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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강이 열리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신의 아들
벌써 해가 지고 있다.
길을 잃은 지도 서너 시간은 족히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사람들의 냄새가 싫다고 일반 등산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 탈출을 시도하지만 가다보면 절벽이 다가서고, 그를 돌아나가다 보면 날 짐승하나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빽빽한 밀림이 길을 막는다. 먼발치로나마 보이던 마을들의 모습도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앗! 따거!"
갑자기 정강이 쪽이 불에 데인 듯 아파 왔다. 놀란 사내는 반사적으로 통증이 오는 곳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친다. 뭔가가 터졌는지 끈끈한 액체 같은 것이 피부에 느껴진다. 그러나 아픔은 한차례로 끝나지 않고 다리의 여기저기서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순간 자신의 발 밑으로 눈길을 돌린 남자는 혀가 굳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보통보다 두 배내지 세 배는 커 보이는 엄청난 수의 개미들이 신발을 타고 바지를 거쳐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 중의 일부가 바지 속으로 들어가 그의 살점을 뜯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머뭇거릴 여유도 없이 냅다 달렸다. 불개미 소굴을 벗어나야 한다. 작은 약탈자를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땅을 쿵쿵 굴러가며, 얼굴이며 목, 손 등 옷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피부가 여기저기 긁혀져 나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마구 달려가다 허연 맨 살을 드러낸 바위를 보고는 다짜고짜 몸을 날렸다. 재빠른 동작으로 신발을 안전하게 처리한 사내는 바지를 벗어서 허공에 대고 턴다. 더러는 수풀 속으로, 더러는 바위 위로 불에 탄 검은 볍씨 같은 것들이 굴러 떨어진다. 숫자가 줄어든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구두를 집어든 남자의 분노한 손이 개미들 머리 위로 공습을 감행하자 누런빛이 약간 섞인 진득한 액체들이 징그럽게 영토를 확장해 간다.
능선 쪽으로 오른 탓인지 계곡에서보다는 밝음이 세력을 덜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밤이 되기 전에 산을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만큼의 긴 여유를 갖게 해 주지는 못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어딘가 밤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산길을 내려가다 적당한 바위 틈새가 보이면 마른나무의 잔가지라도 구해놓고 활엽수의 낙엽들이라도 긁어 모아 아쉬운 대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더 어두워지면 움직일 수 없다. 서두르자. 다시 옷을 주워 입은 남자는 바위 옆으로 돌아내려 짐승들이 만들었음직한 소로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원하던 장소를 찾기도 전에 날은 이미 어두웠다.
"큰 일인데! 낭패 났어!"
여기서 길을 잃고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려 보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아직 겨울은 멀었다고 하지만 가을 산의 한 밤 기온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한여름에도 등산을 갈 때엔 겨울옷을 준비해 가지 않는가? 라이터라도 하나 숨겨 들어올 것을....
"악!"
사내가 짚은 땅이 갑자기 아래로 꺼지면서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공포에 몸이 오그라드는 와중에도 아직 단단한 물체에는 부딪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팔다리를 최대한 좌우로 벌려 낙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남자는 갑자기 쿵하고 바닥에 몸이 닿는 충격을 느꼈다. 왼쪽다리가 겹치면서 짜릿한 아픔이 전해져 왔지만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손을 더듬어보니 푹신한 낙엽이 두텁게 쌓인, 상당히 팔을 멀리 뻗어도 손끝에 닿는 것이 없을 정도의 충분히 넓은 공터였다.
왼쪽 구두가 작게 느껴져 신을 벗고 땅을 짚어보다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심하게 삐기는 했지만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는 일단 이곳에서 잠을 자리라 마음먹는다. 날이 차가우니 뱀은 없을 테고 산 짐승이나 만나지 않아야 할텐데... 옷을 입은 채로 낙엽을 모아 덮고 누우니 생각보다 한기는 덜하다. 맑은 날인데도 별 하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울창한 나무 숲 속의 빈 공간으로 떨어져 내렸나보다. 막상 잘 준비는 했으나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길을 잃은 채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 함께 까맣게 잊었던 세상에서의 일들이 편안한 육신 속으로 다시금 찾아든다.
'태우, 그녀석이 나를 배신할 줄이야.'
