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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일정씨 포은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archi정(鏞和)
포은집의 간행
포은집은 아들 鄭宗誠이 蒐集ㆍ編次하여 1439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초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玄孫 鄭世臣이 新溪縣令으로 부임하여 1533년에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新溪本》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규장각(가람貴819.4 J464P), 고려대 중앙도서관 만송문고(晚貴345)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明ㆍ宣 연간에 開城府에서 韓濩의 글씨로 板刻되어 《開城本》문집이 간행되었다. 이 개성본은 신계본에 詩 3수가 더 첨가되었으며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후 校書館에서 鑄字로 문집이 《館本》으로 간행되었다. 이 관본은 年譜에 신계본ㆍ개성본과는 다르게 사건이 없으면 年을 표시하지 않았다. 또한 위 두 본이 卷上ㆍ卷下로 편차된데 반하여 卷1, 卷2로 편차되어 있으며 行狀과 諸人의 기술을 모은 附錄이 실려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貴155-文70-7)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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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皐書院에 보관된 판각이 소실된 후 1607년 두 종의 문집이 木板으로 간행되었다. 첫째는 永川舊刻本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遺像을 추가하고 11행 18자의 목판본으로 간행된 문집이다. 이 본의 目錄에는 拾遺 뒤에 遺墨이 있으나 문집 안에는 실려 있지 않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6-정몽주-포-라)에 소장되어 있다. 둘째는 임고서원 유생들이 난리 중에 흩어진 문집을 收拾하여 完本을 만들고, 方伯 柳永詢과 郡守 黃汝一의 협조로 慶州와 永川에서 나누어 刻板한 뒤 임고서원에서 10행 20자의 목판본으로 간행한 문집이다. 이 본은 遺墨과 曺好益의 跋이 추가되어 있고 의심난 곳에는 頭註가 붙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승계古3648-文70-82)에 零本 1冊이 소장되어 있다.
1914년에는 숭양서원에서 鉛活字로 《崧陽重刊本》문집이 간행되었다. 이 본은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1106)에 소장되어 있다. 1985년에는 迎日鄭氏圃隱公派宗約院에서 국역본 및 영인본이 간행된 바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07년 永川에서 간행된 11행 18자의 목판본으로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고려 말엽에 정몽주(鄭夢周 : 1337~1392)는 충효의 대절이 있었고 정주학(程朱學)으로 학문을 하여 동방 성리학의 조종(祖宗)이 되었는데, 불행히도 고려가 멸망할 때를 당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하였습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학문을 전습(傳習)한 자는 김종직(金宗直)입니다.
그는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었고 행실 또한 단정하고 방정하였으며, 후학을 가르침에 지극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성종께서 그의 어짊을 알고 판서로 발탁하였으나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습니다. 연산조에 이르러 사화(史禍)가 일어나 사림(士林)들이 죄를 입자, 참화가 그 문도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김종직에게까지 화가 미쳤습니다. 또 김굉필(金宏弼)이라는 분이 있었으니, 이는 김종직의 제자입니다. 김종직은 대개 문장을 숭상한 반면, 김굉필은 실행에 힘쓴 사람입니다.
성종께서는 그를 소중히 여겨 좌랑으로 삼았는데, 연산조에 이르러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귀양 갔다가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끝내 대죄(大罪 사형)를 받았습니다. 중종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어짊을 애석히 여겨 표창하고 우의정을 추증하였습니다. 조광조는 또 김굉필의 제자입니다. 독학(篤學)의 공부가 있어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이욕의 근원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정에서는 옳고 그름을 밝히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뒤에야 인심이 기뻐 감복할 것입니다.
이언적은 벌써 사면을 받았으니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과 조행은 근대에 없는 바입니다. 지난번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다른 이는 볼만한 저술이 없으나 이언적은 저술한 것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저술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배운 바는 정주학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다 도리에서 나왔으며, 또 그의 저서를 보면 젊은 시절에 지은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저술이 이와 같았다면 말년의 성취를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집안에 남아 있는 유서(遺書)들을 찾아내게 해서 후학으로 하여금 존경하고 본받게 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광조와 이언적을 만약 표창하여 추종하고 존숭한다면 아마 인심을 흥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몽주(鄭夢周, 1337년~1392년음력 4월 4일는 고려의 문신이자, 정치가·유학자이다. 본관은 영일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삼은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이며, 이색의 문인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길재는 사림파의 비조가 되었고 권우는 세종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방원에게 살해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 태종의 손에 영의정에 추증(追贈), 익양 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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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리학 도입 한편,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와 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여말선초의 유학
여말 선초는 역사적으로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짐과 함께 사상계의 일대 변화가 있었던 시기에 속한다. 여말의 사상적 풍토는 老, 佛 사상의 지나친 신비주의에 빠져 침체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념과 학풍의 진작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였다. 또한 元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성리학의 민족주의적 성격과 대의 명분론은 환영받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되어, 왕조 교체와 함께 유, 불의 대체를 가져오게 되었다.
