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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 작사 작곡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신교를 대표하는 찬송가라고 할 수 있다. 가사는 원래 신약 성경 시편에 기초한 것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여러 이견이 있으나 1529년 찬송가집에 실려 있으므로 그 이전에 작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작곡의 배경에 관해서도 여러 이견이 있으나, 하인리히 하이네는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Diet of Worms)에 소환받아 갈 때 작곡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H. 하이네,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태경섭 역, 회화나무, 2019, 79쪽)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단지 새로운 기독교 탄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 새로운 헌정질서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중세 교황 중심의 통일적 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 민족국가의 시대 그리고 개인주의 시대를 여는 분수령이었다.
역사적 배경
광부 집안의 성실하고 총명한 학생이었던 루터는 부친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다 회심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 신앙을 길을 걷고자 하였다. 루터는 경건한 수도사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독일 작센(Sachsen)의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교수와 설교사의 자격도 얻었다. 27세에 수도원 대표로 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꿈에 그리던 로마였으나 루터의 기대는 환멸로 바뀌었다. 교황청의 성직자들은 무지하고 부패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가톨릭 재건보다 로마 재건을 위해 애썼다.
당시 독일 즉 신성로마제국은 권력의 중심이 미약하였다. 황제가 있었지만 선제후(選帝侯: prince-electors)들과 각 영방국가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다. 일체성이 결여된 독일 인민들과 독일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만만한 수입원이 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성직록을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하고, 교회 직책의 첫 해 수입을 가져갔고, 투르크 족 방어를 위한 분담금을 강제하였다. 해마다 엄청난 돈이 독일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와 보답도 없이 이탈리아로 흘러갔다(오즈맹, 프로테스탄티즘: 혁명의 태동, 박은구 역, 도서출판 혜안, 2004, 47쪽). 독일에 반 로마 정서가 고조되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의 수탈은 면벌부(면죄부) 판매로 정점에 달하였다. 로마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을 위해 교황의 사절들이 전 유럽에 파견되었다. 독일의 선제후이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도 면벌부 판매에 열심이었다. 그는 여러 특권을 얻기 위해 교황에게 거액을 헌납하였고, 이제 그 벌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또 다른 선제후 작센의 프리드리히(Friedrich)는 자신의 영토에서 면벌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교황 사절 테첼(Tetzel)이 비텐베르크에 와서 면벌부를 판매하였다. 루터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면벌부를 구매하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참담했다. 루터는 이른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였다.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미 본 바처럼 마인츠 대주교에게는 면벌부 수입이 절실하였다. 1518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추기경의 심문이 있었고, 마인츠 대주교는 루터를 파문하였다. 루터는 동료 사제들에게 다시 호소하였다.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루터의 도전은 독일과 유럽 전역 퍼져나갔다. 독일 전역에서 많은 수도승들 하급 성직자 그리고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지역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다.
교황청은 루터의 파문에 신중했다. 신성로마제국 차기 황제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차기 황제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를 선호하고 있었는데, 그는 루터의 지지자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차기 황제가 스페인의 카를 5세로 정해졌고, 카를 5세는 가톨릭의 수호를 천명하였다. 교황도 교서를 발부하였다.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두 달의 유예를 주어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루터의 책들을 불태우라고 하였다. 루터는 교황과 맞서기로 결심했고 독일인들이 루터의 뒤에 모이기 시작했다. 루터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웠다. 루터는 믿음만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세상에서의 모든 직업이 신의 일이며 신앙에 성실한 모든 이들이 바로 성직자라고 주장하여 가톨릭 신학과 교황에에 정면으로 맞섰다.
1520년 1월 보름스(Worms)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열렸다. 카를 5세 황제 취임 후 첫 번 째 의회였다. 황제는 루터를 소환하였다. 그 참석을 유도하기 위해 안전통행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만류하였다. 1세기 전 체코의 종교개혁가 후스(Jan Hus)가 안전보장을 믿고 콘스탄스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에 갔다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진 사건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루터는 운명을 걸고 나아갔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로 떠날 때에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시적 영감으로 역사를 구현해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네는 또한 루터의 그 노래를 프랑스 혁명에서의 ‘라 마르세예즈’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새 역사를 여는 진군의 혁명가로 본 것이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도 루터는 성실하고 강건하였다.
“여기 숨김없고 간단한 대답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와 명료한 이성에 비추어 저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저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취소할 수 없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 이종태 역, 생명의 말씀사, 제3판 2쇄, 2017, 255-6쪽)
또한 루터는 “저는 여기에 서 있고,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연설을 근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기록하고 있다.(칼라일, 영웅의 역사, 박상익 역, 소나무, 1997, 218쪽)
제국 의회에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황제 및 다수파들은 루터를 단죄하고자 하였으나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먼저 보름스를 떠났다. 황제는 남아있는 대표들과 함께 루터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그를 법의 보호에서 배제할 것을 선언하였다. 다행히 안전통행의 약속은 지켜졌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중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서 은신할 수 있었다.
2. 노래 설명
앞서 본 바와 같이 하인리히 하이네는 루터의 이 노래를 프랑스 혁명에서의 ‘라 마르세예즈’와 같다고 하였다. 이 노래는 종교 개혁과 개신교도들의 신념과 저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개신교의 주요 찬송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후대의 작곡가들에 의해 계속하여 차용되었다. 바흐가 이 노래에 기초하여 코랄 칸타타(바흐 작품 번호 80)를 작곡하였으며, 멘델스존은 그의 ‘종교개혁 교향곡’(교향곡 제5번, 작품번호 107)의 4악장과 5악장의 주제로 사용하였으며, 마이어베어는 그의 오페라 ‘위그노교도들 Les Huguenots’에서 개신교들의 결의를 나타내는 장면들에서 사용하였다.
