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답변
00아, 어제는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어서 답변을 못 보냈다. 네 질문이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거 같아. 너는 이분법적 사고를 안 하는 방법과 이분법의 반대말을 물었다.
글쎄 나는 쉬운 결론이나 답변을 주고 싶지 않다. 이분법적 사고를 안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말과 생각의 함정에 빠지곤 해.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경험한 세계에 갇히게 마련이야.
말과 생각은 엄청난 장점이 있고 가능성을 인간에게 열어줬지만, 한편으로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우리의 뇌는 말과 생각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해. 말과 생각이 분명 실재하는 것에 대해 이름붙이고 그것을 묘사하는 한 가지 시각이지만, 그 이름과 시각을 전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편견이 길러지고, 단정이 길러지고, 혐오와 폭력이 강화되는 것 같아. 이름붙이기는 그래서 늘 주의해야해. 단정과 생각 정지가 일어나기 때문이야. 생각이 멈추면 감정적 반응이 앞서게 돼. 이해하고 배우려하지 않게 돼. 이런 점들이 말과 생각의 함정이야.
하지만 말과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는 힘들어. 그것은 마치 칼이나 불과 같은 거야. 그것 없이는 불편해서 살 수 없지.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이 죽을 정도로 엄청 위험하지. 그리고 잘 사용하면 엄청나고 유용한 필수품이잖아.
그래서 말과 생각을 사용할 때도 주의가 필요할 거 같아. 이름과 시각이 임시적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해. 그러려면 이름 붙이기의 그림자를 자주 상기해야 해. 그것은 편리하지만 단정으로 더 이상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해. 그게 바로 이분법의 모습 같다.
이분법의 대표적 예는 선악 이분법이야. 선악은 도덕관념이야. 그것은 인간의 문화에만 존재하는 것이야. 그리고 도덕은 문화에 따라 조금씩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인간과 문화도 자기가 겪은 경험세계의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어. 그래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이 다시 발생하지.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식이야. 그것 선악이분법과 똑 같이 작동해. 그래서는 이해과 평화가 불가능해. 그래서 선악 이분법은 만화영화 안에서만 가능해야 해. 그것이 현실에서 적용될 때 폭력이 되기 때문이야. 현실의 세계에서 순수한 선과 순수한 악은 없어. 인간은 모든 속성을 함께 가지고 있고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여주기도 해. 그런데 그런 인간에 대해 선과 악으로 이름붙이기를 하면 삶이 아니라 죄와 벌의 재판정이 되어버릴 거야.
그래서 나는 네가 쉬운 결론보다 과정과 맥락을 찾고 이해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어야 해. 진짜 이름은 영원히 모를 거야. 진짜 이름에 가까워지도록 새로운 이름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할 거야. 그것이 바로 말과 생각을 과정적으로 사용하는 거야. 때로는 단정이 필요하고 행동이 필요해.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말고 보이지 않고 가려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래. 그럼 분노와 절망 대신 인내와 노력이 다가올 거야. 왜냐면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이분법과 경험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아. 그것을 벗겨주기 위해서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해. 너처럼 진실에 대해 알고 싶고 의문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찾을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젊으나 늙나 꼰대가 되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쉬운 결론의 달콤한 함정에 빠져 잠들지 말아야 해. 멈추지 말아야 해.
네가 이름과 생각의 우물에 너무 빠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답답한 방에 창문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고, 어두운 방에 불을 밝혀 빛이 오게 하는 것처럼 다른 새로운 경험을 찾아보렴. 그것이 책이든 여행이든 사람이든 상관이 없어. 그런 새로운 경험이 바로 공부고 세상의 다양한 진실과 만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00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00의 고민이 00을 더 깊고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고맙고 기뻐. 즐거운 하루 되렴.
아, 이분법의 반대말은.... 음. 예전에 현상학이라는 학문에서는 ‘판단정지’라는 말을 썼어. 말과 생각의 편견으로 우리가 진실을 못 보는 장님이 되기 때문에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는 ‘판단’을 정지하고,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양하게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태도야. 그래서 우리는 그런 태도를 ‘현상학적 판단정지’라고 해. 불교와 같은 명상도 이런 판단을 제거하려는 한 가지 방법이야. 다른 방법으로는 ‘종합적 사유’가 반대말이 될까? 서로 상반된 말과 생각들도 살펴보며 이분법의 단점을 극복하는 종합적 사유가 필요하겠지. 역시 노력이 필요해.
즐거운 하루 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