현식은 사람들을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평소에는 늘 좋은 관계에 있다가도 최후의 순간이 오면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인생을 사는 데에는 철저한 우리편도 필요한 것이다. 나를 위해 타인을 배신할 수도 있는 그러한 관계, 가족을 제외하고는 바로 태우가 그러했다. 중학교 시절 이후로 돈독하게 이어져온 둘의 우정은 형제 이상의 것이었다. 아내를 버리면 버렸지 태우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 복무 중에 휴가를 나왔다가 술집에서의 사소한 시비로 큰 싸움이 붙어 옆에 있던 술병으로 상대편의 머리를 때려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태우는 군인 신분인 현식의 중형을 막으려 학생인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기도 했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떠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현식의 옆에 남는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태우일 것이었다.
그렇게 다정스런 친구로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다 삼 십 후반에 이르렀을 때 태우는 언제까지 남의 밑에서 일을 할거냐며 함께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해 보자고 제안해 왔다. 제철을 사 들여 와이어를 만든 후 큰 공장에 납품을 하는 얼마나 가느다랗고 질긴 선을 만들어내느냐가 성공의 관건인 일종의 금속기계 산업이었다. 현장의 경험이 많은 현식이 제조과정을 관장하고, 여기저기 사람을 사귀는데 재능이 있는 태우가 납품을 따오기 시작하면 어려울 것도 없는 사업으로 판단되었다. 그 동안의 눈동냥, 귀동냥에 의하면 실패하는 공장은 모두가 무리하게 남의 자본을 끌어들인 탓이었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 하에 둘은 각기 반씩을 투자하여 자본금 2억의 중소기업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가내공업의 형태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둘의 믿음은 정확하게 적중하여 처음에는 와이어를 꼬아내는 기계 한 대에 두 세 명의 보조 일꾼을 데리고 시작한 것이 서서히 성장을 계속해 10여명의 사원을 거느린 견실한 기업으로 성장해 갔다. 견실하고 책임 있는 경영과 함께, 국내에서 최초로 네 겹으로 연속 꼬이는 와이어 생산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하면서 그들의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국외에까지 퍼진 소문은 드물지 않게 해외 수주로 이어졌고, 경기가 좋을 때에는 은행 측으로부터 원하는 만큼의 신용대출을 제안 받기도 했다. 그러나 둘은 자본금의 30%가 넘는 은행 빚을 떠 안는 일은 없었다. 그 결과 IMF가 왔을 때에도, 장기적인 경기침체가 전국을 강타할 때에도 그들의 회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불과 몇 년만에 누가 보아도 어엿한 중소기업의 반열에까지 오른 그들은 대기업이나 재벌이 부럽지 않았다. 아니 조금만 더 있으면 금속부분에서는 국내의 누구하고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스락'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낙엽 속에 파묻힌 사내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른다. 혹 사나운 짐승이면 낭패다. 미리 주워두었던 주먹보다 약간 큰돌을 찾아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한다. 모가 나 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싸움의 대상을 찾아 모든 정신을 집중해 보지만 그저 검정 색의 허공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시신경은 헛된 노력만을 계속한다. 어느새 바로 옆에서 기척을 느낀 현식은 몸을 굴리며 돌을 쥔 손을 휘젓는다. 돌에 닿는 것은 그저 축축한 낙엽뿐이다. 바스락 소리는 좀더 다급하게 변했다. 얼떨결에 아직 성한 구두 발로 다시 한 번 내리찍자 크지 않은 살덩어리가 발끝에 걸린다.
"끼익, 끽!"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남기고 소리의 주인공은 점차 멀어져 간다. 산토끼이든 오소리이든 그리 위협적인 짐승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거친 호흡을 억제하지 못하고 낙엽위로 몸을 널부러뜨린다.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찾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태우는 잠적하고 법원의 집달리들이 가정에까지 들이닥치면서 현식의 꿈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공장을 처분하고 자신이 가진 주식에, 온갖 종류의 채권, 집까지 팔았음에도 10억이 넘는 빚이 그의 어깨 위에 남겨졌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파산선고였다. 빚은 면제받으나 영원히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없는 최후의 선택보다도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태우의 변절이었다. 아니, 결국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버려질 것이거늘 나는 왜 남들에게 그다지도 모질게 굴었는가 하는 회의가 더욱 그의 가슴을 압박했다. 태우가 곧 나의 숨겨진 모습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가? 이기지도 못할 승부 차라리 선량하게라도 살았더라면 당당하기나 하련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악의 깊은 산중으로 여행을 떠나왔다가 종국에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한탄하겠는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의식뿐 전 우주가 모두 다 죽어버린 것만 같다. 감각은 있으되 자극이 없는 이러한 상황, 차라리 조금 전처럼 조그만 동물이 아닌 맹수라도 나타나 목숨을 건 사투라도 벌이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잠들자! 이대로 잠들어서 깨어나지 말자.