아래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합창곡을 영상을 올린다. 이어서 루터 작사의 원 가사와 번역을 올리고, 우리 나라 번안 찬송가 가사도 올린다. 찬송가 번역이 매우 훌륭하고 유려하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작사 작곡 / 정태욱 번역
(*1500년대의 독일어 번역이 어렵습니다. Das Wort sie sollen lassen stahn 같은 문장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ein gute Wehr und Waffen. Er hilft uns frei aus aller Not, die uns jetzt hat betroffen. Der alt böse Feind mit Ernst er’s jetzt meint, groß Macht und viel List sein grausam Rüstung ist, auf Erd ist nicht seinsgleichen. Mit unsrer Macht ist nichts getan, wir sind gar bald verloren; es streit’ für uns der rechte Mann, den Gott hat selbst erkoren. Fragst du, wer der ist? Er heißt Jesus Christ, der Herr Zebaoth, und ist kein andrer Gott, das Feld muss er behalten. Und wenn die Welt voll Teufel wär und wollt uns gar verschlingen, so fürchten wir uns nicht so sehr, es soll uns doch gelingen. Der Fürst dieser Welt, wie sau’r er sich stellt, tut er uns doch nicht; das macht, er ist gericht’: ein Wörtlein kann ihn fällen. Das Wort sie sollen lassen stahn und kein’ Dank dazu haben; er ist bei uns wohl auf dem Plan mit seinem Geist und Gaben. Nehmen sie den Leib, Gut, Ehr, Kind und Weib: lass fahren dahin, sie haben’s kein’ Gewinn, das Reich muss uns doch bleiben. | 우리의 신은 강한 성이요 좋은 무기이며 방패입니다. 주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신다. 저 오랜 사악한 적은 큰 권세와 간교함으로 우리를 진실로 해치려고 하니 그의 끔찍한 무장은 지상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도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는 곧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신이 정해주신 의로운 사람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신다. 그가 누구냐고 묻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이니, 다른 어떤 신은 없으며 그는 전장을 이겨낼 것이다. 세상이 악마로 가득 찰지라도 우리를 집어 삼킬지라도 우리는 두렵지 않으니 우리는 승리하리라. 세상의 통치자 제 아무리 독하게 굴어도 우리를 어쩌지 못하니 의로움은 행해지고, 그는 심판받으니 한 마디만으로도 그를 쓰러뜨릴 수 있다. 주님의 언어 세상에 펼쳐질지니 어떻게 감사를 표할 수 있으리오. 주님은 우리에게 섭리로 임재하니 성령과 축복이니라. 그들이 생명을 가져가라고 하여라 재산, 명예, 자식과 부인을 빼앗아 가라고 하여라. 그냥 그리 되도록 하여라 그들에게 아무 이득도 없음이라 왕국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남아 있도다. |
† 찬송가 585장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가사) †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 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를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 아멘
3. 이후 종교개혁의 과정
루터에서 촉발된 종교 개혁은 중세 교황-황제 체제를 붕괴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세상을 위한 도전과 혼돈을 촉발시켰다. 한편에서는 농민들의 반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영방 국가들의 주권적 지위가 강화되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농민 공동체를 꿈꾸었다. 루터 신학의 ‘만인사제주의’는 곧 만민평등의 이상으로 연결될 것이었다. 농민들은 영주 세력을 향해 돌진하였다. 반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특히 신비주의자 토마스 뮌처 Thomas Müntzer는 ‘천년 왕국’의 열망을 고취하였다. 루터는 기독교의 평화를 말하며 농민 반란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세속 영주들의 진압을 옹호하였다. 루터는 ‘두 왕국 이론’을 내세웠다. 지상의 나라와 하늘의 나라를 구분하였다. 세상에서의 육체와 재산에 대하여는 통치자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영혼과 신앙에 대하여는 종교적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농민 반란은 진압되었다.
영주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호응하였다. 영주들은 교회 및 수도원 토지를 압수하고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으며, 부적격 성직자 퇴출, 예배의 단순화, 빈민 구제, 학교 건설 등 교회 개혁에 착수하였다. 또한 영주들은 농민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세를 과시하였다. 황제 카를 5세가 다시 구교를 강화하려고 하자 작센의 프리드리히 등 개신교 영주들과 도시 대표들은 항의(protest)를 선언하였다. 이로부터 개신교도에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황제는 이들 개신교 동맹 세력을 일단 무산시킬 수 있었으나, 결국 개신교 영방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약에서 ‘영토가 속하는 자(영주)에게 종교도 속한다(Cui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합의되었다. 이러한 원칙은 1630년 30년 전쟁의 결과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보다 넓게 확인되었다. 이로써 가톨릭-교황-황제의 중세 체제는 분열하였고, 각 영방 그리고 민족국가가 주권적 지위를 획득하는 근대 국제질서가 태동하였다.
한편 루터 이후 칼뱅에 의한 새로운 종교 개혁의 흐름이 거세게 전개되었다. 칼뱅은 루터에 기초하되 루터보다 더 나아갔다. 믿음과 은총에 의한 구원에 더하여 신의 선택과 예정을 강조하였다.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개신교가 탄생하였다. 칼뱅의 제자들은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잉글랜드에 청교도를, 프랑스에 위그노를 전파하였다. 각 나라에는 종교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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