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배옥주
잭슨 폴록 No. 5. 1948. 외
대답하지 않아도 다 알아
갓길들이 살얼음처럼 풀리기 시작하는 새벽 유리창을 짚어간 배밀이를 지우는 달팽이지도 어둠을 찍어 나른 행적으로 국경을 넘었을지도 느린 보폭으로 건넌 샛길들은 어디로 샐지 모를 몸부림 갔던 길을 얼마나 되돌아 간 걸까 그 골목 끝 이모집 파란 대문은 없었는데 덧칠한 노란 페인트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제 안에서 쌓아올린 파문들
선이 선을 겹쳐가는 액션 이별 앞에서 골몰하는 곡선들 뱉어낸 울음의 진액 괴괴한 미로 퇴화한 패각 무시로 달라지는 배경 한짐 흘러내리는 표정들 비켜서서 먼저 보내주거나 때론 엇갈리는 약속 끈끈이 트랩에 걸린 막대사탕 롤리팝 같은
우화를 멈춘 창의 무늬들을 씹어 먹는 액션 페인팅 소용돌이를 개켜둔 머리맡에서 넘지 못한 창을 떠올린다 허기진 사랑을 꾹 다물고 있을 때나 입술을 남기고 떠나야할 때 돌아가야 할 집이 저기 보일 때 등 돌리지 않고 맨발을 지켰을 온몸
-----------------------------------------
버블버블
하나만 고르라고 했다 딱 하나 초콜릿은 골랐고 청사과맛 풍선껌은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상점 아저씨는 내 왼손을 놓쳤지만 엄마는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검정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풍선껌을 움켜쥐고 돌아오는 내내 저리던
주머니 속 왼손바닥엔 어눌한 청사과향 배어 있고
훔친 풍선껌을 불면 온몸이 웃자랐다 구겨 신은 신발에 넘어질 때마다 무릎 상처는 겹무늬로 단단해졌다 아픈 언니 머리핀을 몰래 가져다 친구 생일선물로 주었다 삼총사에 낄 수 있었던 그날 이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언니 부풀기도 전에 입술을 덮치던 풍선껌처럼 익지도 않은 채 떨어진 청사과 망가진 오르골 위의 발레리나
작별인사도 없는 언니의 일기장을 읽을 땐 눈물방울이 터지곤 했다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부터 이어 쓴 내 일기는 비문으로 채운 소설 같았다 방문을 잠그고 풍선껌을 불던 나는 달아오른 열기구처럼 떠다녔다 버블버블 언제 터질지 몰랐던 언니와 나의 방
내가 훔친 첫 쪽창엔 청사과빛 굴러다니고
---------------------------------------------
배옥주
2008년 《서정시학》으로 등단했으며 2022년 《애지》에 평론이 당선,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요산문학 창작지원금 수혜, 두레문학상, 김민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오후의 지퍼들』, 『The 빨강』이 있으며 평론집 『언어의 가면』, 연구서 『이형기 시 이미지와 표상공간』이 있다. 부경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