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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 산들거리는 화창한 10월의 하루, 신새벽에 단잠을 깨우는 알람소리에 귀를 열고 눈을 비비며 서둘러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마침 산청과 함양을 지나는 산자락에는 억새꽃이 만발하고 언덕에 피어있는 들국화가 가을의 분위기를 더하여 주었으며 가을의 전령사라고 하는 코스모스는 하늘거리는 자태가 그리움을 가득 안은 여인의 모습 그대로다. 차창으로 펼쳐진 들판에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물들고 시골마을 담장위로는 빠알간 감이 가을을 대표하는 듯이 익어가고, 앞마당 멍석을 차지하고 한 낮의 햇살을 받고 있는 고추는 입맛을 돋우는 것 같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과 눈이 부시도록 파란 하늘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가을의 정경이다. 그래서 가을하늘 공할한데 구름한 점 없다고 애국가에서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아름다운 계절에 맞춰 남쪽 항구 거제와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통영을 향해 길을 떠났다.
거제에 도착하니 어느 듯 점심시간이 되어서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니 입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잘 가꾸고 정리된 정원에는 갖가지 분재들이 눈길을 끌었다. 나무 이름은 잘 모르지만 소나무와 모과나무, 향나무,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갖가지 나무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넓지는 않았지만 손님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기에는 충분하였다. 잠시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잠시 기다리니 식당 종업원이 커다란 옹기그릇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그 큰 그릇을 4명이 앉은 식탁위에 올려놓는데 보니 온갖 해물이 가득 차 있었다. 이름하여 해물뚝배기라는 메뉴였다. 나는 그만 놀라서 이것을 어떻게 다 먹느냐고 하였더니 종업원이 한 번 먹어보라고 하며 태연히 돌아서는 것이다. 음식을 담은 그릇으로는 그렇게 큰 것은 난생 처음 보았다. 오징어와 꽃게, 전복과 홍합을 비롯한 각종 조개와 고동이 잔뜩 들어있었다. 국물이 시원하고 전복과 조개와 고동의 쫄깃한 맛이 입을 너무나 즐겁게 해주었다. 식사를 하고 외도로 가기 전에 해금강을 둘러보았다. 온통 높은 절벽으로 된 작은 섬이라 사람이 접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기에 경치가 더욱 아름다운 해금강은 북한의 금강산에서 따온 이름인 것 같다. 십자 굴로 잠깐 들어갔다가 파도 때문에 바로 돌려서 나오니 조금은 아쉬웠지만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외도의 이름으로 보아서는 내도와는 상대적으로 밖에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남해의 외딴 섬 外島!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에 오래전부터 어부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가 살던 초가집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다. 외도의 옛 모습을 그려보기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배에서 내리니 관람순서를 알리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서 길 따라 가면서 구경을 하는데 그냥 뭐라고 말할 수도 없이 감탄만 연발하였다. 대부분 아열대 식물들인 것으로 보아서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고, 그렇다면 이렇게 가꾸기까지에는 얼마나 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었을까하는 상상할 수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천천히 따라가니 투구같이 생긴 향나무와 키다리처럼 우뚝 솟은 종려나무, 이름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참으로 멋진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원을 가꾼 사람이 이창호 씨라고 설명이 붙어있었다. 그는 고려대학을 나오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동대문에서 비단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었고 낚시를 하러 왔다가 풍랑을 만나서 본의 아니게 외도에서 하루를 묵게 되면서 외도에 반해서 섬을 통째로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귤 농사를 지었지만 기후가 맞지 않아서 실패를 하고, 다시 한 것이 돼지를 키웠다고 한다.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서 생각 끝에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어언 40여 년이 흘렀고 지금의 정원이 되었다고 한다. 개발할 당시의 사진을 보니 거칠고 척박한 땅을 일구어 나무를 심는 모습이 다른 곳과는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던 섬을 완전히 별천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지금은 유명한 명소가 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며 입장료만 받아도 엄청난 수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섬 하나로 거제시에도 세수에 많은 도움이 되며 지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섬이었던 거제도가 이제는 섬이 아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육지와 이어지는 한반도의 남쪽 항구로 조선산업의 발달과 호황으로 거제도 전체 주민의 소득도 꽤나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을 목격한 것은 트럭 기사들이 한길 가에 차를 세워 수백 미터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격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조선의 호황도 시들하고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격고 있는 상황이라서 모두가 다 힘들겠지만 무섭게 느껴지는 시위를 보면서 우리 경제의 앞날에 많은 걱정이 되었다.
