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나의 대부님(이진구)이 ‘왜 그렇게도 카페에 글 하나 올리지 않느냐’고 만날 때마다 꾸중하시어(?) 생각하다가 이 글을 올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백일하에 들어내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없기도 하지만 지난 일을 되돌아보고 혼자 웃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리라 봅니다.
건조하지 않게 하려고 해 봅니다만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실명으로 나오는 분에게는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하여 이 자리를 통하여 양해를 구합니다.
제1화 학산초등학교 시절 (1960.5.17-1961.8.5 :초임 14개월, 도깨비에 홀린 곳)
* 햇병아리교사.
1960년 3월 안동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해는 4.19의거가 일어났던 해이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고 안동사범학교 학생들은 4월 27일 데모를 했다.
길에 나섰더니 후배들이
“선배님 손뼉을 쳐 주세요”
“대통령이 하야했는데 데모는 무슨 데모냐? “
고 핀잔을 주었다.
그 해 5월 17일 경북 안동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학가산 중턱에 있는 조그만 학교인 학산초등학교(지금은 폐교)에 ‘단,입대자제대복직시는해면함’ 이란 조건부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40여 년간의 교직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학산 초등학교는 지금은 도로가 잘 되어 있으나 그 때는 안동에서 버스나 기차로 옹천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청년이 2시간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옹천에서 학가산 가는 첫머리에 있는 두뭇재는 오르는데 만 30분이 걸렸고, 황소가 이 고갯길을 넘다가 발목을 부러뜨렸다는 고개다.
무더운 여름 날 뙈약볕에서 산길을 두 시간 걸어 보면 그 고초를 알 수 있다.
학교에서 학가산 정상까지 갈 때는 1시간 걸리지만 내려올 때는 30분 걸렸다.
곳곳에 불개미 집을 볼 수 있었고 버리두(?표준말을 몰라 이렇게 씁니다)가 많았다.
안동고를 나온 친구가
“선거권도 없는 사람이 교사라니……. 하하”
하던 말이 기억난다.
* 그 때 그 사람들
교장 1명, 교사 4명, 용인 1명 6명이 전 직원이었다.
김순희 교장은 특이하게도 교사이면서 교장서리로 근무했다.
그 당시 권세 있던 자유당의 김석기와 정치학교 동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나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지역 사람인 임본기 교무는 안사 1회로 서른 정도 되었고, 역시 이 지역 사람인 김주량 선생님은 그 보다 서넛 많았다.
조필영 선생은 나와 동기였으나 나보다 먼저인 4월 1일자로 발령을 받고 근무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조필영 선생에게 ‘연필조’ 하면서 따라 다녔는데 이름을 거꾸로 하면 비슷하게 된다. (사진에서 왼쪽 2번째와 오른쪽 첫 번째에서 필자와 조필영이 보인다)
그 후 조필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동창회에도 나오지 않는 그를 ‘지금 어디 있는지?’ 보고 싶다.
용인 임노국씨도 이 지역 사람이며 카투사 출신이나 영어는 ‘투나인나인’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투나인나인’이란 그가 근무하던 미군부대 이름이다.
임본기, 김주량 선생님은 다정다감하고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었다.
그 다음해 조필영이 군 입대하고 김주복 선생님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김 선생님은 걱정이 하나 있었다.
형님 두 분이 33세에 돌아 가셨는데 김 선생도 33세에 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웃동네 월전교회에 다니고 싶은데 같이 다니자고 해서 같이 간 일이 있었다.
이웃 동네 학교 선생 두 사람이 교회에 다니겠다니 대환영이었고 교회 전도사(목사가 아닌 것 같다)와 같이 몇몇 교인 집을 방문했는데 음식(주로 달걀 삶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을 내 놓을 때마다 기도를 하고 먹었는데 너무 번거로웠다.
이 때 달걀은 아주 귀했다.
대량으로 양계하는 양계장은 한참 후에 생겼으며 농가에서 닭 몇 마리 기르면서 달걀을 생산했고 10개의 달걀을 짚으로 싸고 묶어서 꾸러미로 만들어 5일마다 서는 장에 팔아서 필요한 물건을 사던 때이다.
