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년시절의 로망 "남정임" 그 녀를 추억하며..
중고딩시절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이름 남정임 !!!
이쁘고 생기발랄한 그 녀는 내 꿈속의 누님..아니 여인이었습니다.
1966년 봄 사상 변두리 시골소년이 초딩을 졸업하고 서면의 중학교로
입성을 합니다.. 마침 그해에 그 녀도 영화배우로 데뷔를 합니다.
춘원 이광수의 1933년작 장편소설 유정을 각색한 영화 "유정"으로..
23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유정의 타이틀 롤을 차지합니다.
감독은 문예영화로 유명한 김수용 감독입니다.
개봉관에서 보지는 못하고 그해 겨울에 이성극장에서 유정을 봅니다.
설경과 호수의 경치가 아름다웠지만 그보다는 여주인공 정임의 매력에
흠뻑 빠진 영화 였습니다.
영화 유정은 죽기전에 보아야 할 한국영화 100선에 들어 있습니다.
그 때는 TV가 보편화되지 않은 관계로 그야말로 영화의 전성기 였습니다.
그 후 그 녀는 1971년 까지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합니다.
멜로, 사극, 액션, 무협, 코메디 등 모든 장르의 영화에 출연을 해서 만능
배우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소년은 거기에 또 빠져 버립니다.
그 녀는 1971년 소년의 고3때 재일교포 부자 사업가 임방광과 결혼 발표를
합니다. 돈에 팔려 일본으로 가는 모양새.. 정말 실망 이었습니다.
역시나 였습니다. 결혼한지 3년만에 가정불화로 별거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1976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계에 복귀합니다.
그렇지만 복귀를 해도 예전만큼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애증이 있었지만 돌아오니 반가웠습니다. 1978년 임방광과 이혼하고
노승주씨와 재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1989년
어느 날 갑자기 유방암으로 입원했단 소리가 들렸었는데...
잘 이겨내는 줄 알았는데.. 1992년 그녀의 사망소식이 들렸습니다.
미인박명.. 그 녀를 두고 한 이야기 같았습니다.
소년시절의 풋풋했던 사랑의 감정은 언제까지나 기억되나 봅니다.
요즘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내 꿈속의 그 녀..남정임 !!!
남정임(1945~1992)
1945년 경기도 광주 출생. 몇 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1966년 TV드라마 ‘유정’의 배우 공모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1968년2월 한양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였으며,60년대 후반기 최고 인기
여배우가 됨. 출연 작품은 360여 편에 이르는데, 이 중 대부분은 '60년대 후반에 출연한 것으로, 발랄하
고 깜찍한 젊은 여성의 역할이 돋보인다. 1971년 재일교포 임방광과 결혼하여 영화계를 은퇴하였고
결혼3년만인 1974년 가정불화로 별거하였으며 1976년 영화계에 복귀하여 영화 "나는 고백한다"에 출연
하였으며 1978년도에는 영화"웃음소리"에 출연하였고 1978년 임방광과 이혼하고 노승주와 재혼하였으
며 1989년 유방암이 발병하여 1992년9월2일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남정임의 작품세계.
여배우 <남정임>의 작품세계는 종잡을 수가 없다. 너무도 다양한 캐릭터로 많은 영화에 등장 하였기 때문
이다. 그러한 관계로 여성영화인 사전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남정임은 문희나 윤정희에 비해 출연작에 비중있는 작품이 부족한 탓에 지나치게 상업적인 이미지만을
추구했다는 평을 들었으며, 작품을 고르지 않고 마구잡이로 출연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아야 했다.
영화평론가 조관희는 <명배우 회고전 - 남정임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 남정임의 후기작품은 흥행용 오락영화가 주종을 이루는데, 이는 제작경향의 변화도 있었겠지만,남정임
자신이 작품선정에 유연했다는 얘기도 된다.
