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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간 이하석
3분간
씻은 그릇을 헹구는데, 누가 죽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젼을 덮는 비애 속
장의 행렬이 서서히 나아간다. 거룩한
죽음인 모양이다. 행주로 그릇들을 닦아
찬장에 챙기면서 그녀는 한 죽음이 장엄한 장식으로
아늑한 빛으로 덮이는 것을 힐끗 본다.
어린이 프로는 막 끝난 듯, 아들은 과자를 물고
안델센을 읽고, 그녀는 탁자 가에 묻은 도마도
캐찹을 닦아내면서 09 : 03의 숫자 아래서 아나운서가
하염없이 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나른히
본다. 된장그릇을 찬장 속 간장종지 곁에 조심스럽게 놓을 때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칼을 수돗물에 씻으며 보니
죽은 이의 딸이다. 09 : 04의 숫자가 그 여자의 풍성한
검은 머리칼 위로 찍힌다. 아들이 안델센을
놓고 밖으로 나간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그녀는 숟가락들을 물에서 건져내어 마른 행주로
닦으면서, 장의차를 장식한 것이 국화… 국화, 꽃, 사이로
아이가 뛰어… 아니… 현관문을 지나 아들이, 뛰어가는 것을
본다. 09 : 05의 숫자가 전신주가 팔을 벌린
시가지 위로 장의 행렬을 멀리한 채 찍힌다.
아나운서의 소리들이 시끄럽게 텔레비젼 아래로
떨어져 재떨이에 쌓이고, 그녀는 남은 물을 하수구에
붓는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텔레비젼
채널을 돌린다. 때맞춰 요리 강좌의 자막이
국화 꽃꽂이 위로 흐른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MADE IN U.S.A 이하석
MADE IN U.S.A
이슬 투명한 물방울의 아침
빈, 얇은, 명료한 차가움 속으로
돌들과 쇠들 산그림자들 비쳐든다.
깡통 곁 허물어진 흙들에 볼 비비며
달개비꽃 벙그는 한때. 휴지 속에 구겨진 채
여자 노랑머리칼엔 달개비꽃 꽂혀
낡은, 흙 묻은 글씨로 날아가는 상표.
불꽃도 깡통 태우고 찬란히 하늘 날아가 버렸다.
빈 몸만 남아 재 끌어모을 때 싸늘한 녹슨 쇠의
고즈넉한 성이 하나
달개비꽃 밑으로 허물어지고.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이하석
가랑비야, 한국시를 찬양하라
가랑비가 끝장난 길 위에 내린다.
주머니 속에 접어 넣어둔 시 쓴 종이를
감춘 손으로 한 번 더 구긴다.
감춘 시를 써왔구나, 나는.
부패한 물들이 하수구로 흘러들고
나의 그림자가 그 위를 맴돌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사람들은 우울하게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서 있다.
붉은 블록 조각들 처참하게 깔린 길 위로
전경들과 대학생들 뒤엉켜 피흘리고 흩어진 다음,
버스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문득 제각기 갈 길이 바빠지고
가랑비가 그 위에 내린다.
모든 길이 비에 젖어
젖지 않은 종이가 없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가야산 이하석
가야산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얼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 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뭇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강변 유원지 1 이하석
강변 유원지 1
강물에 반쯤 몸 담그고, 사이다 병은
주둥이 속으로 속의 작고 깊은 하늘을
내보인다. 햇빛 속에서, 병 속의 물과
강물은 같이 썩는다. 물결이 뜨거운 모래를 적시며
기어올라 깡통 하나를 물 밖으로 밀어낸다.
붉은 녹물을 흘리며, 깡통에는 몇 개의 이즈러진
글자와 숫자가 지워지고 있다. 사랑의
표시일까, 그것을 이젠 해독할 수 없다.
엉겅퀴꽃 그늘에 숨어들던 눈을 치뜨고
여자는 발로 모래를 헤집으면서,
강가에 선 남자의 맨발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남자 양말 구겨져 던져진 모래밭 위,
여자의 그림자가 짧게 흔들린다. 햇빛 속에서
남자의 발 밑에서 강물은 뒤척인다. 아지
랭이로 뜨거움은 피어오르고.
대여섯 명의 남녀의 웃음이 어우러져
피어오르는 술집. 탁자 밑으로 구두와 하이힐은
부딪치고 여자들의 스타킹은 구겨진다.
소주와 사이다와 콜라 사이를 지글대며
솟아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연기 속으로 마릴린
몬로의 젖은 거대한 입술이 보인다. 낙서로 얼룩진
입술은 찢어져, 그 구멍 속으로 먼지 낀 유리창 밖
두 남녀가 모래의 아지랭이 속에서 흔들리며
맨발로 만나는 것이 보인다. 그들의 가슴을 지나
싸구려 여인숙이 보이고, 강물의 더러운 깊이 속,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혼곤한 신음 소리가
들린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고추잠자리 이하석
고추잠자리&
그가 날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여린, 모든 설명과 죄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그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났다고.
이 턱없는, 아슬아슬한,
사랑이 실은 나의 힘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미세하게 얽어짜인 미궁들을 비켜서
그만이 아는 미로의 해답을 더듬어서
그가 내게 왔다.
그 길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길
그를 붙잡으려고 볼펜을 놓다가 밀린 서류를 챙기느라 나는 또 깜빡 빠져든다. 아침에 샤워한 등이 에어콘 기운에 닿아 무감각해진다.
그는 붉은 섬광처럼
내 서류 위에 날개 그늘을 드리운 다음
찬바람에 떠밀려 방음의 천정을 휘젓다가
창밖으로 날아가 버린다.
누가 문을 연 실수를 범했나보다.
누가 투덜대며 문을 닫는 소리에 바깥에서 침입하던 소리들이 끊겨, 나는 잠시 멍한 적막 속에 빠져든다.
내 주위에서 몇 사람이 황급히 서류 속에 몸을 숨기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먼저 그를 본 이들임을 알겠다. 그들은 창밖의 가볍고 투명한 날개의 침입자들을 잠시나마 은밀히 지켜보았겠지.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문 닫기 전에 빠져나갔고
그래, 그는 내게 왔다가, 문득, 가버렸다.
그는 잘 돌아갔을까
왔던 길을 되짚어서
실바람처럼
그가 간 길을 나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타이피스트 김양은, 지난 주말에 산에 갔다가
폭우를 만나 숲에서 허둥댔는데
그것들이 나뭇잎 뒤에 실바람처럼
붙어 있더라고 말한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교통사고 이하석
교통사고
차가, 달려온다. 그의 몸은, 멈칫,
솟구치고, 순간, 모든 시선을 팽개치며,
내동댕이쳐진다. 그의 팔은 꺾이고,
찢어진 채, 나부끼는 옷조각들, 화학섬유 가벼이
무늬를 흩이며 난다. 급한 브레이크로
뜨겁게 정지한 채 멍해진 바퀴 밑,
몇 개의 돌들은 튀어오르며, 긴장된
그의 가슴을 쥐어박는다. 젠장, 신, 세, 조졌군, 하고
운전수가 투덜거릴 때, 그의 구두는 황급히
하수구로 뛰어들고, 그의 반짝이는
단추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급히
차들을 세운다. 그의 주민등록증은 무표정한
얼굴 하나를 경찰관의 발 앞에, 내동댕이
친다. 경찰관은 갑자기 분노해서, 그를 노려보면서,
차를 걷어찬다. 부서진 유리창 속에 경찰관의
얼굴이 어둡게 비친다. 사람들은, 웅성대며,
그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유리창을 떠나 부서졌고,
경찰관은 호각을 불어,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그의 피는 부서진 차의 기름과
녹물에 엉기면서, 고즈넉히, 또는 급히,
땅 속으로 스며든다, 경찰관도 그도
아무도 모르게.
