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차 호국산행때 |
장사리가 보이는 남산에서 |
개념도
낙동강 전투에 투입된 북한군의 인원 14만명 얼마되지 않아 7만명으로 줄어듬 격렬한 전투로 7만이상 사망
장사 상륙작전 전몰 위령탑 |
장사상륙작전 |
대구역으로 가서 수도권에서 오신분들과 만나 영덕 장사해변으로 갑니다.
지난번 종주때는 비가 와서 중간에서 포기해야만 했는데 이번에는...
호국산행 길고긴 대장정을 앞두고 1950년 9월 14일 기척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위장상륙작전
상륙작전에는 성공했으나 772명중 어린학도병이 90% 참가
8일간 중간 지원없이 버팀 상륙작전 도중 어린 학도병 200명 사망
"학도병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로 구성되어 군사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국일념으로 전투에 참가한
탓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장사상륙작전 시나리오 "상륙을 할수 있어도 후퇴는 100%없는 ...후퇴 해봐야 바다이므로
인민군은 장사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남산에서 기관총으로 난사를 하였고
학도병들은 죽을지 모르는 길을 용을 쓰며 올라야 했을텐데
여리고 여린 학도병들의 넋을 위해 잠시 묵념을 합니다.
이번에는 좀 많죠^^
가시밭길로 가야 하는데 그런길 좋아 하시니 같이 가야죠
[장사 상륙작전 잠시 언급]
인천 상륙작전을 하기 위해 인민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했다. 그래서 장사 상륙작전으로 시선을 돌리고
인천에 상륙하여 반격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들은 10대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기꺼이 참여하여 참여자 대부분이 전사 하였다.
이를 기리기 위해 해마다 장사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상륙작전에 앞서 소규모 해군이 함포사격을 감해하였다.
대공포를 박살내고, 공군의 기총엄호를 받기 위해서였다. 대공포가 파괴되자, 미8군 예하 무스탕이 장사 상공에 떳다.
772명의 대원이 1차적으로 상륙을 개시했고 태풍 케지아호의 영향으로 배는 좌초 헤엄치지 못한 어린학도병들 익
사 했다.조국을 위해 책과 펜을 두고 피 묻은 총을 든 소년들이다.
정규군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총 쏘고 수류탄 던지는 법만 간단히 배운 학도병이라지만 매섭게
북한군을 몰아부쳤다. 모래사장은 피로 물들었다. 2차 상륙이 모두 완료되고, 1차 상륙의 병력과 합류하여 북한군
섬멸에 앞장섰다.. 모래사장을 넘어가는데, 수 백명이 전사했다. 무스탕이 가끔 날아와 기총엄호를 할 때면,
북한군의 사격이 멈췄는데, 그 때 엎드려 있다가 얼른 뛰쳐나갔다. 끝내 학도병이 장사를 점령하고 이후 몇시간
동안 포항을 향하는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놓는데 성공했고, 상륙지점이 동해안이라는 강한 의식을
심어줌으로서 북한군의 시선을 서해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4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북한군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도병들은 이를 악물고 탄약을 모두 써가면서까지 적들을 막아냈다.
그러나 2개 대대병력이 기갑병력과 함께 장사를 덮치자 , 미8군은 즉각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미 139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고 생존자 수십명은 동료들을 챙기며 모래사장을 내달렸다.
이것으로 단 몇 시간동안만 이어진 장사상륙작전은 끝이 났다. 장사상륙작전은 772명의 자원입대한 학도병이
참전하여 139명의 전사자를 냈고 부상 92명을 포함 수십명이 행방불명 발생
마지막에 철수를 할 때는 철수를 돕기 위해 왔던 수송함이 매우 작았던 터라 1개 소대병력 36명을 태우지 못한 채
철수 했다고 한다.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동료들을 배웅하며,모래사장에 남겨졌던 학도병들은 끝까지
철수하는 동료들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다시 모래사장 건너편 북한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남겨진 학도병 중 대부분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렵게 좌초된 문산호와 해안의 소나무에 밧줄을 연결 하였고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상륙한 대원들은 장사리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화진리.구계리 봉황산 까지 진출 적의 보급로 차단하는 등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180km의 호국산행길
이제 모두 산행 셑팅은 마치고 어둠속의 그당시 적들이 지키던 남산으로 올라갑니다.
남산 작아도 조망이 아주 좋은산인데 그당시 인민군은 이곳에서 정찰과 해안으로 헤엄쳐 오는 학도병에게
난사를 함
언제 다 갈꼬...
남산 반대편에는 50사단 영덕 대대가 있는곳이다.
새벽에 군부대 철조망 따라 가다가 후문 초병에게 오인사격이 있을수 있어
미리 그곳 작전장교분한테 산행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오인사격이 없도록 연락을 해둡니다.
포항의 멋진 남자님.영덕 예비군 중대장님.50사단 영덕 대대 작전장교님의 협조 감사드립니다.
철조망 옆으로 해서 빠져 나오면 만나는 각개전투 교장
야간에 가시밭으로 진행한다는건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두조 야대장님과 벽계수님은 먼저 가시고
중간,후미 같이모여 안전 모드로 진행
길이가 긴많큼 체력 안배에 신경쓰고
동대산 갈림길 입니다.
이곳에서 동대산으로 가신 몇몇분들 기다리고
시간을 보니 조금 빠르게 진행 했네요
달콤한 휴식은 언제나 좋죠^^
내연산 삼지봉
삼지봉:향로봉과 문수봉.동대산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향로봉으로 진행
바람과 안개로 일출은 없고 이곳에서 옷을 바꿔 입습니다.
가볍게...
이곳에서 중간 4명, 후미 4명으로 나누어짐
일주님과 바랭이 대장님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실까^^
후미분들
경북 수목원
이곳에서 식수 보충하고 잠시 쉬어 갑니다.
발걸음은 가볍게
괘령산에 다시 모여 한장 찍고
매화눈님과 짱이님이 기다리는 성법령으로
송신탑 몇개 설치한다고 온통 파헤쳐 놓은 임도길
성법령에서 맛있는 국밥 한그릇먹고 간식으로 수박까지
잠시 쉬어 갑니다.
