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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원류
시의 기본 정조를 중심으로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서울여대 명예교수)
1. 한국문학의 특질
(1) 내용적 측면
국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한국문학의 특질에 대한 논의가 일찍이 시작되었다. 한국문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원류를 모색하는 작업이어서 주로 문학의 내용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논의가 전개되었다.
도남(陶南) 조윤제(1904~1976)는 국문학개설(1955)의 4장에 「국문학의 특질」 항목을 설정하여 자신의 견해를 본격적으로 밝혔다. 그는 ‘은근과 끈기’, ‘애처로움과 가냘픔’ ‘두어라와 노새’ 등 세 항목으로 나누어 국문학의 특질을 설명했다. 이 중 ‘은근과 끈기’ 부분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 널리 전파되었다. ‘애처로움과 가냘픔’은 애상의 정서를 거론한 것이고, ‘두어라와 노새’는 체념과 흥취의 측면을 말한 것이다.
조지훈(1920~1968)은 「멋의 연구」(한국인과 문학사상, 1964)에서 한국문학의 특질로 ‘아름다움, 고움, 멋’을 들고 그 중 ‘멋’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는 멋을 세분하여 형태미, 표현미, 정신미로 나누어 설명했고, 표현미에 속하는 풍류와 조화를 강조했으며, 정신미로 한국적 휴머니즘을 거론했다. 그러나 멋의 표출이 형태, 표현, 정신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므로 실제 서술에서는 범주가 혼란을 일으켰다.
조동일(1939~ )은 탈춤과 판소리, 민요 등의 연구를 통해 해학과 풍자, 한과 신명을 거론하여 논의의 폭을 넓혔고, 서대석(1942~ )은 구비문학으로 외연을 확장하여 고대의 무속 축전에서 ‘흥과 신명’을 문화의 원류로 끌어냈다.
(2) 형태적 측면
형태적 측면에서 한국문학의 기본 구조를 고찰하는 작업은 한글 운문의 율격 특성을 검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글 표기 문학은 3음보나 4음보의 율격을 보이는데, 음보 설정의 규칙이 엄격하지 않고 한 음보를 이루는 규칙도 자유롭다. 리듬과 율격의 자유로운 변형이 가능하다. 요컨대 한 음보에 들어가는 음절 수가 일정하지 않고 음보도 3음보와 4음보가 혼용을 이룬다.
대표적인 정형 양식이 시조인데 시조를 연구한 학자들이 시조의 형식을 정형이면서 비정형이라고 설명했다.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 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전후 분절의 형식은 변함없이 유지했다. 그래서 시조의 형식을 3장 12구보다 3장 6구로 잡는 것이 실제에 맞는다.
천만 리 / 머나먼 길에 // 고운 님 / 여의옵고
내 마음 / 둘 데 없어 // 냇가에 / 앉아이다
저 물도 / 내 안 같아야 // 울어 밤길 / 예놋다
왕방연(1457년, 금부도사)
차라리 / 절망을 배워 // 바위 앞에 / 섰습니다
무수한 / 주름살 위에 // 비가 오고 /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 세월이 아픈가 // 또 하나 / 금이 갑니다
이호우(1912~1970), 「바위 앞에서」
위의 시조들은 3장 6구 또는 3장 12구로 분절과 율독이 가능하다. 한 음보 안에 배치된 음절의 수는 일정하지 않고, 그 자유로움은 현대시조에 오면 더 두드러진다. 다음 시조는 더 자유로운 형식의 특징을 보인다.
일찍이 / 천 길 불길을 // 터뜨려도 / 보았도다
끓는 가슴을 / 달래어 // 자듯이 / 이 날을 견딤은
언젠가 / 있을 그날을 믿어 // 함부로ㅎ지 / 못함일레
이호우, 「휴화산」
3장 12구로 분절을 하려면 어디서 나눌지 곤란한 부분이 있다. 3장 6구로 분절해 읽으면 그러한 어려움이 해소된다.
민요는 3음보가 많은데, 전통적으로 계승된 한글 표기 운문은 4음보가 중심을 이루고 하나의 시행은 전후 두 마디로 분절되는 형식적 특징을 보인다. 이 특성은 현대시의 국면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계승되어 있다.
2. 고대 시가의 기본 정조 - 임에 대한 그리움과 애상의 정조
한국문학이 막을 여는 고대 초창기에 문헌에 등장하는 시가에서 한국문학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가 전한다. 유리왕 3년(기원전 17년)에 지었다고 연대가 제시되어 있다. 내용인즉슨, 유리왕에게 고구려계 왕비 화희와 중국계 왕비 치희가 있었는데 두 여자가 다투어 치희가 화를 내고 친정 쪽으로 돌아갔고, 유리왕이 뒤를 쫓았으나 치희를 잡지 못하고 돌아오다 자기 마음을 노래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펄펄 나는 꾀꼬리 / 암수가 서로 어울리네
생각하니 나는 외로워 /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자신의 고독에 대한 자각과 임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연 대상을 끌어와 표현했다. 유리왕의 작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노래가 유리왕 서사에 끼어들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다음에 등장한 노래는 「공후인(공무도하가)」이다. 이 노래는 3세기 중국 문헌 최표의 「고금주」 등에 전하고, 19세기 초 실학자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강가 나루터 뱃사공 곽리자고가 목격한 사건으로, 한 백수광부(白首狂夫)가 술병을 들고 강으로 달려들고 그의 아내가 그것을 만류했는데 광부는 강에 들어가 죽고 그 아내도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후 강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말하자 여옥은 비감해하며 공후를 연주하며 그 노래를 불렀다.
