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목 차 >>
1. 도입 - 오온이 '괴로움(苦)'이다.
2. 오 온 ( 五 蘊 )
(1) 오온의 기본적 의미
(2) 오온의 연관관계
3. 불교 유심론 (佛敎 唯心論)
(1) 도입
(2) 유심(唯心)
(3) 유심론과 베단따
(4) 일심(一心)
(5) 유심론과 12연기
(6) 마나스, 알라야, 아마라, 일체심식
4. 고성제(苦聖諦) - 왜 오온이 '괴로움(苦)'인가?
5. '있음(有)'과 '없음(無)'
6. 공공(空空)으로서의 '진속원융(眞俗圓融)'과 '일심(一心)'
마 치 며...
3. 불교 유심론 (佛敎 唯心論)
(5) 유심론과 12연기
'12연기'라는 표현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12연기'가 무엇인지 물으면 설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심지어 불교 서적을 봐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오늘날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12연기를 설명하는 것은 좀 꺼림찍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12연기'라는 표현은 아는데... 그 정도로 대표적인 불법의 기본적인 가르침인데... 왜 설명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가?
12연기... 이게 아주 곤란하다.
12연기라 하지만... 12라는 숫자는 표현상으로는 연기가 아니다. 12연기에 들어간 명사 즉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12개이다.
그리고 연기로 된 표현은... '무명 연 행, 행 연 식, 식 연 명색, 명색 연 육입, 육입 연 촉, 촉 연 수, 수 연 애, 애 연 취, 취 연 유, 유 연 생, 생 연 노사'의 11개이다.
게다가... '무명 연 행'으로 시작해서는 '생 연 노사'로 끝나 버린다. 상식적으로 불법은 무시무종을 말하기에 원견이라 한다. 그런데 '무명 연 행'으로 시작해서 '생 연 노사'로 끝나 버리니... 이상하지 않은가? 소위 말하는 '단견'으로만 보인다. 불법은 윤회를 말한다고 하는데... 도대체가 12연기에는 윤회와 관련한 말이 없다.
또 왜 12연기가 그러한 순서로 되어 있을까?
'12연기'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견해로... 이전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소위 '삼세양중인과적 해석'이 있다.
'삼세양중인과적 해석'은 12연기가 '전생, 현생, 내생'의 삼생(삼세)를 설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뭐 지금 그 견해를 자세히 소개할 생각은 없다. 잘못된 견해라는 말이 많고... 그에 관해 궁금하면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읽어 보면 상당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골격만 간단히 말하면... 위의 12가지 명사 중... '무명, 행'은 전생... '식'부터 '유'까지는 현생... '생, 노사'는 내생... 이라는 견해이다. 특히 현생에 해당하는 것 중... '식'부터 '수'까지는 전생의 것을 현재 받고 있는 것이고... '애'부터 '유'까지는 현생에서 짓는 것으로 내생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어쨌건 '삼세양중인과적 해석'으로 위의 이상한 점 중 최소한 윤회에 관한 의문은 해소할 수 있다.
그럼... 개인적으로 '어리석음의 연기'라고도 자주 표현하는 12연기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
개인적으로 이는 요가체험과 관련해 이해하는 것이 제일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요가를 하다 보면... 무상삼매 혹은 무상정등각 즉 '없음'에 이른다. 하지만 '있음'이 '없음'이 되기에 연속성이 없다. 따라서 '이른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없음'을 알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없음'이란 '없음'의 상태에 있을 때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행자에게 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행자는 '없음'일 때 '없음'인지 알 수가 없다. 행자가 없기 때문이다.
'없음'에서 '있음'이 드러나는 체험은 다음과 같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넘어간다고 추측이 가능한 때... 마음을 일으키려면 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마음을 일으킴에 있어 마음을 서서히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잘 관찰해 보면... 행자에겐 뭐라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후 서서히 형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실험을 해 보면... 이때까지는 과정을 역행시킬 수 있다. 즉 다시 '없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형상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그 진행을 멈추거나 속도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때부터는 아주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나'인가? 왜 '없음'이었는데... '있음'이 된다고 해서 '나'인가? 왜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가?
분명한 것은 '나의 있음'은 '나의 없음'이 되었다가 '나의 있음'이 된다는 사실이다. 왜 그냥 '없음'이 '나의 없음'으로 변했는가? 간단하다. 언제나 '나'로만 돌아 오니까...
