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구봉이다. 후에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가 익주를 평정하고 다시 한중을 취하였다. 건안 24년(219), 맹달과 함께 상용을 공격하여 취하고 부장군에 임명되었다. 오래지 않아 동오가 형주를 공격하여 취하자 관우가 패하여 맥성으로 달아나 그와 맹달에게 구원을 청하였으나 두 사람은 '산성을 이제 막 취해서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군사를 내어주지 않았다. 관우가 사로잡혀 죽자, 유비는 그들을 깊이 원망하였다. 맹달이 위에 투항한 후, 그는 명을 받을어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성도로 돌아갔는데, 유비가 그를 참수했다.
<유봉은 본래 나후(羅侯)에 있는 구씨(寇氏)의 아들이며, 장사의 유씨(劉氏)의 조카이다. 유비가 형주에 도착했을 때, 아직 후사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으므로 유봉을 양자로 삼았다. 유비는 촉군으로 들어간 후, 가맹( 萌)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 당시 유봉은 20여 세였으며 무예가 있고, 기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므로 병사들을 이끌고 제갈양ㆍ장비 등과 함께 장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정사-유봉전中
유봉은 유비의 양자로 위와 같이 뛰어난 능력을 겸비한 무장으로 많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다. 관우와 장비는 유봉은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 바로 유선 때문이다. 유선에 의해 유봉은 불쌍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유봉은 그저 유비의 호위를 위함이나 또는 익주 공략을 위해 이용당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유봉의 실책을 들자면 바로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인데 그것이 과연 옳지 못한 것이었을까?
당시 관우의 사정은 위험하기 그지없었으며 그의 패배로 형주는 들썩거리고 있었으며, 남군은 모두 오군에게 점령당했었다. 더군다나 유봉이 있었던 상용도 언젠가 함락되었을 것으며, 필자가 보기에도 관우에게 군사를 보낸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만약 상용의 군을 보내도 실패했다면 상용마저 빠른 시간안에 함락되었을 것이다. 관우의 죽음은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가 오군에게 거짓으로 투항하고 도주할때 오군에게 붙잡혔다. 상용의 구원군이 도착했을 때 과연 맥성이 온전했을까? 맥성은 당시 작은 규모의 성이었다. 만약 상용의 구원군이 도착했을때 맥성이 함락되어 있었다면 상용의 군마저 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우의 죽음에 유봉의 잘못도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전략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유봉의 죽음은 제갈량과도 연관이 있다.
<제갈양은 유봉이 용맹하고 강직한 인물이므로 유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제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이 때문에 유비에게 그를 제거시킬 것을 권했다. 그래서 유봉에게 자살하도록 했다.> 정사-유봉전中
위의 기록처럼 제갈량은 뒷날 유봉의 능력을 두려워하여 죽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선과의 권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죽일 것을 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유봉이 후계자 문제에 대해 죽을 수 밖에 없을 운명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이 분명 불행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유비는 유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 정을 주고 죽이지 않았으며 이것이 유봉의 삶을 더욱 불행하게 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만약 유봉이 계속 구씨의 아들로 성장했다면? 그는 좀 더 불행하지 않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첫댓글 전 개인적으로 유봉전을 읽으며 유봉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게 다 자신의 실책 탓도 있겠지만, 그가 촉을 배신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이 정말 안타깝더군요,
유비는 왜 유봉을 양아들로 삼았을까요,,그렇게 저버릴것 이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