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김00
병산서원 만루대에서 전방을 조망한다. 발아래는 봉화에서 발원한 낙동강 젖줄이 경·남북 일원을 적시며 남으로 내닫는다. 길게 드리운 산 그림자는 물속에 일렁이고, 햇빛에 반사된 백사장은 금모래 빛이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산 능선은 격조 높은 한폭 병풍을 방불 한다. 해서, 병산서원이라 명명했으리라. 배산임수背山臨水, 경관이 빼어난 명소에 서원을 창건한 것은 선조들의 높은 안목일 터다.
병산 서원은 당대 성리학의 거유, 류성룡을 기리고자 건립했다. 자료에 따르면 서원은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겼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에 재건했다. 선생이 사망하고 제자들이 존덕사를 지어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철존 조에 사액을 받고,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임진왜란에 나라를 구한 서애 선생의 우국충정 정신을 체험하고자 서원을 찾았다. 선생의 충절이 서렸기에 옷깃을 여민다.
서원 초입인 복례문이다. 가운데는 높고 양쪽은 낮다. 함의가 무엇일까. 풍기는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복례문은 자신을 극복하여 예를 회복한다는 선비정신이다'는 글에 고개가 숙여진다. 건축물 마다 선생의 숨결이 머물었기에 어찌 허투루 대할 수 있겠는가. 서원 모퉁이에 범상치 않는 한 그루 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보호수로 지정한 배롱나무다. 수령이 390여 년이란다. 나무는 마치 서원의 파수꾼인 양, 숱한 세월의 풍상에도 위용을 뽐내며 온전히 모습을 간직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었다. 마냥 반들반들하다. 한마디로 겉과 속이 같다. 배롱은 어떠한 위난에도 굽히지 아니한 채, 지조를 지켜낸 서애 유성룡 선생처럼 고결하다. 나무를 바라보며 혼탁한 사회의 제 현상을 돌아본다. 표리부동表裏不同,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오늘의 사회상이 아니던가. 이를 경계하고자 선조들은 곳곳에 배롱나무를 심었을 모양이다. 조상들은 나무의 꼿꼿함을 반면교사 삼아 강직한 삶을 꽤했으리라. 배롱을 무덤가에 심어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후대에 안녕을 빈 것은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배롱의 영향을 받았을 터다. 그러한 전통을 지키고자 선생의 후손인 류진이는 이곳에 배롱을 심었으리.
시골집 울타리에도 배롱나무가 있었다. '그저 한 그루 나무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난 해 봄이다. 나무가 싹을 틔우지 않아 가지를 잘라버렸다. 어느 날, 잘라낸 가지에서 연둣빛 새순을 내 밀지 않는가. 나의 무지를 꾸짖기나 하듯, 배롱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 봄이면 잎을 틔우고 여름이면 벙긋벙긋 꽃잎을 열었다. 가을이면 붉은 옷을 갈아입고, 겨울이면 나목 되어 가살궂은 설한에도 의연하다. 우리 집 배롱나무는 주인의 부주의로 팔이 잘렸지만, 화사한 꽃망울을 줄기차게 터뜨린다. 배롱에 얽힌 식견을 일찍 갖췄더라면, 섣부른 우를 범하지 않았을 터인데.
신비스런 배롱나무를 눈 여겨 관찰했다. 단단한 나뭇가지는 크고 작은 혹을 군데군데 매달고 있었다. 마치 어미가 아이를 엎은 것처럼. 나무에 달린 혹은 사람에 비유하면 난치병에 해당하는 암덩이란다. 배롱이 자신을 지키고자 몸 안의 독소를 몰아 낸 결정체가 바로 혹일 터다. 인간에게 종양은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이다. 범부들은 혹 앞에 전전긍긍한다.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혹과의 전쟁은 치열하다. 혹을 가지 한쪽으로 몰아내며 오늘 까지 건재한 배롱나무의 슬기와 생명력이 경외롭다. 배워야할 일이다.
가지에 달라붙은 혹을 살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억한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체중이 빠지고 주름이 깊게 패갔다. 건장한 모습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앙상한 골격은 재랍에 가까웠다. 온 몸에 퍼진 암덩이는 고통의 어두운 동굴로 밀어 넣었다.
"제발 안락사 시켜 달라." 오죽했으면 어머님을 붙잡고 그 말씀을 던졌을까? 아버지의 임종 무렵이다. 온화한 미소가 마냥 평화로웠다. 당신께서는 '메멘토 모리,' 현재의 허무를 기억하고 다음 세상을 희망적으로 맞아라' 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공감 했을지 모를 일이다. 며칠 뒤 아버지는 혹과의 전쟁에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 생전, 서원에 모시고 왔더라면, 배롱목의 자가 치료처럼 혹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당찮은 자문自問에 씁쓰레한 미소가 입술에 물린다. 갖은 시달림에도 굳건한 배롱나무 아래서 아버지를 추억한다. 허허로운 마음 달랠 수 없어 한 동안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