현식은 밤새도록 채권자들에게 쫓기어 다녔다. 자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친구에게 속은 자신도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라고 소리치지만 돈을 찾기 위한 그들에게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말이었다. 돈을 떼어먹은 놈 치고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갚지 않겠다는 사람도 역시 없다. 입으로만 형편이 풀리면 갚겠다고 우기는 놈들에게서 순순히 물러섰다가는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면 달달 볶아 말려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으로 도망을 치더라도 따라 다녀야 한다. 현식은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너무나 피곤한 탓에 눈 한 번 뜨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수면이 어느 정도 충족되자 다른 욕망들이 고개를 들었다. 허기진 배가, 삐어서 부어오른 발목이 자신들을 돌보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사내는 잠에서 깨었다. 위와 발목 뿐 아니라 전신의 근육과 뼈마디가 다 부서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안개에 파묻힌 계곡은 몇 발자국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을씨년스러웠고, 그 속에서 축축한 낙엽을 들치고 일어선 현식은 주변을 둘러본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들의 몸통만이 경사진 절벽 면을 가득 채우고, 가지와 잎이 달렸을 윗부분은 허공을 떠도는 물방울들로 가리워 그 정확한 크기를 가늠할 길이 없다. 자신이 떨어져 내린 부분에는 유난히 많은 낙엽이 헝클어져 있고, 대여섯 평은 됨직한 평지의 저 편으로는 가느다랗고 키가 큰 풀이 둘러쳐 있다. 누가 보아도 이곳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저기를 통과하는 수뿐이다. 쩔뚝거리며 이를 악물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수풀을 헤치고 나간 사내는 반가움에 몸을 떨었다. 꽤 넓은 길을 따라 파여진 도랑의 한편에 조그마한 약수터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덮개 위에 놓인 조롱박, 틀림없는 식수였다. 가까운 곳에 인가가 있으리라는 판단은 그에게 더욱 큰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살았다. 살았어!'
야수처럼 달려들어 연거푸 몇 바가지의 물을 들이킨 현식은 맥이 풀리며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길은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일단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아무도 없어요! 사람 살려요!"
"아무도 없어요! 사람 살려요!"
그가 지르는 고함은 산의 계곡을 타고 올라 나뭇가지 위에 걸렸다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이 산의 구조는 소리조차도 동심원을 그리며 자신이 서 있는 곳으로 집중되게 하고 있지만 미처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 5분여가 지나고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머리를 기다랗게 늘여 묶은 사내인지 계집앤지 모를 어린 아이였다. 샘터와 현식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번갈아 바라보던 꼬마는 뒤돌아 뛰어가면서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 엄마, 아빠들! 이리 좀 와봐! 이상한 아빠가 물먹는데 있어!"
가스렌지에 올린 차 한 잔이 끓어오를 시간이 지나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현식의 눈앞에 섰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로 건장한 청년들이 넷, 젊은 아줌마로 보이는 여자가 둘 그리고 크고 작은 칠팔 명의 어린아이들이 뒤를 바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뒤로 머리를 묶고 짐승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에 현식은 안도하며 구세주를 만난 것 같이 기뻐했다.
"어르신! 서울에서 왔는데 길을 잃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호연이 아빠! 저 아빠는 말하는게 이상하다. 그치?"
체격이 단단하고 키가 가장 큰 청년의 손을 잡고 있던 소년이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동의를 구한다.
"아빠! 저 사람, 다리를 다쳤나 봐!"
이번에는 노인의 왼편에 선 청년이 말을 거든다. 현식은 그제서야 이들의 대화가 다소 유치한 듯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다.