선두와 거리는 2시간 거리
호국산행길에 함께한 분들이죠
매화누님 짱이님 감사합니다.
이곳은 가사령 가는길 낙동길이죠
그나마 등로가 좋고
낙동길과 보현지맥이 만나는 갈림길에서
보현지맥 고라산
등로는 낙엽이 많아 푹신하고
이곳 742봏에서 방향은 우측이며
잠시 내려오면 임도와 만난다 .
햇볕이 내리는 임도길 걷기가 영 아니다 .
호국길에 때늦은 아카시아는 잠시나마 진한향을 더하고
갈길 급한 산객의 마음을 잡아 둔다.
[구암산 전투 지역]
등로는 구암산으로 가지 않지만 이곳 모두가 구암산 자락이기에 잠시 구암산 저투에 대해서
전쟁이 한참이던 50년 7월 10-15일까지
7월11일 동해안의 춘양방면에서는 게릴라부대 300명이 울진방면으로 이동중에 있었고 남쪽 10km 지점에서도
적 제 5사단 예하부대 300명이 전차부대와 함께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구암산을 거점으로 출몰하던 게릴라부대의 일부는 동일 03:00 구암산 남쪽 죽장면 감곡리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는데, 이들은 경주와 포항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하면서 죽장면과 기계면의 각지에 출몰하여 부녀자와
양곡, 농우 등을 약탈하여 갔다.
이 게릴라부대는 보현산을 주된 거점으로 하여 아군과 대치하여 오다가 북한군이 대거 남침하여 오자 이에
가세하여 후방교란에 열을 올렸다.
포항경비대에서는 이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17:00에 용호대(대장 중위 정창룡)를 안강지구로 출동시켰다가
1개중대로 추산되는 적들이 영천군 구룡산으로 남하하여 잠입한 것을 탐지하고 12일 16:30에 경주를 지나
도유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1개 분대의 척후대를 파견하여 적정을 관찰하였는데, 적들은 인근 마을에서
노획하여온 가축소리 때문에 그들의 위치를 노출하고 말았다.
아군 척후대는 심산에서 울려나오는 송아지 소리를 듣고 적들이 숨어있는 위치를 확인한 다음 본대로 돌아왔다.
도유동 본대에서 공격계획을 세우고 밤을 세운 다음날인 13일 04:00를 기하여 구암산 중복에 있는 적진에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다. 아직 잠에 취해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분산도주하였는데, 2시간에 걸친
추격으로 8명을 사살하고 30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부상당한 듯한 적 30명과 나머지 병력은 청도방면으로 퇴각하였는데, 아군 육전대는 이 전투에서 1명의
부상자도 없이 13:00 포항으로 귀대하였다.
14일에도 산악을 타고 죽장방면으로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하여 죽장면 입암동으로 출동하였던 육전대는
적을 추격하던중 15일 새벽에는 비학산 중복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정찰대원 3명을 침투시켜
100여명의 적들이 잠복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때 포항경비대에서는 제3중대(중대장 소위 박승도)를 파견하여 옴과 동시에 용호대장 지휘하에 편입되었는데
이날은 이미 날이 저물어 교전없이 용기국민학교로 동본부를 이동하였다.
다음날 06:00 1차로 1개 소대의 육전대가 출동하였으나 적들은 죽장 북쪽 산악지대로 도피하기 시작하므로
가사리 방면으로 적을 추격하였다.
산악지대로 도피한 적들은 점차 병력을 증가하여 500여명이 잠복중이었는데 17일 새벽 04:30 그들은 합덕리
방향으로 하산하고 있었다. 한편 정자리에서도 400여명의 적들이 출현하였다는 적보가 들어왔다.
이 적들은 산맥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후방교란을 시도하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합덕리 고지 일대와 정자리에 집결한 적들을 격멸하기 위하여 해군 육전대는 정찰병력 40명과 함께 포위작전을
전개하였다. 군·경 합동부대는 전면과 좌우의 3면으로부터 적을 포위한 다음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7일 14:30부터 공격이 개시되었는데 제1소대가 이미 구축해놓은 중화기로 적의 정면에 사격을 가하자 적들은
뒤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 적들은 정규부대가 아닌 게릴라 집단인 바 무기도 빈약하였으며 일부 포로들은 칼, 도끼등을 무기로 소지한
자도 있었다.
경찰 1개 소대를 좌우에 경계배치한 다음 육전대 제1중대의 3개 소대가 계곡을 따라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제1중대의 1개 소대는 중화기로 적의 우측 정면에 공격을 가하고 제2소대는 적의 좌측 최고봉을
급습 점령하는 한편 적전 최단거리인 500m 소고지를 확보하였다. 한편 제2중대의 1소대는 좌우에서 엄호를
받으며 적진정면을 공격하였으며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7시간에 걸친 격전으로 우리 육전대는 21:30에 적의 최고진지인 807고지(구암산)을 점령하였던 바 동고지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와 버리고 간 취사기구만이 남아 있었다. [참고 국방부 한국전쟁사에서]
휴식은 언제나 좋은데 푹쉬고 나면 배낭매고 일어서기가 싫다.
언제 집에 도착하지 날씨는 덥고
덥다 더워
옷재
옷재 지나서 무심결에 대형 알바 한번 거하게 하고
꼭 두방재에도착합니다.
이곳에서 저녁식사후 다음날 진행 상황에 맞추어 여러가지 보충하지만
감기가 심해 밥이 목에 넘어 가질 안는다.겨우 3숟가락만 뜨고
젊은 사장님이 성격이 아주 좋으시다.
야간구간에 지난번 처럼 베틀봉과 면봉산 보현산 구간 모두 야간이다.
잠은 오고 가다보니 베틀봉이네.
면봉산에서 된비알 좀 참고 올라와서
선두조 먼저 보내고 후미 기다립니다.
선두는 보현산 임도로
우리는 산길로
보현산 정상에 선두가 두고간 수박이 있어 앉아 배를 채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속인이 두고 간것이라고 하네요
[보현산 전투 개요]
보현산 전투는 50년 7월부터 9월 초까지 보현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전개된 비정규전 및정규전 전투였다.