충렬왕 때 안향(安珦, 1243-1306)이 중국에서 주자전서를 가져와 성리학이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그 후 백이정은 주자학을 배우고 성리서를 구해가지고 돌아왔으며, 권보는 주자의 사서집주를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안향이 주자학을 수입한 이후 한국 성리학의 여명기에 초석을 다졌던 대표적 학자들의 계보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이곡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 여말의 성리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전개된다. 역사관이나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이면서 하나는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포은 계열의 이른바 사림파요, 또 하나는 실리와 현실을 중시하는 삼봉 계열의 이른바 사공파라고 할 수 있다. 포은 계열의 사림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불의로서 목숨을 바쳐 막아야 할 악이지만, 삼봉 계열의 사공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시중지도로서의 창업으로 정당시 되었다. 사림파는 정몽주를 정점으로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조광조로 이어져 조선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사공파는 정도전을 정점으로 권근 등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들은 현실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정책 개발, 저술, 문화 활동에서 두드러진 기여를 하였다
性理學의 전래 과정 - 전래 배경 : ① 여말의 사상적 풍토는 老佛 사상이 지나치게 신비주의에 빠져 침체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념과 학풍의 진작이 절실히 요청됨 ② 元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성리학의 민족주의적 성격과 大義名分論은 환영받기에 알맞는 것이었다.
① 성리학 여명기: 충렬왕 때 安珦이 중국에서 [朱子全書]를 가져와 보급 / 白頤正이 연경에서 주자학을 배우고 性理書를 구해옴 / 권보가 [四書集註]를 간행 보급, 禹卓은 伊川易學을 해득하고 가르침, 최해와 최문도도 元에서 주자학을 배워옴. / 이제현(백이정의 제자)과 이곡(이제현의 제자)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經學과 문장 등 通儒로서 폭넓은 학문을 함, 이제현은 원경에 萬卷堂을 짓고 학자들과 교류, 이곡은 이색의 부친으로 經․史․子․集을 넓게 익힌 통유 ☞ 여말 성리학의 계보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이곡으로 이어짐. 牧隱 李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중국에서 성리학을 수입. 經史子集에 통달.
性理學이란? (程朱學, 道學, 理學, 新儒學)
- 性命義理之學에서 연유, 性卽理의 명제에서 비롯. // 인간 본성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 - 性理學을 道學이라 하는 것은 성리학이 聖賢之道로서 실천성과 도덕성 그리고 자기 수양과 사회적 실현의 양면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理學이라 할 때는 理를 진리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心學 혹은 氣學에 대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程朱學이라 함은 程明道, 程伊川 형제와 주희의 학문적 위치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공맹유학이 시대적 요청에 따라 도가와 불가의 영향하에 좀더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체계로 재창조된 새로운 유학이라는 의미에서 서양인들은 종래의 공맹유학과 구별하여 新儒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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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학 도학 1) 도학의 의미 - 도학이란 인륜에 대한 사실판단으로서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판단으로서의 규범적 지식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참된 인격을 수양하고 사회에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실천적 학문이다. 이와 같이 도학은 인간의 구체적 현실에서 올바르고 마땅한 삶을 추구하는 의리학과 이를 위하여 인간의 본질을 분석하는 성리학은 물론 정의와 진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종교성을 포함하고 있다. 즉 철학과 윤리 그리고 종교적 영역이 동시에 담겨 있는 학문이라고 하겠다.
2) 한국 도학파의 형성과 전개
- 고려 말기에 송대의 도학사상을 수용한 한국의 도학사상은 도학사상이 갖고 있는 인도 정신과 의리 정신의 두 요소 가운데에서도 특히 의리 정신이 강조되었다. 중국과 비교하여 국가의 규모나 전통적 기질 그리고 사회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유학사상은 포괄적․원심적 대규모의 체계를 갖고 인도의 정신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한국은 내재적․인간적․구심적 입장에서 의리의 저항정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는 우주론적 이기론보다는 주체적인 인간의 내면에 담긴 태극과 이기를 논하여 중국보다 더 심화된 인성을 구명하였으며, 역사적으로는 후덕한 군자보다는 사회의 불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선비들을 더 높은 중국보다 더 강한 민족정기를 온축하였던 것이다.
- 한국의 독특한 의리정신은 송대의 도학이 수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한국인의 고유한 민족정신에 침략과 패도를 부정하고 진리와 정도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삼국시대에는 <춘추>를 최고의 경전으로 삼아 충의 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조에서도 내적으로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고, 외적으로는 몽고의 침략 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되살렸던 것이다.
- 그러나 송대의 도학사상이 전래한 이후 한국의 선비정신은 정밀한 성리학적 이론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더욱 강한 기질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중추적인 사회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조선 건국의 문제에 대하여 <주역>의 변화론에 근거하여 혁명을 주장한 정도전 계열과 <춘추>의 강상론에 근거하여 절의를 강조하는 정몽주 계열과의 대립이 있었다.
