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車峴)이남은 전라도가 아니라 오월(吳越)의 땅이다.
1.
고려 태조 왕건(王建,877-943)이 후손에 남긴 유훈이었던 훈요십조(訓要十條)중 8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訓要(훈요) 其八曰:
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竝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災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차현(車峴) 이남, 공주땅 강밖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위 기록을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보면, 차령산맥(車嶺山脈)이남 전라도(全羅道)지역의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 글을 보면 분명 차현(車峴)이남 지역인들은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943)의 고려 개국에 반기(反旗)를 들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우리가 고찰한 바대로 차현(車峴)을 현 대륙의 장강이남, 동정호(洞庭湖)의 남서쪽 장가계(張家界)에서 계림(桂林)으로 뻗어내린 약 400여km의 거대한 산맥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게 되면, 고려 태조가 말한 차현이남(車峴以南)은 전라도가 아닌 바로 역사적인 오월(吳越)의 강역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의해 1925년부터 시작된 대륙조선의 역사를 반도조선사로 교열, 재편찬한 악랄하고 비열한 작업은 1938년 <朝鮮史> 37권이 완성되면서 반도식민사학의 철주를 심게 되었고, 이후 친일파들과 그 후예들에 의해 반도조선사는 확대재생산의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반도식민사학은 분명 선조(先祖)들의 기록이 이 반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반도에 꿰맞추고 우리의 위대한 선조들을 거짓말이나 하는 파렴치한으로 몰아붙여 친일식민사학의 목숨을 지속적으로 연명시켜 오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태조 왕건(王建)의 훈요십조(訓要十條)속에 나오는 차현(車峴)이남의 지리(地理)위치를 친일식민사학은 반도의 충청도(忠淸道)아래 전라도(全羅道)지역으로 강제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 반도사관의 명백한 오류이며 고려(高麗)가 창업시기 왕건(王建)을 배신한 오월(吳越)의 무리들이 생거(生居)하고 있던 현 대륙 호남성(湖南省)의 아래쪽과 그 좌측지역을 차현이남(車峴以南)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우리는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재해석해 낼 수 있다.
2.
이전의 글들에서 분석한것과 같이 현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 부르고 그렇다면 월남의 북쪽은 월(越)나라가 되어야 하며, 바로 현 베트남의 위쪽 지역이 역사속 월(越)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되어야 마땅하며, 교열된 근대 역사통설에서 말하는 대륙의 장강(長江)아래쪽을 월(越)이라 했다는 말들은 조선이 빠져나간 거대한 강역을 한족(漢族)의 역사속으로 편입하면서 억지로 만들어놓은 지리(地理)조작의 한 편린(片鱗)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다.
2024.12.12.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베트남을 월남이라고 하는데 월나라의 위치가 저기면 월나라의 남쪽이 베트남으로 딱 들어맞는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