북한군은 남침과정에서 정규전을 실시하는 한편 유격부대를 침투시켜 그들로 하여금 남한에 있는 좌익세력과 합세,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주민을 선동하면서 민중 봉기를 유도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군 제766부대가 동해안에 상륙한 후 보현산 일대로 진출하면서 유격활동을 펼치게
됐다. 아군은 최초 경찰병력을 동원해 적 유격대 소탕작전을 벌였으나 경찰만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7월 하순부터 공병단과 유격대를 투입했다.
북한군 제 766부대가 투입됨으로 비정규전 형식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보현산 전투는 이곳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정규전으로 점차 확대됐다. 즉 국군은 제8사단을 이곳에 투입했고 북한군은 다부동 전방에 있던 제 15사단을
이곳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이 지역에서 결정적인 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반면 아군은
이지역과 이곳으로부터 남쪽은 접근로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적 제 15사단은 운주산과 봉화봉 사이에 형성된 공백지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죽장~자양~영천 축선상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고 9월 2일 저녁 공격을 개시해 돌파구를 형성해 영천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로써 아군 제8사단은 결국 보현산을 포기하고 영천 북쪽에서 적 제15사단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적은 동부전선의 진출이 지연되어 왜관 북방에 위치하고 있던 적 제15사단을 청송지역으로
이동시켜 전투력을 보강하게 하는 한편 목표로 한 8월 l5일까지 대구를 점령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반적인 전쟁목표 달성에 차질을 가져왔다. 반면에 아군은 부대를 재편하고 정리하는 한편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획득하였다.한편 보현산 일대에 이동해 주저항선을
형성한 제8사단은 험준한 지세를 적극 활용해 22일간 우세한 전력의 적 제8사단과 제776부대를 억류하고
견제하는데 성공하였다.하지만 신편으로 인한 훈련부족과 병력 및 장비의 열세에 따른 전력 차는 결국 국군
제8사단을 기룡산 방어선으로 철수하게 작용한 요인이었다.8월 15일 투입함으로써 이후 적 제2군단은
예하의 제8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을 투입함으로써 국군 제8사단은 방어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보현산지구전투는 영천지구 전투를 위한 전초전으로서,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전투였다.
다시 말해,적이 총력을 집중한 9월공세로 9월 공세로 부득이 제8사단 예하 제15연대와 제21연대,
그리고 제7사단 제5연대와 독립 제 1, 제2유격대대,강원경찰대대 등이 9월 4일을 기해 인접부대와 연결 작전을
위해 다음 진지로 이동하였다.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모든 병력을 집중 운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영천 일대에서 결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시루봉에서
노귀재 이곳역시 50년대 전쟁으로 얼룩진 곳이다
곳곳에 유해발굴 지역임을 알리는 하얀 무명천이 나무에 애처롭게 나붓낀다.
노귀재 매점에서 컵라면에 삶은 계란으로 허기를 면하고
지원 오신 악마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악마님 고마워
대장님.
참 편안하신분이죠
수기령에서 상록수님.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화북면 경계
봉림산 갈림길에서
드디어 화산과 팔공산이 눈앞에 펼쳐지고
방가산
이곳에서 잠시 후미분들 기다리다가
먼저 출발합니다.
살구재
화산 3사관학교 유격장에서 본 지나온 보현산 방향
화산 정상 입니다.
[화산 전투 개요]
화산전투도 칠곡 다부동 전투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이었다. 화산(828m)은 군위군 고로면과 영천시 신령면 경계에서
조림산과 마주하고 있다. 국군 제6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퇴각한 북한군 일부와 낙동강을 따라 군위 우보에서
영천 신령 쪽으로 진격하는 북한군 제8사단을 격퇴하기 위해 맞섰다.
이 무렵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부산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영천을 사수하는 신녕전투를 비롯해 최후의 보루였던 대구를 사수하기 위한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화산 정상 부근은 모두가 유해 발굴지역이라 해도 된다.
고추장과 주먹밥 한덩이 지원도 끊어지는 전쟁속에 중대병력이 소대병력으로 줄어듬
북한군의 피해도 막대함
[교전내용]
화산828m은 지형적인 특성상 넓은 들판지역의 평지같은 곳이다
국군은 주간공격에 많은 전사자가 나오자 야간을 이용한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중대원들은 주먹밥에 고추장 찍어 먹고 화산으로 침투
북한군 동쪽진지, 국군은 서쪽진지 서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다 보니 서로의 진지가 뒤바뀌는 일이 많았다.
혼전과 혼전, 전투와 전투속에 진지가 바뀌고 또 바뀌니 식사를 운반해오던 한국청년단원이 적에게 사살되거나 붙들리니 주먹밥과 고추장 한숟갈 조차도 지원이 끊어져 버렸다 .
지원은 끊어 졌지만 실탄은 부족함이 없었다.수없이 쓰러진 전사자의 실탄과 부상자들의 실탄이 보급의 원천이 되었으니...
MBC 드라마 2010년 소지섭의 "로드 넘버원" 촬영 배경이 된곳
화산정상에서
혹시라도 발밑에 누워있을 고인들을 생각해 등로이외 이탈을 하지 않습니다.
화산 인근의 방속국탑 멀리 조림산이 보이고
화산은 넓은 평지로 되어 농사 짓기에 좋은가 봅니다.
감자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감자골이라 하구요
더운날 목마른 갈증
비좀 안오나...
멀리 팔공산과 영화배우님.
양파밭 여길 지나면 갑령입니다.
신녕, 갑령, 화산지구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14일까지 33일간의 피말리는 전쟁을 한 격전지로
신녕지구전투는 갑령, 화산, 조림산 지구전투와 더불어 대구 동북부 방면 방어 작전 중 하나며, 낙동강을 건너게
된 북한군 제 8사단은 아군 제6사단과 교전하면서 신녕 북쪽으로 남침했고, 북한군 12사단과 15사단은 보현산지구로
진출했다
방송국 탑이 있는곳에 올라서니 조망이 참 좋다 .
이곳역시 전투 지역이다
감자골에서 밭일하시는 아줌마 분들께 국수 한그릇 강제로 달라고 해서 맛나게 먹고 오신 영화배우님.
우리는 삶은 감자 하나씩 손에 들고 맛나게 먹습니다.