그가 실려서 어디론가 떠난 후,
도로 인부는 그의 피부터 흙으로 덮는다.
크레인으로 들어올려져 차도 떠나고,
사람들도 흩어진 후, 비로소 인부는 담배를 피워 물며,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길에서
주운 몇 개의 단추는 먼지와 흙을 닦은 후
얼른 주머니에 챙긴다. 하수구에서 주운
두 쪽의 구두를 인부는 제 신과 바꿔
신는다. 푸른 유리조각이 인부의 빗자루에 쓸려
길가 풀덤불 속에 버려질 때,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핏물이 유리에 묻어 급히 흙속으로
숨는다. 향기로운 풀잎 그윽한 오월의 정오를
인부는 나른히 그 곳을 곧 떠나간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기지촌 이하석
기지촌
공군 기지의 꿩들과 참새들은 숲속에 숨어서
지저귄다, 숲 위 하늘엔 인간들의 무수한 길들이
누워 있고. 나무들이 낮게 엎드린 사이로
활주로도 길게 예리한 굉음의 길로 누워 있다.
잔디의 발뿌리가 닿지 못하는
흰 페인트 길에 번쩍이는 햇빛.
폭탄을 적재한 비행기들은 정확하게
하늘 길을 안다. 하느님도 연들이 가는 꿈나라도 없이
하늘은 높고 푸르다고, 기지촌 아이들은
모형 비행기 놀이 속에서 느낀다.
꿩 울음 소리로 봄이 와서 아이들의 신발에 닿아
잔디의 발뿌리가 또 근지럽다.
꿩을 찾아 숲속에 들어간 아이들은 잡초 속 꿩의 길에 누워 있는 타이어 조각과 병 조각들 빈 깡통 무더기 속에 부서진 거울 한 쪽이 떨어져 흙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아이가 쓱 손가락으로 먼지를 닦으니, 거울 속 아이의 손가락이 지나간 쪽으로 비행기도 길도 없는 하늘이 한 쪽 문득 푸르게 비쳐 왔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김씨의 옆 얼굴 이하석
김씨의 옆 얼굴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얼룩져
그의 얼굴은 어둡고 술 취한 듯하다.
육교 밑으로 휴지를 쓸어갈 때
발 밑을 구르는 신문지 조각을
때로 주워 읽는다. 길 가, 인도와 차도를 가로지른
철제 난간에 앉아, 그는 먼지 속처럼 아득히
버마 사건의 그 후와 최근의 학원 사태를 느낀다.
그것들은 그의 코 언저리를 붉게 하고
깊은 줄이 패인 이마를 불룩거리게 한다.
청소가 끝날 때 쯤, 그의 귀 언저리 털에서
이 거리의 마지막 먼지가 부스스 떨어진다.
중앙로의 오늘 그가 맡은 구간은 은사시나무 길,
비와 바람과 불빛과 사람들이 자주 흐르는.
50이 넘어서면서 자꾸 허리가 결리고,
그의 목뼈를 주먹으로 자주 두드린다.
신문엔 안 났지만, 레이건이 중공을 방문하기 직전에 그랬을 것처럼,
때로 그는 자, 신나는 일이 있을 꺼야 하고 중얼거린다.
그걸 위해 그의 눈길이 자식들의 얼굴처럼 생긴
노변의 햇수박 쪽으로도 자주 간다.
은사시나뭇잎 그늘이 거기에도 얼룩져 있다.
육교 옆, 미도 백화점의 셔터가 올라가자
큰 유리창에 이내 김씨의 빈 얼굴이 비친다.
때로 밝게 때로 어둡게 때로 앞 모습만
그 숙인 얼굴이 하루종일 유리창에
맑은 유리창 속 아름다운 온갖 상품들 위에
비친다. 밤 11시 철제 셔터가 내려진 후에도
그의 얼굴이 철제 셔터의 위에 완강하게
비친다. 어둡게 또는 새하얗게. 헌 신문지 같은,
또는 은사시나뭇잎 같은, 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철제 셔터 같은 얼굴이 거기에 있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깡통 1 이하석
깡통 1
풀숲 빈 깡통들은 모여서 흩어지면서,
쉬 녹슬어 버리는 자신들과 헤어지려고 애쓰면서,
스스로 무거워지는 몸을 스스로 자꾸만 비우면서,
자신들이 누운 곳을 언제나 빈 터로
만들어 버린다, 봄 오는 연탄재 더미 속
연탄재를 또 한 번 부서뜨려 놓으면서.
풀꿈의 고통 속 초록은 무성해지고
깡통 속 그 그늘들은 드리워진다.
달개비꽃 피는 양지쪽으로 뻗는 풀의 발가락 황홀할 때
깡통들은 달개비의 햇빛을 날카로운 이빨로 벗겨 놓으면서
더욱 무거워지는 몸을 또 몇 번이나 비운다.
아름답다고말해줄까달개비야
내가벼운몸뿐으로는
네이름도그이상의무엇도감당할수없군
몸뿐이라는 깡통의 말에 달개비는 수줍게
웃는다, 깡통을 벗어나려는 고통 뒤에 스스로의 몸을
감추면서. 깡통들은 은연중 그 수줍음에 걸려
투명해져 버린다, 무게가 없는 몸을 풀의 고통 위에 띄우며.
웃지마라달개비야네수줍음뒤켠의더깊은어둠에비쳐내몸이나타나는구나내몸은앙상하구나그러나저어둠을욕해선안된다달개비야인간인저어둠에비쳐우리는나타나는것우리는어차피인간의편이지만지금은시들어버려진몸그러나너는수줍음만끝내보일뿐우리를받아주지않고지금은우리들만으로떠돌뿐인몸들을자꾸비워낼뿐
지금은이라는 자신의 말에 깡통은 수그러지며
쭈그러든다. 지금은 쭈그러들 뿐이야,
깊숙하고 더욱 차가운 쪽으로 빠져들며,
모든 것을 제 자신이 헐어 버리며,
팽개쳐진 몸의 마음도 팽개치면서.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나른한 현장 이하석
나른한 현장
분홍빛 스타킹이. 한 켤레. 구겨진 채
길게 놓여 있다. 초록의 융단 위에.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떠오를 듯.
검은 숄이 그 밑에 놓이고. 따스한 기운 속
그녀의 연약한 목덜미의 기억을 드러낸다.
스타킹의 발치에는. 마루 바닥에 누운 여자의
벌거벗은 하체를 찍은 흑백 사진이 한 장.
던져져 있다. 사타구니의 검은 숲은
늘 스타킹 속 장미 팬티 안에서 젖어 있던.
그녀의 가랑이의 어둠을 보여 준다. 그 아래
흑갈색의 무늬 아로새겨진 빗이. 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것. 그러나 이것들
속에 그녀는 없다. 이 정물의 풍경 속. 나른한
초록의 융단 위에 그녀는 찍히지 않았다.
그녀는 이것들을 다 벗어 놓고
어디로 갔나?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날아 오르는 명태 이하석
날아 오르는 명태
□ 1
말라 비틀린 희푸른 몸 솟구치며
검푸른 또는 청회색 머금은
붉은 기운 감도는 현암 속을
어둠의 불기운 속을
날아 오릅니다.
바람의 칼날에 날카롭게 조각된 흰 구름의 가로
펼쳐진 깊푸른 어둠의 바다가 보입니다.
