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성경은 어떻게 번역되어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
- 한국성경번역사 개관 -
2011년은 우리나라 성경이 완역되어 우리 손에 주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동시에 흠정역성경(King James Version)이 역간된 지 400주년이 된다.이때를 기념하여 이 논문에서는 한글성경번역사를 간단히 정리하였다. 성경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때는 1816년 9월 5일이었고, 성경의 일부인 주기도문이 처음 번역된 때는 1932년 7월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의 성경번역은 1882년 만주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처음 역간되었고, 1887년에는 로스역 신약성 경이 「예수셩교젼서」라는 이름으로 역간된 일이 있고,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1884년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을 시작으로 복음서와 사도행 전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縣吐 漢韓 新約聖書)라는 이름으로 역간된 바 있다.
국내에서의 성경번역으로는 사역본 성경이 발행되기도 했으나 1900년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가 간행되었다. 이 책은 수정작업을 거쳐 1906년 성경번 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로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 1938년 「개역 신약성서」가 출판되기 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 경이었다. 1900년 이후 구약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1910년 4월 2일 번역을 완료하였고, 1911년 신구약 구약성경이 합본되어 「성경젼서」라는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의 개역작업이 이루어졌고, 1938년에는 「성경개역」이 출판되 었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과 1956년 새로운 맞춤범에 따라 일부 수정되었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는데, 이 「성경전서 개역한 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해방 후 성경 새번역 작업이 이루어져 1967년 12월 15일에는 신약이 완역되어「신약전서 새번역」이 간행되었다. 또 신구교 간의 공동번역 작업을 시도하여1977년 부활절을 기해 「성서」라는 이름에 부제로 ‘공동번역’이라는 표제를 붙인 소위 공동번역성서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되었다. 이 성경에서 신약은1971년에 번역된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개역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쉬운성경이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글 개역성경의 개정작업이 이루어 져, 1995년 11월에는 개역개정판 신약이 출판되었고, 1997년 6월에는 구약개역이 완료되었다. 약 6개월간의 의견수렴과 감수의 과정을 거쳐 1998년 8월 31일 「성경전서개역 개정판」을 발행했다. 이 개역개정판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강단용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교단이나 교회가 적지 않았다. 대한성서공회는 교계의 여론을 반영하여 2000년 새로운 개역개정판(2판)을, 2003년에 제3판을 발행했다.
지금까지 성경번역과 반포사업은 1895년에 창립된 대한성서공회가 주관하거 나 주도해 왔으나 개역 개정판의 발행을 시점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고신, 개혁, 고려 등 보수적인 107개 교단은 ‘한국성경공회’(The Korean Society of the Holy Bible)를 창립하고, 1952년판 개역성경을 대본으로 부분적인 수정을 하여 1997년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성경」을 출판했으나 대한성성공회 가 의이를 제기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한국성경공회는 새로운 번역을 시도하여 2007년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교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한국에서 성경은 한글의 보급과 문맹 타파와 계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금년 2011년은 우리나라 성경이 완역되어 우리 손에 주어진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동시에 영어성경의 왕좌로 불린 흠정역성경(King James Version)이 역간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의 성경완역을 기념하여 여러 행사가 준비되기도 하지만 이런 기회에 우리나라말로 성경이 번역된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한글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 의해 번역되었는가를 정리해 두고자 한다.
1. 한국에 소개되는 성경
그렇다면 언제 어떤 경로로 한국에 성경이 전래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충남 서천군의 마량진은 한국에서 첫 성경 도래지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 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를 작성하라는 명을 받은 영국의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Alceste)호와 리라(Lyla)호가 순조 16년(1816년) 9월 5일,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육했을 때 함장 머레이 맥스웰(Murry Maxwell)과 바질 홀(Basil Hall) 대령이 마량진 첨사(僉使) 조대복과 현감(縣 監)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는데,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로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경은 영어성경이 분명하지만 흠정역 성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는 한국을 방문한 첫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가 내한하기 8년 전이었다.
그 후에는 중국어 성경이 한국에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최초의 한문성경이 출간되었는데, 이 성경은 중국에서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의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중심 이 되어 번역한 성경이었다. 귀츨라프도 이 성경 번역에 일조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1) 분명치 않다. 이 한문성경은 1818-1813년에 발간되었으나 귀츨라프 가 중국 선교사로 일한 때는 1831년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츨라프가 영국에서 모리슨을 만난 이후 동양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1823년 화란선 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소속 선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때모리슨의이성경번역에도움을주었을가능성도있다.
어떻든 한자문화권에서는 곽실렵(郭實獵)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귀츨라프는1832년 7월 동인도회사의 통역 겸 선의(船醫), 선목(船牧)으로 영국 상선‘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까지 오게 되었다. 그가 산동반도를 거쳐 황해도를 가로질러 서해안 장산곶(長山串), 녹도(鹿島),불모도(不毛島)를 거쳐 충남 보령시 오천면의 고대도(古代島)에 정박한 날은 7월 25일이었다.
