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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쓰고 보니 거창하지만 내용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일수 있으니 별 기대를 하지 말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작성하게 된 동기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글을 읽다보니, 대한제국의 근대주화를 비릇하여, 심지어 상평통보에 대한 가치, 무게등에 대해서 정확하지 않고 잘못된 자료들이 넘처나고 있더군요.
수집을 꽤 하셨다고 하는분들이 올린글에서도, 조선시대에는 상평통보 100개가 한냥이다, 아니다 상평통보 한푼이 한냥이었다고, 착각내지는 오류들이 계속 넘처나고...
제가 작성하는 이글도,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들과 검색 내용들을 적절히 섞어서 쓰는 정도로 가볍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상평통보 단위 관련 입니다.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당백전 들이 있다고 편하게 알고 있었던 부분인데,
상평통보 1문의 가치는 2전(錢)5푼(分), 100문이 1냥(兩), 10냥이 한 관(貫) 이라고 심지어 네이버 백과사전에도 나오더군요.
이 표기는 맞는다고 보면 맞고, 틀렸다고 보면 틀린 내용입니다. (근대주화 화폐단위와 혼동하여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원래 조선시대 상평통보등의 화폐단위의 기본은 무게입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무게단위 1푼은 0.375g, 1돈은 3.75g(10푼), 1냥은 37.5g(10돈), 1관이 3750g (100냥)입니다.
여기서 냥(兩)과 관(貫) 사이에 근(斤)도 있는데, 보통은 16량이 한근으로 600g 을 의미합니다. (소고기 한근은 600g 임) 그런데 채소나 약초등에선 편의상 10배를 해서 375g을 한근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화폐단위에서 근은 잘 사용하지 않고, 량이나 관을 주로 사용합니다.)
상평통보는 처음 주조할 당시 무게를 2돈 5푼 (9.375g)으로 하고자 했고, 이것 한 개(잎)의 단위는 1문(文)으로 해서 400문을 은(銀) 한량의 가치로 두고자 했습니다. (은과 동의 가치를 1: 100 으로)
그런데 실제로는 처음에 만들어진 상평통보의 크기및 무게가 현재의 당일전 정도로 작았기에, 1679년 크기를 크게 하고, 뒷면 하단에 2(二) 자를 넣은 하부 2자전 일명 당이전을 만들어 당이전 100개 (100文)를 은(銀) 한량의 가치로 공식환율을 바꾸게 됩니다.
당이전의 실제무게는 2돈 (7.5g)이며, 뒷면에 새겨있는 2(二) 자는 국가가 2돈의 무게를 보증한다는 표시라는 설도 있습니다.
(상평통보가 널리 쓰이던, 영조, 정조등 조선시대에서 주막등에서 말하던 상평통보 화폐단위 한량은, 은 한량의 가치를 의미하는 당이전 100개가 아니라, 당이전의 무게가 2돈(錢) 이므로, 당이전 5개가 상평통보 엽전 한량 (37.5g)이 됩니다.) - 이 의견에 동의 하기 어려우신 분들은 이글의 뒤의 내용들까지 꼭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구리가 점점 부족해져서 무게가 2돈에서 1돈 7푼, 1돈 2푼으로 계속 줄어들어 1돈 2푼으로 줄어든 동전을 흔히 당일전으로 부르고 있는데, 당이전과 같은 가치를 가졌는지, 당이전을 좀더 쳐줬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이 크기가 작은 동전을 당일전으로 통용하고, 큰것은 액면가치를 당이전으로 높여 통용할것을 제의했던 사실등을 참고해보면, 처음에는 당일전과 당이전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었으나, 나중에는 구분하여 통용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당백전은 잘 알려진바와 같이 1866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 하기 위해서 동의 무게는 5~6배 밖에 안되는데 가치는 100배하여 당백전을 찍어 냈기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시키고, 화폐질서를 문란하게 만들다가 1867년 폐지되었고,
당오전은 1883년 개항을 앞두고, 역시 동의 무게는 2~3배정도 밖에 안되는데 가치는 5배를 높인 동전을 발행하여 역시 혼란을 야기 시키게 됩니다.
1886년 (개국 495년) 새로은 압인 기범에 의해 5문과 10문 그리고 20문 시주화가 선보이고, 1888년 (497년) 5문, 10문의 유통주화가 나옵니다.