□ 2
창은 명태의 눈알처럼
하늘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려놓은 명태의 눈알처럼
녹차의 연두빛 물에 푸르스럼한 하늘이 빛납니다. 침대 주위에 쌓아둔 화구들에 기댄 기름 먹은 풋잠이 깹니다. 대낮인가 봅니다. 밖이 부드러이 환하니 봄인지도 모르죠. 녹차 잔을 의자에 내려놓고 일어나 벽에 마른 명태들과 함께 걸린 바지를 걷어 내려서 다리를 찔러 넣습니다. 세 마리의 명태들은 한껏 벌려진 입이 실에 꿰여서 철사옷걸이에 매달린 채 벽에 걸려 대롱거립니다. 명태의 휘부연 아가미 주위에는 푸른 좀이 슬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장엘 나가지 않아서 새것으로 바꾸지 못했지요. 바지 끝단이 헤어져, 명태들로부터 좀들이 건너와 헤쳐놓은 것이나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제는 밤 늦게 명태를 그리는 작업을 했고, 새벽에도 깨어나 홀로 캔버스에 청황빛 하늘을 입혔습니다. 이젠 잠시 쉬러 들에나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늘 그렇듯이, 아파트를 나서면 역이 나오고, 역 앞 나무도 없는 정류장에서 5분쯤 흐린 하늘을 보고 있으면 하양이나 월배행 시내버스가 오겠지요.
□ 3
들에 나가면 고분 발굴 광경을 볼 때도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구멍을 파고 들락거립니다. 때로 이런 광경도 보이지요. 무덤 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흰 담배연기가 가늘게 피어 오릅니다.
때때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보기도 하지요. 어둡고 습기 찬 돌방 속에는 천년 동안 먼지가 쌓여 검푸른 토기와 청동 말안장을 덮고 있습니다. 구석구석에 낀 어둠을 살피노라면 문득 발 밑에 무엇이 꿈틀하니 밟히는 걸 느낍니다. 조심스레 손으로 잡아 올려보면 그것은 푸른 먼지 또는 도마뱀의 꼬리 같습니다.
시간은 도마뱀같은 걸까요,
잡았다고 느낀 순간 본체는 사라져 버리고
그 꼬리만을 남기는.
그래, 들에 갔다 온 직후에는 잠깐동안이나마 그려놓은 명태의 몸에 생기가 느껴집니다. 사나왔던 시절을 가두어 지나와 헐렁해진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화폭 앞에 서면, 명태들은 추운 바다 빛 눈망울을 부신 듯 부릅뜹니다. 들의 흙속에 옛 사람들의 방이 있듯 화가의 방 안엔 명태의 하늘이 무수히 날아 오릅니다.
□ 4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의 삶은 실패했네.
일방적인 평가지요. 누가 날 안단 말예요.
평생을 썩은 나무등걸만 구해와서 깎는 사람의 숲을 나는 압니다.
평생을 통만 만드는 이의 하늘을 나는 압니다.
평생 돌만 모아 귀꽃을 돋치는 이의 땅을 나는 압니다.
그 덧없고 값 없는 짓거리들, 하며 당신들은 비웃겠지요.
나는 스스로의 일 속에 나를 몰아넣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습니다. 그것도 생산이라고
나는 그걸로 가족들을 먹이고 화구들을 샀지요.
나는 스스로의 삶만을 살았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나를 가둔 건 내가 아니라고도 해야겠지요.
나를 가둔 사람들에게 나는 명태의 하늘을 보여줍니다.
나는 나의 삶을 지킨 거예요.
실패하지 않았어요.
나는 명태를 그리며 그것들을 하늘로 날리며
나를 지켜준 방 속에 잘 있습니다.
거기에도 물론―생각하기에 따라서는―사방으로
검은 하늘과 누런 땅이 있고
그리하여 하늘이며 땅인 자리로
늘 옮겨앉습니다, 하늘과 땅이 맞부딪는 곳으로
패랭이꽃 같은 문이 나 있는.
□ 5
그의 삶은 실패했네
그는 죽음의 문턱에 두 번이나 섰었네
마른 쑥부쟁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발 아래 늘 캄캄한 방을 느꼈네
그는 다만 색깔문제로
붉은 벽 속에 끌려 내려갔네
해방 직후였네 제길할
그들은 그의 화폭 속의 하늘이 붉다며
바른대로 대라고 윽박질렀네
그 후로 붉은 색은 결코 쓰지 않았네
실패한 삶을 살았네
그는 실패한 삶을 살았네
죽은 명태만 그렸네
명태는 한국인만이 식용으로 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이 명태로 말라붙은 걸까
마른 명태는 입 한껏 벌리고 끊임없이 소리치지, 들어봐, 들리진 않을 테지만 비틀린 몸이 짜내는 기막힌 소리가 그 속엔 있지, 고통이든 환희든 명태는 비틀며 소리치지, 하면서
그는 마른 명태만 그렸네
그의 삶은 끝까지 실패했네
그는 노년의 문턱에서 큰 병을 만나
죽음의 방문을 열기까지 했었네
고통으로 입 한껏 벌리고
마른 얼굴의 주름 위로
눈물을 흘렸네 실패의 연속이었네
그 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실패했네
죽음의 문 밖을 나와 비로소
명태를 하늘로 날리기 시작했지만
그의 전시장에서 아내는 허무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네
명태는 끊임없이 날아 오르고
날아 오르는 그 높이만큼 그의 삶은
공허하게 떠올랐네
그래도 그의 명태의 하늘은 불타고 푸르르며
때로 무한의 깊이로 나타났네
□ 6
내가 날린 명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날아 오르지요. 보세요.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삶을 가두어놓은 방이
명태의 하늘로 열리면
방이 곧 하늘입니다.
무덤의 안이 옛 사람들의 별자리인 것처럼.
벽에 걸린 화폭들 속으로 명태들은
푸르고 노란 또는 불타는 붉은 하늘을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오릅니다.
물론 저 아래서도 함성이 폭풍처럼 올라옵니다.
풀잎들이 서로 몸 부비며 떠오르는
또는 부딪침으로써 서로 확장되는 소리일까요?
매일 사람을 자기 위에 세우는 들이
스스로의 속의 무덤을 하늘 쪽으로 보여주기 위해
몸 뒤집는 소리일까요?
재생이 하늘 저 편으로만 열린다면
나는 하늘 저 편으로 명태를 날립니다.
그런다음 나는 새롭게 돌아오는 밀물 가에
또는 바람에 퍼득이며 피는 제비꽃의 들녘에
당당히 서고 싶습니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이하석
냇물 속에 뭔가가 있다
낮이거나 저녁이거나
또는 한밤중이거나
잔주름지는 물의 푸르고 노란
또는 검은 자갈들 비치는 내에
그것은 있다
모래무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큰 머리 주억대며
은백색의 흰 배와 검은 등이 빛나는 몸에
여섯 개의 흐린 무늬가 찍힌, 모래 같은
그 고기는 수염을 떨며 모래 속에 파고들고
때로 모래를 불어 물결에 흘린다
그것은 냇물을 자맥질하면서
거꾸로 선 떡버드나무의 하늘을 휘젓고
그러면서 그게 내겐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것 때문에
냇물은 흐르는 소리 높이거나 낮추고
거꾸로 선 나의 머리 아래로
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죽음일까 까만 물풀일까
내가 한때 한껏 몸 기울인 채 보았던
연꽃의 그 아래의 어둠일까 빛일까
빈 병일지도 모른다
모래에 반쯤 몸을 묻고
양각된 글자와 그림들 물로 모래로 매끈해진
주둥이를 뻥하니 벌린 채
때로 물 아래서 번쩍이는
모래무지가 낸 길이 아른거리는
물결 아래의 모래 위로 나서
모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 어귀에 죽음과 생성의
그늘은 어른거린다
그걸 비켜가지 않으려고 그 길에 내려섰다가
아얏 하고 맨발은 마음보다 먼저 오그라지며
물 밖으로 튕겨 나간다
유리 조각에 찔렸나보다
아니면 내가 찾으려는 그것이
날 밀어낸 것일까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이하석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눈과 코와 입이 보이지 않고
얼굴은 캄캄하게 그늘져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이마 쯤에
달팽이의 더듬이 같은 게 돋아나 있는 듯하다
윤곽만이 외부의 빛을 역광으로 받아
고양이나 곰의 털 같은
머리털과 수염이 드러나 보인다
그는 때때로 뭐라고, 말, 한다
입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어두운 내부에서
소리가 울려나오는 듯 하다
누군가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의 내부에선가 아르렁대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이마에 돋아난 안테나들의 불이 켜지고 꺼진다
근심의 신호인지 기쁨의 표시인지
확인되지 않는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단추 1 이하석
단추 1
열 일곱 개의, 또는 스물 한 개의
단추들이 그녀를 가두었다.
