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이 재직한 1940년에 경기중 1학년 학생이었던 홍승면洪承勉(1927-1983, 동아일보 편집국장 지냄)에 따르면, 당시 어린 소년들은 김교신이 이른바 ‘불온 인물’이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섭고 엄한 선생님이지만 한편으로는 동경과 존경의 감정이 퍼져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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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이 경기를 떠난 후에도 제자들 사이에 소문은 계속 돌고 있었다. 홍승면은 경기중 2학년 재학 중이던 1941년에 김교신이 개성 송도중학교로 옮겨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3학년이던 1942년에는 김교신이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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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면과 그의 중학생 친구들은 김교신의 투옥을 비통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당시는 “웬만한 분들이 마치 차례라도 정해놓은 듯이 일본 경찰에 잡혀가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젠가는 김교신 선생님의 차례가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혹독한 일제 말기를 거쳐야 했던 10대 후반 사춘기 소년들의 눈에 비친 김교신 선생님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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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면은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5학년에 진급했다. 졸업반이다. 졸업 날짜가 다가오자, 졸업 기념으로 한마디씩 적어달라고 학급에 공책이 돌아오는 일이 몇 건 있었다. 학급 학생들 전원이 돌아가면서 공책 한 권에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남기는 그 시절의 학교 풍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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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면의 차례가 왔다. 다른 급우들은 어떻게 적었을까 궁금해서 바로 앞 장을 젖혀본 홍승면은 그곳에 적혀 있는 N군이 쓴 시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김교신 선생님에 대한 시〉였다.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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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팔목에 있는 상처는 어떻게 된 것이냐고 제자인 시인이 묻는다. 그러면 선생님은 겨레를 사랑하시려고 했다가 수갑에 차였을 때의 상처라고 대답하신다. 다시 제자는 선생님의 가슴에 있는 흉터는 어찌 된 흉터냐고 묻는다. 선생님께서는 나라를 사랑하시려고 했다가 묶였을 때의 흉터라고 대답하신다. 다시 제자는 등에 있는 핏자국은 어찌 된 핏자국이냐고 묻는다. 다시 선생님께서 그것은 주를 위해, 인류를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하시려고 했다가 매를 맞은 핏자국이라고 대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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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쓴 ‘N군’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광복 후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을까 궁금해진다. 이 시는 경기 학생들이 한 학기만 가르치고 떠난 김교신을 잊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 깊이 흠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홍승면은 그것을 ‘처참한 시’라고 불렀다. 이 시에는 "스승의 고난을 슬퍼하는 제자의 통곡이 들려오고 몸부림이 보이는 한편, 김교신 선생님의 강철 같은 의지와 불꽃을 뿜는 신념이 역력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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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면은 교실에서 공책을 뒤적거리다가 “N군의 시를 읽고는 압도되어 연필을 떨어뜨리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라고 술회한다. 소년의 눈에 비친 ‘김교신 선생님’은 조국과 인류와 그리스도를 위해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는 ‘순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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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교신을 ‘순교자’로 본 것은 이 소년만이 아니었다. 김교신의 신앙 동지 송두용은 김교신을 ‘한국 무교회 기독교 신자로서 최초의 순교자’라고 평가한다. 한국에 무교회적인 복음의 종자를 뿌리고 가꾸는 일을 떠맡은 개척자와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송두용은 김교신이 “규모는 적을지 모르나 그 정신과 태도에서 초대 기독교를 건설한 사도 바울에 견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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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교신을 순교자로 바라본 것은 주관적인 느낌이자 평가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들의 감정 과잉, 또는 스승에 대한 과도한 존경심의 표출이라고 냉소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교신의 주변인들이 그를 ‘순교자’로 생각할 만큼 안타까운 마음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