이때 상평통보 당일전 기준으로 상평통보 2개를 위의 1문의 가치로 함께 통용이 되었습니다. (당이전 기준 1문을 현대화폐 1문으로 한 것으로 사료됨)
1891년 신식화폐조례를 제정하여 1892년 (조선 개국501년) 5량, 1냥, 2전오푼, 5푼, 1푼의 5종의 신화폐를 만들었습니다.
1문을 1푼으로 바꿔 부르고, 5푼이 1전, 20전이 한량이 되나, 이 새로운 화폐단위 푼이나 량은 기존에 사용하던 무게단위 푼이나 량과는 다른 화폐단위입니다. 1679년 상평통보 당이전 100문을 은(銀) 한량 (37.5g)의 공식환율로 설정한 것과, 달리 여기서 한량은화의 무게는 5.2g (은 4.16g 동 1.04g) 입니다.
1893년 (개국502년 ) 닷량 은화의 뒷모습을 일원(圜)으로 수정하여 닷량을 일원으로 부르고, 광무 6년까지는 기본 화폐 화폐단위도 량과 원을 병행하여 같이 사용하였습니다. (아래 일원과 닷량은 크기와 모양만 대충 비슷한 참고품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은본위제가 도입되면서 상평통보의 유통을 중지 시키게 되는데, 이때 기존의 상평통보들과 신화폐의 교환 환율은 역시 100문(당이전 기준 100개)을 신화폐 한량으로 교환해 주었었습니다. (옆전 한개가 반푼이거나(당일전기준) 한푼(당이전 기준)이라는 이야기도 이때 나온듯..),
1901년 (광무5년) 금본위제로 바뀌면서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독수리 무늬 반원, 일전, 오전 등을 만들었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월에 1901년제정된 화폐조례를 재정비한 "화폐조례에 관한건'을 공포하고 일본 오사까 조페창에서 일본 주화와 비슷한 반전, 일전,오전,십전, 이십전, 반원, 오원, 십원, 이십원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게 됩니다. (광무6년 이후에는 량,푼, 두돈오푼등의 화폐를 더 이상 만들지 않고 화폐의 기본단위를 원(圜)으로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보조단위는 전(錢))
(이때 1892년 이후에 만들었던, 한푼, 5푼, 한량등의 화폐에 대해서는 5푼은 5리로, 한량은 10전으로 50% 화폐금액을 줄여서 같이 통용하게 됩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고문정치를 실시한 일본은, 1905년부터 1908년까지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2돈 오푼 백동화를 제일 먼저 정리하였는데, 개국 501년인 1892년부터 제조된 2돈 5푼은 들어가는 재료에 비해 액면이 제일 높은 화폐였기에, 제일 많이 만들어 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청나라 사람등이 위조화폐인 사주전(주로 광무 2년 두돈오푼)을 막대하게 만들었던 화폐였습니다. 두돈오푼은 화폐 유통및 경제를 망쳐 놓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서민경제에 고통을 준 화폐로 알려져 있는데, 융희 2년 (1908년) 에 먼저 유통정지를 당했습니다. (화폐정리 사업을 통한 교환 과정에서 두돈오푼 동전의 상태를 갑, 을, 병으로 구분하여, 갑인 경우는 액면인 2전 5리로 교환해 줬지만, 을인 경우는 액면가의 2/5인 1전으로 교환해 주고, 병인 경우는 교환을 해주지 않았었는데, 한국인들이 소지한 2돈오푼들은 상태를 을이나 병으로 판정하여, 한국인들의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그리고, 광무 2년 두돈오푼은 광무 2년에만 발행 것이 아니고, 사주전인 위조주화들은 1907년 말까지도 인천 앞바다 섬등에서 꾸준히 제조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오사카 조폐창에서 발행된 반전, 일전,오전,십전, 이십전, 반원, 오원, 십원, 이십원 뿐만 아니라 한푼, 오푼, 한량, 닷량등 근대주화들은 1925년 말까지, 일본 강정기에도 조선은행권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일전, 당이전등의 엽전들은 1925년말 유통정지에서 제외 되었었고 , 일제 강정기 말까지도, 주로 경상도등을 비릇한 지방에서는 같이 유통이 되었다고 합니다. ( 상평통보는 공식적으로는 갑오경장 때인 1894년 상평통보는 유통 정지 당했으나, 서민들 사이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기에, 일제 강점기에서도 (소액보조화폐로서) 상평통보를 비릇한 옆전들의 유통을 허용했던 것으로 사료됨)