임에게 물을 건너지 말랬는데 /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 어찌 하리오, 임이여.
여기서 물은 죽음의 강으로 나타난다. 그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강은 건넌 두 사람은 죽음의 세계로 갔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은 아내에게 사연을 노래하고 아내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이 노래에도 임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의 감정이 담겨 있다.
요컨대 기록에 남은 두 노래의 공통점이 임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자신의 고독에 대한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조의 특징이 그다음 시대에 어떻게 계승되는지 살펴보겠다.
3. 향가의 기본 정조
신라 향가의 정제된 형식은 8구체와 10구체다. 8구체 향가 「모죽지랑가」는 32대 효소왕(692~702) 때 득오곡이 지은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죽지랑이라는 화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지나간 봄 그리매 / 아니 계시어 울음 울 이 시름
아름다움 나타내던 모습이 /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눈의 돌아봄 없이 /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임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 다북쑥 구렁에 잘 밤 있으리.
아름다운 임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분의 정신이 계승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여 임에 대한 그리움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고대 시가의 정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10구체 향가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지은 작품이다. 35대 경덕왕 19년(760년) 월명사가 해가 두 개 나타난 괴변을 없애기 위해 「도솔가」를 지었는데, 그 월명사가 이보다 앞서 「제망매가」라는 뛰어난 노래를 지었다고 기록했다. 향가 중 가장 서정성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생사의 길은 / 여기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고 말도 / 못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서 /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겠다.
누이의 사별에 대한 안타까움과 재회를 기약하는 종교적 기원이 주제를 이룬다. 이것도 크게 보면 임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임에 대한 그리움이 주제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35대 경덕왕 24년(765년)에 충담사가 현실에 도움이 되는 노래 「안민가」를 지었다. 그가 전에 지었다는 훌륭한 노래가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다. 「제망매가」와 더불어 향가의 백미로 꼽힌다.
열치매 나타나 밝게 비친 달이 / 흰 구름 따라 떠가는 것 아닌가.
모래가 펼쳐진 물가에 /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냇가 조약돌에서 임이 지니시던 / 마음의 끝을 따라가고자 한다.
아아 잣 가지처럼 높아 / 서리 모를 화랑이여.
이 향가의 주제 역시 임에 대한 그리움,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신라 향가도 고대 시가의 기본 정조를 이어받아 유사한 서정적 태도와 정조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가요의 기본 정조
고려가요의 첫 장을 장식하는 작품은 「정과정곡」이다. 이 작품은 정서(鄭敍)의 작품인데, 정서는 의종 5년(1151년)에 귀양 가서 20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이 작품은 1156년경 창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유교문화권에서 유행한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의 한국판 효시에 해당한다.
임 그리워 울고 있으니 /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합니다.
사실이 아니고 거짓인 것을 / 잔월효성이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과 함께 가고 싶어라, / 우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과실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 헐뜯는 말이었습니다.
애가 탑니다, 아아 / 임이 나를 벌써 잊으신 것입니까?
아소 임이시여 / 돌려 들으시고 사랑해 주십시오.
이 시의 주제는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주장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임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고독, 임과의 만남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다. 이러한 정서는 충신연군지사에 상투적으로 나오는 전형적 요소다. 정조 면에서 보면 고대 시가와 향가의 정조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소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폄하된 고려가요에는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이 더 많이 표현되었는데 그중 중요한 작품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 임과 나와 얼어 죽을망정
정을 준 오늘 밤 /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넋이라도 임과 함께 / 살아가고자 여겼더니
우기던 사람이 / 누구였습니까, 누구였습니까?
남산에 자리 보아 / 옥산을 베고 누어
금수산 이불 안에 / 사향 각시를 안아 누워
약(藥) 든 가슴을 / 맞추었습니다, 맞추었습니다.
「만전춘 별사」 1, 3, 5연
격렬한 사랑과 임에 대한 강한 그리움의 감정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사각사각 잔모래 벼랑에 / 구운 밤 다섯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고서야 /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무쇠로 큰 소를 지어다가 / 쇠 나무 산(철수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로 된 풀(철초)을 먹어야 /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정석가」 2, 5, 6연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임에 대한 영원무궁의 사랑이 이별 후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럭저럭 하여 / 낮일랑 지내 왔건만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일랑 / 또 어찌할 것인가.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 맞아서 우노라.