거제도를 지나서 바로 통영으로 건너가서 해안가의 8층짜리 높은 건물 7층에 있는 횟집에서 싱싱한 활어회로 포식을 하고, 땅거미가 지는 저녁에 동피랑으로 올라갔다. 길가에 걸려있는 사투리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동피랑에 꽃이 피다‘라는 글귀와 비탈진 언덕의 집 벽에 그려진 익살스럽고 정겨운 그림이 통영의 명소가 되고 찾는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니 통영은 역시 문화의 도시고 자연과 함께 미래를 내다보는 창조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목마르다언덕‘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목이 마르다는 생각과 파리의 목마르뜨 언덕이 그려졌다. 정상에 있는 동포루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의 야경이 이채롭게 한 눈에 들어왔으며, 미륵산에서 보지 못한 통영만의 리아스식 해안의 일부를 야경으로 보니 그 아름다운 멋과 맛이 새로워서 좋았다. 숙소로 가는 중에 바닷가 공터에서는 축제를 하루 앞둔 거리공연이 한창이었다. 남자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통기타를 치면서 6~70년대 노래를 부르니 기성세대들이 좋아하며 둘러서서 박수로 장단을 맞추며 잠시나마 흥겨운 시간을 갖고는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나는 1960년 대 초중반 고등학교 때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가 순진한 마음에 야바위꾼에게 주머니를 다 털리고 어쩔 수 없이 걸식과 노숙을 하며 여행을 하였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새겨진 곳이다. 한산대첩 예술제가 열리던 기간이어서 당시 남망산 공원에서 갖가지 행사를 하고 저녁에는 통영,고성 오광대 공연을 하였다.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좌판을 놓고 카드를 돌리며 사람을 유혹하고 있어서 언뜻 생각에 잘 하면 몇 배를 받아서 멋있게 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짧은 생각에 덤볐다가 나와 친구가 가진 몇 푼의 돈을 다 털리고, 주머니에는 한 푼도 남은 것이 없어서 시외 농춘으로 걸어가서 밥은 얻어먹고 잠은 거리의 행사장 의자에서 자는데 가을밤이라 얼마나 추웠던지, 밤새 떨었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남아 있고 당시에는 학생들이 노숙을 하다가 경찰에 걸리면 학교로 연락을 하여 학교에 가면 정학을 당하는 시대라 혹시나 경찰에게 걸릴까봐 걱정하였던 기억도 새롭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새겨진 통영을 몇 번째 여행을 하였지만 갈 때마다 또 생각나는 것이 추억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통영에 가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옛 날의 호젓하던 항구 도시가 아니라 몸살을 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꽉 채웠고 답답하였다. 20명이 넘는 일행이 35인승 버스를 가지고 가니 주차하기가 더 어렵고 바닷가의 길은 온통 차로 줄을 서서 움직이지 않으니 차라리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은데, 차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참으로 교통상황 때문에 여행하는데 많은 부담이 되었고 아름다운 항구의 이미지가 복잡하고 혼잡한 상황으로 많이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아침은 항구도시에서만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복어 맑은 탕으로 식사를 하고, 거리를 이리저리 돌다가 어렵게 어느 호텔에 유료 주차를 하고 통영시티투어를 시작하였다. 안내하시는 분이 2년 전에도 만났던 분이라서 반갑고,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던가? 역시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믿음이 가고 기대가 갔다. 처음으로 투어를 시작한 곳이 유람선을 타고 가는 閑山島였다. 