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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생물학, 행동신경학... 또는 뇌과학, 인지과학...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뇌를 알아야 한다. 문제 아동의 행위 뒤에는 뇌의 문제가 있다. 단지 그 아이의 윤리적 타락이나 환경의 어두움으로 원인을 돌릴 수 없다. 개인의 자아 역시 뇌의 문제이다. 학습의 과정 역시 뇌 구조를 알아야 한다.얼마전부터 이런 낯선 이야기들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 때는 유전자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창조하는 사회구조도 우월한 가치도 그 배후에는 자신의 유전 정보를 우월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유전자의 영향력이 있다는 이야기, 그 유전자에 개인과 사회는 얼마나 종속되어 있는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한 때 내 화두였던 적도 있었다.
이제 뇌다. 인간성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인간성이 실현되는 데 있어 사회제도나 정책이 과연 친 인간적인가 반 인간적인가를 알고 싶다면, 그리고 개개인의 병리적 현상을 제거하여 개인과 사회 전체의 안녕과 조화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은 뇌의 미로 속을 탐험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궁금증을 품은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책이다.
나는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스피노자는 인격신론을 거부하고 범신론을 주장하여 유대인들의 공동체에서 파문당한 철학자이다. 당대에는 이단으로 위험한 사상가로 배척당하고 그의 책은 금서가 되었지만 현대 철학에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 그 영감은 단지 철학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도 엄청난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작가인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연구하는 행동신경학 분야에서 첨단 기기의 도움을 받아 실험하고 관찰하여야만 도달할 결론을 스피노자는 단지 본능적 직관으로 도달했다.
이 책은 말년에 스피노자가 살았던 헤이그를 방문하고 스피노자의 집과 무덤을 배회하는 작가의 행보로 시작해서 스피노자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고 스피노자의 철학이 자신의 연구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설명하고 인간성의, 사회구조의 수수께끼에 대한 희망어린 전망으로 끝맺는다.
일단 신경생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보여주는 풍부한 인문학적 교양과 감수성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나가는 일은 고급스런 지적 만찬을 즐기는 것과 같은 만족감이 있었다. 쾌락과 고통, 윤리와 종교, 구원과 절망에 대한 그의 근원적 질문들이 스피노자와 뇌와 얽혀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다마지오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통해 파악한 인간의 정서와 판단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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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지오는 정서(emotion)와 느낌(feeling)이 서로 구분되는 절차이며 정서에 뒤어어 느낌이 나타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서는 명백하게 신체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 또는 변화하는 신체의 상태 그 자체이며 느낌은 시간적으로나 인과적으로나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사례를 통해 다마지오는 종래에 주로 마음과 뇌에 맞추어져 있던 심신 문제의 촛점을 몸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는 대사 작용, 기본 반사, 면역계에서 시작해서 쾌락 또는 통증 행동, 충동과 동기 등 우리 신체의 항상성 기구의 가장 높은 수준에 위치한 것이 바로 정서라고 설명한다. 정서의 존재 의미는 결국 생명 상태를 원활하고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노력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느낌은? 정서를 지각하는 과정인 느낌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부수 현상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복잡 미묘하고도 어려운 부분이다. 느낌과 의식은 그 출현에서부터 서로 겹쳐지고 서로를 지탱해 주면서 함께 발달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제각기 분리해서 따로따로 분석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복잡한 환경 속에서 복잡한 행동 반응이 요구되는 인간과 같은 생물의 경우 과거를 염두에 두고 미래를 예측하는 자전적 자아와 추론 능력, 복잡한 의사 결정 능력을 가진 의식의 발달이 요구되었고 그 의식 절차의 일부로써 느낌 역시 출현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비록 그 연결 고리에 대해 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지만 가장 하부에서 시작해서 한 층, 한 층 위로 올라가면서 생명 조절 활동을 정밀하게 고찰하는 다마지오의 접근 방식은 가장 단순한 생물체에서 시작해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느낌, 나아가 마음, 나아가 의식이 진화되어온 과정과 그들의 존재 의미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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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근원적인 정서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편도체라는 조직에서 시작된다. 편도체는 시각, 촉각, 미각 등 여러 감각 기관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을 두렵거나 혹은 즐거운 감정으로 인식한다. 예컨데 뱀을 보면 느끼게 되는 공포감은 편도체의 활성화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정서의 형성은 우리에게 좀 더 오래 지속되는 느낌, 즉 왠일인지 기분 좋은 느낌, 혹은 언짢은 느낌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정서가 발생한 후 뇌에서는 약간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느낌이 형성되는데, 이 때 우리 신체의 전반적인 상태가 뇌의 감각 지도에 표상되고 이에 따라 우리가 받는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시적인 정서가 느낌으로 구체화되면서 정서는 어느 정도 의식 수준에 머물게 되고 우리의 행동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제껏 우리는 정서나 느낌을 신체와 분리해서 생각해 왔지만, 우리 몸의 모든 세포의 항상성이 뇌의 감각 지도에 표상되는 것이 느낌 및 인식 형성의 기본 원리라면 어쩌면 몸과 정신은 분리된 것으로 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몸의 감각 지도가 형성한 느낌을 기억한다. 그래서 상상이 다시 몸의 감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사랑이나 미움과 같은 상황을 설정한 후 상상을 통해서 신체 감각 기관이 활성화 되는 사례, 배우가 정서를 일깨우기 위해서 느낌을 기억해내는 연기의 과정등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런 느낌이 우리가 개체를 보존하려고 기울이는 노력(코나투스)에 어떤 기능을 하는가?
