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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가 숨 쉬는 곳으로의 문학탐방기
―공주. 부여를 찾아서―
김 주 석
초하의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6월초 강남문학 창작 회원 16명은 빨간 모자(red cap)의 영원한 청춘 구인환 지도교수를 모시고 백제고도의 고아한 문화가 살아있는 공주와 부여를 찾아 나섰다. 3시간이 체 되지 않는 거리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렀으나 양재동만남의 광장에서 차가 멈추어 서고는 떠날 줄을 몰랐다. 관광버스를 협찬해준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참여 인원이 적어 난색을 표시한 때문이었다. 오늘의 일정을 중단하고 회차하여 돌아오든 중 김영숙회장이 관광버스회사와 직접협상을 시도해 타결을 보는 기지를 발휘하여 판교 IC에서 다시 차를 남행으로 돌려놓는 극적 연출을 겪게 되었다. 짧은 시간동안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모두들 얼떨떨하고 멍한 표정들이었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백제로의 여행길에 찬물을 끼얹는 썰렁한 분위기를 일신하기위해 구교수님은 문학수업을 하는 극적사건을 연출시킨 것이라는 설명이 있고나서 김영숙 회장은 퀴즈게임을 앞당겨 실시하여 답을 맞히는 사람에게는 푸짐한 상품을 안겨주고, 뒤이어 소영미 총무는 준비해온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떡과 음료수를 돌렸다. 김 회장에게 이끌려나온 나는 걸쭉하고 진한 해학이 담겨있는 육담(肉談) 십여자 락을 풀어놓아 원초적인간의 생명감 넘치는 감수성의 문을 열어 남녀 회원의 얼굴에 홍조를 띠게 하였다. 모두가 분위기를 되돌리기 위해 합심한 노력으로 수원을 지나면서부터는 여행의 흥취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여행이란 때대로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실망과 기쁨이 순간에 교차하는 변화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평이함을 거부하고 예기치 않은 극적 전환의 모색과 궤도의 일탈은 문학에서 값지고 소중한 소제를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느 시인이 "봄은 오드이 가드이다."라고 말했듯이 봄을 느끼는 사이 성큼 여름이 찾아와 차창에 스치는 산하는 상록이 천국을 이루어 푸름의 발랄한 열정이 피어나고 있었다. 짙게 푸른 자연은 생명의 원류이다. 이러한 푸르름 속에 역사와 문학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체험하는 것은 꿈을 찾아 떠나는 가슴 설레는 여정이다. 거기에다 비극적 멸망을 가슴에 묻고 부소산 낙화암에서 백마강 푸른 물속으로 꽃잎이 떨어지듯 스스로 목숨을 끊어 역사의 꽃이 된 궁녀들의 비련의 사연은 문학에서 거부 할 수 없는 매혹으로 이끌리게 하였다.
천안을 지나 공주에 가까워지자 구 교수님은 여행의 감흥에 겨워선지 아니면 시심(詩心)에 취한 탓인지 “세상은 빨라지고 차의 속도도 빨라진다.”며 흥겨워하시고 6.25 전란 시 공주에서 학도 호국대학생 시절 하숙집 주인 딸 뚱순이의 친구와 분홍빛 사연을 털어놓을 때는 나이를 뛰어넘은 생기발랄한 청춘이셨다. 백제를 만나러가는 길은 이처럼 우여곡절이 주어지면서도 보랏빛 자락의 감흥적 여행이었다.
공주대교를 건너면서 굽이쳐 흐르는 금강이 넓게 펼쳐져 있는 가운데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지막한 공산성으로 웅진백제의 도성이다. 백제의 화려한 궁궐이 있었으나 지금은 석성과 궁궐터, 가종루. 성문, 연지 등의 일부 유적이 있을 정도이다. 공주는 백제의 개로왕이 서울의 아차산성에서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문주왕이 이곳으로 천도한 후 성왕이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문주.동성. 무령 .성왕) 63년간의 백제의 도읍지였다.
