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놀이 구경
임병식 rbs1144@hanmail.net
‘개갱 개갱 개갱갱 쿵, 개갱지갱 지갱 지갱깽 쿵’
어디서선가 낮익은 풍물소리가 신명지게 울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빽빽히 들어선 아파트 숲을 건너서 골목안으로 휘돌아 울려오고 있었다.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농악놀이를 하는 것 같은데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그 방향은 어렵지 않게 짚어 졌다. 지속적으로 올려오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나도 몰래 가슴이 뛰면서 한번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그 생각이 들자 내 발걸음은 어느새 그쪽으로 몸을 이끌고 있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우선 얼마 만에 들어본 정다운 소리인가. 낯익은 소리를 좇자니 귀에서는 이미 그 소리와 어울러 지고 있었다. 예전 명절 때, 고향에서는 농악놀이가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보기가 무척 어려운 소리가 되었다. 시절도 풍속도 모두 달라진 탓이다.
그래선지 농악소리는 떠올리기만 해도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그러면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나는 어디서 왁자한 농악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몰래 마음이 달뜬다.
농악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았다. 농악놀이는 마을공터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 도 몇 명이 안 되는 소규모 놀이패였다. 그 광경이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거기다가 놀이패를 이끄는 상쇠는 고삭부리 영감이었다. 그런데도 상쇠는 옛날 기량이 여전하여 신명지게 농악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뒤를 징잡이가 따르고 장구와 북을 든 이가 재주를 부렸다.
그곳에는 당연히 농악놀이에서 빠지지 않은 ‘農者天下之 大本’란 깃발도 보이지 않았다. 농사가 더 이상 중히 대접을 받지 않는 세상이 되어서 일까. 그걸 보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상쇠노인은 한껏 곤댓짓을 하면서 앞으로 내민 발로 건중대며 장단을 맞추었다.
그 걸 보면서 나는 쉬 발길을 돌려지지 않았다. 내가 빠져나가면 놀이판이 금방 시들해져 끝나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것을 아는지 상쇠노인은 슬쩍 나를 쳐다보더니 더욱 힘차게 꽹과리를 두들겼다.
'갠지갠지 개갱캥, 갠지갠지 개갱캥’
'갠지갠지 개당캥, 갠지갠지 개갱캥 '
머리를 주억이면서 놀이패를 이끌었다. 그러노라니 발아래서는 자욱이 흙먼지가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문득 옛날 고향에서 명절을 보낼 때면 펼쳐지던 농악놀이가 오버랩이 되었다. 내가 어렸을 적 농촌은 활기가 넘쳤다. 특히나 명절 때면 농악놀이 빠지지 않았다. 집집마다 가족이 많다보니 놀이 규모도 커져서 어른은 주로 꽹과리와 장고, 북을 들고 뒤따르고, 아이들은 작은 소고를 들고 춤을 추었다. 그런 노리패는 구경꾼 많았다.
그렇지만 그 기량은 읍내 농악단에 비하면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동네 놀이는 오합지졸을 면치 못했지만 읍내 장터에서 펼치는 큰 농악패는 수준급이었다. 연기력이며 움직임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일사불란했다. 그중에서도 가끔씩 선보이는 남원 농악 패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이를 무동 태우고 곡예를 부리는가 하면, 열 두자 상모를 머리위에 올려놓고 자유자재로 돌리며 장구춤과 북춤을 선보였다. 마땅한 구경거리가 없던 시절에 그것은 크나큰 구경거리였다.
우리 마을의 상쇠는 늘 주영감이 맡았다. 그의 집안에는 기구를 보관한 장소가 있었는데, 노인은 소집책 역할도 겸했다. 그런 그가 신명을 내어,
‘갱갱갱 깨갱갱, 갠지 갠재 개갱갱’
하고서 한바탕 놀이마당을 이끌면, 놀이판은 금방 열기가 올라 구경꾼이 모여 들였다. 이런 농악놀이는 정초를 기점으로 마당 밟기를 하면서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 백중, 팔월 한가위, 이렇게 죽 이어졌다. 나는 농악놀이를 떠 올릴 때마다 아쉬움을 느끼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꽹과리나 장구, 그 밖의 징잡이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다. 겨우 소고를 들고서 꽁무니를 뒤따랐을 뿐이다.
그런 것은 아이들이 하기는 위험하다는 이유였는데, 이것은 바로 아기가 불화로에 접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서 놀이를 배울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당시 우리 마을에서 벌어진 어떤 농악놀이를 잊을 수가 없다. 마을의 한 청년이 읍내 씨름판에 나가 무명베 한필을 타왔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마을에서는 한판 놀이마당이 신명나게 벌어졌던 것이다. 타온 상품은 무명베 한필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큰 축하무대가 벌어졌다.
‘개갱 웃개갱 웃개- 개갱 개갱 웃개개 웃개_ 개갱 쿵’
‘갠지 갠지 갠지 깨갱 쿵’
신명진 리듬이 밤늦도록 질펀하게 이어졌다. 우승을 한 동네 형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무등 태워지고 그 부모는 이웃사람의 손에 이끌려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런데 세월이 흐른 지금은 농촌에서도 농악놀이를 거의 들을 수 없다. 그런지라 나는 오늘 초라한 놀이마당이지만 한참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은 풍속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흰머리가 되어 있거나, 나이 많은 노인들은 벌써 세상을 떠나 고향 산자락에 묻혀 있다.
그런 저런 회한 때문일까. 나는 마을회관 앞에서 펼쳐지는 농악놀이를 보면서 당시의 고향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모습에서 옛날의 농가 풍경을 떠올렸다. 마치 추억어린 그 시절로 돌아가 그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2009)
첫댓글 어느 소설가가 꽹과리 소리를 '갠지 갠지 개갱갱'이라고 표현하였기에
한참 감탄하였었는데 알고보니 선생님도 똑같은 표현을 쓰셨군요. 더욱 놀랍습니다.
제 아버지는 마을에서 으뜸가는 상쇠였기에 저도 어린시절부터 농악놀이가 친숙해져서 그런지
요즈음도 어디서 리드미컬하고 맑은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면
저도 모르게 발길이 이끌리곤 합니다.
아 그랬었군요. 그렇게 소리가 들리지요. 갠지 갠지 개갱갱은 시작무렵과 끝마무리게 내는 소리고.
한참 흥이 돋아지면 갱갱갱 갱갱갱 개갱갱갱 개갱갱 했지요. 이선생님 선친께선 마을의 상쇠이셨군요.
농악소리가 더욱 그립겠 습니다.
농악 소리를 그리도 리얼하게 표현하시다니 우리말의 장점이지 않을까 싶네요. 농악을 구경하기가 하늘에서 별따기라 아쉽습니다.
예전에는 명절후 장터에서 그런 공연이 많이 이루어졌지요. 읍내 장터를 가면 전북 순창농악대가 내려와 신명지게 농악공연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이를 무동을 태우고 돌아다니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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