멀리 의성의 금성산과 비봉산 줄기
우측 멀리 선암산
앞은 옥녀봉 물론 이곳도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앞은 조림산 638m
조림산 전투는 갑령전투와 더불어 주위 조망이 좋아 사방 수십km가 관측 되어 전략적으로 매우 좋은위치
[교전 개요]
조림산은 8부능선 부터 상당한 급경사의 오름이다. 조림산 정상은 적의 수중에 들어 가있는 상태이며
8월 말부터 북한군 제 8사단은 인접 북한군 제 13사단 및 제 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를 돌파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여 보려고 최후의 총공세를 다짐하였던 것인데 이 적을 맞이한 아군 제 6사단은 장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구 외곽선을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적의 야욕을 드디어 분쇄하고 말았다.
9월 15일부터 반격에 들어간 아군은 낙동강 선의 모든 전선에서 끝까지 저항하고 있던 적에 일대 타격을 가하면서
일로 북진반격을 재촉하였다. 원래 제 6사단의 신령 지구 싸움은 대구를 우회공격하려는 북한군 제 8사단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하여 그 전투 능력을 빼앗고 그 사기를 극도로 저하시키고 말았다
아군:약 8천 5백명
적군:약6천 500명
1950년 8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국군 6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전적지로 당시 국군은
적 3천800여명을 사살하고 적전차 21대, 화포 14문을 파괴하는 등 수세적 전황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킨 곳이다.
갑령에 지원오신 짱이님과 겨울남자님.
짱이님만 한장 담겨져 있네요
미역국 지원 감사합니다.
신령면은 고향의 어머니께서 5살때 군위에서 피난간곳
아버지는 8살때 고향 의성에서 경산 남산으로 피난 가시고
이곳에서 어머니를 잠시 생각하고 이틀째 밤샘을 위해서 다시 갑니다.
드디어 팔공산 자락의 시루봉 입니다.
잠은 고고 길고긴 오르막길 그리고 암릉이 있는 바위길
경사가 급한곳에 자일이 있지만 어두워서 안전산행에 여간신경 쓰이는게 아닙니다.
팔공산 정상의 군부대 잡목을 힘들게 통과하고
드디어 호국길의 최고봉 팔공산 비로봉에 도착합니다.
서봉 가는길에 여명은 밝아 오고
지친 산객의 마음을 잡아 두네요
잠시나마 지친몸도 쉴겸 여명을 구경합니다.
팔공산 전투 개요
1950년 8월 초부터 왜관-다부동 지역에서 대구 공략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하던 북한군 제2군단은 8월 말에 이르러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험준한 산악지대로 침투하여 우회공격하라는 지시를 맡았다. 이에 북한군 제2군단은 효령 일대
에서 다부동으로 남하 중인 북한군 제1사단을 가산-도덕산과 대율동 - 팔공산선으로 진출시켜 그 동쪽의 북한군제
8사단과 협동으로 대구 외곽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다부동 지구에서 작전 중인 국군 제1
사단의 방어지역을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시킨 다음 국군 제 6사단의 좌측을 담당하게 하여 국군 제2군단의 방어정면
을 축소시켜 남침하는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제1사단은 다부동 전선의 동쪽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 6사단 지역
의 일부와 제 5연대 및 기갑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팔공산과 가산 지역에 대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1사단은 새로운 방어지역인수를 위해 8월 30일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육군본부는 제 1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현 담당지구 교대완료 후 즉시 신 담당지구로 이동하여 2개 연대로서 동 지구를
담당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제 2군단도 작명을 통해 제 1사단은 1950년 8월 30일 12시까지 현 진지를
미 제1기병사단과 교대 후 31일 19시까지 제7연대, 제5연대, 기갑연대와 교대하여 적의 남진 및 동남진을 저지하고
이를 진전에서 포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국군 제 1사단은 8월 31일 제6사단 지역인 신녕 부근으로
이동한 후 사단사령부를 신단동에 설치하였다
제11연대와 제 12연대는 제5연대와 기갑연대 그리고 제7연대의 방어진지를 인수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558고지와 527고지 그리고 655고지가 30일 밤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압력으로 점령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제 11연대는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제 5연대 및 기갑연대와 협동으로 이날 13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제 12연대는 제 7연대의 방어지역을 계획대로 인수하여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제 7연대는 제 2군단작명에
의해 신녕으로 이동한 후 사단예비가 되었다. 9월1일 기갑연대는 제11연대 제2대대의 지원을 받아 558고지를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탈환하여 제11연대 제2대대에 인계하고 신녕으로 이동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이날 12시에 655고지
를 공격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 2개 소대 병력을 격퇴한 후 점령하였다. 제 5연대 제2대대는 다시 527고지를 공격하였
으나 실패하자 우선 655고지만을 제 11연대 제 3대대에 인계하였다. 9월 2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전날 진지를 인수받
았으나 북한군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 이날 2시에 381고지에서 318고지로 이동하였다. 이로 인해 우측에 배치되었던
제 12연대 제 1대대가 적의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예비인 제 2대대의 증원을 받아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제5연대 제2대대는 제 11연대 제3대대의 화력지원을 받아 527고지를 3시에 공격하여 11시에 이를 점령하였다.
제5연대 제 2대대는 14시에 527고지를 제11연대 제3대대에 인계한 후 대구로 이동하였다.
9월 3일 제 11연대는 4시부터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제 2대대가 538고지 남쪽에서 적 2개 대대의 공격을 저지하였으나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14시에 538고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제 3대대는 655고지에서 피아간에 서로 탐색전만 전개하고
교전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다. 제 1대대는 318고지 동남쪽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원진지인 318고지로 다시 복귀하였다. 제12연대 정면에서는 제 2대대가 침입해 온 적을 격퇴하였으며
제1대대는 구미동 부근에서, 제 3대대는 제 1사단과 제 6 사단의 전투지경선 변경에 따라 제 2연대로부터
인수한 제370고지를 점령한 후 진지보강 작업을 실시하였다. 9월4일 제12연대 제1대대는 제2대대에게 전지를
인계한 후 연대지휘소로 이동하여 집결하였다.
