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복자를 기다리는 마음
- 로마의 시복식과 서울의 시복식
툿징포교베네딕도수녀회의 독일인 수녀들은 6.25때 함경도 옥사덕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는 이 어려움 중에서 ‘한국교회는 고목나무에 돋아난 새순’이라고 고백했다. 세 번째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한국교회라는 싹이 싱싱한 나무 가지로 성장했음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의 생명을 틔우고 키워 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교황께 올리는 상소문으로 시복식에 참여한 조선신자들
1925년 7월 5일 바티칸 대성당은 범상치 않게 장식되어 있었다. 제대 왼쪽은 순교자 김효임과 그 동료, 오른쪽은 유대철의 심문 장면, 정문 위에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정면 제대 위에는 복자 전체가 있는 ‘영광’이란 그림이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모두 이탈리아인 쥬스띠니아니 교수가 그린 그림이었다.
10시에 조선순교자 79위의 시복식이 시작되었다. 제대 오른편 좌석에 수석 사제 추기경과 5명의 추기경이 함께 앉아 있었다. 한 고위 성직자가 시복소칙서를 낭독하자, 순교자들을 그린 그림 위에서 장막이 벗겨졌다. 조선의 주교들은 가슴이 벅찼다. <테 데움>이 노래되고 대례미사로 이어졌다. 오후 6시에는 성체강복이 있었다. 교황은 열광하는 인파 한가운데로 입장했다. 뮈텔 주교가 조선순교자 기도문을 노래하고 성체강복을 했다. 한기근 신부가 주교관을 들고 따랐다. 성체강복 후에 조선교회 시복청원자 가르니에 신부와 조선 주교들은 성직자 좌석 한가운데서 교황께 순교자들의 성해(聖骸), 치명의 꽃 옥잠화와 동정의 꽃 장미를 바쳤다. 교황은 다정하게 답하고, 전날 뮈텔 주교가 바친 ‘황사영 백서’에도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리고 순교록에 조선을 새 국가로 삽입한 데 대해 감사했다. 시복식 후 3일간 예수성당에서 오전 주교미사, 오후 복자 찬사연설과 성체강복 예절이 있었다. 첫날은 뮈텔 주교, 둘째 날은 드망즈 주교가 각각 오전에 창미사를 드리고 오후에 복자 찬사연설을 했다. 셋째 날은 반 로쑴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하고 로마의 연설자가 복자찬사 연설을 했다. 물론 이 아름다운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들은 서울에서 같은 시간에 맞추어 미사를 올렸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세계를 향해 그 동안의 도움에 감사했다. 그러나 너무나 단출하고 조용한 인사였다.
1925년 로마에서는 성년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 해 동안 시복·시성이 열 두 차례나 있었다. 시복시성식에는 반포되는 복자복녀와 성인성녀들의 친척과 그 교회구성원이 참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당시 바티칸에서는 전교박람회를 열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몇 천 명, 몇 백 명씩 참배단체들이 오고 있었다. 바티칸에서는 그 인파를 위해 처음으로 라디오와 확성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10만을 헤아리는 조선인 신자들은 조선복자시복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주교 두 분만 달랑 시복식 참여차 한국을 떠났다. 대략 6월에 시복식이 있으리라고 예측하던 조선교회 주교들은 로마가 멀기 때문에 미리 길을 떠나야 했다. 3월 17일 나이 50에 이르는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는 70을 넘긴 서울의 뮈텔 주교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뮈텔 주교가 대구로 와서 하루 묵고 드망즈 주교와 출발했다. 조선의 두 주교는 수행원도 없이 여객선 꽁삐엔느호의 2등칸 손님이 되어 로마로 향했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고베, 상해, 홍콩, 싱가포르, 사이공, 스웨즈 등을 경유하여 마르세이유에 닿는 여정이었다.
주교들은 배가 멈출 때마다 하선하여 치료차 내보낸 선교사나 사목 동료들을 찾아보고 인근 수도회를 방문하여 정보를 교환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교회를 위한 모금을 하는 여행선교였다. 조선교회와는 전보로 일을 처리했다. 조선의 주교들은 그해 사순절과 부활절을 배위에서 지냈다. 그리고 프랑스를 거쳐 6월 17일에 로마에 도착했다. 그들이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날짜가 7월 5일이라고 알게 된 때는 여행 중인 5월초였다. 가난한 한국교회 신자들은 각각 자신의 지역에서 주교를 배웅하고, 기도를 통해서나 주교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는 토종 조선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서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마침 7월 1일에는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과 장발 형제가 로마에 당도했다. 그들은 복자들의 친인척이 되었다. 한기근 신부는 로마 성년의 소식과 두 주교의 근황을 속속 보도했다. 6천여 명에 이르는 독자들에게 『경향잡지』는 시복식을 보는 창이 되어 주었다.
한편 한기근 신부는 조선 교우 10만 명 중에 이 영광의 시복식에 참례할 자가 자신 혼자뿐이냐고 한탄했다. “로마는 조선에서 어찌 멀리 있는고. 로마부의 거리가 수천 리만 되어도 참례하러 가는 교우가 몇 명 있을 것이오. 시베리아 철도의 형편이 대전쟁 때와 같아도 거룩한 체면을 세울 교우들이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당시 주교가 이등석 티켓 두 장에 1,600여 원을 지불했으므로 1인당 거의 2,000원은 있어야 하는 여행이었다. 이때 함께 떠나지 못하는 조선신자들은 한 신부에게 교황께 강복을 구하는 상소문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신부 일동은 라틴어로, 천주교 청년연합회에서는 조선어로 상소문을 지어 교황께서 강복해 주시기를 청원했다.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비록 육체는 참례하지 못하오나 마음으로는 조선성직자 대표 한기근 신부와 같이 참례하니 조선 일반신자에게 강복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절한 요청문이었다. 장면 형제가 이 상소문을 교황께 올렸고 교황은 강복장을 주었다. 장면은 귀국해서 교황청에서 받은 강복증서수여식을 했다.