"희국이가 저 사람을 들쳐업고 안방에 가 옷을 갈아 입히고 편안하게 눕히거라. 그리고 혜민이와 현이는 아침밥을 준비하고, 나머지는 평소처럼 지내다가 목통이 울리거든 마루로 보여 식사를 하거라."
"알았어!"
"그러지 뭐!"
다들 대답은 하면서도 정작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댁은 아무 말 마시고 시키는대로 하시오."
"예!"
커다란 눈을 꿈벅거리며 대답을 마친 사내를 억센 청년의 팔이 가벼운 토끼 한 마리 들 듯 한다. 어른들은 서서히 각자의 임무를 위해 발길을 돌리고 아직도 미련이 남은 어린이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 업혀서 올라가는 현식의 뒤를 따른다. 부상자를 업고도 전혀 힘겨워하지 않는 청년의 몸이 마치 고무처럼 유연하게 느껴진다. 몇몇 아이는 방금 할아버지와 낯선 사람이 주고받던 이상한 대화를 흉내 내기도 한다.
"하시오!"
"예!"
"재미있다. 키들키들."
마당에 들어섰을 때엔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상당히 좋아져 커다란 흙벽돌 집과 헛간이나 광으로 보이는 건물 하나와 마당의 중앙에 놓인 지붕이 달린 마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쪽 끝으로는 대나무 통으로 흐르던 물이 모이도록 통나무의 안을 파낸 듯한 구유처럼 생긴 물통이 놓여져 있고 그 위로는 물이 넘쳐흐르며 상쾌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통 옆에는 얼마나 깊은지 푸른빛을 띤 연못이 어른 한 명이 들어가 수영을 해도 될만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집과 헛간, 연못이 T자로 교차하는 지점에는 용인 듯도 싶고 거대한 이무기인 듯도 싶은 집채만한 바위 하나가 수호신처럼 거만하게 서있다.
"정국이는 환자가 몸을 따듯이 하도록 불을 좀 지펴라."
"응! 아빠!"
자기를 업은 청년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로 보이는 청년의 대답이었다. 방에다 현식을 눕힌 희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옷을 벗기고 자기들이 입는 것과 똑같은 동물 가죽으로 갈아 입힌다. 그 손에 몸을 맡기며 잠시동안 홀로 알몸이 된 이방인이 어색하게 웃는다.
"잠시 누워 있으면 아빠가 와서 치료해 줄 테니 기다려!"
"여기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젖은 옷을 들고 나가려는 청년을 불러 세운다.
"'어디입니까?'가 '어디냐?'란 말이야?"
"예?"
"'예'가 뭐야?"
어이가 없어 물끄러미 쳐다보는 현식을 청년은 더욱 이상한 듯이 바라다본다. 침통을 들고 들어오던 노인이 빙긋이 웃는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나가 있어라."
"알았어! 그런데 이 사람은 정말 이상해. 옷도 이런 거는 처음 봐."
희국이 나간 후 "이곳에는 존댓말이라는 것이 없어요. 식사를 마치면 자초지종을 설명하리다. 어이구, 오랜만에 이런 말을 하려니 나도 어색하네." 라고 말하며 무릎 약간 위의 움푹 패인 곳과 허벅지 발뒤꿈치의 아킬레스 건 앞쪽의 세 곳에 능숙한 솜씨로 침을 꽂는다. 금방 삔 발목이 후끈 달아오른다. 밖에서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어느새 방문으로는 햇빛이 새어든다.
나무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침을 빼고 손님을 마루로 안내한다. 어느 결에 부기가 빠지고 통증이 거의 사그라져 버렸다. 밥을 먹으면서 좀더 자세하게 지형을 살피니 크게 멀지 않은 산들이 분지를 기이하게 둘러싸 한 겹 한 겹 벗겨내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노란 고갱이가 나오는 그런 배추 포기의 중심과 같다. 이 곳에 앉으니 바깥 세상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깥에서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집이 등지고 있는 산을 향해 부는 바람이 안개를 서서히 정상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잡곡과 감자 등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하는 동안 마당의 가장자리로는 다람쥐들이 끊임없이 고개를 내민다. 먹이를 던져주면 금방 물러났다가 다시 와서는 함께 만찬을 즐긴다. 아침을 마친 식구들은 잠시 휴식을 즐기는 듯 하더니 농기구를 챙겨들고 어딘 가로 사라지고 부엌일을 하는 여인들과 노인만이 집에 남는다. 가자고 재촉하는 아빠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삐죽삐죽 쉽사리 떠나가지를 못하다 그 중의 용기를 낸 아이가 달려와 "바깥 세상 아빠! 가지 말고 있다가 우리한테 바깥 세상 이야기를 해주어야 되!"라고 간청을 하고 현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안심하고 어른들을 따라 나선다.