다마지오는 우리가 매일 내리는 판단 행위는 그동안 형성된 느낌, 그리고 이와 연관된 정서적 기억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고 생각한다. 즉 흔히 우리는 '이성적' 판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전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판단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과 연관된 정서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뇌 손상으로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는 IQ는 정상이지만 정서적으로 아둔하고, 호기심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없었다. 또한 종합적인 판단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다마지오에 따르면 이 환자에게 부족한 것은 이성적 판단 기능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 형성된 정서적 기억이 느낌으로 형성되지 못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좋은 느낌으로 기억된 상황을 반복하려 하고 나쁜 느낌으로 기억된 상황을 피하려 하는 순간적인 선택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이 때 우리 속에 보존된 느낌의 기억이 개입하여 이성적 계산의 최종 단계에서 선택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느낌이 훼손되면 우리는 판단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다마지오는 인간의 윤리에도 이러한 방식의 접근을 시도한다. 윤리적인 행동은 감성, 부끄러움, 긍지, 복종 등 정서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즉 윤리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서의 구체적인 기록이다. 이런 사회적 정서의 형성에는 물론 전두엽의 역할이 중요하다. 종교 역시 이러한 윤리적 기준을 비준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한 우리들의 욕구에 의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마지오는 윤리나 종교 역시 진화론이나 뇌과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다마지오는 우리가 뇌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약물이나 행동 요법을 통해 인간의 우울증이나 권태를 치료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호기심에 찬, 선한, 혹은 윤리적인 인간으로 계도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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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그의 이론에 대한 소개였다.
다마지오가 스피노자와 자신의 연구의 일치점으로 열광하는 지점들은 무엇인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정리와 다마지오의 해석이다.
*"개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한 경우에 각각의 자신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각각의 개체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개체의 본질이다."
각 존재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기울이는 가치없는 노력이 바로 코나투스(conatus)이다.
다마지오는 인간의 뇌가 발명한 온갖 능력들, 정서, 느낌, 감정들 모두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라고 한다.
*"사유(thought)와 연장(extension)은 서로 구분될 수 있지만 같은 실체(substance)-신 또는 자연-의 속성들이라"
실체 이원론을 거부한 스피노자의 철학이 몸과 마음의 문제를 통합해야 하는 요구를 제기한 것이라 했다.
*"몸은 피부라는 경계로 외부와 구분되는 한 덩어리의 자연이다."
몸은 계속해서 소멸되어 가며 재생되어야 한다. 몸은 다른 물체와 접촉하면서 변형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비록 신경이 뇌의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까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러한 사실을 고려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관념은 사고하는 존재(entity)의 마음이 형성하는 심적 개념이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가 관념(idea)'라는 말을 이미지 또는 심적 표상 또는 사유의 요소와 동일시 함으로써 자신이 주장힌한 '느낌은 체성 감각 지도에 나타난 신체 상태의 구성 형태, 혹은 신체 지도에 대한 이미지'라는 결론을 선취했다고 믿는다.
*"인간의 마음이 외부의 물체를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로 지각하는 것은 오로지 몸의 변용에 대한 관념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몸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몸만이 우리 마음의 대상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주어진 특정 몸이 다른 몸에 비해 동시에 많은 작용을 하고 외부의 많은 작용을 받아들이는 데 유능하면 그에 비례하여 이몸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 역시 동시에 많은 것을 지각하는 데 유능하다는 것이다."