따라서 정확하게 무상삼매를 표현하자면... 그것은 '나의 없음(無我)'이라고 해야 한다.
어쨌건 이러한 과정의 관찰은... 12연기의 매 과정을 세세하게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분명 12연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의도적 수행을 통한 체험이기에 다소 불완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음을 일으키려면 일으킬 수 있는 상태가 '무명'에 준한다. 마음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식'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과 서서히 형상들이 일어나는 것은 '명색(오온)'에 해당한다. 그 다음 진행은 결국 형상이 구체화 된 다음인데... 이에 대해선 통제를 할 수 없어 관찰을 하지 못해 알 수가 없다. 여러 차례를 노력해 보았으나 도저히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결과적으로 '나'가 있다는 사실에서... 역으로 추론해 나갈 수는 있다. '없음'에서 '나'가 있다(생). 그런데 관찰하지 못한 어떠한 '나'의 구체적인 있음(유)이 있었을 것이다. 명색에서 언제나 '나'로만 돌아오니까 '나의 구체적인 있음'은 취해졌음(취:집착)에 틀림없다. 왜 집착이 있었는가? 어떠한 갈애(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애는 느낌(수)에서 온다. 그런데 느낌은 감각기관과 무엇이 접촉(촉)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 '촉'이 있으려면 감각기관(육입)이 먼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결국 위에서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명색' 다음이 '육입'이어야 한다. 이는 논리적 추론과정이다.
체험과 논리적 추론을 합치면 바로 12연기이다. 이와 같이 12연기가 그러한 순서를 취하고 있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cf. 위에서 '무명'에 준한다고 말한 이유는 ... 요가행자와는 달리 일반적으론 무조건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조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무명'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하여 '무명'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음 글에서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결국 12연기는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나'가 '나'를 찾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원을 만들어 준다. 따라서 '단견'이 아니다. 윤회를 설명할 수 있다.
<없음→있음→없음>
하지만 '없음'이 있기에 순환은 아니다. 불연속적인 순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일체 자성이 없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동양의 역 즉 음양에서 말하는 순환관은 불법에 없다. 순환관은 자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 언제나 '나'로만 돌아 오므로 보다 엄밀히 적으면 다음과 같다.
< ... →나의 없음→나의 있음→나의 없음→나의 있음→ ... >
이를 윤회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나의 없음'과 같은 것을 '조건지어진 없음(無)'이라고 칭해 왔다.
위와 같이 표현된다는 의미는 '나의 있음'과 '나의 없음'이 모두 '나'라는 것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생기거나 멸해지는가? '생'하고 '멸'한다 이름하지만... 실제는 생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불생불멸'이라 한다.
'나'와 '대상'이 본질적으로 다를 것인가? 불법에서는 그러한 차별을 말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차별을 했다면 인도에서 '다르마'라고 이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르마'란 현상계와 소위 궁극을 통합하여 드러내는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불생불멸'일 것이다. 이것이 중도 즉 '공'이며... 있음과 없음의 차별상을 여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불자이고 신심만 제대로 가지고 있다면... '없음'을 체험하게 되면 즉각적으로 '불생불멸'의 의미를 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없음'과 '나의 있음'을 알지만... '나의 없음'에서는 분명 일체만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본질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일체만물과 다른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오온의 연관관계에서 프라크리티를 언급하며 했던 설명을 상기해 보라)... 일체만물 역시 그러하리라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를 하여 신심을 낸 자는 '없음'을 체험한 자와 똑 같다. 그래서 불법이 공덕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위에서 논의한 낮은 의미의 '일심' 즉 '진속원융'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하고 납득하여 굳건한 신심을 일으킬 수 있으면 된다. 굳이 '없음'을 체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전혀 무용한 노력이다. 다음 글에서 왜 그러한 것이 무용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어느 정도 했나 알기 위해... 잠깐 무시무종이라는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는 불생불멸과 사실 같은 뜻 즉 중도이고 또한 같은 논리로 설명이 된다.
흔히 불법에선 '무명' 즉 '어리석음'은 '무시(시작이 없다)'라 하고 있다. 위의 12연기에서 '무명'은 처음에 나온다. 이는 시작이 있는가? 도대체 '무명'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이상의 논의를 이해한 사람은 머리속에서 답이 바로 나와야만 한다.