마음도 어항 곁에서 흔들리는
머리칼도 잠그고, 그녀는 검게
고개 숙였다. 누구에게나 검게,
고요하게, 그녀는 문을 닫아걸었다.
남자의 겨드랑이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단추로 바꾸어 달면서
그녀는 하느님에게서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홀로 있다. 밤마다 그녀의 단추는 떨어져 내려
침대 밑을 구르며 문설주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럽다.
그녀는 단추만 보이면 주워선 잽싸게
스스로의 옷에 달았다. 마침내는 성기에까지도
단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언제나 어두운 골목 끝에 서서
그녀는 검게 빛났다. 어느덧 세상의 들판은 어두워졌고
곡식들은 빈 쭉지만을 땅에 떨어뜨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대가천 1 이하석
대가천 1
어떤 구애로 저 아래 불이 저리도 밝은가. 어둠 속에 나를 지우고 서서 밤새도록 깨쳐지지 않는 흔들리는 먼 불을 본다.
바람이 빽빽한 물들의 아래를 쓸며 지나간다. 새벽 자갈밭에서 재처럼 퍼져 한숨 쉬며 또 돌아갈 걱정에 싸인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동물도감 이하석
동물도감
그가 기르던 너구리가 튀었다, 간밤
프라스틱의 쭈그러진 구멍을 통하여. 한때의
그의 집안 내력을 훔쳐서 너구리는 빌딩의 숲을 지나
달아나 버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의 기침 아래로 난 매캐한 수은의 길도 주저않고.
너구리는 무사히 이 도시를 빠져 나갔을까, 젠장, 절망적인
그리움이 그를 저녁이면 문 밖에다 세웠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세일즈맨 박씨는
주위가 허전해졌다. 그가 너구리 따위를 키우려들다니,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그날 밤에 도둑맞은 그의 삶이
그의 출근길을 빠져나가 새로운 길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 버렸다. 그는 동물도감을 낯선 집에 월부로 떠맡기면서
이따금 도시 밖으로 파란 빛깔이 깡충대며 산을 오르는 것을
힐끔거렸다. 제기랄, 지랄 같은 그리움의
봄.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모래알 소리 이하석
모래알 소리
모래 언덕에서 몸을 빼어 빈 깡통은 바다로
굴러내린다, 소금물이 속에 차 올라 물보라 속
헛된 꿈을 게워내면서.
깡통들끼리 모인 골짜기, 바위와 모래뿐인
어슴푸레한 속, 물풀들은 스스로의 발목을 끊으며
달아나고, 소금은 반짝거리며 흩어진다.
낮 동안 수면에도 떠올라 다투던 쇠들
다시 몇 개의 알 수 없는 휴전을 나눠 갖고 잠기고,
깡통들의 모서리 입 다문 조개들의
동리 어귀 물풀들의 뿌리 끝이 분명해진다.
이윽고 깡통 속 모래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바다는 더욱 깊어지고 어두워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못 1 이하석
못 1
우리는 인간의 손들 사이를 빠져나와 많은
거대한 쇠들에서도 멀어졌다, 반짝거리는 침들
끊임없이 무디어지라고 외치면서. 가을 밤,
흙속에서 우리는 자려고 한다, 풀들의 뿌리 밑에
누워서, 붉게 녹슨 몸들을 더욱 안으로
꼬부리면서. 쓰레기 하치장 부근,
활자 날아가 버린 신문지를 끌어 덮으며,
우리도 이미 많은 것들을 날려 보낸 후.
쉬이 잠이 오리라. 빗물에 눕는 풀들 소리 없이
흐느끼고, 밤이 빗물 속에 모든 어둠을 풀어 놓을 때
못들의 잠은 때로 반짝거린다, 흙속에서
자갈 틈서리에서 또는 철교의 침목 곁에서.
빗물에 지워지며 눕는 마음, 껌종이와
타임지와 서양 여자 노랑머리 퇴색한
휴지 속에서 그들의 꿈은 심한 욕지거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못 2 이하석
못 2
그들은 녹슨 몸 속에도 여전히 쇠꼬챙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깃든 어느 곳에서든 부스럭거리며
그들은 긁고 찌른다. 흙속, 헐어 버린 건물 안,
이전해 버린 공장의 빈 터, 폐쇄해 버린 술집의
판자 틈, 버려진 구석 어디에서나
그들은 내팽개쳐진 채, 나무든 흙이든 풀이든
바람이든 강철이든 지나가는 쥐의 발목이든 찌른다.
새로 짓는 건물의 벽에서도 떨어져 흙속에 빠지면서
시멘트 묻은 서까래에 깔리면서 또 하나의 못이
집 밖을 나온다. 하수구를 지나 개울가
자갈밭에 만신창이 몸으로 떠돌다가
그는 침을 숨긴 채 물 밑에 반듯이 눕는다,
흐르는 물을 조금씩 찌르면서,
송어 아가미의 피를 조금씩 긁어내면서,
어느덧 그 자신도 쇠꼬챙이도 조금씩 꼬부라지면서,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밀양강 1 이하석
밀양강 1
인가 쪽을 달래는 강물로 산자락을 깎는 역사가 아프다. 방해와 변형의 마음이 이룬 둑 위에서 자다가 문득 다가서는 낯선 물소리에 꿈은 다급해진다. 나의 전부를 흘려보내고 난 다음 인적 없는 쪽으로 칭얼대는 강.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밖 이하석
밖
문을 열면
어떤 길이 어떤 어두운 밝음이
어떤 미로가
나를 이끌 것인가
나는 내다본다
속에서 어둠의 뇌성은 치고
나가고 싶다
초록의 문을 열고 싶다 나는
또 나가고 싶잖은 마음이 인다
또는 잠시 나가 패랭이나 캐서
화분에 심어보고 싶다
이 위태로운 어질어질함
누가, 바깥에서 문고리를 만진다
…밖에서…누가
내 방의 어두운 창유리를 닦는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버려진 병 이하석
버려진 병
바람 불어 와 신문지와 비닐 조각 날리고
깊은 세계 속에 잠든 먼지 일으켜 놓고
사라진다, 도꼬마리 대궁이 밑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긁히며. 풀들이 감춘 어둠 속
여름은 뜨거운 쇠 무더기에서 되살아 난다.
녹물 흘러, 붉고 푸른, 뜨겁고
고요한 죽음의 그늘 쌓은 채.
목마른 코카콜라 빈 병, 땅에 꽂힌 채
풀과 함께 기울어져 있다, 먼지와 쇠 조각들에 스치며
이지러진 알파벳 흙속에 감추며.
바람 빈 병을 스쳐갈 때
병 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끊임 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휘파람처럼 풀들의 귀를 간지르며.