이 때 그는 홍주목사 이민회 등 조선 관리들에게 조선국 왕에게 통상을 청원하는 서한과 선물을 보냈다. 선물은 한문으로 번역된 두 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로 추정되는 26종의 도리서(道理書), 그리고 만원경 등인데, 이를 순조왕에게 진상하도록 전달했다. 그는 조정의 회신을 기다리는17일동안(7, 25-8, 11) 고대도 내항에 체류하면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 문서를 배포했는데, 그 성경이 「신천성서」였을 것이다. 이 때 귀츨라프는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비록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이었다. 모리슨의 한문 구약성경(1859)는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때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1865년과 1866년 어간 런던선교회 제레마인 토마스((Rev. 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두 차례의 조선 방문하고 약 4개월간 조선 영토에 체류했는데, 그의 방한 목적이 성경보급을 통한 선교개척이었다. 그가 순교하기 전 한국인에게 성경을 배포햇는데, 그것은 중국어 성경이었다. 윌리암슨으로부터 지원 받은 “많은 양의 책들”을 전파하 고자 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그가 조선인에게 분배한 책이 어떤 중국어 성경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양선에 의하면 장사포(場沙浦)에서는 홍신길(洪信吉)소년이, 속호정에서는 김영섭(金永 燮)과 김종권(金宗權)이, 만경대에서는 최치량(崔致良)이 한문성경을 받았 는데, 후일 그들은 강서와 평양교회 설립자가 되었고, 토마스를 죽이려했던 박춘권(朴春權)은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고 한다. 또 성경을 받아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평양장대현교회의터가되었다고말한다.2)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토마스 목사에게 성경을 받아 간 한 사람의 조카가 이영태인데, 그가 후일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레이놀즈(W. D. Reynolds)와 함께 성경번역사업에 동참했다고 한다.3)성경이 우리 말로 번역되기 전에 이렇게 성경이 한국에 소개된 것이다. 그 외에도 북중국에 주제하던 영국선교사 윌리암슨은 남만주 고려문에서 조선인 들에게 성경을 배포한 일이 있고, 1868년에는 북중국 주제 미국인 선교사 마티어가 대동강 하류 연안에서 조선인에게 성경을 배포한 일이 있다.4)
1) 원용국, 「성경형상의 역사」(성광문화사, 1979), 216.
2) 김양선, 「한국기독교사 연구」(기독교문사, 1971), 48.
3) 한영세, 편, 「한국성서 찬송가 100년」(기독교문사, 1987), 12.
4) 원용국, 217.
2. 국외에서의 성경 번역
2.1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
비록 우리나라에 입국하지는 못했으나 국외에서 한국어 성경번역에 기여한 인물은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 1837-1905)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 1841-1915)였다.
스코틀랜드연합 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했는데,메킨타이어는 1871년에, 존 로스는 1872년에 중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는 없었으나 조선에 대한 영적 부담을 느끼고 조선어 성경번 역을 의도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김진기(金鎭基), 이성하(李成夏), 백홍준(白鴻俊) 등 의주청년들 과 접촉하게 된다.
이들 조선청년들은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79년 매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로스는 1877년부터 이응찬으로 도움을 받으며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1879년 로스의 안식년 기간 중에는 매킨타이어가 이 일을 계속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최초로 한국어 성경이 출판되었는데,그것이 1882년 3월 24일 출판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5월 12일 출판된「예수셩교 요안복음젼셔」였다.
두 복음서는 3천권씩 인쇄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장은 구별되었으나 절(節) 표시나 구분이 없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느님, 쥬(主), 예수, 키리스토 등 하나님 칭호 전이나 후에는 반드시 여백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번역본에서 하나님 을 ‘하느님’으로, 그리스도를 ‘키리스토’로, 요한을 ‘요안’로, 세례를 ‘밥팀 네’로 표기한 점도 흥미롭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이어 1883년에는 마태, 마가복음이, 1884년에는 사도행전이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5천권씩 인쇄되었다. 1885년에는 로마인서 와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이 역간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 경이 완역되었다. 이 성경이 순 한글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인데, 보통「로스역 성경」(Ross Version)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것이 한글어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였다.
위에서 언급한 의주청년들 외에도 서상륜(徐相崙), 이익세(李 益世), 최성균(崔成均)등이 번역에 관여했다. 성경 번역 작업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고, 봉천 의 문광셔원에서 출판되었다.