어떤가?
아래를 읽지 않아도 답이 바로 나오는가?
...
...
...
...
...
나름의 답을 찾았으면 이제 설명을 해 보자.
'시작이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은 불법에서 '잘못된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이 잘못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전에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듯이 불법에 따르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물어야만 옳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시작의 유무'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이미 자성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 보자. '시작'을 묻는 것은 원인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없음'에서 '나의 있음'으로 변했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는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어리석음의 연기'라 이름할 것이 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의 시작 즉 원인은 무엇인가? 없다. 그래서 '무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없음'은 어리석음의 연기에서 마지막 '생 연 노사'의 결과인가? 아니다. 있는 것의 결과가 어떻게 없는 것이 될 수가 있는가?
지금 원인과 결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원인과 결과는 어떠한 의미인가? '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보론 - 인과'에서 말한 의미의 인과 즉 원인과 결과이다.
퍼뜩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위의 글을 다시 읽어 보길 바란다.
그런데... '나의 없음'이 또 변해서 '나의 있음' 즉 어리석음의 연기가 다시 드러난다. 끝이 있는가? 없다.
그래서 '무시무종'이다.
현재까지의 과정에서 '생 연 노사'의 의미를 좀 더 알아보자.
ⓐ 위에서 찰나적으로 명멸한다고 했으니... 일반적 의미에서의 태어남과 죽음은 포함하지 않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생 연 노사'는 일반적의미에서의 태어남과 죽음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를 설명하는 방식은 두가지가 가능한데...
첫번째는, 죽음은 다른 법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일반적 의미에서의 '죽음'은 위의 과정에서 '나의 없음'이라 이름할 수 있겠지만... '나의 없음'의 내용은 아주 크게 변할 수 있다. '나의 없음'에서는 일체의 그 무엇도 없지만 즉 '오온'은 없지만 마음이 일어남에 따르는 방식이 변하기 때문에... '나의 없음'을 조건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나의 없음'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없음'의 내용이 변한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죽음은 중생에게 있어 아주 큰 사건이라... 중생의 자성적 집착에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주는 사건일 것임은 자명하다. 그래서 육도윤회라는 말이 있다.
두번째는, 연기의 의미와 관계한 것이다. 이는 나중에 설명한다.
ⓑ 위에서는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나'라고 하였으나 '생각'이나 '느낌'등도 실제는 위의 과정을 거쳐서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생 연 노사'는 '일체 제법'의 생멸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별도의 언급없이도 위에서 진속원융을 말했으므로 이해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까지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차별상이 강하고 언어의 상(표현된 방식이나 의미등)에 붙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미 있는 '나'가 수행하는 활동은 모두 다 12연기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점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제 12연기가 왜 유심론의 단원안에 있는가를 설명해 보자.
불법에 익숙하신 분은 이미 추측하리라 보는데... 12연기는 바로 식의 형성의 과정이자 '나'와 '일체 만물'의 형성과정이기 때문이다.
유식철학의 여러 개념은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있는 표현을 바탕으로 이미 있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나는... 중관은 오온을 중심으로 세워진 체계인 반면... 유식은 12연기를 중심으로 세어진 체계라고 생각한다. 즉 중관은 고성제에서... 유식은 무아의 교의에서 나온 것이란 뜻이다. 이는 발생과정을 보아도 납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중관은 허문 것인 반면... 유식은 세운 것이다. 중관은 고성제의 오온조차 '공'하다고 말했고... 유식은 그러한 중관의 다소 허무적일 수 있는 시각을 '무아의 교의'를 드러내는 12연기를 통해 '나'를 세웠다.
이것이 불법의 파사현정이다. 불법은 '머무르지 않음'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럼 다시 12연기 자체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연기로 묶여 있는 11개의 표현은 다 각각이다. 하지만 11개가 동시에 있을 수도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나의 없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나의 없음'이란 '아예 없음'은 아니다. '말 그대로 없음' 혹은 '있는 그대로 없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복되어 설명될 것이니 지금 이해가 되지 않아도 별 문제는 없다.
어쨌건 11개의 표현이 동시에 있는 상태를 한번 보자.