풀들 흘리는 땀으로 후줄그레한 들판에
바람도 코카콜라 병 근처에서는 목이 마르고.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 와
콜라 병 알아듣지 못할 말 중얼거리며
쓰러진다. 풀들 그 위를 덮고
흙들 그 속을 채워, 병들은 침묵한다,
어느덧 묵묵한 흙무더기로 속을 감추면서.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병 2 이하석
병 2
쥬스, 코카콜라, 사이다, 뜨거운
소주 같은 것들 사람들의 어깨를 넘어서
떠나가 버렸다, 질퍽하게. 미치광이 길을 따라
여름은 발가벗긴 채, 버려진 병의 밑바닥으로
이끌려 왔다. 발가벗긴 채 모든 것은 내동댕이쳐졌다.
병들끼리 부딪치며, 그 소리에 시끄러워하며,
흙들의 어둠 속에 빠지면서, 이제는 누구나 먼지 속
혼음의 골짜기로 굴러 떨어졌다.
우리가누구냐고요?내용이없으니아무것도아니지요뚜껑이필요없는빈병일뿐그냥엎드린채더낮게고개숙이고더깊숙한곳으로몸이나파묻을뿐속은비었지만허전하지않아요우린아무것도아니라니까요
청정한 세계를 담기 위하여 빈 병은 엎질러진다.
엎질러진 다음 냉정해지는 유리. 스스로 버려지면서
병은 더 이상 담을 수 없는 것들만의 세계 쪽으로
주둥이가 빠진다. 고요하다. 남은 빈 병들은 엎질러지며
그들이 둘러싼 세계가 거꾸로 그 자신들을 껴안는 것을
느낀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부서진 활주로 이하석
부서진 활주로
활주로는 군데군데 금이 가, 풀들
솟아오르고, 나무도 없는 넓은 아스팔트에는
흰 페인트로 횡단로 그어져 있다. 구겨진 표지판 밑
그인 화살표 이지러진 채, 무한한 곳
가리키게 놓아 두고.
방독면 부서져 활주로변 풀덤불 속에
누워 있다. 쥐들 그 속 들락거리고
개스처럼 이따금 먼지 덮인다, 완강한 철조망에 싸여
부서진 총기와 방독면은 부패되어 간다.
풀뿌리가 그것들 더듬고 흙속으로 당기며.
타임지와 팔말 담배갑과 은종이들은 바래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고, 철조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한다, 구름처럼
우울한 얼굴을 한 채.
타이어 조각들의 구멍 속으로
하늘은 노오랗다. 마지막 비행기가 문득
끌고 가 버린 하늘.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부재 이하석
부재
장미꽃 화병은 투명하고 장미꽃은
붉은 그늘 속에 모돌씨를 숨긴다. 저 쪽 못가
흰 나무의자에 마주앉은 두 여자. 그 중 한 여자를
기다리며 모돌씨는 붉은 안락의자에 앉아
탁자 위 장미꽃 화병 아래 재떨이 속에
담뱃재를 쌓는다.
재는 쌓이고, 두 여자는 모돌씨를
얘기한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그들은 다툰다. 이건, 그이가 옛날에
내게 보냈던 사랑의 편지예요. 보세요.
난, 안, 봐요. 난, 지금, 그이를, 사랑해, 요. 물이
기슭을 친다. 모돌씨의 손이 탁자를 잘못 건드려
장미화병이 넘어진다. 왈칵, 물이 붉은
융단 위로 쏟아진다. 레지는 웃으면서
괜찮아요 그까짓 것, 꽃의 물을 새로 갈고
탁자를 닦은 후 다시 놓아 준다. 미안, 해요.
햇빛이 떡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쏟아져
흰 나무의자에 어른거린다, 못물은
기슭을 치고.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를, 사랑,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그렇지만, 난,
그이가, 필요, 해요. 무슨 소리예요. 난
그이의 아내예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다신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요?
……알, 았어요. 만나지 않, 겠어요. 갑자기
장미꽃 화병이 모돌씨가 탁자를 잘못 짚는 바람에
흔들하고 엎질러진다. 물이 왈칵, 쏟기고
꽃이 융단 위로 떨어진다. 레지는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와 꽃을 줍고 탁자를 닦으면서, 괜찮아요,
치워드릴까요? 라고 말한다. 치워 주세요, 아예,
없는 게 낫겠어요, 모돌씨는 갑자기 불안해서
소리친다. 치워 버리세요.
저쪽 물가의 흰 나무의자가 비고
이쪽 도심지 다방의 붉은 의자도 빈다. 레지는
이쪽 의자의 탁자의 재떨이를 치운다.
장미꽃 화병이 다시 놓여지고 젊은 남녀가
그 자리에 앉는다. 어서 오세요. 뭘 드릴까요?
레지는 웃는다. 커피? 쥬스?
난 커피. 난,
아무거나.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비무장지대 이하석
비무장지대
시월, 철원평야 가로질러 청둥오리 떼 남으로
날아온다, 철조망에 푸른 그림자 걸려 퍼덕이며.
걸린 그림자 미쳐 못 건진 채 새들 날아가고,
쇠들만 널린 들판, 쇠 조각들 밤마다 일어나
그 그림자들 찢어 놓는다.
이윽고 새들 울음 긴 포물선으로 남은 채
얼어붙는 하늘 밑 들판은 살 비비는 풀들 짓이기며
엎어져 버린다. 한꺼번에 큰 겨울이 오고
포탄의 심지 파고 들며 흙들 속 뻗어 나오던
풀 뿌리들 다리 오그리고, 자욱이 씨앗 날리던
하늘 북풍에 날아가고, 쟁기와 낫 사라진 들판,
철새들 그림자만 어지럽게
널려 마른 풀들이 덮는다.
녹슨 철조망 새로 보수하는
봄. 청둥오리 떼 아득히 가는 북쪽 하늘,
철조망에 걸려 새로 칠한 페인트 묻은 푸른
그림자들 퍼덕거리고, 들판을 기어가는 풀 뿌리 지뢰 밟아,
흙들 싹트는 씨앗 움켜쥔 채
공중으로 흩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비밀 이하석
비밀&
그 나무는 신의 모습으로 서 있었네.
─모든 나무는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해 뜰 무렵 출근길에 인도와 차도 사이, 아슬아슬하게,
나무의 서쪽으로 드리운 그 그림자에
내 그림자의 가슴을 맞추었네.
다른 사람들이 버스가 오나 하고
동쪽으로 목을 뺄 때에,
슬쩍.
그게 `일치'라는 암호를 쓰는
내 비밀이네.
여러분들도 도시인이라 물론 많은 비밀을 가졌을 테지만.
해질 무렵 버스에서 내려
동쪽으로 뻗친 그 나무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몰래 맞추려 했지만,
퇴근 시간이라 사람들이 붐벼
또 뒤섞였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서시 이하석
서시&
우리가 갈 곳을 지우며
안개가 검게 흰 진창 위로 피어
오른다. 먼 데로 도주하는 마음이
돌아보는 밤.
꼭두새벽에 돌아온다.
진 데를 빠져나와 비로소 잠 밖으로 몸을 털 때
우리의 길을 지우는 찬밤의 흰 꼬리가
아침해가 내린 그물에 휘감기는 게 보인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세 사내 이하석
세 사내
대구 변두리, 토지 구획 정리 작업장의 한 구석,
세 사내가 불을 쬐고 있다.
서리의 한 끝, 날카로운 마른 풀들 부서진 길 가에서
판자조각들은 붉은 불길 솟구치며 타오른다.
기침이 한 사내를 폭풍 속 전나무처럼 흐트러놓는다.
또 한 기침은, 자신이 키운 낯익은 둔덕 쪽으로 번지는
불을 발끝으로 지우는 또 한 사내를 빈 깡통처럼 굴린다.
