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진감선사 탑비(雙溪寺 眞鑑禪師 塔碑)
혜소(慧昭)는 전주 출신으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가던 평민이었다. 승려가 되어 당나라로 유학갔다가 830년(흥덕왕5) 신라로 돌아와 상주 장백사(현 남장사)에 주석했다. 그러다 지리산 화개골의 폐사된 절을 수리해 ‘옥천사’라고 이름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후에 ‘쌍계사’로 고쳐불렀다.
신라 민애왕이 사자를 보내 경주로 초청하였으나 ‘선정을 닦으면 되지 무엇을 원하리오’라면서 응하지 않았다. 민애왕은 화내지 않고 그에게 ‘혜소’라는 법명을 내리고는 경주에 와 살기를 여러 차례 요청해 법력을 얻고자 하였으나 혜소는 그때마다 모두 거절하였다. 다만 “이 나라에 살면서 부처의 해를 이고 사는 자 마음을 기울여 부처를 받들면서 임금을 위해 공덕을 쌓지 않는 사람이 있으리오. 하필 멀리 임금의 말씀은 메마른 나무와 썩은 말목에 보내 구하리오”(진감선사 비명)라고 대답했다. 그는 임금의 사자에게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주지 않으면서 초청을 거절하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제자들과 울력으로 생산해 먹고 헤진 옷 입고 꽁보리밥을 먹으며 정진했다. 그러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해주었다. 누가 인도산 향을 보내주면 ‘나는 무슨 냄새인지 모르겠구나. 마음을 경건히 할 뿐이다’고 하고 당나라에서 생산한 차를 공양하면 ‘나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구나.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때때로 범패를 부르며 스스로 환희에 젖기도 했는데, 범패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불러 “만법이 모두 공하다. 내 곧 가리라. 너희들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힘쓸지어다”라고 당부하고 부도를 맏들지 말 것과 비명을 쓰지 말라고 했다. 제자들은 그가 열반한 지 하루 만에 시신을 땅에 묻었다. 하지만 나중에 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내리자 그가 머물던 쌍계사에 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최치원이 섰다. 그 비가 한국전쟁 때 총탄을 맞는 등 풍상을 겪으며 쌍계사에 보존되어 있다.
비는 887년(진성여왕1)에 건립되었다. 전체높이 3.63m, 비신높이 2.13m, 너비 1.035m, 두께 22.5㎝. 국보 제47호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및 탑신이 완전한 탑비로, 신라 말기에 나타나는 탑비 양식에 따라 귀두(龜頭)는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귀부의 등에는 6각의 귀갑문(龜甲文)이 크고 간편하게 조식되어 있다.
이수에는 보주를 다투는 반룡(蟠龍: 승천하지 아니한 용)이 힘차게 조각되었고,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전액(篆額)을 양각하였으며, 그 위로 앙련판(仰蓮瓣) 위에 보주를 얹었다.
진감선사 혜소(慧昭)는 최씨로 804년(애장왕 5) 세공사(歲貢使)의 배에 편승하여 당나라의 신감대사(神監大師)에 의하여 중이 되고, 각지를 편력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여 역대 왕들의 숭앙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885년 헌강왕 11년에 진감선사대공영탑(眞鑑禪師大空靈塔)이란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대표적 문인인 최치원(崔致遠)이 짓고 썼으며, 특히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비문 글씨는 자경 2㎝ 정도의 해서로 상하로 긴 짜임새를 하고 있으며, 붓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 조형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신품(神品)이다. 이수의 전액 또한 최치원의 글씨로 공간이나 자형에 구애받지 않는 신묘한 필치로 생동감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