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풍물이라는 것이 우리 민중들의 생활, 심성(민족성)을 반영하고 여러 가지 다른 요소를 포함(극적 요소, 춤,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풍물은 우리 겨레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삶 그 자체였다라고 할 수 있다.
풍물도 우리음악의 범주(악기의 연주 측면만을 바라볼 때)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바르게 보지 않고서는 풍물을 바르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물(우리음악)의 참 맛과 길을 회복함은 단순한 풍물(우리음악)애호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한 잊었던 건전한 민족정신 문제가 담겨져 있다. 잊었던 민족정신을 풍물(우리음악)을 통해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물을 이해한다라고 한다면 우리민족의 문화와 역사와 동, 서양의 문화적 차이점 등을 두루 이해해야 조금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명 칭
농 악
1870년대까지 판소리 춘향가에는 '두레굿'이라 쓰였는데, 일본제국주의의 농업 수탈정책의 하나인 농업장려운동으로 원각사의 협률사라는 단체에서 '농악(農樂)'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기록은 일제식민지시대에 대부분 소실되고 변조되었다.)
농악이 글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36년 총독부에서 펴낸 '부락제(部落祭)'라는 책에서였다. 따라서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시대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생긴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농악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농민(농사꾼)의 음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원래 풍물굿이 농경사회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농민들 스스로 농악이라고 불렀던 적은 없었고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의 하나로써 일본의 탈놀이 능악(能樂)의 발음인 '노가꾸'를 본떠서 농악이란 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일본제국주의는 우리의 민속신앙을 말살(민족정기 말살정책)하고 농업장려의 목적에 한해서만 풍물굿을 허용했다. '농악'이란 이름으로 신청을 해야만 굿판을 열 수 있었기 때문에 굿하는 단체나 마을들이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신청을 한 데서 일반화되다가, 8.15 해방 이후 많은 학자들이 국악이론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농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풍물은 총체적인(종합적이고 대동굿적) 성격을 갖고 있는데 농악이라는 말은 농민의 음악, 즉 장단이나 소리만을 나타내는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으로 한정시켜 버린다. 풍물이 음악적인 요소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풍물굿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뜻은 놀이, 춤, 재담, 노래, 연극 등이 나뉘어지지 않고 같은 마당에서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또 현재 사회에서도 가능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뜻에서 좀더 적극적인 쓰임말이 필요하다.
풍물굿이 본래 농경사회와 함께 하면서 농경사회의 생활과 노동의 율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오늘날 서로 다른 환경이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여러 삶의 터(농촌, 도시, 학교, 노동현장, 어촌 등)에서도 공동체문화 형성에 필요한 매개체로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쓰임말 자체가 가지는 한계점을 이겨 낼 필요가 있다.
풍장 : 농사일에 많이 쓰이는 말로 김매기할 때 이루어지는 풍물놀이를 가리킨다. 특히 만두레(벼농사는 김매기를 보통 세 번 하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에 하는 것을 말함)가 끝나는 날 농사가 제일 잘 된 집 머슴을 소등에 태워 위로하며 노는 것을 농장원, 질꼬냉이라고 한다.
두레 : 원래는 우리 나라 고유의 마을단위 일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며, 특히 김매기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 풍물이 공동체적 놀이로서 일 두레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풍물을 두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굿 : 모든 지방에 걸쳐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로 '굿친다'라는 표현을 쓴다. 굿의 의미는 원래 '모인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모여서 공동체 안의 모든 일을 의논하고 풀어 가며, 공동체적 바람을 집단적으로 빌며 집단적 신명으로 끌어 올려 새로운 삶의 결의를 다지는 일련의 과정을 담아 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무속에서의 신앙적 뜻만을 가리키는 흐름이 있다.
매구, 매굿, 매귀(埋鬼) : 땅 밑에 있는 나쁜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묻고 밟는다는 뜻으로 보통 섣달 그믐날 밤에 하는 풍물놀이를 매굿이라 한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풍물을 일컫거나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풍물 : 주로 경기, 충청도 지방에서 쓰이는 말로 모내기할 때 간단한 편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하며 신에게 소원을 푼다는 뜻이나, 농사의 풍년을 바란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80년대에 들어와서 대학가와 문화모임들이 농악이란 말 대신에 풍물 또는 풍물굿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게 되었다.
風物의 특색
지역의 특성에 따른 풍물굿의 특색
풍물굿은 크게 중부 이북지방에서 행해지는 웃다리 풍물굿과 중부 이북지방에서 성행하는 아랫다리 풍물굿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웃다리 풍물굿은 주로 경기지방과 충청 이북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상쇠의 기능이 뛰어나다.