그리고 또 한 사내는 말 없이
분할된 들판길을 건너오는 찬 바람 앞에
고개 수그린다, 불꽃 이글거리는
눈만 차갑게 치켜뜬 채.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순례 1 이하석
순례 1
어디에서든 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어진
세상에는 온통 부러지고 망가진
길들뿐. 기름과 석탄 사이를 걸어서
졸면서 또는 기도하는 몸짓으로
어두운 어깨만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먼지를 덮어 쓴
풀들은 깡통들의 투명한 표정들을 감추고 있고,
바람이 나무둥치를 흔들 때, 나무들
쇠 껴안은 붉은 뿌리에서부터 쓸쓸해지고.
머리에 구름과 모래를 인 사람들이
나무 뿌리들이 감춘 물 속으로 그림자 던지며
지나갔다. 그들은 깡통과 비닐을 비껴 흐르는
길들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기름들을 쏟고
깡통들을 풀밭에 던졌다. 그들은 스스로 흩으러 놓은
것들 때문에 결코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리라.
인간들이 지나간 들판에 버려진 채로
인간을 그리워하는 것들만이 남아
어느덧 신성한 기운에 싸여 갈 뿐.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순례 2 이하석
순례 2
바다 밑 빈 병들 서걱거리는
바위 틈으로도 인간들은 웅성거리며
지나갔다. 모래를 껴안으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병들, 인간들의 말과
몸짓들과 신성을 게워 내며.
미역들은 초록의 몸을 바닷물에 풀어
모든 길들을 인간 쪽으로 열었다. 그 길을 떼지어 걸어
그들은 바다를 열었다, 몇 개의 쇠들을 흘리며
고통과 안식을 꿈꾸며. 말미잘의 동네 어귀
또는 꽃게의 마을 어귀에는 동전과 고무줄과
팬티 천 조각들이 쌓여 숨을 죽인다, 고요히
누구나 차츰 해류에 투명해지며.
인간들의 말들을 풀어 놓고, 말미잘과 꽃게들은
동료의 시체들을 팽개치고 떠날 뿐.
저무는 동네 어귀에 빈 병들과 빈 깡통들이 쌓은
탑 위로 모래는 덮어 온다, 어둠처럼.
탑을 쌓는 것만으로 인간의 길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말미잘들은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어깨를 밀면서 깊은 곳의 신성을 힘겹게 짊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신천 이하석
신천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또는 폭풍우를 숨은 채 꿈꾸며.
물 속 나사의 뜻은 훌러 내린다, 강철과
알미늄과 합성세제에서 떨어져 나가며,
물 공기 시간을 하나로 풀어 놓으면서,
녹물처럼 반란하며, 얼굴 붉히며.
나사에 걸린 물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기 전에
벌써 힘이 빠진다.
풀들과 거머리와 모래들을 비켜서
이윽고 숨죽인 소리로 흐르다
그치는 물.
노란 해 잠자는 물 속 떠도는
나사들 하염없는 밑바닥 꿈꾸며 가라앉고,
들판에 닿기 전에 벌써 힘 빠지는 물.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안 1 이하석
안 1
구석진 내 넋의
차고 빛나는 유리덮개를 닦으면
꿈인가 강 저 편 언덕의 푸른 풀춤이 보인다
사람들이 모여 내지르는 함성의 몸짓일까
강물엔 햇빛 들끓고
끊임없이 흐르며 사방에서 누가
나를 부르고 부르고
그러나 나는 다만 은밀히 내다보며
나의 춤을 휘장 속에 숨기며
또 내다볼 뿐
유리창 안으로
내 말과 춤을 어둠에 문지를 뿐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이하석
애인들은 쪽, 쪽, 소리를 낸다
바다다슬기들은 민물에 삶긴 몸들을
바닷가 플라스틱 함지박에 누인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밤새 바다다슬기들의 꽁무니를
뺀찌로 절단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바다다슬기 한 봉지를 3백 원에 사선
다정하게 마주 보며 먹기 시작한다.
다슬기의 앞쪽을 쪽, 쪽, 소리내어 빨면
다슬기의 속이 살덩이 채로 입 안에 톡, 떨어진다.
여자는 처음엔 부끄러워했지만 이내 요령이 생겨
때로는 쪽, 한 번으로도 다슬기의 몸을
집어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사내는 쪽, 쪽, 소리를 내는 여자를
사랑한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남자는 저쪽, 싸구려 해안 여인숙의 창에 서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쪽, 쪽,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을
본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여자는
승용차를 내려 20대의 타이피스트를 껴안다시피
바다다슬기를 안기는 40대 남자의 살찐 가랑이를
본다.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에 굴리고.
그리고 바다는 끊임없이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2월의 부산 부두는 다슬기의 껍질만
쌓인다. 3백원 또는 6백 원 어치의 껍질들만 남겨 두고
애인들은 가 버리고, 모래 속으로 바다를 느끼면서
껍질들은 구멍뚫린 몸들을 모래로 채운다. 노란
타올을 쓴 아낙네는 껍질들 위에 앉아
옛 애인의 쪽, 쪽, 하던 소리를 물거품 위로
듣는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아낙네는 주름진
입술 사이로 하염없이 쪽, 쪽, 소리를 내며. 바다는
흰 물거품을 모래 위로 굴리고.
바다다슬기를 먹는 자는 누구나 쪽, 쪽,
소리를 내며, 모래 위를 구르는 흰 물거품을
이해한다. 누구든 흰 물거품 속에선 흰 물거품으로 밀리며
2월, 애인들은 어디서든 쪽, 쪽,
소리를 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야외소풍 1 이하석
야외소풍 1
도로표지판의 화살표 방향으로만
달리는 길
도로표지판의 화살표를 따라
불빛 속 벗어나지 않은 채 달리며
나는 화살표가 비켜가는 숲의
캄캄한 안을 힐끗거린다
갑작스레 비치는 헤드라이트에
망연자실해진 나무들 아래
감춰져 있던 흰 길들 소리치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게 보인다
빌딩숲 밑에서 모든 길들로
욕망을 열어두고 잠든 거지처럼
저 숲길로 자못 숨어드는 마음의
화살표는 어디?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야외소풍 2 이하석
야외소풍 2
소나무는 죽는다
도시에서 뻗어나온 길들이 칡넝쿨처럼
감고 올라와 전신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바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칡뿌리를 캐다가 나의 마음이
그 뿌리에 걸려 죽은 나무 베어넘긴 골짝으로
굴러 떨어진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용정 가는 길 이하석
용정 가는 길
들뿐인 구릉 위에 서니
하늘이 넓어
내가 잘 드러난다
광야엔
굉장한 넓이의 침묵이
고요의 굉장함이
날 보고 뭔가를 말하라고
긴장해 있다
숨을 수 없어
`나는 한국인!'이라 소리치니
내 소리가 두 말로 갈라진다
저 아래서, 서로 맞받는 메아리처럼
두 말이 솟구쳐올라
서로 부딪쳐 피 흘린다
돌아보니 마른 수수밭머리에
큰 바람이 먼지를 말아올린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원통리 1 이하석
원통리 1
전쟁은 모든 버려진 것들을 다시 일으키고
내던졌다. 원통리 민둥산의 완만한 능선 밑에
엎드린 흉기를 덮으며 사방으로 뻗는 풀들을 달래는
흙들. 흙들 속에서 때때로 터지는 폭탄들이
풀들의 다리 짜르고, 풀덤불 속 잠자는 토끼의
귀를 찢는, 밤낮으로 쌓인 재들만 날리는 산.
무덤들의 주인들도 혼비백산한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찬비 내려 눈 녹는 오월, 묻혀 있던 쇠들 솟아나
골짜기마다 죽인다 죽인다는 말들만 짙어진다.