공주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 가까웠다. 평일이어서인지 우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관람객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곳에는 등나무가 터널을 이루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몰아내고 진한 밤꽃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1971년 7월5일 공주 송산리 고분군 중 5,6호분 주변에 장마를 대비한 배수로 공사 중 벽돌하나가 삽날에 걸려 1500년간 땅속에 잠자고 있던 무령왕릉에서 백제의 찬란한 문화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꼭꼭 숨어있던 백제역사의 영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국 고고학상 가장 위대한 발굴의 하나로 백제사 연구에 일대의 대사건이었다. 왕능에서 108종 2906여점의 유물이 솟아져 나왔으며 그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박물관 2층에는 무령왕릉 내부의 모형을 본 떠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유리관을 통해 허리를 굽혀 들어가서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역사적이고 학술적가치가 높은 화려한 유물을 건성으로 스치고 지나는 것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공주에서 부여까지는 팔십리 길이다. 공주시 40번 국도변 고개에는 우금치 동학 혁명군 전 적비(사적 제387호)가있었다. 1894년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세우고 폭정과 수탈에 항거하고 일어난 동학 농민군이 이곳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의거 무려 4,5십 차례 접전 끝에 처참하게 패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우리 근대사에서 높이 평가하고 기억해야 할 유적이다.
부여가 가까워지면서 차분하던 분위기는 여행이주는 감미로움에다 고도를 찾는 설렘, 문학을 하는 풍부한 감성이 복합적으로 혼재하여 들뜬 분위기였다. 분홍빛 띤 얼굴은 수학여행을 나온 중. 고등학생들과도 같았다.
따가운 햇 살이 내리쪼이는 한낮 시내중심부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에 덩그렇게 탑만 우뚝 솟아있는 정림사지에 당도했다. 이절은 부여왕도의 중심 사찰이다. 절터의 면적은 9500평이나 당시는 몇 배가 넘었다고 한다. 중문, 금당, 강당, 회랑의 집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백제시대의 일 탑식 가람배치의 정형으로 남북자오선상에 차례로 놓여있었다. 당초에는 절 구역 전체를 회랑이 빙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으며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지나게 하였다.
1942년 절터 발굴 때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 절 이름이 밝혀졌다. 대평8년은 고려 현종 19년 1028년으로 이때 절 이름이 ‘정림사’ 이었으며 그때까지 이 절이 유지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발굴당시 백제와 고려 때의 기와 조각들과 벼루, 소조불상 등이 부여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정림사는 일본 오사카의 사천왕사 창건에 본보기였다.
백제 시대 조성된 탑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으로는 익산 미륵사탑과 이곳 정림사탑 2기뿐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면서 가장 완성된 탑으로 고려 때까지 이 지방 탑 조성에 본보기였다. 백제인의 탁월한 예술혼이 깃들여진 날렵하고 경쾌한 조형이었다. 높이는 8.33m이고 아쉽게도 상륜부는 없어졌다. 각층의 옥개석(지붕틀)은 얇고 넓으며 추녀 끝이 살짝 반전하고 있어 날렵하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키가 늘씬해 상승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1층 몸돌이 훌쩍 솟고 2층부터 몸돌은 높이가 1층 반으로 줄어들면서 지붕들의 너비는 차차 줄어져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서인 「북사」의 ‘백제전’에는 ‘寺塔甚多’라고 하여 백제에는 탑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탑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부여를 침략한 당 군은 성내를 불바다로 만들어 장장 7주야를 탔다고 한다. 백제의 화려한 영화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버린 것이다. 당 군에 의한 극심한 파괴를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탑인 장하리 삼층석탑, 서천 비인 오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탑, 무량사탑, 등이 모두 이 탑의 영향을 받았다. 정림사 오층석탑에서 백제시대를 관통하는 사유와 철학의 예술혼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거 나이든 사람들은 이 탑을 평제탑(平濟塔)이라고 역사시간에 배웠다. 이것은 당나라 소정방이 세운탑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1층탑 신부에 희미하게 새겨진 ‘大唐平濟國碑銘’ 글자 때문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탑에 이 글을 새겨 넣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무지와 사대성에 다시 한 번 깊은 반성과 함께 역사에 대한 신중한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다시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궁남지(宮南池)를 찾았다. 