반면 아랫다리 풍물굿에서는 장구와 소고의 기능이 발달하였다.
그러면 각 지역마다의 특색을 살펴보자.
경기도 ․ 충청도 풍물
흔히 웃다리 풍물굿이라고 하며 경기, 충청, 강원도 영서지방을 포함한다.
안성에 있는 청룡사는 옛날 남사당패들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직업성을 띤 남사당은 연회종목으로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놀음) 외에 풍물놀이에도 뛰어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소고와 법고(버꾸)의 구별이 없고, 다른 지역에 비해 북을 적게 쓰는 편이며, 특히 느린 가락 과 빠른 가락을 고르게 쓰는 쇠가락이 분명하고 암채, 숫채 가락의 변화를 구사하는 짝쇠놀이가 발달했다.
그리고 판굿의 짜임새는 당산벌림 같은 ㄷ자진, 사통백이, 가새벌림, 좌우 치기 같은 진풀이가 다양하게 발달 하였다.
모든 치배들은 상모를 쓴다. 특히 양사를 위주로 하는 채상버꾸가 발달하였고 충청도 남쪽에서는 고깔을 쓰기도 한다.
졍기 풍물에서는 마을굿인 대동굿(당산제)을 하지 않고 지시밟기만을 하며, 여름철에는 두레굿을 하며 걸립풍물이 발달 하였다.
전라 우도 풍물
우도 풍물굿은 전라도의 서쪽 평야지역으로 군산, 김제, 전주 등의 지역에서 발달 하였다.
쇠치배들은 뻣성모를 쓰고 다른 치배들은 고깔을 쓰며 쇠치배의 옷은 화려 하게 발달 하였다.
장구가 중요시되며, 가락은 주로 느린 가락이 많으나 빠른 가락도 곁들여 있어 비교적 가락이 다채롭고 여성적이며, 장구잽이의 개인놀이와 쇠잽이의 부포놀이가 발달 하였다.
윗놀이에 치중하지 않고, 발림(발동작)을 중시하는 아랫놀이가 발달 하였다.
경상남도 풍물
경상남도 풍물굿은 진주, 삼천포, 부산, 양산 등의 지역에서 발달 하였다.
경상남도 풍물의 특징은 군대의 지휘체계와 일사불란한 단체행동을 중요시하며, 북이 많이 쓰여 북춤과 북가락이 발달 하였고 보통 징뒤에 북이 선다.(이점이 다른 지역 풍물과의 차이점이다)
지역에 따라 고깔을 쓰기도 하는데 대부분 치배는 종이 부포상모를 쓰고 소고잽이는 채상모를 쓴다.
채상모의 소고춤과 자반 뒤집기가 뛰어나다.
위에서 살펴본 지역별 풍물굿의 특색은 악기의 짜임이나 가락이 어느 부분에서는 같은점이 있으나 그속에서 나오는 맛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별 특색에는 다른 견해가 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지방의 나이드신 어른들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물(四物)과 사물놀이
사물의 이해
절에는 범종, 운판, 목어, 법고 등의 사물(四物)이 있고 민간에는 쇠(꽹과리), 징, 장고, 북의 사물(四物)이 있다.
목어, 법고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며, 범종과 운판은 금속으로 만든다.
장고와 북은 가죽으로 만들며 , 쇠와 징은 금속으로 만든다.
쇠
(범종)
북
(목어)
장고
(법고)
징
(운판)
가죽으로 만든 악기는 땅의 소리를, 쇠로 만든 악기는 하늘의 소리를 뜻한다.
이 네 개의 악기를 인간이 소리내면 악기로부터의 진동이 서로 어우러지고, 화합하여 ‘소리의 공간’을 이루게 된다.
이는 천(天), 지(地), 인(人)사상을 받들어 온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소리의 유산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많은 민속음악이 이 사물(四物)의 소리를 바탕에 두고 있다.
이 네 가지 악기의 역할을 자세히 살펴보면 쇠는 시간을 소리로 다져내고 북은 이를 몇 개의 그룹으로 갈라내며, 장고는 그 사이사이를 채워 나간다.
징은 몇 개의 소리 무더기를 크게 휘감아 하나의 소리 공간을 이루게 해 준다.
사물은 무속음악과 풍물(농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악기들이었으나, 양자 모두가 오랜 세월 시각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였기 때문에 그 장단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다지 주의 깊게 관찰해오지 않았었다.
따라서 시각적인 요소를 배제시킨 사물(四物)의 순수한 연주를 통한 소리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체험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후 세계무대를 통해 우리장단의 우수성을 확연히 인정받게 되었다.
四物놀이의 탄생과 짜임
탄생
1978년 4월 소극장 공간 사랑에서는 사물놀이 창단 공연이 있었다.