"저 아이들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모두가 아빠요, 나 정도는 되어야 할아버지가 되지."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노인이 현식을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혼란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는 식의 말투다.
"햇수를 세지 않고 살다보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이십 년은 족히 넘었을 거요. 대여섯 살 난 아이들 여섯을 데리고 이곳으로 숨어든 것이..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던 것도 같소."
지나간 세월의 회한을 돌이키려는 듯 노인은 눈을 감는다. 격암유록이라는 책 한 권을 믿고 설악을 이 잡듯이 뒤지던 사십 중반의 사나이가 감겨진 눈동자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고자 했던 그 사내가 벌써 백발을 휘날리는 칠십 노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난 세상이라는 전쟁터를 떠나고 싶었소. 이기적이고 강한 자들의 논리로만 정당화되는, 인간들의 고집과 욕심이 만들어낸 온갖 법규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단 말이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온갖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다른 인간들을 밟고 일어서는, 사치와 향락을 위해 눈동자를 휘번득거리는 인간들 속에서 나의 존재가치는 너무나 미미한 것이었소.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전설 속에서 나오는 말세의 피난처인 십승지였소. 그 속에 숨으리라 다짐했지. 이미 일부 종교인들에게 알려진 아홉 개의 성지를 탐사했으나 그곳도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의 마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오. 마지막 남은 설전(雪田)이라는 승지는 말세의 환란사상을 믿고 따르는 이들도 찾아내지 못한 비밀 속의 장소로 그 이름과 내부구조만이 정감록이나 격암유록같은 비책 속에 언급될 뿐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뿐이었지.
그런데 나에게는 묘한 확신이 있었소.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느낌으로 저절로 알게 되는 그런 믿음 말이오. 눈 설자와 밭 전자로 쓰여지는 설전은 아마도 설악산의 한 가운데에 있는 밭과 같은 지형일 것이라는 영감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오. 다소 허황된 그 생각은 나를 이곳으로 몰아왔고 한 달이 넘게 내설악과 외설악을 샅샅이 뒤졌지만 소득을 얻지는 못했소. 그러나 그냥 포기하기에는 영감이 너무 강했소.
그러다 우연히 군대에서 독도법을 배운 것이 생각났소. 그래서 군청의 지도 관리과를 찾았지. 그곳에 근무하는 공무원에게 사정을 해서 최근에 나온 가장 정밀한 축척으로 표시된 지도를 얻어 탐독해 나가던 나는 외설악 내의 좁은 지역이 애매하게 표시된 것을 발견했소. 그때의 기쁨이라니.. 즉, 그곳은 어떠한 이유로 측량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소. 물론 헬기 등을 동원해서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거대한 산 속의 고작 몇 백평 남짓한 쓸모 없는 땅 때문에 그런 막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 정도 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은 측량기사도 없었을 것이오. 나는 직감했소. 바로 이곳이 설전이라고....
그러나 역시 이곳은 접근이 가능하지 않았소. 아무리 애를 써도 산은 언제나 나를 밖으로 밀어내고 마는 거요. 공간은 보이는데 접근이 되지 않는, 흡사 무술 영화에 나오는 어떤 진법에라도 걸린 기분이었소. 날지 않는다면 이곳에 들어올 가능성은 없었던 거요.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소.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다시 한 번 격암유록을 믿기로 한 거요. 군청의 지도와 비책 속의 지도를 펼쳐놓고 이리 저리 끼어 맞추어나가다 비밀통로로 보이는 흔적을 찾아낸 것이오.
적당한 물과 집터, 그리고 밭으로 일구어 쓸 수 있는 약간의 비탈, 외부 세계와의 기막힌 단절,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이곳은 역시 하늘이 내린 은둔처임에 틀림이 없소."
"그러면 지금까지는 아무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현식은 노인의 말을 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이십 년이 넘도록 사람의 그림자를 보지 못할 수가 있는가? 혹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면 야만인과 같은 이들의 모습은 또한 뭔가?