이때의 한글성경 번역 방법에는 다소 불완전한 점이 없지 않았다. 이응찬 등 한국인 조력자들은, 중국에서 1864년 간행된 한문 신약성경 「신약전서문리」(新約全書 文理)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과 흠정역(KJV), 그리고 흠정역을 개역한 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등을 참고로 검토한 후 역문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말하자면 한문 신약성경이 대본(臺本)으로, 헬라어성경과 영어성경은 준 대본(準臺本)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번역본은 축자적 번역이라기보다는 의미의 동등성을 중시했다. 또 이 번역본에서는 한문 투의 어휘가 적고 구어체 가 많이 사용되었으나, 서북방언 등 토착방언이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신약성경이 국내에서 1900년「신약젼셔」가 출판되기까지 유일한 한국어 신약성경 번역본이었고, 그 이후 한글성경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5) 한글성경 번역에 기여한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공헌을 고려하여 마삼락(Samuel H. Moffett)는 이들을 한국의 위클리프(Wycliffes of Korea)라고 불렀다.
5) 1882년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로스와 그 동료 한국인들에 의해 한만(韓滿)국경지대인 서간도에 배포되어 개종자가 생겨나 100명의 한국인들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이만열, 기독교 수용사, 40). 또 번역과 출판에 협력했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에 의해 의주를 거쳐 이북지방에 비밀히 보급되었다. 한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각 1천 권은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톰슨(J. A. Thomson)에게 보내졌고, 톰슨 은 일본인 매서인을 통해 이 책을 부산과 대구 등 경상도 일원에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규, 「부산지방 기독교 전래사」(도서출판 글마당, 2001), 25-28
2.2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만주 뉴좡(牛莊)에서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이수정(李 樹廷, c. 1842-c. 1877)에 의해서 성경번역이 시도되었다. 지금의 외교통상부 에 해당하는 통리외무아문(統理外務衙門)의 협판(協辦)이었던 이수정은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민비를 보호해 준 공로에 대한 고종황제의 배려로,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비공식 수행원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가 도쿄에 도착했을 때가 1882년 9월 28일이었다. 그는 곧장 친구인 안종수(安宗洙)의 소개로 농정(農政)의 권위자였던 쯔다 센(津田 仙, 1837-1908)을 찾아 갔고 그를 통해 농학은 물론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된다.6)그로부터 3개월 후인 1882년 12월 25일부터 야스까와(安川亭)목사가 담임하 고 있던 쓰키지(築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신앙은 급속하게 성장하여 1883년 4월 29일 주일에는 동경의 로개쥬쵸(露月町)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Knox)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일본에서 세례 받은 첫한국인이된것이다. 세례받은그는1883년말에는7, 8명의한국인 수세자를 얻음으로서 일본에서 최초의 한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특히 그는 녹스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연구에 진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enry Loomis)로부터 한국 어 성경 번역을 제의받은 그는 야스까와 목사의 도움으로 한문성경을 대본으 로 번역을 시작했다. 그래서 「신약성서마가전」(新約聖書馬可傳, 1884년)을 시작으로 마태전(馬太傳), 누가전(路加傳), 요한전(約翰傳), 그리고 사 도행전(使徒行傳) 등을 번역하였는데, 이렇게 번역한 성경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縣吐 漢韓 新約聖書)였다. 이 책은 1887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성서공회’를 통해 출간했는데 이 번역본은 신약성경 전서가 아니라 복음서와 사도행전 만으로 엮어진 성경이었고, 완전한 번역본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한문에 토(吐, 口訣)를 단 성경이었다. 한문에 익숙한 조선인들이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수정은 진정한 의미의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첫 책은 마가복음인데, 부피가 작고 내용이 간결했기 때문에 이 책부터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5년 2월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 라는 이름으로 요꼬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되었다. 초판은 1천부를 인쇄하였는데, 그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라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 마가복음 번역본이었다.
이수정은 한문으 로 된 마가복음(上海和漢聖譯書)를 주 대본으로 하되 일본어, 영어,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 하였다고 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만주에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와는 달리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였고 고유명사 표기가 원어에 가깝고 한문투의 용어가 많다. 이수정은 하나님 칭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는데, 한문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로,일본어 성경에서는 ‘가미’(神)로 번역하였으나, 그는 ‘천주’(天主)로 번역 하였다. ‘천주’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이미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세례’는 ‘밥테슈마’로, 그리스도는‘크리슈도스’로 각각 음역하여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이 번역본은 가능한 순 한글역을 지향하되 지식인들의 편리를 위해 중요한 단어는 한자로 표기하고 한글로 토를 달았다. 이렇게 번역된 마가복음서를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라고 한 것은 유교와 불교계통의 서적의 한글역을 ‘언’라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수정 역의 마가복음은 1882년 만주에서 간행된 누가복음 번역본에 이어 한글로 번역, 간행된 두 번째 한글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정은 계속하여 마태, 누구복음서도 완역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수정의 1885년판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그리고 한국인 송덕조 등의 공역으로 개정되어 요꼬하마에서 재출간되었다.7)
6 ) 쯔다 센의 인물, 활동, 농업정책, 그리고 이수정과의 접촉과 한국에 준 영향 등에 대해서 는 金文吉, 「津田 仙と朝鮮, 朝鮮キリスト敎受容と新農業政策」(東京: 世界思想社, 2003)을 참고할 것.