나는 그렇게 한번 가고 안 갔지만 김 선생님은 나와 같이 근무할 동안 계속 다녔다.
아이들은 무명 바지, 저고리를 입고 다녔으며, 신은 검정 고무신이 대부분이었고 양말은 바닥은 다 떨어져 발등만 있는 것을 신고 십리, 이십리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이때의 양말은 면양말로 좋지 못한 신발에 산길을 다니니 흙이 들어와서 금방 떨어졌다.
내복이 있을 리 없다. 추운 겨울에도 저고리 밑으로 배꼽-요즈음도 배꼽티를 입지만 그 때 벌써 배꼽저고리를 입었다-이 다 보였고, 그래도 감기 한번 안 걸리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도시락은 꽁보리밥에 반찬으로는 고추장 종지를 도시락밥에 꾹 눌러서 가지고 오는 아동은 그래도 형편이 좋은 편이었고 도시락을 가지고 오지 못하는 아동들이 많았다.
지우개나 연필 그 것도 도막연필을 잃어버리면 옆 친구의 필통을 뒤지고 야단이었으니 만일 신을 잃어버린다면 그 것은 큰 사건이 되었다
첫댓글 이재일이가 그랬구나! 난 그 때 월전에 안갔나. 월전에서는 선생님이 모두 4명이였는데 김복임교장선생님과 박성철선생님,그리고 박희배선생님,그리고 나 이렇게 지내다가 몇이 바뀌였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 때 아이들 중에 몇은 이름도 기억나는데. 심정순,석옥자,임봉늠,강병돌.....내가 3,6학년을 맡았던가 2,4학년을 맡았던가? 그것도 헷갈리네. 좌우간 복식수업에 교실이란게 조그마한 초가집다락방처럼 작았던가? 그 때 졸업사진 보니까 졸업생 7명인데 박성철선생님 딸도 같이 사진에 들어있었다. 고향분이셨지. 월전교회에 전도사님도 젊으신데 아이들이 하도 가자고 졸라서 갔던 일이 있었는데 제일 두려웠던 것이
전혀 교회에 대해서 모르고 너무도 초보인 나에게 갑자기 기도를 시키는 일이였지. 사전에 미리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런...무척 당황스러운 시간이였어......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는 교회에 가는 일이 두려워지던걸...학산학교에는 가보질 못한것 같은데 ....우리 학가산 산행할 때 드뭇재 까치재를 넘어 월전학교를 먼저 보고 학산으로 가면서도 그 때 초임시잘을 생각했는데...차에서 내려 옛날 그 자리에 가보고 싶었지만 ....자가용으로 한번 더 찾아와 볼까? 나중에라도.
김복임, 박성철,박희배 선생님 모두 기억나네, 김복임교장선생님은 더 기억나고 임창생, 임창립은 그의 아들이고 임창립은 영주 교육장을 했었지
이재일이도 천주교에 귀의한 모양이군. 이진구친구가 대부라 천주교에선 친부 대신 대부라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난 천주교를 잘 모르지? 하여튼 이재일의 초임 교사 시절의 정경이 나의 초임 교사 시절의 추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즐겁게 옛 추억을 더듬어 보네. 좋은 착상에 고맙게 생각하네.
고맙네... 천주교 세례를 받은지 1년이 조금 넘어 오묘한 천주교의 진리를 아직은 모르네.
좋은 추억들이 올라왔는데 늦게야 제6화를 보고 1화로 왔네. 정말로 못살고 눈물 나던 시절, 한 예는 대여섯살 때의 기억- 산에서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만든 송구떡(지금은 없음)을 먹었는데 이튿날 변이 막혔으니 어머니가 꼬챙이로(상상) 아마 피가 흘렀지요.조필영은 내초등교 동기로 중등 지리과 교사로 구미 중학교 에서 퇴직(나도 구미 근무로 재직시 만난일 있음) 후 대구에 살지만 동기회에 두문 불출 연락이 닿지 않으니 답답- 같은반 외에는아는 이도 드물고...... 권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