"하늘을 날아서 들어온 당신이 처음이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장소는 그렇게 창조되었소. 외부 세계와의 유일한 만남은 가끔씩 날아다니는 비행기이지만 다행하게도 저 아이들은 그것을 가끔씩 일어나는 자연현상의 일부 정도로만 여기고 있다오. 세상은 우리를 볼 수 없고, 우리도 세상을 볼 수 없소."
"청년과 처자들은요. 그들은 세상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탈출을 하려고 애를 쓰지는 않나요?"
잠시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노인은 차를 입에 머금고 호흡을 조절한다. 현식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이런 곳에서 20년이나 살다니... 그것도 아이들을 여섯이나 데리고...
"탈출은 불가능하오. 저 산에 오르려 해도 그럴 수 없고, 하늘이 자꾸만 사람들을 이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지.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아이들의 기억이었소. 그들이 자꾸만 세상을 그리워한다면 오늘의 우리는 숫자가 줄었을 것이오. 내가 이곳으로 숨어든 것은 행복을 위한 것이지, 불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오. 나의 신념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기 위한 것은 더욱 아니라오. 그러나 아이들의 기억이라는 것이 원래 꿈처럼 희미한 것이어서 그런지, 인간이란 어느 환경에서나 적응해 살기 마련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별 탈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오."
"처음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살아 남으셨나요?"
"이곳을 발견하고도 1년이 넘는 준비기간이 필요했소. 집과 먹을 것, 입을 것, 사회생활에서 마련된 약간의 저축이 아주 유용하게 이용되었지. 산골에서는 쌀이 아닌 잡곡으로 주식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라 세상을 오고가며 몇 년 치의 양식을 준비했소. 그리고는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왔지. 독립된 생활을 위해 텃밭을 개간하고 사냥 기술을 익히고 하는 동안에 무럭무럭 자란 아이들은 열 살이 넘으면서 늦고 빠르고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의 몫을 하더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간한 밭은 농사의 경험이 늘고 기틀이 잡히면서 생각보다 빨리 식량의 자급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오."
현식은 아직도 이런 식의 생존을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전혀 가능하지가 않다. 이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지 않은가? 몇천 몇만의 산새들이 지붕 위에서 날아올라 건너편 나무들 뒤로 사라진다. 이렇게 산다면 저 새들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식량은 혹시 모르겠지만 이렇게 좁은 지역에서 자급자족이란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입니까?"
"불가능하오."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사내는 차라리 어이가 없다.
"내가 가끔 세상을 오가며 필수품목을 구해오곤 한다오. 그러나 그 횟수는 몇 년에 한 번 일뿐이지. 소금이나 철제물품의 부족이 우리를 압박해 오긴 하지만 견딜 수 없을 만큼은 아니라오. 인간들에게 많은 물품이 필요한 것은 바로 눈 때문이오. 보지 않으면 욕망도 없는 법, 불편함도 익숙해지다 보면 불편이 아닌 것이지. 환경에 자신을 맞추느냐, 아니면 자신을 환경에 맞추느냐의 선택 중 우리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라오. 손에 쥐면 하나 뿐이지만 그 손을 놓으면 모든 것이 손에 들어오는 진리도 세상의 발전에 못지 않은 묘미가 있다오. 그래, 당신의 세상살이는 우리들보다 고단하지 않소?"
"그건, 그 그건.."
현식은 할 말을 하지 못한다. 과연 누가 이들과 세상의 방식 중 어느 것이 승리자라고 장담을 할 수 있는가? 결국엔 자신도 세상의 고통을 피해 도망 나왔다가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적은 수의 사람이 선택한 방식이라고 그들의 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이들의 교육은 어떻게 합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현식에게 노인은 껄껄 웃으며 대꾸한다.
"이런 식의 삶에서 교육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겠소?"
"그야, 그렇지만..."
"오전에는 농사를 짓고, 이것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라오, 오후에는 두시간 가량의 무술수업, 그 외에는 자유요. 생존과 건강의 유지를 위한 활동 외에 강요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글은 가르치시지 않나요?"
"내가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그때 나의 곁에 있으면 글을 배우게 됩니다. 책은 주로 정신의 수양을 강조하는 것들로 한정되고 있지요. 난 이들이 외부의 생활을 책으로나마 접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들에게 혼란만 가져올 뿐이지요."
