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인
김 국 자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배우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보았다. 베를린 영화제는 프랑스의 칸 영화제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3대영화제라고 한다.
수상인터뷰에서 김민희는 “이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준 홍상수 감독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배우가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홍상수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불륜을 다룬 실화이기에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처녀가 스물두 살 연상의 유부남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자기 딸 또래의 애송이와 불장난에 빠진 홍상수 감독을 더 비난했다. 가장 큰 화젯거리는 김민희의 태도였다. 홍상수 부인이 김민희를 찾아가 “남편을 그만 가정으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때 김민희가 홍감독 부인에게 “남편 단속 제대로 못한 주제에 무슨 소리냐?”며 큰소리쳤다고 한다. 본처 앞에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은 판에 남편 단속 제대로 못했다고 충고까지 하다니 당돌하기 짝이 없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아버지 바람피우던 생각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항상 양복정장을 입고 다니는 멋쟁이였다. 호탕한 성격에 기분파 아버지를 친척들과 동네사람들 모두 좋아했다. 시골 어른들이 해결하기 어려운 관청용무라든지 애로사항을 척척 해결해주었기 때문이리라. 지방자치제 선거에 당선된 후부터 아버지의 인기는 대단했다.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치중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 가을이었다. 내 짝꿍이 감을 따는 날이라며 저희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과일 중에 감을 제일 좋아한다. 감을 먹고 싶은 마음에 그를 따라갔다. 우리 집엔 감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데, 친구네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감을 따고 우리들은 집안으로 날랐다. 집에 친구의 고모가 있었다. 나와 초면인데도 말랑말랑한 홍시를 골라주며 친절했다. 홍시를 실컷 먹고 돌아올 때, 바구니에 홍시를 가득 담아주었다. 우리 어머니도 홍시를 좋아하신다. 기뻐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웬 홍시냐?”고 물으셨다.
친구의 이름을 대며 그 애 고모가 준거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가 바구니를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마구 때렸다. 저녁도 굶고 쫓겨나 대문 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버렸다. 어머니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몰랐다. 춥고 배고파 이웃에 사는 이모네 집에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모가 “네가 맞을 짓을 했구먼!, 하필이면 그 집에서 홍시까지 얻어왔으니 쯧쯧, 쯧쯧” 하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애 고모가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이상하긴 했었다. 넥타이를 날마다 바꾸어가며 멋을 부리고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아버지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런 여자를 좋아할까? 어머니보다 예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애 고모는 어머니보다 잘 생긴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었다.
어느 날, 큰댁에 계신 할머니가 다니러 오셨다. 아들 삼형제를 둔 할머니는 무조건 아들 편만 드는 분이다. 우리 큰아버지는 소실과 딴살림 차린 지 오래되었다. 동네사람들이 ‘얻어 들인 첩만, 한 트럭이 넘는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사촌오빠와 사촌언니는 명절날이나 할아버지 제삿날에야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한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는 할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하소연하는 어머니를 꾸짖었다. “네 동서 보아라. 서방이 딴살림 차렸어도 군말 한마디 하더냐? 세상에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는 없단다.”며 호통을 치셨다. 맵디매운 고추바람 쌩쌩 날리며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무조건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법이여.”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 나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할머니 말씀처럼 아버지의 바람기는 저절로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가정에 충실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 가정에 평화가 깃들었다. 이 나이 되도록 조강지처 버린 남자 잘 되는 걸 보지를 못했다. 십중팔구 노후가 불행했다. 우리 큰아버지 역시 늙고 병들어 조강지처 수발 받다가 돌아가셨다. 경제력 있고 몸 성할 때 돌아오셨더라면 좋았으련만, 빈털터리 병든 남편 수발드신 큰어머니가 존경스럽다.
그보다 아버지의 애인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산소 옆에 나란히 모셔놓고, 정성껏 제사 지내드리는 사촌오빠의 효성에 감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