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타락
우리가 인간의 타락을 이해하고자 할 때 도움을 줄 수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차의 탈선”입니다. 열차는 미리 깔린 철로, 레일을 따라서만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고, 가장 빠른 것이며 가장 편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열차가 그 레일을 이탈해서 달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열차는 빠르게 갈 수도, 안전하게 달리지도 못합니다. 레일을 이탈한 열차는 결과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타락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목적대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최고로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에서 이탈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입니다.
1. 죄!, 타락의 시작
사단이 뱀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 유혹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 즉 동산 중앙에 있는 실과인 선악과만은 먹지말라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을 저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유혹에 넘어지고 맙니다. 결국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은 그 이후로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질병을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버리게 되고 맙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창조시에 피조물들이 드러내던 영광스러운 광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의 모습들이 깨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의 본래 목적에서 이탈한 가운데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행동하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2. 죄가 미치는 영향
죄는 단지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나 부도덕한 일을 행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을 제쳐두고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이 최종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죄는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 즉 가난, 질병, 인간의 모든 갈등(전쟁. 살육. 테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인간의 죄로 인해 나타난 죽음의 증상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은 그저 목숨이 끊어져 육신이 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ex)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특징지우는 요소입니다. 모든 동물들은 단지 흙으로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본질은 육체입니다. 따라서 동물들은 죽으면 그대로 흙으로 돌아가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이 바로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체 안에 영혼을 불어넣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는 순간 바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단지 육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모두 살아서 함께 결합되어 있어야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있을 때에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고 그 죄가 제일 먼저 행한 일은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영적인 연결을 완전히 끊어 놓은 것입니다.
3. 결론
이처럼 인간은 본래 영혼과 육체가 모두 살아있는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제가 끊어짐으로 해서 영혼은 죽고 육체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죽은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절망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그러한 절망의 상태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병에 걸린 비참한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인가?, 인간은 이렇게 절망 가운데 비참한 존재로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속에 끝이 나고 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 속에 이제 우리는 구속으로 넘어 갑니다.
질문) 왜 동산 중앙에다 실과를 두어 가지고 죄를 질 소지를 제공했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신 후에 아담에게 명하신 두 가지 명령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의 참 뜻을 알아야만 이 질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다스리고 관리할 자로 인간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지키고 보존하며 가꾸어야할 책임이 주어짐과 동시에 모든 만물의 가장 머리에 위치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할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ex) 지배인의 개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지배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게의 원 주인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가게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를 지배인이라고 합니다. 가게의 운영권, 어떤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할 것인지에 대한 인사권, 심지어는 재정권까지도 다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지배인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인간에게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인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두 번째 약속, 즉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명령은 첫 번째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기위한 일종의 “보호장치”입니다.
지배인이 아무리 가게나 회사의 모든 운영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지배인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배인은 어디까지나 지배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세상을 다스릴 지배권을 허락하셨지만 그것의 주인이 되기를 원치는 않으셨습니다. 자칫 인간이 세상의 지배권을 행세하다가 스스로를 세상의 주인으로 착각할까봐 하나님은 동산중앙에 실과를 심으셔서 아담이 그것을 볼 때 마다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세상을 지배하는 아담 자신의 주인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입시키셨던 것입니다.
ex) 성경의 인물로 빗대어 본다면 요셉이란 사람을 들 수 있겠지요. 보디발 장군이 요셉을 그의 집 가정총무를 삼아서 그에게 가정사의 전반적인 일을 책임지라고 합니다. 다만 그의 아내만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주인에게만 허락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보디발의 집안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보디발의 아내를 볼 때는 이 집의 주인은 보디발이라는 것을 되새김질 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실과를 심으셨던 것입니다. 아담에게 죄를 질 소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실과를 볼 때 마다 하나님께서 한 명령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장치로 동산 중앙에 실과를 심어 그것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질문) 아담의 죄가 왜 우리에게까지 영향이 미쳐야만 하는가? 우리가 언제 그 선악과 맛이나 봤나?
아담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 약속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고 나의 말에 순종하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형벌이 임하는 것, 이것을 바로 “성경의 대표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 축구국가대표선수 - 개인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이름으로 나간다. 이기면 나라가 이기는 것이고, 지면 나라가 지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불공평한 것도, 부당한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아담 덕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 대표자 사상은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류의 두 번째 대표자라고 합니다. 첫 번째 대표자로서의 아담은 실패해서 그의 후손들에게 죽음을 안겨주었지만 두 번째 대표자이신 예수님은 성공하셨기 때문에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대표자 사상이 없었더라면 우리 모두는 개인의 자격으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대표자사상에는 부당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