다마지오는 '느낌(feeling)'이라는 현상을 마음이 외부의 물체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 못하고 단지 몸에 유발된 변용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한 변용에 '비례'한다는 스피노자의 표현은 '대응', '지도화'라는 자신의 말을 상기시킨다고 한다. 마음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은 몸의 존재, 또는 그 대상이 몸에 야기한 특정 변용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즉 몸 없이는 마음도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몸의 변용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변용에 대한 관념 역시 지각한다."
관념의 관념, 그 관념의 관념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뇌이다. '관념의 관념'이라는 개념은 중요하다. 이 개념은 관계를 나타내고 기호를 창조할 수 있게 하며 자아 관념을 탄생시킨다. 자아는 바로 이러한 이차적 관념이다. 자아는 지각된 대상과 그 지각을 통해 변용된 몸 간의 관계에 대한 관념이다.
다양한 감각 양식에서 사물과 사건을 그려내는 이미지의 흐름-뇌 속에서 펼쳐지는 영와-이 내가 조금 전 설명한 자아의 이미지와 함께하게 될 때 우리는 의식을 가진 마음을 갖게 된다.
결국 스피노자의 통찰이란 무엇인가?
마음과 몸은 서로 평행하며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절차로서 마치 한 물체의 양면처럼 모든 측면에서 서로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몸이 마음의 내용을 구성하는 방향으로 주로 이루어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그보다 적다. 반면 마음의 관념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지만, 몸의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
마지막으로 다마지오는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명예도, 사랑도, 권력도, 돈도, 우정도, 세속적 성공도 없었던 스피노자가 어떻게 삶에서 만족감을 얻었을까? 즉, 이 책에서 논의하고 있는 우리의 정서, 느낌, 심신 문제에 관련된 생물학을 이해하는 것이 만족스러운 삶을 성취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를 질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참 좋다.
물질적인 몸이 형성한 뇌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이 현상을 신경생물학자는 어떻게 설명하려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자기 삶의 의미를 어느 정도 밝혀 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존재보다 더 커다란 어떤 목적을 지닐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 모든 것을 쥔 사람조차도 더 큰 무엇인가를 쥐고 싶어 안달복달 한다. 그와 같은 지혜와 명징성에 대한 갈망은 어떤 바람직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이러한 갈망이 우리 뇌의 설계 및 그러한 이를 만들어 낸 유전적 풀(pool)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인간의 구성에 그와 같은 특질이 포함되었을까? 이러한 요소는 오랜 옛날의 초기 인류에게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현실, 특히 죽음-우리 자신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 실제의 죽음이나 죽음에 대한 예상-을 마주했을 때 스피노자가 우리 존재의 정수라고 명확하게 밝힌 자기 보존에 대한 자연스러운 갈망, 코나투스가 작용한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예상은 항동성 작용을 붕괴시킨다. 그러면 생명과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를 보존하고자 하는 자연적인 노력은 이러한 붕괴에 대한 반응으로서 고통과 죽음을 막고 새로운 균형 상태를 이루기 위해 투쟁한다. 이 투쟁은 우리로 하여금 사라져 버린 항동성 작용을 대치할 전략을 찾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총체적인 곤경에 대한 인지는 깊은 슬픔에 대한 원인이 된다.
대부분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대부분은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특성이 유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어지게 되었을까?
그와 같은 현상은 첫째로 느낌-단순히 정서가 아니라 느낌-, 특히 감정 이입, 우리가 완전히 인정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의 결과이다. 적절한 상황에서 감정 이입은 슬픔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다.