넓은 들판에 위치하고있는 궁남지는 일명 마래 방죽이라 불리 엇으며 현재보다 약3배 규모의 규모였던 것을 1965년 현재와 같이 재현하였다. 섬을 만들고 무왕의 출생 설화와 관련하여 정자이름을 포용정(抱龍亭)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백제무왕35년(638)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덜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다가 연못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한가운데 방장신선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백제 무왕 때 만든 궁의 정원임을 알 수 있고 현존하는 우리나라 연못가운데 최초의 인공조원이다. 또한 삼국사기에서 무왕39년 (638) 「3월에 왕은 비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고 하였으니 이 남궁지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조원(造苑)인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만들어져 안압지의 모형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백제의 정원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연못동쪽에서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에 따른 원지(苑池)로 추측하고 있다. 근처에는 3단으로 쌓아올린 팔각형의 우물도 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그 한 가운데 포용정(抱龍亭)이라는 그림 같은 팔작전자가 있었으며 물위에는 파란 연잎이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못가에는 푸른 버드나무가 휘늘어져 그림 같은 풍광을 연출하는 곳에 한 무리의 상춘객들이 흥겨운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부여읍지에 기록하고 있는 고성팔경(백제탑의 낙조, 부소산의 해맞이, 고란사의 새벽종소리, 백마강의 봄빛, 대왕포의 돛단배, 만광지(萬光池)의 추련(秋蓮), 남궁지의 버들 숲, 백마강의 솔숲과 느티 숲)중에 이곳 「남궁지의 버들 숲」 이 들어갈 정도로 운치와 낭만이 있는 곳이다.
시내에서 부여 한정식으로 늧은 점심식사를 하고 땀을 훔치며 부소산성 입구 사비문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2시가 넘어서였다. 적국 각지에서 몰려온 초. 중. 고 학생들과 일반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어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유적이고 광광 명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부여군청 문화관광과의 최미선양이 우리를 맞아주어 이곳에서 부터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南夫餘)하였다. 국호를 남부여라 정한 것만 보드라도 그들의 뿌리가 고구려의 부여족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곳 사비성은 해발 106m 부소산을 도성방위산성으로 하고 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을 끼고 북. 서. 남은 백마강이 둘러 흐르는 천해의 요새로 입지조건을 갖춘 자연의 성벽이다. 그리고 주위는 나성으로 에워 쌓았다.
산성을 전부 찾아보는데 두 세 시간 이상 소요 되어 늦은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는 서쪽 코스인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로 향하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도는 남쪽마루에 부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반월루에 올랐다. 시가지는 유적지로 묶이어 고도제한을 받아 고층건물을 지을 수 없어서 인지 나지막했으나 도로만은 넓고 반듯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 정책적으로 이곳 부소산성에 신사건립을 추진하고 계획도시로 조성했기 때문이라 한다.
정상을 오르는 길 양편으로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가운데 시원한 청솔바람이 불어와 더위에 지친 길손에게 청량함을 안겨주었다. 소나무하면 하늘로 향해 곧게 뻗어 있는 것을 연상하지만 부소산성의 아름들이 소나무들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꾸불꾸불하게 휘어져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아름다운 자태를 연출하는 것은 백제인의 예술혼을 닮은 까닭이 아닐까? 음수대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살펴본 북쪽은 활처럼 휘어진 백마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서남의 넓은 들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백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비극적 사연의 낙화암(落花岩)이다. 700년 백제 사직이 무너지는 날 꽃처럼 아름다운 궁녀들이 끝까지 저항하며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이곳 천 길 낭떠러지에서 치마를 뒤집어 쓴 채 꽃송이가 파르르 떨어지듯이 몸을 던져 죽어간 비극적인 곳이다. 백마강이 한눈에 들러오는 절벽 위에는 육각 누각의 백화정(白花亭)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상 수많은 국가의 흥망성쇄 가운데 유독 백제만이 「슬픈 백제」, 「잃어버린 백제」 등으로 우리들을 비감케 하고 애상에 젖게 하는 연유는 이곳 「낙화암」의 애절한 사연 때문일 것이다. 원혼 서린 역사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표정은 우수가 가득하였다.