이보다 2개월 전에 개최된<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 밤>에서 선보인 <웃다리 풍물(경기, 충청지방의 풍물가락)-앉은 반>의 풍물가락 연주가 성공적인 반응을 얻은 데 힘입은 4명의 젊은이들은 이날 웃다리풍물 이외에도 호남풍물, 영남풍물을 정리하여 준비하였으며 처음으로 <사물놀이> 라는 명칭을 이들의 단체 이름으로 선보였다.
쇠에 김용배, 장고에 김덕수, 북에 이광수, 징에 최종실로 구성된 <사물놀이>는 그날의 관객 모두를 충격과 환희로 몰아넣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우리 선조들의 음악이 이토록 훌륭함에 관객 스스로 놀라워한 것은 연주 시작후 불과 몇 분만의 일이었다.
이로서 전통민속의 한 획을 긋는 <사물놀이> 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물놀이의 짜임
비나리
↓
삼도 설장고 가락
↓
삼도 풍물 가락
비나리
고사는 그 집의 대청마루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때 집안식구들의 무사태평이나 장수를 비는 고사덕담과 연 월에 따라 그 집에 드는 액을 풀어주기 위하여 <비나리>를 하게 된다.
비나리는 무속적 의식을 무당이 아닌 평범한 잽이(악사)에 의해 치른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겠다.
특히 김덕수 사물놀이의 초기 멤버인 이광수의 소리는 가히 일품이다.
삼도 설 장고 가락
원래의 <설 장고>는 풍물놀이중 잽이의 재주를 개별적으로 보여주는 개인놀이 또는 걸립패 풍물굿에서 마지막 각 잽이의 기량을 자랑하는 <판굿>등에서 장고잽이들이 추는 춤으로서 상장고가 혼자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물놀이>에서는 호남, 영남, 중부지방의 뛰어난 장고잽이들의 가락을 모아 체계 있게 정리하여 마치 네명의 연주자를 위한 연주회용 <산조>라 할 수 있겠다.
삼도 풍물 가락
<사물놀이>가 가장 집중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한 부분은 역시 각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풍물가락 이었다.
각 지방의 풍물가락은 ‘비나리’나‘설 장고’와는 달리 사물이 완벽하게 이가 맞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사물놀이의 기량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으며, 따라서 <사물놀이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네 개의 악기가 산출해 내는 제각각의 배음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공연 때마다 듣는 맛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락의 짜임
점고
↓
월산가
↓
오채질굿
↓
굿거리
↓
별달거리
↓
짝쇠 놀음
점고
경술 - , 예 - 이.
각각치배 다 모였으면, 1차 2차 단 3차 끝에 행군 하랍신다.
예 - 이
월령가
아헤 - 헤에 - 에헤
놀러나 가세, 놀러나가요.
월산리 땅으로 놀러나 가세
오늘은 여기서 놀고
내일은 가다가 저기서 놀고
얼싸 - , 절싸 -
오채질굿
별달거리
하늘보고 별을 따고
땅을 보고 농사짓고.
올해도 대풍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달아달아 밝은달아
대낮같이 밝은달아.
어둠속에 불빛이
우리네를 비춰주네.
짝쇠 놀음
風物과 四物놀이의 비교
사물놀이는 풍물굿을 가리킨다기보다는 고도로 무대화된 타악기의 연주 형태로 풍물굿의 가락을 음악적으로 발전시킨 한 형태로 봐야 한다.
풍물굿과 사물놀이를 비교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볼수 있다.
풍물과 사물 놀이의 차이점
구 분
풍 물
사 물 놀 이
연 주 장 소
넓은 마당이나 공터
좁은 공간이나 무대
연 주 시 간
시간 제한이 없다
한 작품당 10 ~ 15분 정도
연 주 인 원
많을수록 굿의 맛이난다
보통 4 ~ 6명 정도
연 주 목 적
대동굿(놀이) 지향
짧은 시간에 고도의 기량 발휘
가 락 특 징
같은가락의 되풀이 많음
대표적인 가락을 이어서 만듬
잡 색 역 활
치배와 관객의 다리 역활
없음
진 풀 이
판에 따라 즉흥성
공연전 정해짐
관 객 반 응
판에 끼어 들기 쉬움
공연땐 불가
풍물을 창조적으로 이어받은 사물놀이는 일반 시민들에게 풍물의 가락을 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뛰어난 재주를 살리고 발전 시킨다는 좋은 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풀어 나가야할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옛날 마을굿이 지니고 있던 대동놀이적인 면을 살리고, 구경꾼과 놀이꾼(연희자)과의 거리를 좁혀 가는 판을 되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