배에서 내려 閑山門을 지나서 바다를 끼고 약 20분정도를 걸어가는 길이 참으로 호젓하고 좋았다. 오른쪽에는 시원한 푸른 바다가 있고, 왼쪽으로는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적송이 멋진 풍경을 만들어 주었고, 길가에 서있는 아왜나무는 윤기가 나는 둥근 잎이 싱싱해서 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느낌이 들었다. 大捷門이 있고, 포졸 형상을 한 인형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대첩문 입구의 입간판에 충무공 정신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첫째 멸사봉공정신. 둘째 창의와 개척정신. 셋째 우비무환 정신. 지금도 많은 가르침으로 본받을 만한 훌륭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역시 미래를 내다보며 창의력이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었다. 마당으로 올라가니 흘림체의 현판이 붙은 制勝堂이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원래는 운주당 터라고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1740년(영조16)에 통제사 조경이 운주당 옛 터에 세우고 제승당이라고 이름한 데서 유래하였으며, 1976년 성역화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제승당 서쪽에 바다를 한 눈으로 굽어보며 의연히 서 있는 것은 戍樓다. 수루는 사적 113호로 1593년 7.15 ~ 97.2.26일까지 한양으로 압송 당하기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영을 두었던 곳이며, 난중일기를 쓴 1491일 중 1029일을 이곳에서 썼다고 하는, 이순신 장군에게는 참으로 의미 있는 곳이다.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 오른 쪽에 고동산, 왼 쪽에 미륵산, 뒤편에는 망산이 있는데 이런 절묘한 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동태를 살핀 누각이다. 한산만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지형에 따른 작전으로 55척의 배로 한산대첩이라는 4대 대첩을 이룩한 역사가 깃든 곳이다. 하지만 서쪽 옆에 바다를 지켜보며 서있는 수루는 수리중이라 휘장을 쳐놓아서 구경을 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다. 제승당 뒤쪽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활터에는 사대인 한산정과 바다 건너편 145m 지점에 과녁이 세 개가 서있었다. 지구상 유일한 바다 건너편에 과녁이 있는 활터로, 그 먼 곳까지 활을 쏘아서 맞힐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장군은 바다에서 싸우는 사람이라 실전을 대비하기 위해서 사대와 과녁 사이에 바다를 끼고 활을 쏘는 연습을 하였다고 하니, 거북선을 만들던 지혜에 버금가는 예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閑山 夜吟이라는 시 한 편
水國秋光暮 한 바다에 가을 빛 깊구나
驚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하늘 높이 날아 가네
憂心轉輾夜 가슴에 근심 가득하여 잠을 못 이루는데
殘月照弓刀 새벽 달빛이 들어 내 활과 칼을 비추네.
적막한 수국의 깊은 밤에 혼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는 모습과 외롭게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나라 걱정을 하는 장군의 심회가 너무나 절절하게 나타나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낮이나 밤이나 오직 한 가지 나라 걱정을 하는 우국충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라고하겠다.
우리의 귀에 너무나 익숙한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역시 이 시에서도 깊은 밤에 홀로 나라를 지키며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장군은 언제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위해서 싸웠다고 하겠다.
