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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氏雜辨]
불씨잡변[佛氏雜辨]-01 불씨 윤회의 변 佛氏輪廻之辨
사람과 만물이 생생(生生)하여 무궁한 것은 바로 천지의 조화(造化)가 운행(運行)하여 쉬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태극(太極)이 동(動)하고 정(靜)함에 음(陰)과 양(陽)이 생기고, 음양(陰陽)이 변(變)하고 합(合)함에 오행(五行)이 갖추어졌다. 이에 무극(無極)?태극(太極)의 진(眞)과 음양 오행의 정(精)이 미묘(微妙)하게 합하여 엉겨서〔凝 형기가 이루어짐.〕사람과 만물이 생생한다. 이렇게 하여 이미 생겨난 것은 가면서 과거〔過〕가 되고 아직 나지 않은 것은 와서 계속〔續〕하나니, 이 과(過)와 속(續) 사이에는 한 순간의 정지도 용납되지 아니한다.
부처의 말에,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으므로 태어남에 따라 다시 형체를 받는다.”
하였으니, 이에 윤회설이 생겼다.
「주역」(周易 계사상 繫辭上)에,
“시(始)에 원(原)하여 종(終)에 반(反)한다. 그러므로 그 생사(生死)의 설을 알 수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정기(精氣)는 물(物)이 되고 유혼(遊魂)은 변(變)이 된다.”
하였다. 선유(先儒)는 이 글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천지의 조화가 비록 생생하여 다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임〔聚〕이 있으면 반드시 흩어짐〔散〕이 있으며, 태어남〔生〕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死〕이 있다. 능히 그 시(始)에 원(原)하여 그 모여서 태어남을 안다면 그 후에 반드시 흩어져 죽는 것을 알 것이며,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기화(氣化)하는 날에 얻어진 것이요, 원래부터 정신이 태허(太虛)한 가운데에 머물러 사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죽음이란 것은 기(氣)와 더불어 함께 흩어져 다시 형상이 아득하고 광막한〔漠〕속에 남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기는 물이 되고 유혼은 변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천지 음양의 기가 교합(交合)하여 바로 사람과 만물을 이루었다가,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돌아가는데 이르러서는, 바로 변이 되는 것이다. 정기가 물이 된다는 것은 정과 기가 합하여 물이 되는 것이니, 정은 백(魄)이요, 기는 혼(魂)인 것이며, 유혼(遊魂)은 변이 된다는 것은, 변이란 바로 혼과 백이 서로 떨어져 유산(遊散)하여 변하는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변이란 변화의 그 변이 아니라 이 변은 단단한 것이 썩음이요, 있던 것이 없어져 다시는 물(物)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홍로(烘爐)와 같아, 비록 생물이라 할지라도 모두 다 녹아 없어진다. 어찌 이미 흩어진 것이 다시 합하여지며, 이미 간 것이 다시 올 수 있으랴?
이제 또한 내 몸에 징험(徵驗)하여 본다면, 숨 한 번 내쉬고 들이쉬는 사이에 기가 한 번 들어갔다 나오나니, 이것을 일식(一息)이라 한다. 여기서 숨을 내쉴 때 한 번 나와 버린 기가 숨을 들이쉴 때 다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사람의 기식(氣息)에서도 또한 생생(生生)하여 무궁함과, 가는 것은 지나가고〔過〕오는 것은 계속〔續〕되는 이치를 볼 수가 있다.
또 밖으로 물(物)에 징험(徵驗)하여 본다면, 모든 초목이 뿌리로부터 줄기와, 가지와, 잎에, 그리고 꽃과 열매에 이르기까지 한 기운이 관통하여, 봄, 여름철에는 그 기운이 불어나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고, 가을?겨울철에는 그 기운이 오그라들어 잎과 꽃이 쇠하여 떨어졌다가, 이듬해 봄?여름에는 또 다시 무성하게 되는 것이나, 그러나 이미 떨어져 버린 잎이 본원(本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또 우물 속의 물을 보라. 아침마다 길어낸 물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불로 끓여 없애고, 옷을 세탁하는 사람이 햇볕에 말려 없애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러나 우물의 샘줄기에서는 계속하여 물이 솟아 다함이 없으니, 이 때 이미 길어간 물이 그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백곡(百穀)의 자라남도 마찬가지다. 봄에 10섬의 종자를 심었다가 가을에 1백 섬을 거두어들여 드디어는 1천 섬, 1만 섬에 이르나니 그 이익이 여러 배나 된다. 이것은 백곡도 또한 생생(生生)함이다.