둘째,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생물학적 재능, 즉 의식과 기억이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자전적 기억의 도움을 받아 의식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개인적 경험의 기록으로 가득한 자아를 제공해 준다. 의식적 존재인 우리가 삶에서 새로운 순간을 마주하면 우리는 과거의 기쁨과 슬픔을 둘러싼 상황들, 예견된 미래의 상상적 상황, 더 큰 기쁨과 슬픔을 가져올 것으로 생각되는 상황들을 불러오게 된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의식이 없다면 지금이나 초기의 인간에게 거론할 만한 두드러진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없다. 한편 우리가 의식은 가지고 있되 기억이 거의 없는 상태라고 해도 역시 두드러진 정도의 괴로움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지만 개인적 역사의 배경에 위치시킬 수 없는 사건은 오직 현재에만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다. 의식과 기억이라는 두 가지 재능이 결합될 때만, 그리고 풍요롭게 나타날 때, 인간의 드라마가 나타날 수 있고 또 그 드라마에 비극적 상태를 부여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두 가지 재능은 또한 무한한 기쁨, 순수한 인간의 영광의 원천이기도 한다. 면밀히 검토된 인생을 사는 것은 저주일 뿐 아니라 특권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도, 검토된 인생을 만족스러운 인생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고통과 죽음이 불러일으킨 괴로움에 저항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대치하는 방법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정서와 느낌에 대패 신경생물학은 우리가 기쁨과 기쁨에서 파생된 감정들을 슬픔 및 슬픔과 관련된 정서보다 더 선호하며 이러한 감정들이 건강한 삶과 존재의 창조적 번영에 더욱 크게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인 이유에서 기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아무리 바보같고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죽음과 고통을 직면하는 것은 항상성 상태를 크게 교란시킨다. 초기 인류는 사회적 정서와 다른 이에 대한 감정이입, 기쁨과 슬픔과 같은 감정을 습득하고, 자기 기억을 지닌 자아를 갖게 되고, 또한 감정 상태를 변화시키는 한편 다시 항상성 상태의 균형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존재와 행동을 상상하는 능력을 갖게 된 이후로 이러한 경험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괴로움에 대한 반응으로서 항상성 상태를 되찾고자 하는 갈망이 시작될 것이다. 갈등 상태를 수정해서 다시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할 수 있는 뇌를 가진 개인은 그 보상으로서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균형 상태를 이루려는 갈망과 그 갈망의 이로운 결과는 대를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시도는 미리 예견된 죽음을 받아들이고 육체적 고통이나 정신적 번뇌에 적응해 나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종교적 개념과 관행을 따름으로써 비극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통에 맞서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스피노자 역시 그와 같은 역사적 반응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종교적 공동체에서 자라났으나 그 공동체가 인간의 구원으로 제안한 해결책을 거부한 그는 그것을 대치할만한 다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이 지각하는 모든 것의 근원인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하고 무한한 실체이다. 그 신은 자연이며 살아있는 생명체에 가장 명확하게 구현되어 있다. 스피노자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 할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행동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행동을 한다멱 그것으로써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나에게 스스로 벌을 주는 셈이며 내면의 평화와 행복을 성취할 기회를 부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신의 본성에 맞게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구원이란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행복이 쌓여서 이루어 낸 건강한 마음의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쉬운 길은 덕망있는 국가에서 덕망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민주적 국가의 법률을 따르면서 성경의 지혜와 도움을 구하는 길, 어려운 길은 쉬운 길에 더하여 지성에 대한 직관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 죽음과 그에 따른 손실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니 그 이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는것. 또한 개인으로 하여금 부정적 정서-공포, 분노, 질투, 슬픔과 같은 정념-을 일으킬 수 있는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과 그와 같은 정서를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스스로 단절할 것을 촉구한다. 그 대신 긍정적이고 마음에 자양분을 주는 정서를 촉발할 수 있는 자극으로 대치하라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해법은 정서적 절차를 관장하는 마음의 힘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마음의 힘은 부정적 정서의 원인을 발견하는 것과 정서의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에 의존한다. 개인은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과 정서 촉발 메커니즘 간의 근본적 분리 상태를 인지해야만 한다. 그러게 함으로써 그는 그 자극을 이성이 촉구한, 가장 긍정적인 느낌의 상태를 생성할 수 있는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으로 대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피노자의 해법은 개인으로 하여금 지식과 이성의 안내에 따라 개인의 불멸이 아니라 신 또는 자연의 영속성이라는 전망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첫째, 자유이다. 이 자유는 우리가 보통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 논할 때 말하는 그 자유와 조금 다르다. 이 자유는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이 자유는 우리를 노예 상태로 속박시키는 객체-정서적 요구에 대한 의존을 감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둘째 결과는 우리가 인간 조건의 정수에 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직관은 쾌락, 기쁨, 즐거움 등의 요소를 포함하는 평온한 느낌과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 느낌의 투명하고 맑은 질감을 생각할 때, 축복 또는 지복이 그 느낌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적인 느낌은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확장된 의식과 자전적 기억을 갖게 된 이후로 잃어버리게 된 상대적으로 독립된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주는 것이 스피노자 해법의 목표다. 그는 이성과 느낌을 통해서 그 곳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길을 볼 수 있게 해 주지만, 느낌은 우리가 그 길을 보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 스피노자는 낙관론자였다. 그는 즐거움의 장점을 인정하고 슬픔과 공포를 거부했으며 전자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후자를 지워 버리고자 했다. 스피노자는 삶을 긍정했으며 정서와 느낌을 그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지혜와 과학적 선견지명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각으로서 스피노자의 해법은 지난 400년 동안 과학이 구축한 우주관가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양립할 수 있었다.