1925년 시복식 후 국내에서는 복자유해거동, 79위 복자를 모시고 기도하기 등 여러 신심활동이 일어났다. 약현성당 본당신부가 심장병으로 위독하자 신자들이 복자되실 조선치명자들에게 기구해 차도를 얻기도 했다. 시복식은 국내외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일례로 당시 동아일보는 그해 3월 19일 시복식을 ‘천주교순교자표창식(天主敎殉敎者表彰式)’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시복식이 끝난 9월 30일자 신문에는 조선순교자 시복식이 있었다고 수정했다. 시복식은 일반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교회 신자가 10만 명이었는데, 43년 후 두 번째 시복식 때에는 신자가 75만 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바티칸에서 아리랑을 합창한 1968년 시복식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병인순교자 26위 중 24위의 시복식이 있었다. 이 시복식에는 5만여 명의 순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7명의 추기경, 15명의 대주교 및 주교, 5백여 명의 한국 신자들, 2천 5백여 명의 프랑스 신자들이 참석했다. 한국인들은 중앙제단 좌우편 특별석에 앉았는데, 여성은 한복, 남성은 양복을 입고 태극기와 교황기를 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민간인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전세 내어 2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순례단 136명, 서독에 파견된 간호원 65명, 그리고 유럽에 사는 유학생 등이었다. 시복될 남종삼의 후손 7명도 함께 했다. 미사집전 사제도 한국인이었다. 미사집전을 맡은 김수환 대주교가 입장하자 곧 이어 <칙서> 낭독이 있었다. 라틴어 원문 낭독에 이어, 이인하 대전교구 부주교가 한국어로 낭독했다. 김수환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이 시작될 때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를 가린 막이 걷혔다. 베르뇌 주교를 선두로 한 그들의 모습은 떼 데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사람들의 눈을 잡아 두었다. 시복기념화 ‘영광’은 정창섭 교수가 그렸다.
이어 대례미사가 올려졌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되었다. 이 날의 시복식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특별연설은 5개 국어로 중계되었는데, 한국어 중계는 심용섭 신부가 맡았다. 한국 순례자들은 그 감격을 담느라 녹음기에 신경을 쏟기도 했다. 미사 마지막에 교황청 합창대가 ‘복자찬가’를 부르자 한국인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문근 신부가 작곡하고 최민순 신부가 작사한 “장하다 복자여~” 로 시작하는 현재 가톨릭성가 283번이었다. 오후의 성체강복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날의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후, 한국 24위의 순교자들을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한국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했다. 교황의 이 강론은 성 베드로 대성전을 가득 메운 관중들로부터 여러 차례 박수를 받았다. 교황의 연설에 이어 새 복자들의 유해친구가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유해친구를 한 이는 복자 남종삼의 후예들이었다. 이때 24위 복자가 로마에서 시복되는 같은 시간에 한강변 새남터순교성지와 양화진복자기념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튿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 노기남, 장병화 주교를 모시고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 신자들이 바티칸 순례를 하는 것이 어려웠고 교황 알현은 더더욱 어려웠다. 교황은 거듭 한국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하며 성작을 선물했다. 한국교회와 순교자의 후손, 신자들의 선물에도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 1시간 20분이나 걸린 알현에서 전원이 아리랑을 부르며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리랑은 계속 이어지고 신자들은 물론 연세 든 신부들까지 교황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교황은 나가다가 감격에 넘쳐 흐느끼는 여성 신자를 보고 되돌아서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하기도 했다.
한국교회는 순교자를 내었고, 순교자 위에서 자라났다. “순교자의 꽃을 피게 하라.”는 뮈텔 주교의 표어였다. 뮈텔 주교는 1925년 시복식에서 성체강복을 했다. 또한 1968년 시복식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당시 대주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병인교난 때 순교했다. 할머니 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그의 부친이었다. 물론 한국교회의 성장도 급속도였다. 첫 번째 시복식에는 한국인이 단 3명 참여했지만 두 번째 시복식에는 그의 170배에 달하는 신자가 참석했다. 교회매체뿐 아니라 국내 일반매체들도 시복식에 대해 호응이 높았다. 이후 교회에서는 엄청난 순교현양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시성식을 당기게 되었다.
한국 심장부로 천주교를 부르는 시복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거행한다. 물론 역사 속에서 굴곡은 있었지만 광화문은 조선왕조의 심장부였고 현재 한국의 중심이다. 숨어 살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그 이름을 불리게 된다. 인사동, 관훈동에 살던 강완숙 등등의 이름도 불릴 것이다. 신자들이 마음으로만 함께 해야 했던 1925년 시복식, 순례단이 전세기를 타고 참여한 두 번째 시복식을 거쳐 신자 20만 명이 참여하는 세 번째 시복식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로 이렇게 큰 사랑을 베푸시는 걸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시복식을 통해 한국사회 내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우리 땅, 우리 역사 속에서 살았던 순교자의 생활과 신앙을 고스란히 이해시키라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같은 공간에서 동시대를 산 10명 중 비신자 9명이 이해하지 못하는 교회사는 교회 안의 이야기로만 남게 된다. 이제 교회사를 한국사 안에서 해석하고 순교자를 한국사회 공간 안에서 부활시켜 전 국민이 공유하게 해야 한다.
[월간빛, 2014년 8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