병사들이 심심풀이로 잡다 놓친 노루, 쇠들에 걸려
넘어지고, 골짜기 음지에 수줍게 남은 잔설이
노루가 밟은 지뢰에 놀라 흩어진다.
산 아래는 죽인다는 말로만 덮어 오는 신록,
바람도 산등성이를 넘자 살기등등해진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유리 속의 폭풍 이하석
유리 속의 폭풍
구름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면서 전신주를 꺾는다.
흰 기둥들은 꺾인 채 완강하게 서 있고,
전선들은 끊어진 채 전신주와 구름 사이를 토막토막 잇고 있다.
그 아래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가 뭉쳐진 채 솟아오른다.
신호등 아래서, 솟아오르는 은사시나무의 윗가지 너머
푸른 신호등이 건너 편 인도 위로 켜지길 기다린다.
푸르고 노란, 또는 남빛의, 검은 차들은
은사시나무 새로 솟는 윗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만 뒤섞으며
나의 앞을 어지럽게, 어디론가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또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또는 그런 곳들로부터 와선 또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길 건너 온통 거울로 벽을 바른 금융회사 육 층 건물의
거울 속에 비쳐 있어야 한다. 폭풍의 구름 아래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 아래
너무 어두워 이 쪽에선 보이지 않지만
나는 조그만 덩어리로 비쳐 있어야 한다.
구름의 갈기가 뒤섞이면서 전신주가 꺾인다.
심상치 않는 폭풍이 오려나보다.
내가 길을 건너갈 때에도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의 덩어리 아래로
나는 보이지 않고 검기만 한 그 속에
푸른 신호등만이 켜져 있다.
푸른 신호등 아래 은사시나무 가로수와 나는 안 보인다.
다만 빨리 건너가야 할 뿐이다. 건너가서 재빨리
저 유리를 빠져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그 속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눈에 내가 안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휘젓는 폭풍을 그 속에서 보았으니까.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은종이 이하석
은종이
바브민트의 옷을 벗긴 다음 소년은 철조망에 반짝이는 천사를 달아 두었다. 봄이 와서 소년의 주머니 속 뽀빠이가 팔을 올리듯이 천사들의 치맛자락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다시 로보트 태권 V를 철조망에 매달았다. 철조망 안 어두운 몸들을 세운 풀들 위로 로보트 태권 V는 철권을 흔들고 작년의 은종이 천사들이 찢긴 날개로 혼곤한 세상의 봄 속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그 봄을 사랑했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종이놀이 이하석
종이놀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숫타니파아타
1984년 1월, 우리 시쟁이들 몇은 대구에서 소리를 접고 펴는 일을 벌였다. 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명을 받으며 시를 쓰고 고치는 행위를 해 보였다. 나의 시를 사람들에게 읽게 한 후, 고쳐 써선 다시 읽히고 고쳐 썼다. 그건 나의 놀이였을까? 아니면 나를 지켜본 그들의 놀이였을까? 또는 그건 놀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시들은 그 때 그 자리에서 씌어진 것들이다.
□ 1. 소리
종이를 찢는다. 오오하고
종이 찢기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구긴다. 히유하고
종이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유리잔 너머 남자가 노랗게 돌아보고 여자가 분홍 잠옷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를 접는다.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부딪치며 부스럭 소리가 난다. 부스럭거리는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째애앵
찢어진다. 유리잔에 금이 갔나보다.
나는 시를 긋는다. 종이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들린다.
나는 시를 구긴다. 종이로 시를
접는다. 내 시의 종이는 끊임없이 찢기고 접혀지며
부스럭거린다. 시 위로 볼펜 지나가는 소리가
째애앵 난다. 시를 찢으면 히유하고
종이 찢겨지는 소리가 난다. 히유와 오오가 부딪치며
시가 접혀진다. 쫘악, 하고 시는 곧잘
찢어진다.
나는 시를 찢는다. 나는 아무 종이에나
시를 구긴다. 아무것도 아닌
찢김, 아무것도 아닌 구겨짐, 아무것도 아닌
접히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내던짐, 아무것도 아닌
부딪침, 아무것도 아닌 떨어지는 소리.
아무것도 아닌.
□ 2. 시
종이가 하얀, 또는 노란 빛 속에서
펴진다. 내가 들어 있는 빛을 둘러싼 어둠 속엔
숨죽인 백여 명의 어깨들이 있다. 어두운
눈들과 귀들이 있다. 나는 시를 쓴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다. 내 손과 어깨를
보고 있다. 강한 빛 속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어둠 속의 그들을 나는 안다. 나는 시를
쓴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흰 빛의 종이 위에, 어둠으로.
유리잔이 맑게 놓이고,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여자가 분홍 잠옷만으로 걸어나오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이 씌어져 있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이 구겨지며 남자의 어깨와 닿는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이 닿은 채로
쫘악, 찢기는 소리를 낸다. 아름다와 운 삶이 서로 떨어
진다. 찢어지는 소리 멀리, 유리잔이 금 가는
소리가 반짝인다. 나는 시를
쓴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끊임없이 누가 나를 보고 있고, 내가 종이를 접을 때
빛 속에 숨어 있던 그늘 몇 장이 은밀하게 접혀진다.
또는 내가 종이를 찢을 때 몇 개의 어둠은
튄다. 찌직하는 소리가 난다.
종이를 찢을 때 시가 찢기는 소리가 히유, 하고
들린다. 어둠 속에서 흠흠, 기침 소리도 난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어둠 속엔 숨 죽인 채 나를 보는 백여 명의 마른
침들이 각자의 목구멍을 타고 올라간다. 마른침이
올라가는 쪽으로 찢기는 종이 소리는 깡통 속
반 쯤 채워진 모래 소리이다.
나는 시를 만든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린다.
나는 등을 구부린 채 볼펜으로 시를 쓴다. 모래알이
바람에 쓸린다. 나는 어깨를 추스리며 종이를 구기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소리가 허물어진다. 나는 다리를 펴거나
이따금 기지개를 켜면서 시를 만든다. 모래 위로
따스함이 배어든다. 그들은 기침을 하면서
나를 본다. 모래가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왼 주먹에
턱을 괴고 나를 본다. 모래가 일어서며 달그락거린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옆구리로 숨을 쉬며
나를 본다. 모래알은 달그락거리고 모래밭은 경전처럼
펄럭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허벅지로 숨을 쉬며
시를 만든다. 누가 모래를 밟는 소리.
□ 3. 사랑
종이가, 고즈너기, 빛 속에서, 펴진다. 펴진
종이 위에,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쓰다가
구겨 버린다. 구겨지는 소리가 빛을 흔들고
탁자 위 몇 장의 흰 종이를 흔든다.
빛의 바깥, 구겨진 종이 내던져진 어둠 속에
눕고 싶다. 빛이 어둠과 닿은 경계에서
수치와 암담함의 백지가 만져진다.
유리잔이 놓인 저쪽, 노랗게 서 있는 남자와,
이쪽, 분홍 잠옷만으로 앉아 있는
광고지엔 아름다운 삶이란 글자가 씌어 있다.
찢어 버리고 싶다.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을
구기면 남자의 어깨에 닿아 짖이겨진다.
종이를 찢으면 남자의 어깨와 여자의 가슴은
닿은 채로 쫘악, 찢어진다. 아름다운과 삶이 떨어져
내동댕이쳐진다. 유리잔의 날카롭게 부서진 잔해 속에
노랑과 분홍이 서로의 몸을 찌르며 엎질러진다.
나는 시를 만든다. 알 수 없다. 또는 시가 나를
만든다.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시.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종이.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독자. 알 수 없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 알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나.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내 구겨진 종이의
몸을 펴고 싶다. 알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다시 내가 구겨서 던진 종이를 주워 펴 본다.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펴진 종이 위에 씌어 있다.