1950년 9월 5일 중부전선의 제 8사단전선이 돌파되면서 북한군 제 15사단이 영천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에 제1사단은 9월 5일 밤 전반적으로 전선을 조정하고 6일 오전에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였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사단의 좌측부대로서 538고지 북쪽 능선을 점령하여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는 384고지 좌측 전방에, 제2대대는 대율동 남쪽 능선을 점령하였다.
제 11연대 제1대대는 836고지인 파계재 일대의 주요지점에 배치되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군단예비가 되어
신단동으로 이동하였다. 제 12연대 제2대대는 573고지에서 329고지 사이에, 제 3대대는 388고지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 날 북한군 제1사단은 대구에 이르는 최단 접근로에 주력을 투입해 국군 제1사단을 돌파하고자 기도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군 제1사단의 일부병력이 2시 야음을 이용하여 583고지로 침투하여 가산 부근의 적과 합세하여
중리를 향해 남진하였다, 그런데 이날 아침 중리에 도착한 제15연대 제1대대는 남진하고 있는 북한군과 불시에
조우하였으나 과감한 공격으로 이를 격퇴한 후 583고지를 계획대로 점령하였다.
이 날 오후 미 공군과 사단 제 17포병대대가 제 1사단 정면에 지원사격을 실시함으로서 적은 공세 행동을 하지 못하였
다. 북한군 제 1사단은 9월 9일 19시에 팔공산 북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제 1사단의 후방을 차단하고자 도덕산으로 침투시켰으나 제 15연대의 공격을 받고 격퇴되었다.
한편 제 11연대 제 1대대는 사단 좌측에 대한 적의 압력이 증가되자 제거하기 위해 이날 새벽 파계재에서 고도현으로
이동하여 적 1개 대대병력을 격퇴하였다.
제 15연대 제 3대대 도 22시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열한 교전 끝에 이를 격퇴하였다.
이날 제 15연대는 연대지휘소를 매골로 이동하였고, 제 12연대도 연대지휘소를 왕산동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 제1사단장은 1200여명의 병력을 증원받아 도덕산으로부터 대구 동촌 비행장으로 진출하고자 기도하였으나
제15연대와 제11연대가 10일 미명에 도덕산을 탈취하여 적의 기도를 분쇄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사단은 3분의 2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 진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12일 적의 특공대가 제15연대 지휘소가 있는 매골지역으로 침투하였으나 사전에 인지한 아군의 매복공격으로 격퇴하
였다. 9월13일 제 11연대 제 1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 제 8기병연대와 협동으로 756고지 부근에서 침투해 온 적을 포착
하여 격퇴하였다. 583고지를 방어하던 제 15연대 제 1대대는 포병지원을 받은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받고 일시 고지 동
남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 1사단은 13일 12시부로 국군 제 2군단으로부터 미 제1군단의 지
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행작전은 계속 수행하였다. 제11연대 1대대는 적이 장악하고 있는 756고지를 야간에 기습
공격을 하여 탈취하였다가 다시 적의 역습을 받고 빼앗겼다. 제 15연대 제 1대대는 14일 783고지를 공격하여 이날 19시
30분에 점령하였다, 제11연대 제 1대대는 15일 미군 전폭기와 포병지원사격을 받으며 756고지를 다시 공격하여 이를
점령한 후 추격전을 전개해 가산산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북한군 제1사단의 대구 동촌비행장을 점령하려
는 그들의 의도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제1사단은 가산과 팔공산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제1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제1사단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어 재기불능상태로 만들었다.
북한군 제1사단은 그들 병력의 3분의 2를 이 전투에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제1사단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이후 단행된 낙동강 방어선의 총반격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적을 주격하기 시작하였
다. 제 1사단은 팔공산 지역에서 적을 추격하여 가산 부근을 탈환한 후 다부동 지역의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하여
9월 22일 이 지역에서 북진의 돌파구를 만들었다.
아침이 주는 산의 아름다움
아침을 먹기 위해서 서봉에서 한티재까지 각개전투 하듯왔지만 아직 문은 굳게 닫혀있다.
감기때문에 목이부어 뭘 삼키기가 힘들고
후미가 오는시간에 맞추어 가산으로 그대로 진행 한다. 아침식사는 소야 고개에서
치키봉
최근에 발굴한 유해 발굴지역
가산으로 가는길에 몇해전부터 해온 발굴은 아직도 계속이어지고
회원님들께 부탁드립니다.
산에 가시면 전사자 유해 발굴을 한곳이 의외로 많고
모두가 나라 지킨 국군이 잠든 곳이니 이곳에서 특별한 볼일 안봤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오는 동안 많은곳에 용도를 알수 없는 휴지가 많아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이곳에는 절대 뭘 버리시거나 하시면 안됩니다.
영화배우님.
가산바위로 갑니다.
드디어 가산바위에 오르고 앞으로 남은곳을 보니
이곳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인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서 치열한 교전이 이루어진 다부동입니다.
눈에 보이는곳 모두가 교전 장소죠
[다부동 전투]
"여기서 밀리면 대한민국이 끝장" 55일간 격전, 1만용사 숭고한 희생이...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지역은 지형상 돌파되면 10km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가 불가피 하여 대구가 적 지상 포화의 사정권내에 들어가므로 다부동일대는 대구방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요충지이며 6.25전쟁 중에서 최대 격전이었으며 대구를 사수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을
오늘에까지 있게 한 전투였다.
전투 과정
다부동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항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3, 13, 15사단)의 8월공세를
27일간에 걸쳐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전개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다부동 전투는 1차 세계대전시 프랑스 수도의 관문으로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
전투에 비유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동양의 베르덩 전투라고도 한다.
북한군의 8월공세시 주공부대의 목표는 당시 한국의 임시수도인 대구와 부산 교두보였다.
적은 대구공격을 위해 투입된 5개 사단중 제1, 제13, 제15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대구축선에 집중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3개 사단, 즉 중앙에 국군 제1사단(왜관-낙정리)을, 우측에 제6사단(낙정리-의성)을,
죄측에 미 제1기병사단(현풍-왜관)을 대구북방에 배치하였다. 제1사단은 7월 31일 미 제25사단의 엄호하에
낙동강을 건너 새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런데 8월 1일 마산이 위협받게 되고 미 제25사단이 그쪽으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미 제25사단의 책임구역을
제1사단이 맡게 되었다.