7)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번역 외에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미국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한국은 개항한 이후였으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지체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883년과 1884년에 녹스목사의 이름으로 “조선의 사정”(Condition of Korea)이라는 서한 형식의 글을「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발표하였다. 이 글이 흔히 ‘그리 스도의 종 리쥬테’(A Servant of Christ Rijutei)의 호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수정은 이 글에서 “혹시 미국의 선교단체가 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 로 전도자를 보내시겠지만 미국의 선교사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한국 선교를 간절하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 글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라의 내한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그가 1886년 귀국하여 국내에서는 활동하지 못했으나 한국 에서의 복음화를 위한 예비적 사명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그의 입신과 수세, 그리고 성 경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은 그를 한국의 마게도냐인(A Macedoonian from Corea)이라고 불렀다.
3. 국내에서의 성경 번역
3.1 몇 가지 사역본(私譯本)8)
해외에서 은밀하게 성경번역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876년에는 개항하게 되고 일본에 이어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韓美修好通商條約)하게 되자 서양인의 입국이 가능해 졌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이수정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 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인성경이 없는 상태 에서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성경번역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이런 현실에서 1887년 2월 7일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를 번역책임자로 임명했다. 그 첫 작품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7년 펴낸 「마가의 젼복음셔 언」였다. 그러나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이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를 개역한 것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잠정적으로 이 책을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에이책을수정하게된것이다.
이외에는성경번역작업이위원회 차원에서 추진되지 못했고 도리어 성경번역은 사역(私譯)의 차원에서 시도되었다. 그것이 아펜젤러가 1890년 간행한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와 1892년 간행한 「마태복음젼」, 1892년에 게일이 펴낸 「도젼」과 펜윅(M. C. Fenwick)이 펴낸 「요한복음젼」이다.
이런 상황에서 1890년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만주에서 번역된 로스역 성경의 수정판을 낼 것을 요청했다. 한국의 시급한 현실에서 수정본이 보다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 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그러나 성서번역위원회는 이런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을 위임했다.그러나 이 일이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하여 1892년 1월 20일 마태복음서가 번역되어 「마태 복음전」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기존성경의 수정본이 아닌 국내에 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되었다.
8) 3.1항에서 3.4.항까지의 내용은 박창환, 「성경의 형성사」(대한기독교서회, 1969), 99-108, 원용국, 「성경형상의 역사」, 215-230, 그리고 한영세, 편, 「한국성서 찬송가 100년」(기독교문사, 1987)에 수록된 이덕주, “한글성경 번역사 개관,” 18-55를 참고하였음.
3.2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신약성경 번역 작업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는 1893년 5월에 조직된 상임성서 실행위원회였다. 영국성서공회 만주지부 책임자였던 켄 무어(A. Kenmure)의 내한을 계기로 성경번역을 새로운 차원에서 검토하게 되었다. 사역이나 수정 본은 한계가 있으므로 보다 완전한 번역본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 다고 본 것이다.
이런 필요에 부응하여 1893년 한글성경 번역 사업을 관장할‘상임성경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가 조직되 었고, 그 휘하에 이 일을 실행할 구체적인 번역 위원회인 ‘성경번역자회’(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때 선임된 위원으로는 언더우드, 게일(J. S. Gale)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스크랜톤(W. B. Scranton) 등이었고, 성공회의 트롤로프(M. N. Trollope)는 개인자격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남장로교회의 레이놀즈(W. D. Reynolds)가 추가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위원회에서 언더우드는 위원장으로, 스크랜 튼은 서기로 선출되었다. 성경번역의 시도와 함께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것은 커다란 발전이었다.
성경번역은, 각 위원들은 분배된 신약의 책들을 독자적으로 번역하되 그리 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성경과 일본어 성경을 준 대본으로 참고하여 선교사들을 돕고,선교사들은 한국인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 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후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처 번역자회 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Tentative edition of the board)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과정이 얼마나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되 었는데, 마태복음 외에는 개인역에 가까웠다. 번역절차를 거쳐 위원회의 공인 시안본으로 제작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 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전을 번역자회가 시안본 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역본이었다.9)
1896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누가복음이 완성되었고, 1897년에는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번역되었고, 1898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골로세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전후서,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2,3,서와 유다서가 번역되었고, 1899년에는 에베소서가 번역되었고 1900년에는 요한계시록이 번역되었다.