그러나 구겨진 종이는 유리잔의 금처럼 찢겨진 자국이
짓이겨져 있다. 새 종이를 꺼내, 나는 사랑을 껴안는다라고
다시 쓴다. 종이 위 볼펜을 쥔 손아귀에서 새어나오는
빛과 어둠과 시와 삶이, 노오란 파란
또는 무지개를 이룬 섬세한 모든 색들이
다림질한 책상보처럼 곱게 펴져 어른댄다.
종이를 함부로 찢거나 구겨서 버리지 말라.
나는 사랑이라고 쓴 종이 위에
내 몸을 펴며 포갠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초록의 길 이하석
초록의 길
때때로 가벼운 주검이
아주 가까운 데서 만져지는 수가 있다.
11월의 오후, 차고 마른 풀잎들이 모여 있는
도시 변두리 또는 도심의 공터의
푸른 빛이 먼지와 함께 흩어지는 곳에서.
방아개비 한 마리를 내가 사는 아파트의 빈터에서 서성대다 발견했다. 아이들의 노래소리 가까이 그 주검은 아무도 몰래 버려져 있었다. 바랭이풀의 마른 잎 사이에서 서걱이는 것을, 처음에 나는 빈터 멀리서 날아온 은사시나무 가로수의 마른 잎인 줄 알았다. 그것은 속날개였다. 바깥을 덮었던 초록 외피의 튼튼한 겉날개는 떨어져 나가고, 속날개는 끝이 찢긴 채 몸체에 겨우 붙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흡사 죽어간 방아개비의 몸을 떠나, 방아개비의 초록 영혼을 이 도시의 하늘 위로 날리려는 것처럼. 통통했던, 미세한 물결 무늬로 마디를 이루었던 배는 벌레에게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머리 역시 반쯤 뜯겨 나가, 속이 비어 있었다. 껍질뿐인 몸으로 바람에 조금씩 날개 파닥이며 닳아 갔다. 우리가 사는 도시의 밑바닥에는 칼날의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댔다. 나는 풀밭을 계속 걸어다녔다. 잠시 후 풀섶 아래서 풀무치의 주검을 보았다. 이어서 여치와 잠자리의 주검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주검들 앞에서 애통해 할 까닭은 없다.
가난하게 떨어져 땅에 눕는
내 시간의 따스한 집이여 주검이여
살아 있던 날들의 모든 기억을 고마워하며
우리 함께 여기에 눕느니
내 존재의 끝이자 시작인 너의 가슴에
지금 고요히 누워있으니
풀무치와 방아개비, 여치, 잠자리들은 그들의 빛나는 날개로 여름을 분주히 날았고, 어쩌다 이곳까지 왔었고, 죽을 때가 되어서 죽은 것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아파트의 가까운 이웃이 죽었을 때, 애통해 하는 가족들의 울음 속으로 여치 울음이 끊임없이 들렸음을 나는 슬퍼한다. 죽은 이는 밧줄에 묶여 지상에 내려가 장의차를 타고 도심을 빠져 나갔다, 이 도시와 산을 눈물로 이은 길을 만들면서. 또 나는, 사랑하는 이를 그릴 때 풀벌레의 울음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길고 고적한 밤도 보냈다. 내가 발견한 풀벌레의 주검들은 그 때 내 영혼을 흔들던 그것들이었으리라. 지금은 모든 풀벌레 소리도 끊기고, 밤은 너무나 고요하다. 모든 풀벌레들의 울음은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하나 하나가 온 길을 비로소 찾아 나설 마음이 인다. 풀무치는 초록의 길을 따라, 산이나 들에서 이 도시의 깊은 곳으로 왔다. 처음엔 들판에서 쉽게 이어진 초록의 길이 도시 변두리의 빈터로 이어졌으리라. 그 다음엔 우리가 모르는 풀에서 풀로 이어진 길이 풀무치를 미세하게 이끌었으리라. 그렇다, 이 도심의 회색 콘크리트의 세계에도 자세히 보면―풀무치의 눈으로 보면―들과 산으로 이어진 초록의 길이 있다. 아무도 찾으려 하지 않는 그런 신비한 길이. 단순하게 자연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삶 속에는 그렇게 열린 길이 있다.
우리 낯선 사람들, 세계사, 1989
측백나무 울타리 이하석
측백나무 울타리
버스에 부딪혀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뒤집혀져,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그러나, 다아,
살았다.
죽음의 냄새 같은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그것은 살아 있는,
측백나무 향기.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신성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달려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이쪽 켠에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고.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컵 1 이하석
컵 1
유리창 밑 쇠의자 위, 그 캄캄한
공간에 빈 컵이 놓여 있다.
컵에 비친 노을 속, 어슴프레한 붉은
얼굴이 하나 캄캄한 머리칼 늘어뜨린 채,
창 밖을 응시하고 있다. 차고 강한 철제의
의자 모서리에서 돋는 녹의 붉은 반점들은
어둠을 향해 녹아 내리고, 허물어져 가는
빈 집은 창만이 맑다.
컵에 묻어 있는 것. 사랑 같은 것 또는 혼곤히
남아 있는 진홍색 루즈는 흙빛깔이 되고 싶어한다.
그 순간 컵 속에서 맑은 수줍음 하나가 끓어 오르고
컵은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수줍음만 남아
이룩한 고요가 집마저 무너뜨린다.
그 다음 이 폐허의 구석에서 사랑처럼
풀과 흙냄새가 피어 오른다.
김씨의 옆얼굴, 문학과지성사, 1984
타이프라이터 1 이하석
타이프라이터 1
금융 회사의 김양은 손을 다쳤다, 타이프라이터 속에
서류를 끼워 넣다. 화장실에서 손을 붕대로 감은 채
그녀의 다리 사이로 조그맣게
Q자는 열리고, 때로 붕대를 만질 때 마다
몇 마디 말이 변기 속으로 급히 빠져 나갔다.
클립에 끼워진 하루를 처리하는 손이
금융 회사의 현관 유리에 붉게 걸릴 때,
그녀의 머리칼은 흘러 내리고, 엉덩이는
타이프라이터처럼 삐걱거렸다.
그녀는 오늘 밤 남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손이 젖어서, 타이프라이터의 숫자를 잘못 찍어
해고되었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투명한 속 이하석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 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 다닐 때,
버려진 아무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속으로 열며.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폐차장 1 이하석
폐차장 1
산에 가 붙들리고 싶다.
너의 어깨 위로 너의 모자 그늘 아래로
산이 멀리 있다.
우리가 다툰 지도 오래 되었다.
우리의 욕망이 서로 높아가는 만큼
산은 저렇듯 낮고낮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우리는 욕망의 기름 덮인 검은 흙 위에 앉거나
기름으로 탄 쇳조각 더미에 기대어 일어나며
늘 서로 조금씩 달아나면서
주검으로나마 저 산에 갈 수 있을지 서로 지쳐 묻는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폐차장 이하석
폐차장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치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체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도 젖으며, 흙이 되고
더러는 독이 되어 풀들을 더 넓게
무성하게 확장시킨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핀 1 이하석
핀 1
돌멩이들에 걷어채여, 핀은 어깨와
손이 상했다. 풀들을 찢으며 꽃의 눈을 찌르며
신문지 조각들을 땅에 박아 놓으며, 핀은 어깨와
손뿐인 몸으로 길고 오랜 여행을 했다.
돌 틈에 누워 핀은 이제 아무 데도 걸림 없이
땅 속에 기어든다, 녹의 껍질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그 자신이 땅의 껍질이 되어,
이제는 무엇을 찔러 고정시켜 놓을 일도 까닭도 없이.
돌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핀은 막연하게
빈 얼굴로 밖을 내다본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