이제 불씨(佛氏)의 윤회설을 살펴보자.
“혈기(血氣)가 있는 모든 것은 스스로 일정한 수(數)가 있어, 오고 오고 가고 가도 다시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하는데, 그렇다면 하늘과 땅이 물(物)을 창조하는 것이 도리어 저 농부가 이익을 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혈기의 등속이 인류로 태어나지 않으면 조수(鳥獸)?어별(魚鼈)?곤충(昆?)이 될 것이니, 그 수에 일정함이 있어 이것이 늘어나면 저것은 반드시 줄어들고, 이것이 줄어들면 저것은 반드시 늘어나며, 일시에 다 함께 늘어날 수도 없고, 일시에 다 함께 줄어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살펴보건대, 왕성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류도 늘어나고 조수?어별?곤충도 함께 늘어나는가 하면, 쇠한 세상을 당하여서는 인류도 줄어들고 조수?어별?곤충도 또한 줄어든다. 이것은 사람과 만물이 모두 천지의 기(氣)로써 생기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기가 성하면 일시에 늘어나고 기가 쇠하면 일시에 줄어듦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불씨의 윤회설이 너무나도 세상을 현혹하는 것에 분개하여, 깊게는 천지의 조화에 근본하고, 밝게는 사람과 만물의 생성(生成)에 징험하여 이와 같은 설을 얻었으니, 나와 뜻이 같은 사람은 함께 통찰하여 주기 바란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자네는 선유(先儒)의 설을 인용하여「주역」(周易)에 있는 ‘유혼(遊魂)은 변(變)이 된다.’는 말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혼(魂)과 백(魄)은 서로 떨어져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내려간다.’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니, 그것은 불씨(佛氏)가 말한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멸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나는 대답하기를,
“옛날에 사시(四時 봄?여름?가을?겨울)의 불은 모두 나무에서 취(取)하였으니 이것은 원래 나무 가운데에 불이 있으므로 나무를 뜨겁게 하면 불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백(魄) 가운데에 혼이 있어 백을 따뜻이 하면 혼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무를 비비면 불이 나온다.’는 말이 있고 또 ‘형(形)이 미시 생기면 신(神)이 지(知)를 발(發)한다.’는 말도 있다. 여기서 형(形)은 백(魄)이요, 신(神)은 혼(魂)이다. 불이 나무를 인연하여 존재하는 것은 혼과 백이 합하여 사는 것과 같다. 불이 다 꺼지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이는 사람이 죽으면 혼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의 연기는 곧 사람의 혼기이며 불의 재는 곧 사람의 체백이다. 또 화기(火氣)가 꺼져 버리게 되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이 죽은 후에 혼기와 체백이 또다시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는 이치는 또한 명백하지 않은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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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잡변[佛氏雜辨]-2 @ 불씨 인과의 변 佛氏因果之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의 불씨의 윤회설에 대한 변증(辨證)은 지극하다마는, 자네의 말에, ‘사람과 만물이 모두 음양 오행의 기(氣)를 얻어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어진 사람, 불초(不肖)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장수(長壽)하는 사람, 요절(夭絶)하는 사람 등이 같지 않으며, 동물의 경우에는 어떤 것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실컷 부림을 받고 드디어는 죽음을 감수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물이나 낚시나 주살〔?