신약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자 이들 낱권이 묶어져 한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였다.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번역자회의 검토를 거치지 않는 개인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여 1900년9월 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 감사예배가 드려졌다.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만족스러운 번역으로 받아드려지지 않았다.그것은 고린도전서 이후 계시록까지의 책들은 번역위원회가 수정하거나 독회를 거치지 않는 개인역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책이 출판되자 번역자회의 공인을 위한 수정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 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하여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다른 배와 충돌하는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하는 사고를 당했는데,이때가 1902년 6월 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 즈를 성경번역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하였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성경 수정작업이 추진되어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 서」가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 1938년 「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 까지 한국교 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었다.
이상과 같은 성경번역사업은 선교사들의 노고로만 이루어 진 것은 아니었 다. 이런과정에서한국인조력자의수고또한적지않았다. 성경번역사업에 참여한 한국인으로는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외에도 게일의 일생동안의 동료이자 번역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 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 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있다.
9) 한영제, 24.
3.3 구약성경 번역 작업
1900년의 「신약젼셔」가 출판된 후 자연스럽게 구약성경 번역이 시작되었 다. 그러나이보다앞서구약의책이번역되기시작했는데, 그첫책이피터스(A. A. Pieters)의 사역본으로 1898년 출판된 「시편촬요」였다. 이 책은 시편 전편을 번역한 것이 아니고 저주시편을 제외한 62편을 번역한 것이지만 한국에서의 구약번역의 효시가 된다. 피터스는 한국에 온 유일한 유대인 출신 선교사인데, 미국성성공회 파송으로 내한한 그는 시편을 번역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위원, 혹은 수정위원으로 활동 하며 성경번역작업에 기여하였다.
1900년 이후 구약성경 작업도 번역자별로 구약의 책을 분담하여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창세기를, 언더우드는 시편을, 게일은 잠언과 사무엘 서를, 스크랜톤은 이사야서를, 레이놀즈는 여호수아서를 책임 맡았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쉬 이루어지지 못했고 지체되었다.
또 번역자들이 교체되거나 하디(R. A. Hardie), 마펫(S. A. Moffett), 노블(W. A. Noble) 등의 선교사들이 번역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으나 단기간 일하고 사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레이놀즈와 두 사람의 한국인 김정삼 과 이승두에게 구약성경 번역의 책임을 일임하였다. 이 두 한국인이 공식적인 성경번역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레이놀즈가 있던 전주에서 번역작업에 몰두하여 1910년 4월 2일 드디어 구약성경 번역 작업을 완료하였다.
말하자면 구약성경 번역 작업은 10년이 소요된 것이다. 그 결과로 1911년 구약성경이 이미 출판된 신약성경과 묶어져 「성경젼서」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구약젼서」가 출판되기 이전 낱권으로 창세기, 시편(1906),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전후서, 말라기(1907), 열왕기상하, 이사야서 번역본(1908)이 출판되었으나 이제 이 모든 책들이 한권으로 묶어져 「구약젼 서」로 간행된 것이다.
미국성성공회는 이 책을 상(창세기-역대하), 하(에스라-말라기) 두 권으로 출판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성경전서였다.이 성경은 성경원문을 참고하였지만 1901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을 주로 참고하였고, 한문성경이 참고된 흔적이 짙다. 이 번역이 이루어지기까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그리고 한국인 김정삼, 이승두의 노고가 컸다.
3.4 성경 개역작업
이세상에서그어떤성경도완전한것은없다. 어떤이들은흠정역성경은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에도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고 계속적인 수정 작업이 필요했듯이 「성경젼서」가 출간되자 말자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 다. 특히 구약개역이 시급했다. 그래서 먼저 구약을 개역하기로 하고 1911년‘구약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를 구성하였다.
개역작업은 대영성서 공회가 발행한 긴즈버그(C. D. Ginsburg, 1908)가 편집한 히브리어 성경이 사용되었다. 이 작업에 헌신한 인물들이 언더우드와 게일 그리고 레이놀즈였 다. 성경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레이놀즈는 그 동안 성경번역 작업에 몰두하여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 사임하였고,언더우는 1916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남으로 개역작업도 순탄하지 않았다.그러나 1924년 이후 레이놀즈가 다시 번역자로 동참하였고, 후에는 감리교의 케이블(E. M. Cable), 하디(R. A. Hardie), 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엥겔(G. Engel) 선교사가 위원으로 선임되어 이 일을 도왔다.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이었던 게일은 자신이 추구하는 조선어 풍 번역에 대한 다른 개역자들이 반발로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구역성 경 번역에 몰두하여 사역 구역성경을 출간했는데, 그것이 1925년 기독교창문 사에서 펴낸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이다. 이 일에도 한국인 조력자 이원모(李源謨), 이창직(李昌稙), 이교승(李敎承)의 도움이 컸다.비록 게일은 개역위원직을 사임했으나 한국성경 번역사에서 그가 남긴 기여와 역할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
구약성경 개역작업은 이런 저런 일로 지체되었으나 피터스, 베어드, 한국인 남궁혁(南宮爀), 김관식(金觀植), 김인준(金仁俊), 이원모 등이 가담하여 이 일을 추진하여 무려 26년에 걸친 작업을 완료하고 마침내 1936년 「구약젼셔 개역본」이 간행되었다. 이 개역본을 일부 수정하여 1938년에는 보다 완전한 번역본으로 출판되었다.