그날 이후 1300여년이 넘는 세월 속에 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에 올라 백제 패망의 한과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궁녀들을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조선 숙종 때 시인 석벽 홍춘경의 시를 살펴본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구나 /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갈 길이 먼데도 털썩 주저앉아 머무르고 싶어진다. 까닭 없이 울먹이며 고란사로 내려서는 발길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흥망성쇠, 생과 사, 희로애락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만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고 정에 이끌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일까?
고란사는 절벽에 의지하여 좁은 터에 자리 잡고 있어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거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고란사란 절 이름은 이절 뒤에 고란초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암자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 주변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함께 기암괴석과 고란초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절 뒤편 절벽에서 떨어지는 약수 물을 맛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며 모여들었으나 긴 가뭄으로 인해 물방울만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절 아래 선착장에서 두드래 나루터를 지나 규암리까지 가는 백마강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하게 되 였다. 경북60령 고개에서 발원하여 충북 옥천 을 지나 충남 공주와 부여를 경유하여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금강 중에서 부소산을 중심으로 16km를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제 문학탐방길 내내 우수 깃든 표정들이 뱃머리에 올라 시원한 백마강 바람을 쐬면서부터 가벼운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낙화암의 짙푸른 녹색이 빠져있는 곳에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이 뱃머리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우리 모두는 유람선 뒤편 'ㄷ‘자로 된 곳에 모여 「꿈꾸는 백마강」의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잊어버린 옛날에 ....”를 합창할 때엔 세월과 추억이 노래되어 흐르고 나이를 잊어버린 꿈 많은 청춘이 되어 흥취에 흠뻑 젖어 들었다. 흥에 겨워 감정에 취한 문승자. 남명순은 산타루치아와 오솔레미아의 절묘한 화음의 합창은 부소산에 메아리가 되어 강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져 나갔다. 이때 구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모자를 벗어들고는 일일이 회원들이게 구걸하는 유모러스한 포즈를 취하여 좌중을 웃기셨다. 3km 뱃길의 흥취는 도도히 흐르는 백마강 물길 따라 길게 이어졌다. ’구드래‘ 선착장에 잠시 배가 멈추었다. 백제시절 이곳은 일본으로 오가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오늘날 일본을 ’구다라‘로 부르는 것은 이곳의 이름 때문이라 한다. 번성했던 포구의 영화는 찾아볼 길 없고 드넓은 주차장만 덩그렇게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또한 강 건너 부산(浮山)의 대재각(大哉閣)이 그림처럼 암벽에 걸터앉아 있다. 효종의 북벌에 관한 각서석(刻石)이 있는 곳이다. 꿈길 같은 백마강 뱃길 유람을 마치고 규암리 선착장에 내렸을때는 ’천상여행‘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은 황홀함에 취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오후5시까지 강행군에 지칠 만도 한데 어느 누구 하나 피곤한 기색 없이 완성한 젊음릉 과시하는 것은 우리 모두 ‘역사와 문학은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에 익숙한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문학은 체험으로 승화하는 것이 아닌가.
국도 변의 산들은 나지막한데 온 산은 밤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진한 밤꽃 향이 달리는 차창 속으로 스며들어 꽃 향을 뿌려 취하게 만들었다.