무명 연 행 , 행 연 식 , 식 연 명색 , 명색 연 육입 , 육입 연 촉 , 촉 연 수 , 수 연 애 , 애 연 취, 취 연 유 , 유 연 생 , 생 연 노사 .
위에서 '무명 연 행'의 '무명'이 유심론에서 무엇으로 나타날 것 같은가? 바로 '알라야'이다. 왜 무명이 알라야 인가?
대답을 하기 전에 한가지를 반문해 보자. 만약 '식'이 없다면 도대체 '행'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식온'과 연기하지 않으면 '행'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무명'은 '식온'의 일종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초적인 '식온'에 붙어 있는 이름은 무엇인가? 바로 '알라야'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점은 유식학은 '무명'을 알라야의 특성으로 꼽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마나스'라고 이름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나는 '알라야'라고 했는가?
위에서 '식온'은 집합이고 '식'이 서로 연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식'이 서로 연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가 서로를 감지한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지할 때 어떠한 현상이 생길 것 같은가? 서로가 서로를 하나의 존재로 받아 들인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는 어떤가? 서로가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는 서로가 함께 있고 함께 없을 뿐인데... 즉 '공'한데('중생이 왜곡하는 불교 3 - 공' 참조)... 그렇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이는 '없음' 때문이다. 함께 없어지고 함께 다시 있게 되기에 '없음'을 식온은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있음'에서 '없음'으로 다시 '있음'으로 변했을 때... 첫번째의 있음과 두번째의 있음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없음'이 되었는데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감지하다 없음이 되었다 다시 서로가 서로를 감지한다. 이는 식온에게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없음'은 '조건지어진 없음(無)'라 이름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하여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념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감지하는 식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나스이다.
그렇다면 '무명' 즉 '어리석음'은 원칙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알라야'이다.
이해가 될 것이다.
마나스는 위와 같은 작용이 일으키는 것을 감지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마나스는 알라야를 대상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바로 '무명'을 감지하는 식의 이름이 마나스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나스는 상주견과 끊임없이 연기하게 된다. 이를 유식에서는 '항심사량'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마나스는 상주견과 끊임없이 연기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마나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마나스'라고 이름하는 식이 있을 수 있다. 마나스는... 스스로가 스로이기 위해... 스스로가 있기 위해... 그러한 속성을 지닌 식온의 부분집합을 이름하는 것이다.
불법은 하나도 억지가 없다. 불법은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구성된다. 왜 그런가? 신심은 감성적 이끌림과 함께 이성적인 납득까지 요구하는 것임을 불법을 말하는 사람이 안다. 그러니 그런 것이다. 온 몸으로 수용할 수 있어도 신심은 나약하다. 그러니 온몸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불법을 말하는 자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말을 넘어 있다'는 소리는 불법을 말하는 자가 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 말을 하는 자는 이미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선언이며... 스스로 불법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그따위 말로 '권위'같은 것을 드러내려는 사람이 많다. 나의 입장에서 그런 사람들은 쓰레기들이다. 그런 자들은 침묵해야지... 불법을 설명하면 안된다. 스스로가 불법을 온전하게 드러내어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불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현재엔 노력해야할 자들이 '말을 넘어 있다'는둥 하면서 너무나 말이 많다.
앎은 체험이상이다. 지식과 체험은 깊이에서 우열이 가려지는 것이지... 지식이라서 혹은 체험이라서 어떠한 절대적 비교우위를 가지는 일따위는 불법에선 없다.
바른 불자는 스스로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질문을 한다. '말을 넘어 있다'는 말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한다. 자신이 무엇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지 무엇을 분명하게 살피고 있지 못한지... 스스로가 스스로를 늘 돌본다. 그것이 불자이다.
'말을 넘어 있다'는 방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법에의 취작을 막아 준다. 그래서 불자가 스스로를 파사현정하게 한다. 그 어떤 언설을 넘어 있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 아니다. 그 어떤 언설을 넘어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자기 권위를 세우라고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바른 불자... 무엇이 바른가?
늘 사람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이는... 불상을 흉내내는 사람이 바른 불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부처님도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를 그리워 하셨다. 불상은 부처가 아니다.