1사단은 이 때부터 9일간에 걸쳐 낙동강 연안지구 방어전투에서 적 3개 사단과 맞서 적 사살 6,867명, 각종 포 23문,
전차 파괴 10대 등의 전과를 올렸다.
한편 육군은 8월 11일부로 그동안 계획중이던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강변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하였다.
제1사단의 다부동지역은 좌로는 328고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의 횡격실 능선과 우로는 가산, 팔공산에서 뻗은
고지군으로 둘러싸여 대구에 이르는 관문에 해당되는 전술상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1사단은 13일 다부동지역에 집결한 후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하여 제15연대가 328고지일대,
제12연대가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로, 제11연대가 신주막일대의 계획된 진지로 진출하였다.
적도 13일 제3사단 일부병력이 약목일대에서 도하하여 328고지로 공격하고, 제15사단이 국군 제1사단보다
한발 앞서 유학산에 진출하였으며, 제13사단은 도로를 따라 신주막의 제11연대 정면으로 접근하면서
일부병력을 우회시켜 미처 제11연대가 병력을 배치하지 못한 674고지를 선점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의 중앙돌파와 다부동이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대구 정면의 적은 당초 '남한 해방'을 목표한 날인 8월 15일부터 다시 총공격을 재개하였다
국군 제1사단은 제15연대가 328고지를 빼앗기고 뺏는 쟁탈전을 전개중이었고, 제12연대가 유학산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반복하였으며 제11연대도 전차 7대를 앞세운 적 연대규모의 공격을 받아 복곡일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구 방면에서 적의 공세가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인 8월 16일 11:58∼12:24분에 대구전선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출격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일대 5.6×12㎞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적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서 놓여 있었다. 이에 제8군은 사단 병력만으로는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8월 17일 군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으로 투입하였다.
18일 새벽에는 가산에서 침투한 일부의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낙하하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충격으로 이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어 대구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직접 가두에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함으로써 가까스로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와같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군 제1사단은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대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부대와 협조된 공격
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풀이 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트포로 적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
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반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명령에 따라 미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하였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개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그러나 20일 밤 적측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적은 더이상 다부동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음인지
유학산 일대에 전개한 제15사단을 의성방면으로 이동시킨 후 국군 제8사단 정면 영천방면으로 공격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으며, 이로써 적은 제3사단 일부가 수암산 일대에, 제13사단이 유학산 우측면을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소야고개에서본 다부동 일대
국군으로서는 당시 적 제1사단의 위협이 가중되어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다. 이날 야간 특기할 것은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조공을 제11연대로, 주공을 미제27연대 정면으로 지향하여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였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여 적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전차를 추진하여
적에 응사하였다.
다부동 계곡에서 쌍방간에는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불꽃을 튀기었다.
당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의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방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곧장 날아가는 모양이 마치 볼링 공이 맞은 편에 세워진 목표로 핀을 향하여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하였다.
더구나 다음날 오전에 적 제13사단 포병연대장(정복욱 중좌)이 제11연대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고,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곡사포 7문과 76㎜
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지원을 무력화사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끝에 이날밤 최초로 야간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귀순한 포병연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의 갖추면서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또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서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다부동 전투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공세 이전의 계기를 포착하여
다른 유엔군 부대들과 함께 반격작전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소야고개에 도착해서 곰탕 한그릇에 잠시 쉬고 다시 가자니 발길이 안 떨어진다.
그당시 산정으로 실탄과 주먹밥을 나르던 노무자분들도 이랬을까
다시 갑니다.
백운산 일대도 최근에 유해 발굴을 한곳이다.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장현고개에서 유학산 된비알을 치고 오르니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나는것 같고
이곳 유학산 오름길은 황학산에서 버등재로 그리고 장현고개(듬티)로 해서 올라오는 마루금이다.
급경사의 된비알길
국군은 이곳을 힘들게 올랐으며 노무자들역시 실탄을 지게에 지고 급경사길을 올랐을것이다.
좌측은 황학산 우측은 소학산 여기는 유학산 일명 삼학이라는곳이죠.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서-
우리 국군 1사단의 방어 전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전담했던 12연대가 이 유학산에서 혈투를 벌였다.
1950년 8월 17일부터 항공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들은 날이 밝으면 공격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또 공격을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12연대는 적이 먼저 고지에 오른 이 유학산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식의 공세(攻勢)
를 벌여야 했다. 고지를 선점한 적은 우리보다는 훨씬 유리한 지형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유학산 남사면(南斜面)은 매우 가파르다. 그에 비해 적들이 올라오는 북사면(北斜面)은 이보다 훨씬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고지에 오르기 위한 길의 평이함에서도 적은 우리보다 유리했다. 더구나 남쪽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은 8부 능선까지는 비교적 쉬웠지만 그 이상은 험준한 암벽이었다. 몇 안 되는 등산로를 통하더라도 마지막에는
50~70m의 가파른 암벽을 올라야 했다.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고지를 빼앗으려는 12연대 장병의 큰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8월 13일 이후 유학산에서 격전이 벌어지면서 병력 손실이 계속 발생했다.
그를 보충하기 위한 추가 병력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을 올려보내는 일은 통상 밤 10시30분을 지나서 시작, 11시30분
쯤 마쳤다. 새 병력이 도착하면 소대장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서 “내가 소대장 아무개”라고 소개한 뒤
중학교 졸업자 이상인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해 분대장에 임명하는 식으로 공격 진형(陣形)을 갖췄다고 한다.
소대장들은 화랑담배 껍질에 소대원 명단을 적어 간직했다. 소대장은 또 분대 단위로 대원들이 서로 성명을 확인하게
한 뒤 먼저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동이 트면 시작하는 공격에 이들 분대원이 앞장을 섰다. 아침 전투에서 지난밤에
보충된 신병의 80~90%가 사라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의 화랑담배 껍질은,
그러나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설령 없어지지 않더라도 격전에 격전을 거듭했던 소대장의 땀과 피로 얼룩져 전선에서 죽어간 신병들의 이름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무명(無名) 용사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12연대 1대대의 공격 목표는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였다. 그곳에 이를 수 있는 능선은 3~4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지를 눈앞에 두고 멈춰 서게 되는 곳은 70m 이상의 암벽이 버티고 있는 지점이었다. 적으로부터 수류탄이
날아오면 피할 곳도 없었다.