가다가 가다가 듣노라 / 어디론가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서 / 해금을 켜는 것을 듣노라.
「청산별곡」 4, 5, 7연
자아의 고독, 인간사의 애증, 인간 세상의 모순을 표현한 수준 높은 노래다. 서정의 저변에 이상적 상태(임)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잃은 안타까움, 탄식의 정조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요가 다소 자유로운 형식과 주제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도 고대 시가와 향가의 정조가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 시조와 가사의 기본 정조
조선 조에 크게 유행한 시조에는 순정하게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도 있지만, 많은 시조에 ‘충신연군지사’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했다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1506?~1567?)
사랑이 거짓말이 / 임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뵌단 말이 / 긔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 아니 오면 / 어느 꿈에 뵈오리
김상용(1561~1637)
김상용의 시조는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읊은 작품으로도 충분히 해석된다. 그러나 김상용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위상을 알게 되면 충신연군지사로 해석하게 된다.
충신연군지사의 주제를 담은 대표적인 가사가 송강(松江) 정철(1536~1593)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다. 이 두 작품은 선조 20년(1587년)경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 이전에 쓴 「관동별곡」(1580년)에도 충신연군의 감정이 상투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소양강에 내리는 물이 어디로 든다는 말인가?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도 하도 할샤.
철원에서 밤을 새워 북관정에 올라가니
삼각산 제일봉(第一峯)이 잘하면 보이겠구나.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에 내리는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한강의 남산에 대고 싶도다.
「관동별곡」 출발 부분, 동해 삼척 도착 부분
동풍이 건듯 불어 쌓은 눈을 헤쳐 내니,
창밖에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었구나.
가뜩이나 냉담한데 그윽한 향은 무슨 일인고.
황혼의 달이 쫓아와 베갯머리에 비치니,
흐느끼는 듯 반기는 듯 임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꺾어 내어 임 계신 데 보내고 싶구나.
임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꼬.
하룻밤 서리 김에 기러기 울며 갈 적에
높은 누각에 혼자 올라 수정발을 걷어내니,
동산의 달이 뜨고 북극의 별이 보이니
임이신가 아니신가 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
맑은 빛을 쥐어 내어 궁궐에 부치고 싶다.
누각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 다 비추어,
깊은 산골도 대낮같이 만드소서.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깐만 생각 말아 이 시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꿰쳤으니,
명의가 열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이야 이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사미인곡」 춘사, 추사, 결사
이처럼 조선 시대의 시조와 가사에도 임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의 안타까움, 재회의 기다림에 대한 정서가 뚜렷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 볼 때 자아의 고독, 임에 대한 그리움, 이별의 안타까움 등의 정조가 한국문학 서정 양식의 중요한 특질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6. 근대 이후 시의 기본 정조
한국 근대시는 국가 상실의 비운과 함께 출발했다. 그러한 시대의 여건상 어쩔 수 없이 계몽, 애족, 우국, 저항, 환멸, 우울, 비탄 등이 주제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국 상실의 슬픔은 임을 상실한 슬픔으로 대치되었다. 1920년대의 많은 시는 임을 잃은 슬픔과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서가 집약된다. 자아의 고독, 임에 대한 그리움, 이별의 안타까움 등 한국문학의 기본 정조는 물 만난 고기처럼 1920년대 시에 백 프로 활성화되었다.
1920년대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등의 시는 한국 시의 기본 정조를 이어받아 그것을 자신의 방향으로 발전시킨 양식이다. 1930년대 정지용, 김영랑, 김기림, 오장환, 이용악, 백석 등에 오면 이러한 정조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데 이것은 서구 문학의 영향으로 한국 시의 기본 정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확대된 결과다. 다음과 같은 시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되,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다. 한국시의 새로운 영토가 개간된 사례다. 이후 한국시는 과거의 기본 정조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자유롭게 발전해 갔다. 그러나 전후 분절의 형태적 특징은 상당 부분 은밀하게 지속되었다.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정지용 「호수 1」 전문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여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 「바다」
문 기슭에 바다 해 자를 까꾸로 붙인 집
산뜻한 청삿자리 위에서 찌륵찌륵
우는 전복 회를 먹어 한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하늑이는
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
허리도리가 굵어 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한다
백석, 「삼호(三湖)」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서정주, 「귀촉도」
이 시편에 나타난 보고 싶은 마음의 상태는 과거 시의 기본 정조와 상당히 다르다. 시인의 개성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창의성이 발현된 결과다. 그러나 시행 구성의 내면에 전후 분절의 형식적 특징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음을 알아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전후 분절 형태를 추출해 볼 수 있다.
바닷가에 왔더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 고기비늘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여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 섧기만 하구려
문 기슭에 바다 해 자를 / 까꾸로 붙인 집
산뜻한 청삿자리 위에서 / 찌륵찌륵 우는 전복 회를 먹어
한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 하늑이는 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
허리도리가 굵어 가는 / 한 사람을 연연해한다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걸 슬픈 사연의 /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 호을로 가신 님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