여배우 남정임이 트로이카 다른 여배우들에 비해, 우월한 매력은 깜찍하고 발랄한 모습이었으며, 이 매력
을 무기로 “도시의 세련된 여성상”이나 “도발적인 청춘상”을 잘 소화해내어 뛰어난 <청춘영화>나 <연애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활약하였다. 트로이카 여배우 중 “정적이고 고전적인 이미지”를 앞세워 “눈물의
여왕”으로 군림한 <문희>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윤정희와 마찬가지로 <남정임>역시 김수용 감독과 콤비를 이루어 많은 작품을 찍었으며, 데뷔작 <유정>(1966)
을 시작으로 총 15편의 영화를 남겼다. 인상에 남는 영화로는 충무로(영화계)의 이면을 파헤친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 천승세 원작의 어촌영화 <만선>(1967), 김동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까치소리>(1967) 청룡상
여우주연상 수상작 <분녀>(1968), 염전을 배경으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그린 <수전지대>(1968) 외에도
<시발점>(1969), <봄봄>(1969) 같은 수준급의 영화들이 있으며, 같은 시기 <김수용 - 윤정희> 콤비가 남긴
일련의 작품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너무도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남정임>의 작품세계는 <도발적인 청춘상>을 보여준 청춘영화와 <백치 연기>
를 보여준 코미디물과 사극, 그리고 백치연기와는 대조되는 <요부나 귀신 연기>를 보여준 일련의 상업영화들로
나눌 수가 있다.
첫 번째, 그녀가 남긴 청춘영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는 1966년 정진우 감독의 <초연>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세련되고 깜찍한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잘 소화해서 스타덤에 올랐다. 애초에 <초연>의 여주인
공은 <고은아>로 결정되어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어느날 <남정임>을 본 정진우 감독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바로 저 여배우다라는 생각이 들어 <고은아>를 도중하차시키고, <남정임>을 전격 기용하였다고 한다. 영화를
촬영중이던 감독이 그동안 촬영했던 필름을 폐기하고, 다시 시작할 정도로 <남정임>의 발랄하고 깜찍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 잡았다.
이어 <백발백중>(1966), <길잃은 철새>(1967), <내일은 웃자>(1967), <초원의 인>(1967), <오월생>(1968),
<정부 마농>(1968), <설원의 정>(1970) 등 <신성일 - 남정임> 콤비의 청춘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
영화를 황금시대를 장식하였고, <내 생애 단한번만>(1969)이란 청춘물에서는 가수<조영남>과 공연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남정임> 연기의 백미는 백치연기다. 1967년 <상감마마 미워요>에서의 미련한 산골처녀 연기를 시작
으로, <철부열녀>(1967), <분녀>(1968>, <순덕이>(1969), <미스촌닭>(1969), <야성녀>(1969) 등에서 바보
역이나 순박한 시골처녀역을 천역덕스럽게 소화해 내어 연기력을 인정받게 되고, 영화 <분녀>로 1968년 트로이
카 여배우 중에 처음으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당시 인기절정의 코메디 배우 <구봉서>, <서영춘>등과 함께 출연한 <남자식모>(1968)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트로이카 중 <코메디영화>에 가장많이 출연하게 된다. 인상에 남는 작품으로는 <남정임
여군에 가다>(1968), <사직골 구서방>(1968), <막둥이 신혼 10개월>(1969), <출세가도>(1969), <억울하면
출세하라>(1969), <의리의 사나이 돌쇠>(1970), 그리고 개인적으로 남정임이 최고(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
의 연기를 보여준 <팔푼이 며느리>(1969)가 있다. <팔푼이 며느리>의 히트로 <팔푼이 시리즈>가 연이어
제작되었고,거의 비디오로 출시되었는데,아쉽게도 원조인<팔푼이 며느리>만 국내 비디오 출시되지 않은듯하다.
세 번째, 1968년 신정푸로로 국도극장에서 <요화 장희빈>(임권택 감독)이 개봉되었는데, 남정임이 장희빈으로
등장한다. <정창화>의 흑백 <장희빈>(1960)을 리메이크 한 이 작품에서 남정임은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보이며
요부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소화한다. 이어 <에밀레 종>(1968), <방랑대군>(1968), <삼현육각>(1968)등 일련
의 사극에서 명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1970년 <주동진>감독의 <마님>에서 “연기의 절정”을 맞이한다.
