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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풀이 무성해도, 폭이 좁아도, 지면이 울퉁불퉁해도 길이 있다면 사계절 내내 걷기를 즐길 수 있다. 그래도 굳이 걷기에 좋은 시기와 길을 꼽자면 이맘때의 들길이나 산길이 아닐까. 생동하는 자연이 주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조성된 실레이야기길도 그렇다. 봄이 내려앉은 마을길과 숲길은 생명력이 넘친다. 게다가 그 길엔 걷는 즐거움을 더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바로 ‘이야기’다. 증리(실레마을)는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으로, <봄봄>을 비롯한 그의 작품 12편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4월의 중순, 설레는 마음으로 실레이야기길을 찾았다. 이 길은 춘천시가 2011년 조성한 도보여행길인 ‘봄내길’의 제1코스다. 지하철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400m 거리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에서 시작해 마을과 숲을 빙 둘러 돌아오는 총 5.2㎞ 코스다.
문학촌은 김유정의 생가와 전시관을 구경하려는 관람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중 한무리에 끼어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실레는 시루를 뜻하는 이 지역 사투리예요. 금병산에 둘러싸인 이 마을 형상이 옴폭한 떡시루를 닮아 실레마을이라 불러요.”
김유정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듣고 문학촌을 나섰다. 마을길을 따라 펼쳐진 풍경은 정겹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밭이 갈아엎어져 있는데 얼마 전 거름을 줬는지 구수한 향기도 난다. 어떤 밭에는 부추와 대파 같은 파릇한 것들이 돋아나 있다.
마을길이 끝나니 제법 오르막인 산길이 시작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첫번째 이야기 표지판이 보인다. ‘들병이들이 넘어오던 눈웃음길’이라고 쓰여 있다. 들병이는 술을 병에 담아 팔러 다니는 여인을 뜻하는데, 김유정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먹고 살기 위해 그런 일을 했을 여인들의 처지를 떠올리니 괜히 마음 한쪽이 아린다.
들병이길을 지나면 시원한 잣나무숲이 나온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는 사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초록색 잣나무 사이에 활짝 핀 분홍색 진달래도 있다. 진달래 감상에 빠져 있을 무렵, 어디선가 날아온 주황색 나비 한쌍. 따라 걷다 보니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에 닿았다. 소설 <동백꽃>에서 주인공과 점순이가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에 포개져 쓰러졌던 그 동백숲이다. 그런데 빨간 동백꽃은 어디에도 없다. 대신 샛노란 생강나무꽃만 만개해 있을 뿐. 알고 보니 강원도에선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이라고 부른단다. 꽃향기에 취해 폭 쓰러지는 청춘남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씩 웃음이 난다.
동백숲길을 지나니 물오른 봄이 기다리고 있다. 만발한 개나리가 길을 따라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 그 모습이 마치 노란비단길 같다. 개나리길 중간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니 금병산이 감싼 마을의 모습이 정말로 떡시루를 똑 닮았다.
‘춘호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을 넘어서부터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그 사이 개나리·진달래는 점점 자취를 감추지만 산괴불주머니와 제비꽃 같은 작은 야생화들이 눈에 띈다.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을 지나면 다시 마을길이다. 마늘밭에서 일하고 있던 한 할머니의 표정이 봄꽃만큼이나 밝다.
금병의숙(김유정이 야학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던 간이학교) 터가 있는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진원지는 닭갈비 전문식당들. 유혹을 이기지 못해 그중 한곳에 들러 배를 두둑이 채웠다. 다시 마을 안길로 들어가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과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을 지나니 김유정 문학촌에 닿았다.
잠깐 숨을 고르며 걸어온 길을 다시 떠올려 본다. 정겨운 마을 풍경, 포근한 바람과 앙증맞은 풀꽃, 맛난 음식과 구성진 이야기…. 생각해 보면 몇가지를 빼고선 대부분 이 계절 어느 들길·산길을 걸어도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떤 길이든 훌쩍 찾아가 걸어 보자. 봄은 더디 오지만 또 빨리 가니까.
춘천=김난, 사진=김병진 기자
●봄내길 6코스는…
봄내길은 춘천시의 옛길 걷기코스로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조성됐다.
▲1코스(실레이야기길)=김유정문학촌-산신각-저수지-금병의숙터-마을안길-김유정문학촌(5.2㎞, 2시간)
▲2코스(물깨말구구리길)=구곡폭포 주차장-봉화산길-문배마을-구곡폭포 주차장(7.3㎞, 2시간30분)
▲3코스(석파령너미길)=당림초등학교-예현병원-석파령-덕두원-수레너미-장절골 정보화마을-신숭겸묘역(18.7㎞, 5시간)
▲4코스(의암호나들길)=서면 문학공원-눈늪나루-둑길-성재봉-마을길-오미나루-신매대교-호반산책로-소양2교-근화동배터-공지천-어린이회관-봉황대(14.2㎞, 5시간)
▲5코스(소양호나루터길)=소양강댐 선착장-품걸리 선착장-갈골-물로리 선착장-소양강댐 선착장(12.69㎞, 7시간)
▲6코스(품걸리오지마을길)=품걸1리-옛광산길-늘목정상-임도길-사오랑-품걸1리(16.3㎞, 6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