우리로 하여금 자기 보존이라는 노력이 명하는 바에 따라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며 살아 나가도록 만드는 그 누햄릿의 첫머리에 나오는 심란한 질문, "거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피노자의 관점을 묻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자기 보존이라는 노력이 명하는 바에 따라 모든 어려움을 인내하며 살아 나가도록 만드는 그 누군가가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스피노자의 대답은 명료할 것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저 한 순간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메마르다. 가혹하다. 불굴의 용기, 인내, 희생, 규율이 필요하며 보답은 한 순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의 위대함, 우리 모두를 화나게 하는 그의 위대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평온한 확신을 가지고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갈등이란, 고통과 죽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과 그와 같은 지혜에 거스르고 충돌하며 그에 실망하게 되는, 역시 자연스럽기 그지 없는 인간 마음의 경향 간의 갈등이다. 상처는 남게 되고...
모든 것은 반복된다.
제임스 윌리스는 하버드에서 종교 철학 강의를 준비하면서 스피노자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냉정한 동화'라는 것이며 스피노자가 갖고 있던 인생에 대한 긍정적 열정 또는 '건강한 마음 가짐'을 거부했다. 제임스는 인간을 밝은 영혼을 가진 자들과 병든 영혼을 가진 자들의 두 종류로 나누었다. 밝은 영혼을 가진 이들은 죽음의 비극, 먹고 먹히는 자연의 끔찍한 측면,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무시해 버리는 자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체질적으로 스피노자는 그러한 인간이다.
스피노자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게 "사악함은 일종의 병이고, 그 병에 대해 우려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병으로 애초의 병적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반면 제임스는 자신을 '병든 영혼'에 속한다고 했다. 병든 영혼은 자연을 똑바로 응시하고 즐기지 못한다. 적어도 언제나 그렇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자연의 광경은 종종 고질적으로 끔찍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꼭 우울증에 걸려야 병든 영혼의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병든 영혼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밝은 영혼이 체계적으로 이 세상 위에 드리우고 있는 거짓된 장막을 걷어치우고 삶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의 비관주의는 좋은 것이다.
스피노자는 밝은 영혼이기만 했을까?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그 어두운 측면을 받아들이지만 그 어두운 열정이 개인을 지배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제임스와 스피노자는 자연스러운 영적 삶이라는 형태의 풍요로운 적응의 길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들의 신은 고통과 번민으로 인해 상실된 항동성 균형을 되찾아 준 점에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신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둘 다 균형의 회복은 정교한 사고와 추론이 적절한 정서와 느낌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달성되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인간 존재는 이 신비스러운 우주에서 나타난 주체적 특성의 단순한 사례임을 시인함으로써 그 과정을 합리화 했다.
마직막으로 다마지오는 신경생리학자로서 말한다. 영적 경험이라는 것은 생명체의 특정 상태, 특정 신체 구성과 특정 심적 구성의 미묘한 조합이다. 그와 같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조건과 다른 이들의 처한 조건, 과거와 미래, 우리의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추상적 이해 등을 아우르는 풍요로운 사고에 의존한다. 다마지오의 목적은 영적 현상의 숭고함이 생물학의 숭고함에 구현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절차를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희망이란 미래나 과거 속에서 끄집어 낸,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회의하고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심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마지오는 자신의 신경새물학의 지식이 인간 삶의 터전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많은 슬픔과 약간의 쾌락 한가운데서 우리가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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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던진 재미난 질문 한가지만 인용하면서 마치자.
'인류가 최초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는 것를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을까?'
*더불어 읽어볼 책, 다마지오의 앞선 책, <데카르트의 오류>,<사건에 대한 느낌>
*로버트 라이트 <도덕적 동물>: 이 책엔 찰스 다윈의 삶이 삽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