〕의 해(害)를 면치 못하기도 하고, 크고 작고 강하고 약한 것들이 저희끼리 서로 잡아먹기도 하니, 하늘이 만물을 냄에 있어 하나 하나 부여해 준 것이 어찌 이렇게도 치우쳐 고르지 못하단 말인가? 이렇게 보면 석씨(釋氏)의 이른바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였거나 악한 일을 한 것에 모두 보응(報應)이 있다.’는 것이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또 살아 있을 때 착한 일을 하거나 악한 일을 하는 것을 인(因)이라 하고, 다른 날에 보응을 받는 것을 과(果)라고 하였으니, 이 말 또한 근거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면, 나는 이에 대답하기를,
“사람과 만물의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앞에서 자세히 논(論)하였으니, 이를 이해한다면 윤회설은 저절로 변명(辨明)될 것이요, 윤회설이 변명되면 인과설(因果說)은 변명하지 않아도 자명(自明)해진다. 그러나 이미 질문이 나왔으니 내 어찌 근본적으로 다시 말하지 않으랴? ‘저 이른바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것은 엇바뀌어 운행되며,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參差不齊〕그러므로 그 기(氣)의 통(通)함과 막힘〔塞〕, 치우침〔偏〕과 바름〔正〕, 맑음〔淸〕과 흐림〔濁〕, 두꺼움〔厚〕과 얇음〔薄〕,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의 차가 있다. 그리하여 사람과 만물이 생겨날 때에 마침 그 때를 만나 바름과 통함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힘을 얻는 것은 물(物)이 된다. 사람과 물의 귀하고 천함이 여기에서 나눠지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기(氣)의 맑은 것을 얻은 사람은 지혜롭고 어질며, 흐린 것을 얻은 사람은 어리석고 불초하며, 두꺼운 것을 얻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엷은 것을 얻은 사람은 가난하고, 높은 것을 얻는 사람은 귀하게 되고, 낮은 것을 얻은 사람은 친하게 되고, 긴 것을 얻은 사람은 장수(長壽)하게 되고, 짧은 것을 얻는 사람은 요절(夭折)하게 되는 방법이니, 이것이 대략이다. 물(物)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기린?용?봉(鳳)의 신령함이나, 호랑(虎狼)?독사와 독(毒)함이나, 춘(椿)?계(桂)?지(芝)?란(蘭)의 상서로움이나, 오훼(烏喙 맛의 쓴 독약의 일종.)?씀바귀의 씀과 같은 것은 모두 치우치고 막힌 가운데에서도 선악(善惡)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어떤 의식〔意〕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주역」(周易 건괘(乾卦)에 보임)에 이르기를 ‘건(乾)의 도가 변화하여 각각 성명(性命)을 정(定)한다.’ 하였으며, 선유(先儒)가 말한 ‘천도(天道)가 무심(無心)히 만물 두루〔普〕덮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의 의술(醫術)이나 점술(占術)은 조그마한 술수〔數〕이지만, 점치는 사람은 사람의 복(福)이나 화(禍)를 정하는데 반드시 오행(五行)의 쇠퇴하고 왕성함을 근본으로 추구한다.
‘이 사람은 목명(木命)이니 봄을 맞아서는 왕성하지만 가을을 맞으면 쇠퇴하여 그 용모는 푸르고 길며 그 마음씨는 자비롭고 어질다.’ 하고 ‘이 사람은 금명(金命)이므로 가을에는 길(吉)하나 여름에는 흉(凶)하며 그 용모는 희고 네모나며, 그 마음씨는 강(剛)하고 밝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때로는 수명(水命)을 때로는 화명(火命)을 말하여 해당시키지 않는 것이 없으니, 용모의 추(醜)함이나, 마음의 어리석고 사나움이 모두 오행의 품부(稟賦)가 치우침에 근거〔本〕한다고 한다.
