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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주_모든 전쟁과 폭력은 멈춰져야 한다
여호수아 11:7-12
7. 여호수아는 전군을 이끌고 메롬 샘터로 가서 갑자기 들이덮쳤다.
8. 야훼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부치셨으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무찔러 대시돈과 미스르봇마임과 동쪽으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따라가며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쳐 죽였다.
9. 여호수아는 야훼께 받은 명령대로 그들을 해치웠다. 군마의 다리 힘줄을 끊고 병거를 태워버렸다.
10. 여호수아는 돌아오는 길에 하솔을 공략하고 그 왕을 칼로 쳐죽였다. 일찍이 하솔은 이 여러 왕국의 종주국이었다.
11. 숨 쉬는 것이면 모조리 칼로 쳐 죽였다. 코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솔에 불을 질러버렸다.
12. 여호수아는 이렇게 야훼의 종 모세에게 받은 명령대로 그 여러 왕의 성을 다 점령하고 왕들을 사로잡아 칼로 쳐 죽였다.
전국 대학교수들이 뽑은 '2022 올해의 사자성어'는 '과이불개(過而不改)'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자성어는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서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는 말을 하죠.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라는 의미입니다. 비슷한 내용의 말이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데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이란 말입니다. '잘못하면 고치는 일을 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보면 술주정 꾼과 어린 왕자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어린 왕자가 세 번째로 도착한 별에는 한 술꾼 남자가 살고 있었어요.
빈 병들과 술이 가득 찬 병 무더기를 앞에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어린 왕자가 묻습니다.
‘아저씨 거기서 뭘 해요?’ ‘술 마신다’
‘술은 왜 마셔요?’ ‘잊어버리려고 마시지’
‘무엇을 잊어버리려고 마셔요?’ ‘부끄러운 걸 잊어버리려고 그러지’
‘부끄러운 게 뭔데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어린 왕자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그 별을 떠났습니다. 어린 왕자는 길을 가며 생각했죠. ‘어른들은 정말이지 참 이상해’
잘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연세대 연합대학원을 다닐 때 기독교 사회 윤리라는 과목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 과목의 주제 중 하나가 기독교 전쟁론이었는데 3가지 관점에 대해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과연 전쟁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세 가지 견해는 행동주의(Activism), 평화주의(Pacifism), 선별주의(Selectivism) 입니다.
행동주의란 ‘기독교인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여 그 명령에 따라 모든 전쟁에 참여해야 된다’고 하는 견해죠.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전쟁 결정에 복종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평화주의란 ‘전쟁에는 절대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전쟁은 기독교의 중심사상인 사랑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죠. 칼빈 당시의 재세례파나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이 이런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롬 12 : 17-19).
선별주의란 정당한 전쟁(Just War)에 대한 것인데 행동주의와 평화주의의 절충형이죠. ‘전적인 행동주의는 맹목적이고 지각이 없는 복종이며, 완전한 평화주의는 현실을 외면한 방관’이란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선별된 정당한 전쟁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개인의 생명이 귀중하지만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에서의 살인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의미는 개인 차원에서 원한을 품고 동료를 죽이지 말라고 하는 뜻이지 전쟁에서의 살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전쟁 대신 협력과 화해를 추구해야 하며 혹 침략을 받았다면 방어에 그치는 전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제 결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마무리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진군하죠. 가나안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외부의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싸우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흡수 통합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가나안 전쟁은 매우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스라엘의 침략에 투항한 자들에게는 관대함을 그렇지 않고 대항한 족속들에게는 무자비한 살육이 자행됩니다.
그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요~
1947년 사해 서쪽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에 따르면 고대 유다인들의 군대는 대체로 보병, 기병, 투석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보병은 거울처럼 광택을 낸 청동 방패로 무장했죠. 기병대는 약 3.5m 길이의 창을 장착하였습니다.