불자는 그런 것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바른 신심이 그런 것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제대로된 불자는 스스로 바르다. 그리고 스스로 바르지 않음을 안다. 불자는 그러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 그 전에... 위와 같은 논지와 무관해 보이는 말들을 계속 하는 이유가 있다. 실제 불법에 관한 글의 목적이 바로 위의 내용이다. 신심...을 떠나 그 어떤 불법도 말해지지 않는다.
이제 연기로 표현된 것이 11개 뿐임에도 12연기라 이름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2개의 명사 그것은 어떠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집합이다. 원소들이 서로 연기하는 집합인 것이다.
그러나 집합의 이름을 사용하였기에 12연기이다.
이상에서 12연기를 처음 시작하며 곤란하다고 했던 것들에 대한 대답이 모두 이루어졌다.
논의를 좀 더 계속 해 나가자.
위에서 알라야는 식의 집합이며.... 마나스는 상주견과 끊임없이 연기하며 알라야를 대상으로 하는 의미까지 살펴 보았다.
마나스는 집합이 아닌가?' 아니다. 마나스도 집합이다. 유식에선 알라야만 실체성을 인정한다고 유심에 대한 논의에서 밝힌 바가 있다.
마나스는 그 자체가 어떠한 실체가 아니다. 알라야의 원소인 식들이 서로 연기하는 과정에서 식의 특성상 상호간을 감지하며 상호간을 감지하기에 상주견이 파생된다고 하였다.(cf. 이러한 과정이 마음의 작용 즉 심소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주견을 감지하는 식이 마나스라고 하였다. 이는 알라야의 가현이다. 이것이 유식의 설명이다. 이를 어리석음이라고 이름한다. 어리석음은 알라야의 입장에서도 '무시'이다. 하지만 알라야가 있기에 어리석음이 있다. 동시에 알라야의 원소들이 서로 연기할 때 '없음'은 감지하지 못하기에 그러한 것이다. 결국 '없음'이 어리석음의 원인이라 해야 하는데... 위에서 말했듯 없는 것이 어떻게 있는 것의 원인이 되겠는가?
원인이 없는 것이니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알라야의 원소 개개의 것이 모두 불생불멸이다. 그러니 일체 자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게 유심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가현은 끊임없이 가현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꿈속의 꿈이 꿈이기 위해 스스로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유심론에서 말하는 현상계이다.
그렇다면 12연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꿈 즉 가현이다. 결국 12연기의 '식'은 마나스이다. 그리고 마나스는 스스로를 보다 깊은 꿈속으로 촉수를 넓혀 나간다. 스스로가 스스로이기 위해서...
왜 그런가? 알라야는 불생불멸의 원소로 구성되며... 그 자체로는 어떠한 작용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나스는 상주견을 확고하기 위해 대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게 된다. 그리하여... 육식을 뻗쳐 나가는 것이다.
사람은 꿈을 꾼다고 한다. 꿈을 꿀 때... 어떠한 reality를 만나며.... 꿈이 깨고 나서 꿈을 말한다. 마치 본 것과 같이...
하지만 꿈을 꿀 때... 안식이 작용을 하고 있는가? 무엇으로 그 장면을 보았는가?
나는 꿈을 꾼 자가 꿈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 경탄에 잠긴다.
심식이 스스로 만들어 낸 나머지 오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실제와 같은 기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억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네 삶을 보라...
기적이 넘쳐 난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산다.
불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기적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태연하게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기적을 누구나 다 행하니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상에서 12연기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나는 학자가 아니니 불법을 왜곡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인의 의견을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펼 수 있다.
사실 엄밀하게 유식철학에 맞추지는 않았고... 그럴 의사도 없다. 유심론은 중국등지로 전래 되면서 그 자체로 발전하였고 수 많은 이론이 더해졌다. 그러니 불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틀린 유심론이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글을 적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유심론의 이론은 오직 딱 한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다.
바로 '신심'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불법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신심을 낼 수 있게 한다면 이론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전에도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글을 쓴 나도 똑같이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바른 앎이 있다면... 바른 불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바른 한도 내에서 말이다...
첫댓글 출근!
퇴근! ^^
출퇴근이 참 빠르시네요. 난 이곳에 오면 퇴근을 못하는데...일 한 흔적이 없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사실...옳고 그른 것은 별로 없어요... 이해의 차원인 경우가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