3개 분대씩 일렬 종대로 목표에 다가가다가 적이 수류탄과 박격포로 공격하면 1개 분대가 그 자리에서 희생을 당한다.
그러면 다시 뒤의 분대가 앞으로 나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3개 중대 병력을 모두 합해도 10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병력 손실이 생겨났다.모든 고지가 그랬다. 다부동 싸움의 모든 전장(戰場)도 그랬다.
이런 때에 과감하게 나선 사람이 노무자였다. 병사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노무자들은 조국과 민족, 그들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이들은 깊은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아군이 있는 능선까지 접근해 탄약과 보급품을 날랐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 또한 아주 컸다. 1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유학산 전투의 절반은 노무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다부동의 유학산 전투에서 아군이 결코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에는 1사단 병사들의 시신이 쌓여 갔다. 새로 전쟁터에 투입된 신병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그만 겁부터 집어먹고 주저앉기도 했다. 그들이 흘린 피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물처럼 흘렀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그 피는 하천을 이루는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참혹한 정경이 나의 눈앞, 저 산에서 벌어지고 있
었다. 유학산은 이렇게 내 전우들의 피와 육신을 삼켰다. 그 무덥던 1950년의 여름날, 밤과 낮 구별 없이 벌어지는 전투
의 현장에서 내 부하들은 죽고 또 죽었다. 그러나 내가 있던 사단, 그리고 그 예하의 각 연대에서는 사정없이 ‘고지 탈
환’의 명령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득달같이 진지로 날아오는 공격명령을 받아들고 그들은 싸움터로 향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 명령을 따랐다.
유학산은 학이 노닐던 산이다 깨끗함과 고고함의 상징이던 지명 그래서 그런지 유학산과 더블어 삼학이라는
유학산. 황학산.소학산이 삼각형을 이루며 유학산 인근으로 학상리.학산리.황학리 .학하리라는 마을이
있다
진행하며 남은 빵으로 영령들께 절을 합니다.
후미분들 만나고
또다시 찾아온 밤
팥재에서 국밥으로 저녁을 먹고 식수와 음료수 보충후
다시 갑니다.
어둠은 내리고 후미분들을 위해서 비싼 야광띠 작업을 하고
오르막 내리막 참 많이도 지나온길 숲데미산 (수암산)
수암산 유학산 가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며 국군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곳이다.
이능선은 최후의 저지선인 셈이다.
당시 각 연대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한번은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에서 우리 1사단이
일보를 제출하지 않아 이를 규명하겠다고 현장 확인을 하러 나온 일이 있었다. 중령을 반장으로 한 조사단이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자 사단에서는 15연대 전투 현장으로 안내했다. 행정 규정을 따지는 그들에게 해당 작전지역
대대장은 “직접 가 보시면 안다”고만 말하고 270고지 위로 안내했다.
그런데 고지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자
조사단은 아무 말 없이 되돌아갔다. 그 후로는 육본에서 일보를 제출하라는 독촉이 없었다.
당시 사단의 각 연대에서는 신병이 도착하면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중대에 보충했다.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파악할 새가 없을 정도로 전황이 급박했다. 심지어 중대장과 소대장도 자기 부대의 현재 병력이
몇 명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룻밤 격전을 치르고 나면 총원의 30~40%가 손실되고, 다음날 또 신병으로 교체됐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분대원 얼굴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몰 병사들을 무명용사로 일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숲데미산길을 내려와 마지막 관문인 남등이고개에서 328고지를 정복하는 일만 남았다.
이곳부터 다시 야광디로 작업하며 진행하는데 어느지점에 올라서니 정상정인 산능선이다.
숲이 너무 우거진곳이라 방향감각도 없어진다.
나침판을 살며시 들고보니 동쪽으로 향하고 곳곳이 유해 발굴을 한곳이다.
328고지 전투 12일간 주인이 15번이나 바뀐 328고지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837고지(칠곡 가산 학산리)
탈환전 등 치열한 싸움을 벌인 다부동전투에서 아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적군은 1만7천5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1950년 8월 13일 북한군은 왜관 남쪽 기산면 노석리에서 도하를 시도하고 있던 제3사단 병력을 328고지 쪽으로
돌려 집중 공격하였다.
8월 12일 밤에 국군 제15연대는 연대 지휘소를 매남에 설치하고, 동명에서 부대 정비 중이던 제1대대를 포남리에
위치한 328고지에 배정하고, 154고지를 방어 중이던 제3대대를 반계리에 위치한 270고지에 배정하였다.
국군의 방어선 변경으로 인한 틈을 노려 북한군은 154고지를 차지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다. 8월 14일 1시 무렵 북한군
은 1개 연대 병력으로 북삼면 오평리 (현 북삼읍 오평리) 마진나루터의 수중 가도를 도하하여 328고지로 접근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국군은 고지 후사면으로 철수하였고, 북한군은 인접한 3대대의 270고지까지 점령하였다.
중과부적으로고지를 빼앗긴 제15연대는 3~4시간 교육을 받은 신병을 보충병으로 부대를 재편해 다시 고지를 빼앗는
1진 1퇴의 공방을 24일까지 지속하게 된다.
날이 밝아지자 국군 제1·3대대는 북한군의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역습을 시도하여 오전 8시 무렵 고지를 다시 탈환하고
고지의 전사면7~8부 능선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국군은 낙동강 건너편에서 북한군을 지원하는 집중 포격이 가해지자 포격을 피해 고지의 후사면으로 철수한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국군 제15연대는 철수와 동시에 특공대를 328고지 뒤쪽으로 침투시켜 두었다. 8월 15일 새벽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
는 특공대와 함께 협공해 들어가 제1대대는 328고지, 제3대대는 270고지를 탈환하였다.