이 말을 듣자 현식은 자신의 처지가 불안해 진다. 오후에 있을 아이들과의 대화도 부담이 된다. 혹 저 노인이 화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도 가슴을 찾아든다.
"그렇다면 할아버님의 자손들이 오기 전에 저는 이곳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데 그러실 필요는 없소. 이왕 벌어진 일, 순리를 따르는 수밖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낮에 당신을 보내면 비밀통로를 기억해 두었다가 세상 사람들을 끌어들일 염려도 있고 하니, 당신의 체력이 회복된 밤을 이용해 보내드리리다. 다시는 이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오."
"그럼 아이들에겐 바깥 세상에 대해 거짓말을 해야만 합니까?"
노인은 깊은 한숨을 들이쉰다. 얼굴에는 깊은 고뇌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럴 필요는 없소. 아이들이 묻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을 해 주시되 물질적인 환상을 자극하는 그런 발언만 삼가주시오."
"그러다 이곳의 평화가 깨지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당분간 혼란기를 맞을 거요. 세상과의 첫 만남이었으니... 그러나 시간은 다시금 저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줄거요. 죄에 물들지 않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오."
노인의 표정은 자못 엄숙하다. 겸허한 자연의 자손들, 가진 것이 없기에 빼앗길 것이 없는 사람들, 욕심나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빼앗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 언어는 온통 반말 투성이이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이해가 가득한 사람들, 현식은 자꾸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저와의 만남을 단절시키지 않아 굳이 세상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나오면 어쩌시렵니까?"
"지켜보아야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지 않은 삶을 꿈꾸지 않소? 당신보고 이곳에서 살라면 견딜 수 없듯이, 저들도 세상에선 행복할 수 없소. 미꾸라지가 맑은 물에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숭어도 진흙 속에서는 살지 못하는 법이오. 저들은 이미 너무나 맑고 순수하오. 그러나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오랜 세월 불행에 빠지는 사람이 나온다면 나는 그들을 구속할 수 없소. 당신을 보내듯이 그들도 보내주는 수밖에..."
말을 하며 안면 근육에 경련이 이는 것을 현식은 놓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작업은 상상만으로도 괴로운 모양이다. 노인에게 동정심을 느끼기 시작한 사내는 얼른 화제를 바꾼다.
"그런데, 일곱 명의 꼬마 아이들은...."
"내가 데려온 여섯 아이들의 자손이라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얼른 수긍하기에는 그가 익혀온 세상의 규범이 너무나 단단하다.
"그럼 형제끼리 결혼을...."
"하하하!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저들 중에 내가 낳은 자식은 하나 뿐이오. 나머지는 오갈 데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주워 기른 것이지. 혹 저들의 잠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부모들로부터의 배신의 기억이 이곳에서의 삶을 더욱 안정되게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소. 최소한 이곳에서는 자신을 위해 남을 버리는 일은 존재하지 않소."
"그럼 나머지 두 분도 결혼을 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청년 넷에 처자가 둘임을 상기하며 묻는 말에 노인의 얼굴이 홍조를 띤다.
"허허, 이거, 갈수록 대화가 어려워지오."
"예? 무슨..."
"우리 아이들이 존대말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고.."
"예. 그렇긴 합니다."
"어른이라고야 나 하나 뿐이었소. 그리고 나 또한 어른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이 말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니 굳이 존대말을 가르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 마치 철없는 아이와 그 어미가 하는 대화와 같은 언어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오.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게 되면 당신은 더욱 혼란을 느낄 것이오. 어른이 예쁜 어린아이를 보고 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본적이 있소? 그럴 테지.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사랑이다 보니 욕을 빌어 그 강도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오. 나에게는 유난히 그런 성향이 강했소. 그러다 보니 이들도 그렇게 배운 것이지. 오랜 세월을 같이 살다보니 애정을 표현할 기회가 드물어서 그렇지, 자주 사랑을 하게 된다면 이곳은 온통 욕쟁이 마을처럼 보일 것이오. 생각해 보시오. 손자가 할아버지를 보고 '이놈아'하며 사랑을 표시하는 것은 차라리 볼만 하지만 서른이 다된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보고 그렇게 애정 표시를 한다면 당신은 아마 놀라 까무러칠 거요. 그러나 어차피 우리끼리 사는 것, 큰 문제는 없었지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어요. 아이들이 커오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둔감했던 것이지. 처음으로 혜민이가 임신한 것을 아는 순간 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소. 놀라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물어보니 누가 아버지인지를 알 길이 없는 거요. 가정에 대한 관념이 없는 그들은 그저 필요에 따라 아무 하고나 성 관계를 맺어왔던 거라오."