만수산(575m)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무량사(無量寺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가 창건한절로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곳으로 부여지역에 현존하는 대표적 사찰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웅장한 2층의 극락보전은 보물356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앞에 장중하고 단아하면서 균형 잡힌 5층 석탑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찾아본 정림사 5층 석탑과 흡사하여 백제의 탑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탑은 고려때조성 된 백제계 석탑이다. 극락전에서 작은 개울을 건너 산신각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진본은 아니고 사진이었다. 김시습은 긴 방랑 생활을 끝내고 이곳에서 죽었기에 부도가 있는 곳이다.
경내를 두루 살피고 일주문을 나설 때에는 만수산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사에 황혼이 깃들면 맑은 영혼은 촉촉이 상념에 잠겨들게 한다. 한 서린 백제 문학탐방의 여정이기에 더욱 처연함이 깃들었다. 일주문 바로 앞 사하촌(寺下村)에 있는 삼오식당을 찾아들었을 때는 일정의 끝남에서 오는 긴장이 풀어짐과 허기짐이 일시에 엄습해왔다. 칡과 누룩을 넣고 빚은 토속주를 몇 순배 도리고 나서 만수산에서 뜯은 각종 산나물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은 산채비빔밥맛은 충청도 특유의 얼얼하고 산뜻하여 허리띠를 풀고 먹을 정도였다. 인사치레의 빈말이 아니라 이구동성으로 “정말 맛있다.” 칭찬이 자자하였다. 차안에서 마시기 위해 생수 2병을 부탁하며 미안해하자 주인 할머니는 이것도 덕적(德積)이라며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고 손수 물을 담아주는 것을 보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몸에 밴 사하마을 사람의 후덕함을 알 수 있었다. 무량사의 인종이 긴 여운을 남기며 울려 퍼질 때 속인들은 어쩔 수 없이 세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삐 귀경길을 서둘렀다.
어둠을 가르며 질주하는 차속에서 멸망한 백제를 돌이켜 보았다. 나. 당 연합에 의해 망하면서 찬란한 문화유산이 일시에 도륙 당하고 이후 고려시대 내내 폐허로 묻혀 지냈으며, 조선500년 동안 숭유억불 정책에 의한 파괴와 방치, 이어 한일 합방기간 내내 일본들의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도굴로 철저히 유린당하여 영광스럽고 우아한 백제문화의 흔적은 미미하기만 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1971년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사를 재조명해야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의 발굴이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옥계석의 날렵하고도 반전의 부드러운 선, 서산마애 삼존불의 백제의 미소, 백제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에 표현 된신선세계의 아름다운 걸작, 남궁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인공연못 조성 등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고 미려한 백제문화 유적을 남겼다. 백제유역의 자연환경이 고즈넉하고 부드러운 가운데 문화 예술 또한 고아(高雅)하면서도 선이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백제는 우리가 역사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훨신 강력한 해상국가였다. 근래 우리 재야 사학자들이 산동반도 일부와 중국 남부지방일부가 백제의 식민지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중국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겨루어 수나라를 멸망하게한 고구려의 강건한 기상과 북쪽의 광대한 영토를 잃어버리고 백제 또한 동남아와 서해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해상세력을 상실한 체 지금까지 한반도에만 고착하는 가운데 그것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마주하고 있는 역사적인 현실이 비극적이고 가슴 아리게 한다.
사라진 백제에 대한 아쉬움과 여한보다는 백제의 재발견이 기대된다. 세월 따라 부침(浮沈)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백제의 미소를 되찾는 역사의 반전이 눈앞에 도래하고 화려한 부활이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인 공주와 부여지역 문학탐방에서 더 많은 관심을 넓히고 발걸음을 넘치게 하여 비록 사느라 억눌린 현실에서 배움을 넓히고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문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떠날 때는 인원점검을 하지만 돌아갈 때는 체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라 했는데 도중에 한사람도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들은 여행의 참뜻을 알지 못한 모양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