신약개역작업은 1926년 ‘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일은 감리교의 스톡스(M. B. Stokes), 윈(S. D. Winn), 로스(C. Ross), 레이놀즈,커닝햄(F. W. Cunningham), 크레인(J. C. Crane) 등에 의해 추진되었는데,개역대본으로는 네슬레가 편집한 1898년에 편집한 히랍어 성경이 사용되었 다. 1937년에는 개정을 완료하였고 1938년 「신약개역」이란 이름으로 발간되 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합본되어 「성경개역」이 출판되었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수정을 거친 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란 이름을 간행되었고, 1956년 다시 새로운 맞춤범에 따라 일부 수정되었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다. 이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이상의 공인역본 외에도 1906년에는 애국지사이기도 했던 유성준 장로의 국한문신약전서와 같은 사역 성경이나, 1912년 이익채씨가 편찬한 관주성경 등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4. 해방 이후의 성경 번역
해방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경번역 혹은 출판은 외국성서공회의 후원과 지원을 받았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여 미국성서공회는1946년 신약전서 5만권을 기증해 주었고, 1947년 영국성서공회는 「성경전서」5천부를 기증해 주기도 했다. 1947년에는 대한성서공회가 재건되었고, 1950년에는 한글판 성경전서가 출판되었는데 한글성경에만 사용되는 ‘성서체’라 는 특별한 문체가 사용되었다.
예기치 못한 6.25 동란으로 성서공회 건물은 파손되었고, 10만권에 달하는 성경과 주요 문서가 소실되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성경 편찬 작업은 피난지 부산에서 계속되어 1957년에는 점자성경이 신약 10책, 구약 16책으로 완간되기도 했다.
4.1. 새 번역 성경의 시도
해방이되자성경의새로운번역에대한관심이일기시작했다. 그첫 시도가 박창환의 성경 사역(私譯)이었다. 장로교신학교 교수였던 박창환은 1957년 8월 창간된 「기독교계」라는 잡지에 에베소서 사역을 게재했고 이어서 빌립보서 골로세서를 사역하여 게재하였다. 또 김정준은 시편 사역본을 게제 하기도 했다.
1957년 7월, 김정준, 김찬국, 김철손, 문익환, 박대선, 박창환, 전경연 등은 복음동지회를 구성하고 성경번역을 시작하였다. 젊은 세대는 고어체로 된‘개역성경’을 잘 이해할 수 없으므로 현대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고, 최근의 성경본문연구를 반영한 새로운 역본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번역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61년 1월 25일에는 「마태복음」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성경 새번역 작업은 대한성서공회 사업으로 흡수되었고, 번역위원장에 전경연, 초역위원에 김철손, 박창환, 이상호, 서기에 정용섭 등이 선임되었다.
대본으로는 네슬 25판이 사용되었다. 이때로부터 4년이 지난 1967년 12월 15일에는 신약이 완역되어 「신약전서 새번역」이 간행되었 다. 이 성경 번역진은 진보적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한국교회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강단용으로 사용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한국인 학자들로 구성된 번역진에 의해 새로운 신약성경이 역간된 일은 경하할 일이었다.
4.2. 신구교 간의 공동번역 성서의 출간
신약 번역을 완료한 성서공회는 구약 번역을 서둘렀다. 그런데 이 때 신구교 가 합작하여 성경을 번역하기로 합의하고 1968년 2월 15일 신구교 ‘성경번역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 그해 4월 1일에는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번역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번역위원으로는 김정준(위원장), 정용섭(서기), 문익환, 배제민, 최의원 목사, 그리고 천주교 학자인 선종완 신부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배제민과 최의원은 번역정책과 신학적 입장에 대해 견해 를 달리하고 곧 사퇴하였다. 이렇게 되자 실제적인 번역 실무는 개신교의 문익환과 천주교측의 선종완 두 사람이 맡았다. 이 두 사람은 약3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신약공동번역본이 1971년 4월 11일 부활절을 기해 출판되었 고, 1977년에는 구약까지 완역되어 그해 부활절을 기해 「성서」라는 이름에 부제로 ‘공동번역’이라는 표제를 붙인 소위 공동번역성서가 대한성서공회에 서 출판되었다. 이 성경에서 신약은 1971년에 번역된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개역한 것이었다.
