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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시대 "내일이 허락되지 않은, 폭력에 기대다" | ||||
조센징들은 악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절망의 시대를 말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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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조센징들은 악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쓰여진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은 미래가 없던 당시의 지식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비슷한 시기 쓰여진 이무영의 소설 '두훈시'에서도 직업도 없이 며칠을 굶은 끝에 무전취식을 하고 마는 비루한 지식인의 삶을 보여준다. 이들 두 사람이 결국 친일로 돌아서게 된 것도 그같은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개화되었다고 많은 젊은이들이 신문물을 배우고자 어렵게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심지어 멀리 외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배우고 나면 길이 열리던, 최소한 그렇게 믿어왔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들 지식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의 경제는 거의 일본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조선출신의 고급인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장 역시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조선말 전국에 2만여 곳에 이르던 서당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미 있는 학교에조차 아이를 보내기를 꺼리는 배움에 대한 환멸로 이어지고 있었다. 머리에 먹물이 들면 제 밥벌이 못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해도 미래는 없었다.
더구나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전통적인 전호제가 부정되면서 농민의 다수를 이루던 소작농의 지위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었다. 경작권은 보장되지 않았고, 경작권을 잃을 수 있다는 현실적 위협 아래 소작료는 생계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조선의 값싼 쌀을 필요로 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입장과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지주계급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대부분의 농민들은 더욱 곤궁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피폐해진 농촌의 삶을 견디지 못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났지만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도시에도 이들을 받아들일만한 산업 자체가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쉽게 범죄의 유혹에 넘어갔다. 70년대 이전 폭력에 대한 대중의 관대한 시각은 그러한 현실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먹고 살 길이 안 보이니 보다 쉬운 다른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그것을 밑천삼아 어떻게든 거친 세상과 맞서보려 한다. 어차피 그들을 옥죄고 있는 법이란 원래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남의 나라 법일 터였다. 자기 법도 아닌 남의 법인데 그것을 여긴들 무슨 큰 대수겠는가. 물론 그 가운데는 진짜 악당들도 있어 낭만시대에 역동성을 불어넣는다. 태생부터 악당들과 어쩔 수 없이 범죄에 손을 댄 협객 사이의 대결은 그 자체로 드라마가 된다. 전형적인 낭만주먹의 이야기였다.
가진 것도 없다. 배운 것도 없다. 가진 건 그야말로 몸뚱이 하나 뿐이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병든 여동생까지 책임져야만 한다. 신정태(아역 곽동연)가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현대사회라면 최소한 의무교육은 마쳤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한 국가와 사회의 배려에 기대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법이 있고 많은 제도가 있다. 기관들도 많다. 단체들도 많다. 여전히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꿈도 꾸어 볼 수 있고, 희망도 가져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신정태가 살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현실이란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
"사람이요 고뿔 때문에 죽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감기에 걸려서도 사람이 죽는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지쳐서 죽고, 병에 걸렸어도 치료할 방법이 없어 죽는다. 동생을 치료하려면 10만원의 돈이 필요하다. 벌목장에서 하루 일해서 버는 돈이 1원이다. 하기는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고통이나마 줄여주자고 제 손으로 산목숨을 끊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뉴스를 탄다. 그럴 수 없으니 몸이 부서져라 인력거도 끌었던 것이다. 강에 나가 얼마 안하는 물고기를 잡는다. 할 수만 있다면 밀수꾼의 지게꾼이라도 하고 싶다. 밀수는 범죄이니 가담해서는 안된다. 아직 희망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풍차(조달환 분) 역시 밀수해서 번 돈으로 고아원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
희망이 없는 시대다. 미래가 죽어있던 시대다. 무엇도 자기가 결정할 수 없었다. 조선인은 자신에 대해 무엇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지식인들은 절망했고, 많은 민중들은 차라리 체념했다. 주먹으로라도 밥 벌어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선악의 구분이 없다.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다. 자기의 목숨마저 가볍게 내던진다. 30미터 높이의 철교에서 뛰어내리는데 주저함은 있지만 두려움은 없다. 현실은 철교보다 더 무섭다. 공포보다 더 절박한 한 가닥 희망을 쫓는다. 살기 위해서.
어째서 주인공 신정태는 폭력의 세계에 몸담게 되었는가. 차라리 일국회의 음모보다 그쪽이 더 관심이 간다. 폭력에 의지해 피투성이가 되어 살아가는 신정태의 모습이야 말로 당시의 수많은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아니 지금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절망보다 지독한 체념에 짓눌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삶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빛이 비추지 않으면 차라리 어둠에 의지한다. 민중을 착취하는 것은 같은 조선인 폭력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라도 의지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폭력이 친숙하다. 폭력에 익숙하다. 고운 나이의 어린 소녀 가야(아역 주다영)조차 아무렇지 않게 밀수를 사주하고 거래에 나선다.
멋스럽지 않은 것이 좋다. 거창한 명분 따위 없다. 주절거리며 늘어놓는 개똥철학도 없다. 삶이 곧 이유다. 살아가는 현실이 곧 모든 것이다. 싸우는 장면 역시 그래서 더렵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흙바닥을 뒹군다. 결국 두들겨맞는다. 일국회의 신이치(조동혁 분)의 싸움은 그에 비하면 훨씬 깔끔하다. 두 사람이 사는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벼린 칼날이 아니다. 사나운 개다. 지킬 것이 있는 절박한 들개의 발악이다.
일제강점기 신의주, 도비노리 출신으로 시라소니 이성순이 유명하다. 당대 최고의 주먹으로 손꼽히는 협객의 전설이다. '감격시대'라는 제목도 방학기 화백의 동명 만화에서 가져왔다. 흥미를 더하는 이유다. 아직은 시작이다. 이유들이 하나씩 등장한다. 인상이 깊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