그리고 <어명>(1967), <십오야>(1968), <팔도검객>(1970) 등의 영화에서는 트로이카 여배우들 중 유일하게
여검객으로 등장하며, 무협연기에도 도전하였다. 또 하나 트로이카 다른 여배우들과의 다른점 하나가 귀신역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괴담>(1968), <몽녀>(1968), <전설따라 삼천리>(1968), <오공녀의 한>(1968), <심야
의 비명>(1969), <흑장미성의 미녀>(1969), <투명괴인>(1969)등의 호러영화에서 열연을 하여, 상업적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작품들이 많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여배우” <남정임>은 이렇듯 자신의 필모에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남겼으며, 다양한 성격의
캐릭터를 모두 소화한, 극단의 성격을 모두 지닐 수 있었던 전능한 연기자였다.
김수용 감독의 그리운 여배우 ⑭ 남정임
1966년 TV 드라마 ‘유정’ 배우 공모 당선돼 화려하게 데뷔
재일동포와 결혼하고 활동 접은 뒤 1978년 김수용 감독의 ‘웃음소리’로 재기
1966년 춘원 이광수의 ‘유정’으로 한국 최초 TV 공개 모집에서 당선되어 화려하게 데뷔한 남정임은 국도극장에서
3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때는 KBS TV가 사옥이 없어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 가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을 만
들었다. 공개 모집 당시 마지막 두 사람의 후보자 중 누가 당선되느냐를 두고 아나운서가 너무 힘을 주었기 때문
에 2등 한 후보자가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후 남정임은 밤낮으로 촬영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문희가 등장
하고 윤정희가 발탁되어 세칭 트로이카 시대를 맞게 된다.
1978년 영화 ‘웃음소리’(김수용 감독)에 출연한 배우 남정임.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남정임은 우선 얼굴이 예쁘다. 그리고 온순하고 예의가 바르다. 한부모 가정, 어머니 밑에서 남매가 자랐는데,
어머니가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외국 촬영 때는 으레 어머니를 여배우로 대접하고 딸은 심부름꾼으로
봤다. 남정임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 많아, 아침 집에서 촬영소로 가는 길에 남의 포스터, 그러니까 문희나 윤정
희의 얼굴을 먼저 보면 그날 점심을 굶는다.
1967년 천승세의 ‘만선’을 찍을 때 남해의 어촌에서 촬영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가 암초에 부딪혔다. 깜깜한 밤
중 파선 직전의 공포 속에서 30여 명의 배우들은 침묵했고, 원로배우 변기종이 기도를 했다. 이어 김승호는 “하느
님 당신 너무하잖아. 종일 땡볕에서 촬영하고 우린 저녁도 굶었단 말야. 우리가 뭘 잘못해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
가는 거야!”라고 소리소리 쳤다. 그런데 옆에서 들으니 남정임은 자기 스케줄맨에게 “이번에 서울 가서 무슨 무슨
작품 계약을 꼭 해야지, 안 하면 아저씨는 해고”라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까치소리’ ‘봄봄’ ‘어느 여배우의 고백’ ‘수전지대’ 등 이 무렵의 남정임은 정열적인 연기를 했으며 라이벌 의식
외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행복한 여배우였다. 그런데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 전성기의 여배우
도 10년을 넘기기가 힘에 벅찼다.
문희가 신문사로 갑자기 시집가는 바람에 남정임도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때 재일동포 청년 하나가 신랑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 젊은이를 직접 만난 일이 있는데, 용모로 보나 그가 하는 한국말 솜씨로 보나 한국의 일급
여배우 남정임이 이렇게 숙맥 같은 사내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부 어머니는
그들의 재산에 홀딱 반했다는 소문이 흘렀다. 그녀가 소문도 없이 일본으로 떠나고 딸을 낳았다는 소식도 들렸다.
물론 우리들은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다른 배우로 채우면서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다.
1978년 가을, 남정임은 서울로 홀연히 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최인훈 원작 ‘웃음소리’를 맡기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거다, 다 잊어버리고 영화에 열중하자고 타일렀다. 짧은 가을 날씨의 햇볕을 아끼면서 우리는 광릉수목원 숲
속에서 며칠을 강행군하면서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사랑의 형태를 어느
정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남정임을 에스코트한 사내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두 번째 남편이다. 둘은 곧 아
들과 딸 낳고 행복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더욱이 남자가 부자라는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