잘 정비된 이스라엘 군의 경우는 기병수가 6천 명, 보병이 약 2만8천 명이었습니다. 기병대는 700명 단위로 구성됐으며, 기습 담당 기병은 200명이 별도로 조직돼 전장을 누볐습니다
당시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는 40~50세였으며, 밥을 짓고 말에게 먹이를 먹이는 등 허드렛일을 하는 보조 전투 인력은 50~60세 연령층이 맡았죠. 다만 순발력과 뛰어난 승마술이 필요했던 기병의 경우, 보병과 달리 30~45세로 제한되었습니다. 20대 청년들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다만 군수품을 조달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소년이나 여성도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전투 방식 또한 독특했죠. 사해 문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뿔 나팔을 불었다고 합니다. 나팔은 군대 소집, 적에 대한 경고, 공격, 추적, 재소집 등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도록 했습니다. 경고 및 공격 나팔 소리는 높고 끊어지는 소리였고, 후퇴 나팔 소리는 낮은 저음의 긴 울림이었답니다. 여리고 성 함락 작전을 연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가나안의 관문 도시, 여리고 성 전투 승리 후 이스라엘의 군의 기세는 무서웠습니다. 내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여호수아는 곧이어 아이를 점령했고(여호 8,1-29),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기브온 마저 평화 협상을 통해 손에 넣게 됩니다.
포도 생산의 중심지였던 기브온은 성경에 45회나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지형적으로도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위치할 뿐 아니라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죠.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차지했다는 것은 가나안 토착민들의 남북 연락망을 끊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가나안의 요충지 기브온을 뺏긴 가나안 왕들은 매우 충격을 받습니다. 예리코와 아이, 기브온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공멸의 위기를 느낀 가나안 부족들은 연합 작전을 통해 기브온 탈환에 나섭니다.
연합 작전에는 다섯 왕이 힘을 모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아도니 체덱, 헤브론의 호암, 야르믓의 피르암, 라키스의 야피아, 에글론의 드비르 왕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전투가 각 부족들과의 개별 전투였다면 이제는 연합세력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죠. 정면 대결은 위험이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빠른 기동성을 앞세운 게릴라 작전을 펼칩니다. 연합 군대는 여호수아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다섯 왕도 잡혀서 죽임을 당하죠(수 10:1-27).
가나안 중부 중심 지역을 평정한 여호수아는 말머리를 남부와 북부로 돌립니다. 바야흐로 이제 가나안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입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하솔 왕, 야빈과의 전투입니다. 야빈이 볼 때 유대인들은 평화 파괴자이자 침략자였습니다. 야빈 왕은 주변국들과 정치적 연합을 결성하고 이스라엘 군대에 공동 대응합니다. 연합세력의 초반 기세는 대단했지만 상승세를 타고 있는 이스라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준 잔혹성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돌아오는 길에 하솔을 공략하고 그 왕을 칼로 쳐 죽였다. 일찍이 하솔은 이 여러 왕국의 종주국이었다. 숨 쉬는 것이면 모조리 칼로 쳐 죽였다. 코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솔에 불을 질러버렸다(수 11:10-11).“
“여호수아는 그 온 지역을 정복하였다. 산악 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 지대와 비탈진 지역과 거기에 사는 모든 왕들을 쳐서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숨 쉬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모조리 죽여버렸다(수 10:40).”
가나안 북쪽과 남부지역 정복 때의 이야기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볼 때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은 침략과 약탈을 통해 성장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13세기의 몽골이 그랬고, 기원전 390년 북부 유럽의 켈트족(로마인들은 그들을 갈리안이라고 불렀다)이 그랬습니다. 켈트족은 당시 높은 수준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문명국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죠.
이스라엘 민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착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경 기술 등 생활 문화가 열등했습니다. 이 열등감은 적들과 전쟁을 할 때 잔혹함으로 나타납니다. 유다인들은 신의 명령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합니다.
어쨌든 평화롭게 살던 가나안 토착민들의 비참한 운명은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유다인들의 자부심 ▲오랜 광야 생활로 체득된 유대인들의 잡초같은 근성 ▲쇠퇴하는 이집트 등 당시 국제 정세 등이 어우러진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최종 정복은 통일 왕국이 성립하는 기원전 1000년대 말에 가서야 볼 수 있었죠.
가나안 정복으로 이스라엘에게 항구적인 평화가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다윗의 통일왕국은 솔로몬 이후 분열되었고 남북조 왕국은 외세에 의해 멸망당 당하게 됩니다.