"음..."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에 현식은 신음을 흘린다.
"난 그들을 나무라지 않았소. 사내가 넷이고 여자가 둘이니 이들에게 일부일처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판단이었지. 일대일의 사랑을 위해서는 세상에 나가 최소한 사춘기 나이에 있는 처자 둘을 업고 들어와야 하는데 내 아이들을 위해 다른 사람의 자식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오. 특별한 신념이 있거나 이곳에서 잔뼈가 굵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옥일 수도 있는 것이라오."
"그렇지만....."
여전히 현식의 가슴은 이 사건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문화적 충돌이란 이렇게도 거대한 것이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공동부부제를 선택한 것이오. 두 명의 짝이 없어 외로운 피해자를 만드느니 생각을 바꾸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오. 모두가 남편이고, 모두가 아내요, 태어난 아이들 또한 모두의 자식인게요."
"짝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나요?"
"저들은 나름대로 현명하게 잘 해 나가고 있소.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잦은 출산이었지. 이곳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이십 명 이상을 부양하기 힘드오. 다음 대의 짝짓기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래서 일곱 번째 임신이 확인된 날 가임기간에는 합방을 금하는 규칙을 정할 수밖에 없었다오."
"그 규칙이 효력을 발휘하나요."
"모든 생명체에게는 생존의 본능이 있소. 스물이 넘은 나이였으니 자신들도 식량문제에 대한 위기를 느끼고 절제한 덕분에 우려했던 추가출산은 없었다오."
"지금까지는 몰라도 할아버지의 손자 대에서는 결국 형제간의 부부생활을 피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약점을 찾은 현식은 다시 의문을 제기한다.
"어차피 당신이나 나나 다 같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오? 인간은 누구나 머냐 가까우냐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한 가족, 한 형제라오. 그런 우리들이 네 것, 내 것을 가려놓고 서로 시기와 질투, 싸움을 일삼는 것이 오히려 죄악이지. 어찌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고 아끼고 위해주는 것이 잘못이라 할 수 있겠소? 바깥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세상 사람들의 욕망과 번잡함에 오염되지 않는 한 저들은 이곳에서 내내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거요."
노인의 손에 이끌려 칠흑 같은 밤길을 간다. 자신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건만 마치 훤한 대낮에 평지를 가듯 늙은이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처음에는 평이하던 길이 갑자기 험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한다. 축축한 풀밭을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굴을 통과하는지 고막이 멍멍하며 발자국이 사방에 메아리친다. 몇 십 미터에 이르는 비탈을 거의 수평으로 자란 나무등걸을 타고 오르니 맑은 밤하늘에서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천혜의 성지를 벗어난 둘은 복잡한 산길을 이리 구부러지고 저리 비틀어 돌며 두 시간이 넘게 산행을 계속한다. 자신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건만 노인은 숨조차 가쁘지 않다. 멀지 않은 곳에 인가의 불빛이 드문드문하다. 앞 서 가던 노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오."
세상, 빚, 태우, 파산 선고자 등의 번뇌가 다시금 현실이 되어 살아난다.
"함께, 그곳에서 함께 살면 안될까요?"
"세상을 아는 사람에게 언제나 꿈쩍하지 않는 자연이란 아귀악신같은 싸움보다도 훨씬 지긋지긋한 것이라오."
노인이 사라져간 어둠 속을 바라보며 현식은 천진난만하게 검을 휘두르던 일곱 명의 어린 눈동자를 떠올린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렇게 많은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투박한 말투와 언제나 공손하게 사람을 대하는 도시의 신사들을 비교해 본다. 그곳에서 세상을 그리는 것이 나은가? 세상에서 그곳을 그리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나도 그들처럼 살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들은 어떻게 될까?
풀지 못할 수수께끼들을 만들어가며 사내는 인가의 불빛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