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올라가고 내일은 내려간단 생각에 기쁘다. 오늘이 내가 텔레비전으로 봐오던 에베레스트를 눈 앞에서 보는 날인가. 아침에 일어나서 심호흡을 크게 한다. 외롭다. 아침에 깨워주시는 할머니가 그리웠고 안 일어난다고 엉덩이를 때리는 엄마의 '매운' 손도 그립다. 침낭에서 슥 나온다. 제일 사무치게 외롭고 이 순간이 싫어지는 건 침낭 넣을 때다. 오를 수록 침낭 넣는 시간이 길어진다. 오늘은 10분은 걸렸다.
등산 양말 두 켤레, 나시에 반팔에 그 위에 긴팔에 또 그 위에 긴팔에 후드티에 후드집업에 패딩에 또 그 위에 바람막이를 입었다. 있는 사탕들도 탈탈 털어 가방에 넣는다.
'이거 힘들어서 찍을 수나 있을까? 배터리도 간당간당인데.'
디카를 카고백에 넣어다가 다시 배낭에 넣었다가 반복하다 결국 가톨릭 스카우트 항건에 말아 가방 깊숙히 넣었다. 아침 식사는 끓인 죽이다. 많이 먹으려고 해도 잘 안 넘어간다. 결국 반을 남기고 출발한다. 날이 차다. 새벽에 출발하는 건 처음이라 더 겁도 난다. 오늘은 파쌍 아저씨도 위에 잠바를 더 입으셨다.
드디어 출발. 칼라파타르가 내가 다짐하고 약속했던 정상. 김남희 작가 언니가 여름 쯤에 갔는데도 엄청 추웠다고 하니 긴장이 바짝 된다.
속도를 낮춰 걸어간다. 이제 나무도 풀도 안 보이고 바위 뿐이다. 손이 너무 시려워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간다. 손가락 끝이 아파온다. 발가락도 감각이 없어진지 오래다. <걷기예찬>이란 책에서 추운 곳에서 걷다가 발가락을 다 자른 한 등산가가 생각난다. 등산화도 등산양말 두개도 견디지 못하는 추윈데 파상 겔로 오빠 옷은 얇기만 하다. 손을 보니 내가 남체에서 선물한 장갑을 끼고 계셨다. 어쩜 내가 선물하지 않았더라면 이 추위에 맨 손으로 오르셨을까?
'아 따뜻해. 손난로를 들고 있는 것 같아.따뜻해. 아 더워. 아 너무 따뜻해서 덥잖아.'
하면서 걷는다. 쉬는 시간에 언니가 주저 앉아 울었다. 손을 막 주무르면서 손이 너무 너무 아프다는 것이다. 언니가 야속하다. 손이야 다 시려운데 손이 시려워서 주저앉는 언니 모습에 화가났다. 난 생리대도 얼어서 지금 걷기도 힘든데 손 때문에 울고 있다니. 내가 아는 언니와 달리 너무 약해보였다. 나도 언니의 길을 언니도 나의 길이 대신 걸을 수 없는 길이다. 오늘은 가장 힘든 날. 항상 의지해 왔던 우리지만 오늘은 서로에게 힘이 못 되어주기에 씩씩하게 오르는 든든한 언니를 바랬다. 외롭다. 숨 쉬기도 먹기도 힘든데 걷기까지 하는게 지치고 싫다. 나보다 몇 배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고 자기 보다 어린 날 존중해주고 식사 때마다 쉬지도 못하고 준비하고 나중에 먹는 포터들 오빠를 보니 약하기만 한 나다. 난 엄청 잘난 척도 심하고 주목 받기 좋아하고 칭찬 받기 좋아하고 나서기도 좋아한다. 겸손한 척 하지 솔직히 마음 속에선 내가 자랑스러워서 좋아 죽는다. 내가 나서야 잘 될 것 같고 누가 어떻게 하고 있으면 그게 아닌데 아 이렇게 해야 더 좋은데라고 생각하고 내 의견을 설득시키려고만 한다. 근데 지 잘난 줄 아는 '박혜민'이 별 것 아니다. 자연 앞에 어쩔 줄 몰라하고 내가 힘들어서 헉헉 거리던 샹보체에서 뛰어다니며 놀다가 아버지 일까지 척척 돕는 나보다 어린 세 형제들. 부끄럽다.
