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7 사순절 제 26일 침묵-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말씀(막 15:14-15절)
막 15:14-15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개역개정)
영화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게 된다. 피트 트레비스 감독의 <벤티지 포인트>다.
미국 대통령이 대낮에 스페인 살라망카의 마요르 광장에서 10만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저격당했다. 곧이어 각국정상들이 묶고 있던 숙소에서, 그리고 광장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테러에 대비한 공조협약을 위해 모인 자리는 테러로 인해 순식간에 재해현장으로 바뀐다.
그 사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던 각각 다른 8명의 시선을 통해 끈질기게 범인을 포착한다. 그럴 때 마다 영화 내내 비슷한 장면을 '보고 또 보고' 한 격이 되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제시해 준 나름 재미있었던 영화였다.
영화 제목 ‘밴티지 포인트’란 뜻은 ‘가장 잘 보이는 장소’란 말인데, 사실상 영화에서는 시간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다. 영화에서 처럼 오늘 본문은 어느 시점으로 읽어내야 할까? 사건이 펼쳐지는 '바로 그 자리'에는 공간이 들어갈 틈이 없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리하여 빌라도는 무리를 만족시켜 주려고,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넘겨주었다.(새번역, 막 15:14-15절))
그래서 나는 오늘 이 기록된 말씀을 읽는 독자의 위치에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시선으로 이 장면을 다시 본다. 한글 영어 등 다양한 번역으로 읽는다. 가지고 있는 책은 죄다 펼쳐놓고 살핀다. 《네 복음서 공관1:마르코복음 편》과 대한성서공회 인터넷사이트의 '평행본문보기'는 참 친절하다. 사건은 점으로 되어 있다. 점을 연결하면 선으로 시간을 재구성해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군중들의 외침 속에 한마디 말씀도 없이!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거기까지다.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막 14:72절)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일까? 예수의 뒤를 따라 베드로와 함께 들어갔던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던 다른 제자 한사람(요 18:15절)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새벽에 온 공회가 결의(막 15:1)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유월절 잔치를 흠없이 먹고자 했던 유대인들은 관저 밖에, 예수는 관저 안에 있으니 빌라도는 밖에 나와 유대인들과 협의를 하고 안에 들어가 예수를 심문하는 등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는 빌라도가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 석에 앉아" 공개 재판을 하고 있을 때 그 무리들 속에는 예수를 따르던 어떤 사람도 없었을까?
어제같이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르는 사람들만 거기에 있을까?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개역개정, 눅 23:21절) 연거푸 두 번이나 격렬하게 소리친 누가의 기록엔 마음이 아프다.
당신의 아들이 모욕을 받고, 희롱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십자가로 내몰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 겟세마네의 기도 중에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결별을 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없는 것일까?
하나님이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 묻는데 엔도 슈사쿠의 《침묵》 생각이 났다.
초창기 일본 선교 때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그의 책 《침묵》은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문제를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는 소설이다. 책 이야기를 좀 더 해보기로 하겠다.
영향력 있는 교수였고, 존경받던 신부 페레이라 크리스트반은 일본에 잠입해서 33년간이나 선교를 하고 있었고 주교(主敎)라는 최고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와 신도를 통솔해 온 성직자였는데 그의 '배교' 소식이 본국에 전달되었다. 그의 제자 세 사람(프랜시스 가르페, 호안테 산타 마르타, 세바스티앙 로드리고)은 선생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일본으로 잠입하고 그들의 순교와 배교의 과정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페레이라의 배교 과정에 대해서 엔도는 일본인 신자 다섯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가 홀로 다섯 시간동안 '구멍 매달기'란 고문 속에서 배교하게 되었다는 연구논문이 있더라.
그를 만나기 위해 잠입했던 세 사람의 수사 중 둘은 순교를 하였고, 남은 한 사람 로드리고(실제 인물은 주세페 캘러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사제를 모델로 함)는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 세 사람의 신자들을 위해 배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배교를 하면 살게 되고, 배교를 하는 방법은 성화를 밟거나 밟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성화는 지금 바로 그의 발 앞에 있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나뭇결이 무늬지어 있는, 약간 더러워지고 회색으로 된 나무판자에 조잡한 구리로 새긴 그리스도의 모습이 끼워 있었다. 그것은 가느다란 팔을 벌리고 가시관을 쓴 보기 흉한 얼굴이었다. [중략] 성화 속의 그분은 많은 사람에게 밟혀 거의 닳아 없어지고 오그라져 있었다. 그 분은 신부를 슬픈 듯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정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넘쳐 흐를 것만 같았다.(엔도 슈사쿠, 《침묵》, 2011년. 266-7쪽)
《침묵》의 '첫머리 이야기'에는 운젠(雲仙)의 지옥 열탕으로 끌려가서 뜨거운 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서서히 죽이는 끔찍한 고통에도 결코 신앙을 꺾지 않고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는 강한 일본인 신도와 신부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의 중심부에는 아주 조금의 위협만 가해도 금방 겁을 먹고 비굴해 지는 나약한 의지를 가진 배교자 기치지로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엔도는 신부와 기치지로를 통해 자기의 말을 들려준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 성자와 평범한 인간, 영웅과 용렬한 자. 그래서 강한 자는 이와 같이 박해받는 시대에도 신앙 때문에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자는 기치지로처럼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 인간이냐? 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 지도 모릅니다."(같은 책, 122-3쪽)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같은 책, 177쪽)
책의 말미에 엔도는 거침없이 그의 말을 쏟아낸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중략]
그 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비록 그 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같은 책, 293-5쪽)
책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담은 곳은 따로 있다. 배교한 후에 박해의 핵심 인물 이노우에와 나눈 대화이다.
이노우에의 말이다. “신부는 결코 나에게 진 것이 아니오. 이 일본이라는 늪지대에 패배하신 거요.” 신부는 말한다. “아닙니다. 내가 싸운 것은 ...... 내 마음속에 있는 가톨릭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같은 책, 287-8쪽)
역사는 승리한 사람들의 역사일 것 같지만, 그러나 어디 그들만의 역사일 수가 있는가!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군중들의 외침을 잠재우지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그 분을 돌려 세우지도 않으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십자가에 달리는 당신의 아들 예수와 함께 고난당하고 계셨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