장군의 넋을 기리는 충무사에는 사당 정면에 장군의 영정이 크게 자리를 잡고 매서운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며 오늘의 현실을 질타하는 것처럼 의연한 자태를 보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삼도수군통제사가 208대까지 이어지는 중에 이순신 장군은 1대와 3대, 두 번이나 통제사를 하였으며, 7년 8개월을 통영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장군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도, 그의 호국 정신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유재란으로 참패를 하고 명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으므로 한 많은 한 평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統營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삼도수군을 통제하는 영이 있었다는데서 따온 것이라고 하며 당시에는 통영이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관장하는 중심이 통영이었다는 것이다. 삼도 중에서 부산, 대구, 광주 다음으로 큰 도시가 통영이었다고 하니 통영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생선구이로 먹은 점심은 통영의 맛과 인심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통영시 향토역사관을 둘러보며 충무공을 비롯한 통영의 면면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 통영의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삼한 시대에 번진 12국 중 고자미 동국에 속하였고,
통일 신라시대에는 고자군을 고성군으로 이름 바꾸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고성면에 속하였고,
조선시대에는 1604년(선조37) 삼도수군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고, 이때부터 통영이라 부렀다고 한다. 1900년(광무4)에 진남군을 고성에서 분리하고, 1910년(융희4)에 용남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시대 1914년 용남군과 거제군을 통합하여 통영군이 되고, 1931년 통영면이 통영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대한민국인 1953년에 거제와 분리를 하고 1955년에 충무시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통영군과 충무시을 통합하여 통영시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洗兵舘이다. 세병관으로 가는 모퉁이 길가에 있는 유치환의 동상과 향수라는 시를 보고 바로 근처에 있는 ‘행복했으므로 행복했네’라는 시비를 보면서 사랑은 행복의 제일 조건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1604년에 세웠다는 세병관은 국보 305호로 통영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선 현판의 크기에 위압감을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현판으로 그렇게 큰 이유가 아무나 못 온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공감을 하였다. 건물은 어른의 아름으로도 모자랄 정도의 큰 통나무 기둥이 38개 받치고 있으며 정면이 9칸, 측면 5칸의 9랑 구조로 단층 팔작집이며 조선시대 3대 목조 건물 중에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의 하나다, 그 이름은 두보의 싯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리고 洗라는 글자에서 삼수(氵)변을 빼면 먼저 선(先)자가 되는데, 일단 유사시에 먼저 군사를 일으킨다는 깊은 뜻을 숨긴 글자로 사용하였다니 참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작전과 장수로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주변 통제영에는 100여 동의 집이 있었다는데 일제의 만행으로 다 헐리고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 세병관이며, 그 실용성을 살펴보면 첫째 권위를 상징하고. 둘째 객사로 썼으며 셋째 통합군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건물을 살린 이유는 칸막이를 하여 학교로 사용하게 위해서라고 한다. 며칠 전에 서울의 경희궁을 둘러보았는데 광해군 때 세울 당시에는 100여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역시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장악하면서 다 헐어버렸다고 하는 설명을 보고 다시 한 번 주먹이 울었다. 역시 통영에서도 같은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세병관 자리가 명당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땅의 기운이 너무 세어서 새가 집을 짓지 못하며-참고로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설악산의 봉정암도 새집을 짓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둘째 유명한 인사가 공부한 자리요. 셋째 앉아 있어도 기가 흐르기 때문에 엉덩이가 아프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500년간 있었던 곳이 전주요, 300년간 있었던 곳이 통영이라고 한다. 높은 벼슬아치가 300년이나 오래 살게 되면 문화와 음식이 바뀌고 패션과 음악이 바뀐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통영은 최고의 음식이 생기고 고급의 패션이나 음악이 발달한 문화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세병관을 거쳐 간 통영의 유명 인사들을 살펴보면 화가 전혁림을 비롯하여 극작가 유치진, 시인 유치환, 꽃의 시인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시조시인 김상옥, 그 외에도 나전칠기 장인 김봉룡, 작곡사 정윤주, 최장수 외무부 장관 김용식, 한국은행 총재 이성택 등 수많은 문학과 주요 부분에서 통영의 인물들이 많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고 하는 옛 말이 있듯이 역시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통영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 외에도 통영에는 세병관영역을 비롯하여 윤주당영역, 중영영역, 일반영역 등이 있고, 갓을 만드는 총방과 입자방을 비롯하여 자개를 만드는 패부방 등 12공방도 유명하며 관광지가 많은 곳이다.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곳을 다 가고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예정된 시티투어를 마치고 태풍의 영향권에 들기 시작한 통영에 바람이 세게 불어서 케이블카 타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어시장으로 가서 마른 참가자미를 한 바구니 사고, 통영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꿀빵을 사서 짧지만 알찬 이순신 장군의 넋이 깃든 거제, 통영여행 일정을 마무리 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관광의 계절에 연휴를 맞아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좁은 지역에 너무나 많은 관광객이 한꺼번에 모이니까 식당에서 밥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모텔에는 잠잘 곳이 부족하며 무엇보다 차를 세울 수가 없어서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여행이었음을 숨길 수가 없다. 앞으로 통영시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2014.1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