이 성경은 킷텔(Kittell)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곧 BHK을 기초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이 성경 번역이 신구교간의 타협으로 이루어졌 다는 점에서 특히 한국의 보수교회는 이 성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개신교는 천주교의 요구를 수용하여 ‘하나님’ 표기를 포기하고 ‘하느님’ 표기 를 취했다. 보수교회는 이 성경은 범신론적인 번역이라고 혹평했다. 또 신구교 간에는 외경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으므로 가톨릭용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 사이에 외경(外經)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경은 지지를 받지 못했고 강단용 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심지어는 번역에 동참한 학자들이 속한 교단에서조차 도 외면당했고 단지 참고용 성경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이 성경을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록 강단용으로 받아드려지지도 못했고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신구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북한에서는 이 공동번역성경을 일부 수정하 거나 북한식 용어로 바꾸어 출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3 현대인의 성경
대한성서공회에 의해 공동번역성서가 발행되었으나 이 성경은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현대어 역을 지향한 점은 고무적인 일로 받아드려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현대어성경 역본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영어권에서도 보다 일기 쉬운 현대어역본들이 출간되기도 했다. Living Bible 이나 Good News Bible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런 추세에 부응하여 생명의 말씀사는 현대어로 된 성경 번역본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로 1977년에는 신약이 번역 출간되었고, 1985년에는 구약까지 번역되어 신구약이 합본되어 「현대인의 성경」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이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현대어문으로 번역된 점은 장점으로 지적되지만, 그것이 원전의 의미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의문시 되고 있다. 사실 「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전 성경을 대본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현대어 영어성경본인 Livng Bible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 번역의 의도도 이 책을 한글 개역성경과 함께 사용하여 어려운 개역성경을 용이하게 이해하 도록도움을주려는동기를지니고있었다. 즉이역본은원의의정확한 전달보다는 용이한 독서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현대인의 성경」이「한글 개역성경」을 대체하기에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성경은 한국어로 출간된 최초의 풀어쓰기 성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4. 성경전서 개역 개정판의 발행
앞에서 언급했지만 그 동안 한국교회가 사용해 온 성경은 190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신약성경, 1911년에 완역된 신구약성경 번역본인 「한글 개역성경」인데, 1938년 개정을 거처 1952년과 1956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하여 수정된 성경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 성경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강단용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1938년 개정된 이래 재 개정된 일이 없이 오늘까 지 사용요해 왔다. 이 성경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 번역 상에서도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새로운 번역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한글 개역성경을 개정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한성서공회에 의해 추진되었다.
1983년에는 개역개정 준비 작업을 시작하였고, 1993년 8월 17개 교단 대표로 구성된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개정감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개역성 경에 사용된 대본으로 구약은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성경(BHS)이, 신약은 네슬알란트(Nestle-Aland)판을 사용하였다. 한글개역성경을 개역하되 보수 적인 교회를 포함한 범교회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서 보수적인 학자인 오병세 박사를 개역위원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95년 11월에 개역개정판 신약이 출판되었고, 1997년6월에는 구약개역이 완료되었다. 약 6개월간의 의견수렴과 감수의 과정을 거쳐 1998년 8월 31일 「성경전서개역 개정판」을 발행했다. 초판 3만부가 발행되었다.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고치고 문법이나 어법이 맞지 않는 경우를 수정하였고 어색한 말을 다듬는 등 국어학적인 개정과 함께,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용어도 수정했다.
이런 외형적인 개역 외에도 원어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국어로 대치했다, 고유명사의 음역은 개역성경에 따르되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익숙한 용어는 바꾸지 않는 다는 원칙에 따라 번역되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은 개역판의 7만2천7백개의 항목 을 수정했다고 한다. 특히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칭하는 4글자 YHWH를 ‘여호와’라고 번역하지 않고 맛소라 본문 전통에 준하여 ‘주’로 번역하였다.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개역개정판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강단용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교단이나 교회가 적지 않았다. 대한성서공 회는 교계의 여론을 수용하여 번역에 반영하여 2000년 새로운 개역개정판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후 제기된 문제점들은 수정하여 2003년에 제3판을 발행했 다. 일부 교단은 이 책은 개역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혹평하면서 여전히 강단용 으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나 점차 개역개정판을 사용하는 교회는 늘어나 고 있다. 대한성서공회는 최근 교단별 성경활용 현황을 분석한 결과 85%-90%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4.5 성경공회의 창립과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의 출판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성경번역과 반포사업은 1895년에 창립된 대한성서공 회가 주관해 왔다. 물론 초기에는 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대한성서공회는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관장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구였다.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보수적 교회들은 대한성서공회의 정책과 신학적 입장,특히 성경번역과 관련하여 불만이 야기되었다.