또 의사가 사람의 병을 진찰할 때에도 반드시 오행이 서로 감응(感應)함에 근본을 추구(推究)한다. ‘아무개의 병은 한증〔寒〕이니 신수(腎水)의 증세’라 하고 ‘아무개의 병은 온증〔溫〕이니 심화(心火)의 증세’라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런 유(類)의 것이다. 따라서 약(藥)을 쓸 때에도 그 약 성질의 온(溫)?양(凉)?한(寒)?열(熱)과 그 맛의 산(酸)?함(?)?감(甘)?고(苦)를 음양 오해에 나누어 붙여서 조제(調劑)하면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우리 유가(儒家)의 설에 ‘사람과 만물은 음양 오행의 기를 얻어서 태어났다.’는 것이 명백히 증험되는 것이니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과연 불씨(佛氏)의 설과 같다면 사람의 화복과 질병이 음양 오행과는 관계없이 모두 인과(因果)의 보응(報應)에서 나오는 것이 되는데, 어찌하여 우리 유가의 음양 오행을 버리고 불씨(佛氏)의 인과 보응설을 가지고서 사람의 화복을 정하고 사람의 질병을 진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불씨의 설이 황당하고 오류(誤謬)에 가득차 족히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거늘, 그대는 아직도 그 설에 미혹되려는가?“
할 것이다.
이제 지극히 절실하고도 보기 쉬운 예를 들어 비유해 보자.
술이라 하는 것은 국(? 누룩)과 얼(蘖 엿기름을 넣어 만든 죽)의 많고 적음과, 항아리〔甕〕의 덜 구워지고 잘 구워짐과, 날씨의 차고 더움과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이 서로 적당히 어울리면 그 맛이 매우 좋게 된다. 그러나 만일 얼(蘖)이 많으면 맛이 달고, 국(?)이 많으면 맛이 쓰고, 물이 많으면 맛이 싱겁다. 물과 국(?)과 얼(蘖)이 모두 적당하게 들어갔다 할지라도 항아리의 덜 구워짐?잘 구워짐에나, 또는 날씨의 차고 더움이나 기간의 오래됨과 가까움에 서로 어긋나 합해지지 않으면 술맛이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맛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용도도 상(上)?하(下)로 다르게 되며, 지게미〔糟粕〕같은 것은 더러운 땅에 버려져 발길에 채이고 밟히게도 된다. 그런즉, 술의 그 맛있게 되고 맛없게 되는 것과, 상품도 되고 하품도 되는 것과, 쓰이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 이 모두가 다 일시적으로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럴 뿐이니 술을 만드는 데에도 역시 인과의 보응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겠는가? 이 비유는 비록 비근(鄙近)한 것이기는 하지만 극히 명백하여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른바 음양 오행의 기는 서로 밀고 엇바뀌어 운행되어서 서로 드나들어 가지런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도 만번 변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그 이치가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성인(聖人)은 가르침을 베풀어, 배우는 사람에게 기질(氣質)을 변화하여 성현(聖賢)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나라를 사람에게 쇠망〔衰〕을 바꾸어 치안(治安)으로 나아가게도 하나니, 이는 성인이 음양의 기(氣)를 돌이켜 천지가 만물을 생성(生成)하는 공(功)에 참여하여 돕는 까닭이다. 어찌 불씨(佛氏)의 인과설이 그 가운데에 용납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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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道傳)이 틈을 내어「불씨잡변」(佛氏雜辨) 15편과「전대사실」(前代事實) 4편을 지었는데 이미 이루어짐에 객(客)이 읽고 말하기를,
“자네가 불씨(佛氏)의 윤회설을 변정(辨正)하는 데 있어 만물이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인용하여 밝혔는데 그 말이 근사하긴 하나, 불씨의 설에 이르기를,
‘만물 중에 무정물(無情物)은 법계성(法界性)으로부터 왔고, 유정물(有情物)은 여래장(如來藏 진여(眞如)에 섭수(攝受;마음을 관대히 먹어 받아들임)된다는 것)으로부터 왔다.’