왕조의 쇠락, 외세의 지배와 간섭이 반복되었던 이스라엘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죠. 이후 약 2천 년을 떠돌이 생활을 하던 유다인들은 1948년 예루살렘에 정부를 세웁니다. 3천 년 만에 또다시 가나안 침략을 감행한 것입니다. 새 이스라엘은 4차례에 걸친 전쟁을 일으키며 팔레스틴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100만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으며 지금도 끊임없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 7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경향신문(2022.12.09.)에 ‘대통령은 매일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이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 오창익 국장은 “윤 대통령이 앞으로 나가는 방식은 대개 ‘싸움’이다. 매일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 주로 직접 싸우지만, 가끔 대리인을 내세우기도 한다. 적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전술의 기본쯤은 간단히 무시한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싸움처럼 보인다. 대통령의 싸움은 안팎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준석 전대표를 당에서 쫓아낸 것, 자신의 잘못을 MBC에 돌리며 언론탄압을 자행한 것,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한 검찰의 칼,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업무개시명령 등 대화나 타협 없이 일반적으로 협박하고 싸움하는 모습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싸움이 아니라 대통령의 일을 해야 한다. 대통령에 취임하며 선서했던 그대로, 헌법 수호, 국가 보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성실히 일하는 게 바로 대통령에게 주어진 헌법상 책무”라고 권고합니다.
지금 윤석열 정부는 검찰 파시즘의 완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미 한물간 정보정치와 사법기관 장악을 통해 영구집권을 꿈꾸고 있습니다. 경찰을 하수인으로 두고 국정원을 통한 사찰을 강화하며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장악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합니다. 미일 군사체제에 들어감으로서 대내외의 압박을 해결하고자 하죠.
하지만 이런 기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한국의 근세사가 말해줍니다. 어떤 국면에서도, 제아무리 강한 권력일지라도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우리 국민들은 나섰습니다. 의롭지 않다고 여기면 침묵하지 않았죠. 그래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몰아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과 싸웠고, 박근혜 정권을 탄핵했습니다.
윤석열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낡고 낡은 지배권력의 기구를 장착한다고 막무가내의 오만을 가지는 순간, 파멸은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전쟁 이후 백성 대다수를 적으로 여기며 외세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고 했던 이스라엘 왕들의 배신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형벌입니다. 선민으로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비참한 역사적 고통을 당했으며, 디아스포라 난민으로 2000년을 살았던 유다 민족은 지금도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는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역사는 지금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들을 고통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직도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합작해 만들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촉발된 세계 경제의 몰락, 군사 쿠데타로 2년 넘게 피로 물들어 가는 미얀마, 히잡 반대 시위 강경 진압으로 석달 동안 500여 명이 사망한 이란 사태 등을 바라보며 어떤 경우라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전쟁과 폭력이 강대국,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게 됩니다.
노자 31장에 보면 “사람을 죽인 것이 많으면 슬피 울어 애도하거니와 전쟁에 이겼더라도 상례로 삼아야 한다(殺人衆多 以哀悲泣之 戰勝 以喪禮處之)”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 나라가 군대를 두지만 그 목적은 방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 의도가 없기에 전쟁에서 이겼더라도 마무리 할 때는 장례를 치루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적이지만 적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집 식구가 죽은 것처럼 슬피 울고 애도하라는 것입니다. 승전고를 울리고 승리의 축배를 들 것이 아니라 패전국의 백성들과 함께 애도하면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생기지 않도록 다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지난 금요일은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49제가 종교인들과 시민사회의 연대로 용산에서 열렸습니다.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참사 발생 46일 만인 14일 희생자들의 위패와 영정을 제대로 갖춘 시민분향소를 녹사평역 인근 이태원광장에 설치했습니다. 이제라도 영정과 위패를 보며 제대로 된 조문을 받고, 또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자리는 유가족에게 상처가 된 정부의 합동 분향소가 있던 자리입니다. 유가족들은 ‘이제라도 진정한 추모를 시작해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이 자리에 와서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국민을 적으로 삼아 협박하고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라 돌이켜 사과하고, 고치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가올 수치와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 주입니다. 이제 한 주 후면 우리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위한 것입니다. 이들의 해방은 모든 억압과 착취, 그것을 위한 모든 전쟁의 종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폭력과 협박, 살인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험악한 시절에 아기 예수와 함께 모든 전쟁과 폭력이 멈춰지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022.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