특히 대한성서공회가 ‘표준새 번역’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가장 오랜 기간동안 사용해 오던 개역성경 의 보급과 출판을 중단하려고 했을 때 표준새번역을 받아드릴 수 없는 교회는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표준새번역이란 대한성서 공회가 개역성경의 개정이 아닌 완전한 새로운 역본을 의도하고 1983년 번역에 착수하여 1993년 출판한 성경인데, 쉬운 현대의 한국어로 번역하고 원전의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힘썼다고 말하고 있으나 한국교 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고신, 개혁,고려 등 보수적인 107개 교단은 ‘한국성경공회’(The Korean Society of the Holy Bible)를 창립했다. 창립과 함께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까지 잠정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판권시효가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는 1952년판 개역성경을 대본으로 부분적인 수정을 하여 1997년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성경」을 출판 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한성성공회가 이를 인격권의 침해라고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성경공회는 1999년 6월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기로 하고 성경번역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고, 구약성경번역위원에 손석태박사(위원장)외14명을, 신약번역위원으로 황창기 박사(전 고신대총장)외 14명을, 국어문학 팀장에 정효현박사 외 2명을, 감수위원장에 정규남 박사(광신대학교 총장)을 위촉하고 성경번역을 시작했다. 번역대본으로 구약의 경우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2nd ed., 1983)의 맛소라 본문이, 신약의 경우 Novum Testamentum Greece(27th ed.)와 Greek New Testament(4th corrected ed.)이 함께 사용되었다. 번역 작업은 8년 6개월이 소요되었고, 2007년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영문으로는 The Korean Truthful Version이라고 명명했다.
한국성경공회는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출판했으나 한국교회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다. 현재 이 성경을 강단용으로 사용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한국성경공회 창립의 중심교단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나 고신에서 조차도 이 책은 외면당하고 있다. 비록 일부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보수적 교회들이 한국성경공회 창립에 동참하고 성경번역을 시작했으나 대한성서공회에도 이사를 파송하는 등 두 기관에 동시에 동참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성경공회의 창립이나 새로운 성경번역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부족했다. 일예로 고신교단의 경우를 말한다면, 원로 학자인 오병세 박사는 대한성서공회의 개역성경 개정 작업에 깊이 관여하였지만 황창기 박사는 한국성경공회 신약번역위원장으로 참여하는등 같은 교단에서도 일치된 입장 을 견지하지 못했다. 성경번역에 있어서도 믿음을 주기에 부족했다.
대한성서 공회는 지난 한 세기 이상 성경번역과 출판을 관장하는 전통을 계승해 왔고 외국의 성서공회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서 신뢰를 쌓아왔으나 한국성경공회는 그런 전통이 없고 성급하게 새로운 성경을 역간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번역진의 구성에 있어서도 교회적 신뢰를 얻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실제로 새로운 번역이 기존의 번역과 확연하게 다르거나 우수하여 성경 원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런 측면과 함께 한국교회가 하나의 성경으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는 심리가 「하나님의 말씀, 바른성경」의 사용을 기피하게 만든 또 다른 요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책을 사용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점 때문에「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은 강단용이 아니라 참고용으로 받아드려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새로운 성경번역을 계기로 성경원전, 혹은 성경 언어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키고 더 우수한 역본에 대한 교회적 관심을 환기시켜 주는 일은 한국교회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일일 것이다.
5. 맺는 말
이상에서 성경이 한국에 소개되는 과정에서부터 성경번역의 역사를 간단하 게 정리하였다. 처음에는 국외의 만주와 일본에서 한국어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으나 1887년 이래로 성경번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또 한국성서공회가 조직되어 1890년대부터 국내에서 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00년에는 신약이, 1911년에는 구약이 완역되어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다.
그 이후 여러 종류의 성경이 역간되었지만 1911년에 나온 「성경젼서」의 전통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비록 이견이 없지 않았지만 한국교회 강단에서 하나의 동일한 성경역본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성경은 한글의 보급과 한국사회 계몽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한국에서 성경은 한글의 보급과 문맹 타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서민들은성경을통해한글을터특하기도했고, 성경을통해천시받은 한글이 우리 글로 정착하게 되었다. 독일의 루터의 독일어판 신약성경의 번역(1521)이 독일문학에 끼친 영향이나, 흠정역성경(1611)이 영문학에 끼친 영향과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규 교수
첫댓글 후원참여가 없습니다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공과금 통신료라도 내야만 계속 카페를 운영합니다
월세를 내야 한달을 삽니다 여러모로
힘든시기지만 후원을 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카페에 후원참여가 없습니다.....
한달에 두세분 후원으로 카페를 계속할수가 없어요
방 월세와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공과금을
못내고 있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세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