【안】무정물이란 바위들이나, 풀?나무와 같은 것이고, 법계란 무변(無邊)이라는 말과 같으며, 유정물이란 본각(本覺)인 중생심(衆生心)과 모든 불성(佛性)이 본래 여래와 같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대개 혈기(血氣)가 있는 물(物)은 다같이 지각(知覺)이 있고 지각이 있는 물(物)은 다같이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자네는 물(物)의 정(情)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같은 격으로 동일하게 말하니, 헛되이 말만 소비하고 천착(穿鑿)하고 부회(附會)하는 병을 면할 수 없지 않은가?“
하였다. 이에 대답하여,
“아아! 이것이 바로 맹자의 말처럼 근본(根本)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기(氣)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본시 하나일 뿐인데, 동(動)과 정(靜)이 있어서 음(陰)과 양(陽)이 나누어지고, 변(變)과 합(合)이 있어 오행(五行)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주자(周子 이름은 돈이(敦?)호는 염계(濂溪))가 말하기를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라고 하였다.
대개 동하고 정하고 변하고 합하는 사이에, 그 유행하는 것은 통(通)과 색(塞)과 편(偏)과 정(正)의 다름이 있으니, 그 통함과 정을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그 편과 색을 얻은 것은 물(物)이 되며, 또 편과 색 가운데서도 그 조금 통한 것을 얻은 것은 금수(禽獸)가 되고, 전연 통이 없는 것은 초목이 되나니, 이것이 바로 물(物)이 정(情)이 있고 없는 것으로 나누어진 까닭이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동(動)하되 동함이 없고, 정(靜)하되 정함이 없는 것은 신(神)이니 그 기(氣)가 통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신(神)이라 하는 것이요, 동하면 정함이 없고, 정하면 동함이 없는 것은 물(物)이니 형(形)과 기(氣)에 국한되어 서로 통할 수 없으므로 물(物)이라 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개 동하여 정함이 없는 것은 유정물이라 이름이요, 정하여 동함이 없는 것은 무정물이라 이름이니, 이 또한 물의 정(情)이 있고 없음이 다 이 기(氣) 가운데에서 생기는 것이니, 어찌 둘이라고 할 수 있으랴?
또 사람의 한 몸에도 혼백(魂魄)이나 오장(五臟)이나 귀?눈?입?코?손?발 등속과 같은 것은 지각(知覺)과 운동이 있고, 모발?손톱?이〔齒〕등속은 지각도 운동이 없으니, 그러면 한 몸 가운데에도 또한 정(情)이 있는 부모로부터 온 것과, 정이 없는 부모로부터 온 것이 있으니, 부모가 둘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객(客)이 다시 말하기를,
“자네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러 가지로 변론한 설이 성명(性命) 도덕(道德)의 묘(妙)와 음양(陰陽) 조화(造化)의 미(微)한 데에 출입하여, 진실로 처음 배우는 선비들도 알지 못할 바가 있는데, 하물며 어리석고 용렬한 아래백성들이랴? 자네 말이 비록 정묘(精妙)하긴 하나, 한갓 호변(好辯)한다는 비방(誹謗)이나 얻을 뿐, 저쪽이나 이쪽의 학문에 함께 손(損)도 익(益)도 없을까봐 나는 염려하며 또 불씨(佛氏)의 설이 비록 황당무계(荒唐無稽)하나, 세속의 이목에 익숙하여 빈 말로는 타파(打破)할 수 없을까봐 염려된다. 하물며 그들의 이른바 방광(放光)의 상서(祥瑞)나 사리(舍利)로써 여러 몸으로 화생한다는 이적(異跡)이 이따금 있음에랴? 이것이 세속에서 감탄하고 이상히 여겨 믿고 복종하는 까닭이다. 자네는 아직도 공박(攻駁)할 말이 있느냐?”
하였다. 다시 대답하여,
“이른바 윤회(輪廻) 등의 변론은 내 이미 다 논(論)하였다. 비록 그 폐(蔽)가 깊어서 갑자기 깨닫게 할 수는 없겠지만, 학문을 좋아하는 한두 사람의 선비라도 내 말로 인하여 돌이켜 구한다는 것의 얼(얻?)음이 있을 것이니, 이에 다시 덧붙여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