별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나댄 옛날의 나를 기억하는데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힘들어서 눈물이 나는데 창피해서 더 눈물이 난다.
얼음도 많고 개울에 징검다리도 얼어서 미끄럽다. 돌을 넘고 돌을 오르고 지친다. 따뜻한 물을 꼴깍꼴깍 넘기는데 물이 내려가는 느낌이 다 느껴진다. 가슴이 차오를 때까지 마시고 진짜
"캬~"
를 외친다.
중간 배열에 위치해서 뒤쳐지지 않고 고락셉에 도착했다. 레몬티를 시키고 쓰러져 앉았다. 감자튀김은 정말인지 도저히 못먹겠다. 먹으면 토할 것만 같다. 트윅스를 조금 베어물고는 다시 눈을 좀 붙혔다.
에몬 대장님께서 언니에게 칼라파타르까지 올라갈 거냐고 물으신다. 난 올라가야지 하고 있는데 언니가 아니요 라고 한다. 다시 나한테 물어보시는데 그 짧은 순간에 별 생각이 다 든다. 언니가 안 오름 나라도 올라야 할까, 언니가 없는데 내가 오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생리 때문에 많이 힘들겠지 하는 생각에 그냥 포기한다. 한국에서 고대하고 오를 생각에 설렜던 '칼라파타르'지만 이번엔 어렵단 생각이 든다.
대원들이 준비하고 올라가는데 잠결에 인사도 못한다. 고락셉에 남은 사람은 신부님, 원수연 대장님, 언니 그리고 나다.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간다. 걷는데는 별로 안 지쳤던 터라 숭 숭 내려간다. 올라갈 땐 잘 몰랐는데 내려가는데 왜 그리 먼지. 어느새 칼라파타르에 오르시다가 무릎 꿇어버리신 나 대장님도 합류하신다. 트윅스를 나눠먹고 걷는다. 아 왜이리 정말 왜 이리 긴지 모르겠다. 평지로 내려왔는데 롯지가 안 보인다. 거의 졸면서 스틱을 끌고 걷는다. 자면서 걷는 내가 다 신기하다. 롯지에 도착하곤 원수연 대장님이 끓여주신 라면을 먹는다. 오르고 있을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그래도 냠 냠 먹고 기운을 차렸다. 먼저 내려온 승하도 기운이 많이 나 보였다.
금세 날이 어두어졌다. 신부님도 대장들님도 초조해지시기 시작했다. 날씨가 안 좋다고 내려오던 길에 우리가 함께했던 포터오빠를 먼저보내 문을 부수고 침낭을 올려 고락셉에서 머물라고 했는데 소식도 없다. 그 때 젠젠 오빠가 돌아왔지만 고소 때문에 내려왔다 한다. 불안하다. 신부님은 고락셉에서 머무르고 내일 안전하게 내려왔음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아무런 포터들도 소식이 없어서 불안하다. 그 때 창문 너머로 불빛 몇 개가 조금씩 보인다. 성수랑 준서 도착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둘이 고소 때문에 체하고 포터들과 빨리 내려왔다고 한다. 파상 아저씨는 랜턴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올라가신다. 한 참이 지나서 조금씩 대원들이 온다. 다 왔는데 에몬 대장님이 아직이시다. 고소가 계속 있으셨는데 대원들 인솔 때문에 칼라파타르 까지 오르시고 많이 부담 되셨단 모양이다. 모두 마중나와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에몬 대장님이 도착하셨다. 에몬 대장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고맙다고 한 명 한 명 안아주시는데 괜시리 눈물이 난다.
신부님이 내려오는 길에 그러셨다.
'위로 올라가는 친구들은 '아름다운 도전'을 하는 것이고 우린 올라가는 친구들을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오늘 정말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잰지 얼마나 행복한 존잰지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