다만, 이때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당일전, 당이전등 모든 옆전을 그냥 엽전 한푼으로 같이 통용하였으며 (갑오경장때 상평통보를 회수해 가면서 당오전등 옆전들을 모두 한푼으로 취급 했다는 이야기도 있음. 1902년에 미국 의사 필하와 씨와 한국인 신해영씨가 저술한 산술신편에 "(예전에는) 당오전은 한푼이 곧 5푼 이므로, 옆전의 5배가 되어서 한푼을 5푼이라고 이르렀으나, 지금은 법율로 당오전 한푼을 옆전과 같이 마련하니라" 라는 기술이 있음)
(두돈오푼을 제외한 개국 501년 이후의 근대주화들은 1925년 12월 31일이후 유통정지 당함, 다만 1892년 부터 발행됬던 화폐들과 1905년 이후 발행된 화폐들과의 환율은 원래대로 하면, 5량은 1원, 한량은 20전, 5푼은 1전 으로 바뀌어야 정상 이지만, 일제는 화폐정리 사업기간부터 새로만든 화폐와의 관계를 액면 그대로 쳐서, 한량은 10전, 5푼은 5리, 한푼은 1리로 쳐서 교환 하였기에, 2돈오푼은 갑인 경우 에도 2전 5리로 교환하였음. 기존화폐의 가치를 50%로 낮춘 셈이 됬지만, 1905년 부터 새로 만든 위의 돈들과 함께 1925년 말까지는 계속 사용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엽전은 오히려 크기에 관계없이 한푼 (1리)의 가치를 가지고 해방직전까지 계속 사용되었음)
일제 강정기말 태평양 전쟁 당시에 전쟁 물자가 부족할때, 옆전을 비릇한 집안에 있는 금속류 들을 공출해가서, 녹여서 전쟁물자로 사용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나 해방직후, 일본인등 일부 질 나쁜 사란들이, 한국인들을 엽전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던 것도, 옆전이 해방직전 까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꾸준히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1892년 화폐 개혁및 1905년의 화폐개혁을 통해, 한량은 10전, 10전은 상평통보 100 개가 되어서 1925년 말까지 계속 사용되었엇고, 상평통보는 크기에 관계없이 1리의 가치를 가지고,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 사용되었었고, 이것들과 상평통보 초기교환 환율 (당이전 100개가 은한량)과 혼동하여서 인지, 네이버 백과사전등에 조선시대에 엽전 10개가 10전이고, 10전이 1량이 되고, 10량이 한관이라는 잘못된 표현이 나오게 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 참고로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영조, 정조등 조선시대에 흔히 나오는 돈을 지칭하는 단위 한량은 돈의 무게에서 비릇 되었으며, 상평통보 당이전 (하부2자전) 기준으로는 5개가 1량 이었습니다. )
(2013년 4월 26일 추가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있는 "100문이 한냥이고 10냥이 한관이었다는" 글을 최소한 " 화폐의 가치는 100문이 은 한량 , 은 열량이 상평통보 한관의 가치를 가짐" 으로 수정 하도록 요청 하였고, 그것이 검토끝에 채택되어, 조만간 두산 백과사전 내용도 수정될 예정이라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
대한제국때 사용하던 화폐단위 원(圜)은 한일강제병합후에도 구한국은행권을 통해 1912년 까지 발행되어 사용이 되었으며, 강제 병합 후 조선은행으로 변경된 후에 1914년 금권 백원이 나오면서 일본 화폐단위인 원(圓)으로 바뀌어 1953년까지 사용되었고, 1953년 화폐개혁을 통해 환(圜)이 사용되었고, 그리고 1962년 이루 현행 원으로 바뀌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자와 발음이 혼동되어 헷갈려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것 같은데, 제블로그 ‘한일합방에서 해방전후까지의 일원지폐들...’ (http://blog.naver.com/aerocomb/20046638430 )에서 일원권들의 변천을 통해서 살펴본적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상평통보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당백전에 대한 약간의 자료도 제블로그 기타수집품 란에 올린것이 있으니 참고하실분들은 참고하세요. )
[하늘불꽃 | 조회 545 |추천 0 | 2012.04.20. 2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