오후 4시 무렵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강 건너 언덕의 북한군을 제압하였고, 328고지에는 네이팜탄에 의한 북한군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이날 밤 11시 무렵 국군은 북한군의 재공격을 막다가 제1대대는 망정리로 후퇴하고, 270고지의
제3대대는 465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16일 국군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하였고, 미 공군은 B-29로 북한군에 대한 융단폭격을 가해
북한군의 움직임을 크게 둔화시켰다. 그렇지만 북한군의 공격은 8월 17일에도 계속되었고, 8월 24일까지 피아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8월 23일 국군 제1대대는 미군 105밀리 곡사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면서 다시 역습하여 270고지·328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328고지에는 수습하지 못한 적군과 아군의 시신이 즐비했으며 전투 중에는 시신
을 방패삼아 적과 교전을 하기도 했다.
8월 24일 새벽 국군 제1·3대대는 여세를 몰아 154고지를 협공하자 북한군이 154고지를 버리고 369고지로 도주하였다.
북한군에서 서울을 점령한 공을 찬양받아‘서울사단’이라 불리던 북한군 제3사단은 제15연대에 의해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328고지 전투는 고지의 정상이 15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극히 치열하였다. 적 제3사단은 기간 중의 전투에서
미 공군의 부단한 공중 폭격과 그리고 아군의 포격 하에서 328고지를 점령하고자 끈덕진 공격을 거의 일과와 같이 반복
하였으나 도리어 막대한 손실만을 입게 되어 그 사기는 급하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적은 제15사단이 영천 쪽으로 전진함으로써 전선이 넓어지고 보급의 지연과 탄약 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지속된 공격행동을 못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적의 자랑이었던 전차도 미공군에 의하여 거의 파괴되었고 아군의 장비한 3.5인치 로케트포에 여지없이
파괴됨으로써 전차지원 없는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반면 아군 제15연대는 2주일에 걸친 이른바 328고지전투에서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투와 육박전을 통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 끝에 이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비록 인적 손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아군 전선내의 요지를 담당하여 인접부대와 긴밀한 협조 하에 임무수행을
완전히 끝 마치고 8월 30일부터 기동을 시작한 결과, 이날 5시에 대구, 하양을 거쳐 9시에 신덕동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12일간 15번이나 주인이 바뀐 328고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된곳이죠
이제 하산이다 길고 길었던 호국산행의 길
핏빛 낙동강 동부 산악지대 180km
올해는 이렇게 끝나지만 내년을 또 다시 기약해본다.
왜관 철교에서 마지막을 고하며
이번 산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분들 감사드리고
날머리에서 늦게까지 기다려주신 매화누님.짱이님.훈아님 후사님 고맙구요
새벽에 집에 오니 큰녀석이 자기가 먹던 어린이 감기약이라며 한숟갈 떠 먹여 줍니다.
약먹고 푹쉬라고 ..
단순하게 걷는 산행에서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한 호국산행길
우리가 걸은길에는 수많은 군군이 피를 흘리며 전사한곳이니
다음주 왜관 지역 호국산행길 31km에도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들녀석은 잘 크죠.
올해 부족한 부분은 차츰 준비해서 내년에도 진행해야 호국산길을 더 알릴것 같습니다.
가을날 억새 푸른날 신불이나 천황에서 우연히 한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더운날씨에 먼길다녀오시느라 고생많이 하셨읍니다.
클럽 산행이란게 평범한 산행을 벗어나니 항상 뭔가 특별한 이벤트가 준비되어야 재미가 있죠
항상 지켜봐 주시고 마음에 드는게 있으면 오시길 바랄게요^^
글 감사합니다.
몸도 안좋은 상태에서 그 먼길을 완주하심은 아마도 책임감이 젤 크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자료정리에 답사에 애 많이 쓰셨고, 무더위에 완주도 축하드립니다.
중산리 계곡 맑은물에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호국길에 임했건만 감기란녀석을 달고 와서 고생 좀했죠
내일 지리 태극 잘 다녀 오시고 좋은그림 많이 담아오세요
단순산행이 아닌 역사의 현장에서 의미를 새기며 행하는 산행 새로움입니다
참여하신 모든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쟁의 비극 너무나 많은 분들이 희생되어 그길을 걷는동안 마음잉 숙연해 지더군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가족과 함께 가까운 전쟁 기념관으로 한번 가보세요
그리고 글 남겨 주셔어 감사합니다.
방장님 호국산행 후기 읽으면서 가슴이 찡하네요~~~내년에는 함께하고 싶습니다. 수고하셨구요 좀 쉬세요~~~~
작년에 설악에서 뵙고 이렇게 글을 남겨 주셔어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정기산행에 한번 오셔야죠^^
상세한 戰史資料와 사전답사와 감기걸린 몸으로 완주하신다고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다부동 전투에서 한국전 최초의 전차전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았네요...
업무하면서 틈틈이 산행기와 전사를 읽는다고 오후시간 잘 보냈습니다.ㅎㅎㅎ
이번산행길에 많은 도움 주셔어 감사드립니다.
영덕 대대 작전장교님과 몇번 통화 끝에 이른새벽임에도 철조망 옆 초병의 아무런 제지없이 통과 했습니다.
불이 환하게 켜진 군부대 옆길...
내년에는 찾아가서 호국산행을 좀 알려야 할것 같더군요
글 감사합니다.
먼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함께 하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네요.
무대뽀님 내년에도 호국산행 추진하니 오시길 바라구요
울산지부에 많은힘 보태 주시길 바랍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산행 기획부터 답사. 첫 시도에 발걸음을 되돌렸지만 끝끝내 완주해 내셨네요.
전사의 혼이 깃든 이곳에 제삼리의혼도 함께 핏줄처럼 흐르리라 봅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함께 했어야 하는데 많이 송구스럽네요.
조만간 더좋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살면서 이런 종주 한번 해보는 것도 좋겠다 ^^ 그런 종주 코스 입니다.
길이는 아무것도 아니구요 곳곳에 산재해있는 유해 발굴지대
마음아픈 곳이죠
내년에 꼭 오세요
영화를 한편 보는것 같습니다. 호국영웅의 희생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지요.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야할 우리 국민들 입니다. 2주후가 6.25전쟁 61주년 이네요...
올해 61주년이죠.가까운 6.25 전쟁 기념관이라도 찾아 보시면 많은 도움 될것 같구요
지난번 부탁하시것은 다음주에 보내드릴게요^^
항상 안전 산행으로 국립공원 즐기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