그 뒤, 세조의 즉위에 대하여 불의한 왕권의 찬탈이라고 규정하고 항거한 성삼문 등의 사육신이나 김시습 등의 생육신들과 국권을 공고하게 확립하기 위한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성을 강조하고 세조를 도운 정인지와 신숙주 등과의 대립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그들 개인은 물론 당시의 역사적 시대 상황에 대한 분석과 종합적 이해 속에서 내려져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대립의 본질적인 문제는 의리사상에 있어서 상황성과 원리성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 세종 시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는 정몽주와 길재 등을 충신으로 수록함으로써 강상론을 근거로 하는 의리론이 제시되었고, 그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사육신 등의 절의파들을 대중들이 지지하고 존숭함으로써 강상론적 의리론이 확립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황성인 권도보다는 원리성인 상도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한국 의리사상의 특질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 조선조 초기에 도학적 의리학파의 정맥은 일반적으로 정몽주에서 길재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하여 왔다 한국 도학파의 형성과 전개
- 고려 말기에 송대의 도학사상을 수용한 한국의 도학사상은 도학사상이 갖고 있는 인도 정신과 의리 정신의 두 요소 가운데에서도 특히 의리 정신이 강조되었다. 중국과 비교하여 국가의 규모나 전통적 기질 그리고 사회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중국의 유학사상은 포괄적․원심적 대규모의 체계를 갖고 인도의 정신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한국은 내재적․인간적․구심적 입장에서 의리의 저항정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는 우주론적 이기론보다는 주체적인 인간의 내면에 담긴 태극과 이기를 논하여 중국보다 더 심화된 인성을 구명하였으며, 역사적으로는 후덕한 군자보다는 사회의 불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선비들을 더 높은 중국보다 더 강한 민족정기를 온축하였던 것이다.
- 한국의 독특한 의리정신은 송대의 도학이 수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한국인의 고유한 민족정신에 침략과 패도를 부정하고 진리와 정도를 숭상하는 선비정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삼국시대에는 춘추를 최고의 경전으로 삼아 충의 정신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조에서도 내적으로는 고려 말기의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고, 외적으로는 몽고의 침략 세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하여 민족정기를 되살렸던 것이다.
- 그러나 송대의 도학사상이 전래한 이후 한국의 선비정신은 정밀한 성리학적 이론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더욱 강한 기질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중추적인 사회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조선 건국의 문제에 대하여 주역의 변화론에 근거하여 혁명을 주장한 정도전 계열과 춘추의 강상론에 근거하여 절의를 강조하는 정몽주 계열과의 대립이 있었다.
그 뒤, 세조의 즉위에 대하여 불의한 왕권의 찬탈이라고 규정하고 항거한 성삼문 등의 사육신이나 김시습 등의 생육신들과 국권을 공고하게 확립하기 위한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성을 강조하고 세조를 도운 정인지와 신숙주 등과의 대립도 있었다. 이러한 대립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그들 개인은 물론 당시의 역사적 시대 상황에 대한 분석과 종합적 이해 속에서 내려져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대립의 본질적인 문제는 의리사상에 있어서 상황성과 원리성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韓國 道學派 形成과 意義
고려말 송대의 도학사상을 수용한 한국의 도학상은 인도정신과 의리정신의 두 요소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리정신이 강조된다. .
한국의 도학은 첫째가 인간과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윤리사상이다. 단순한 인도가 아니라 이때의 인도는 천리를 중심에 확보하고 있으면서 천도를 실현 시킬 수 있는 주체로서 인도를 말한다.
둘째의 ‘子曰未能事人 焉能事鬼’에 나타나는 것처럼 정상적인 人倫을 벗어나거나 자연주의에 중심을 주는 佛家나 道家의 理論을 비판하는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 인성의 본질을 분석하고 궁극적으로는 天道, 天理와의 관계를 해명하여 논리적 이론체계를 갖추고 있다.
셋째 도학은 사실판단으로서의 객관적 진리와 가치판단으로서의 규범적 지식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참된 인격을 연마하고 사회에 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사상이다.
종교성이 담겨 있다. 공자의 살신성인과 맹자의 사생취의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실천을 강조하는 도학에서는 이론에만 탐닉하는 지식위주의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구체적 현실에서 정의와 정도를 구현하려는 도학정신은 대내적으로는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비판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비판정신과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부당한 침략과 무도한 패도에 항거하여 민족을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저항정신이 담겨 있다.
韓國의 道學派 -形成展開 고려 말 송대의 도학사상을 수용한 한국의 도학사상은 도학사상이 갖고 있는 人道精神과 義理精神의 두 요소 가운데서도 특히 의리정신이 강조 되었다. 한국은 내재적, 인간적, 구심적 입장에서 의리의 저항정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철학적으로는 우주론적 리기론 보다. 주체적인 인간의 내면에 담긴 태극과 이기를 논하여 중국보다 더 심화된 인성을 구명 하였으며 역사적으로는 후덕한 군자 보다는 사회의 불의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선비들을 더 높여 중국보다 더 강한 민족정기를 온축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독특한 의리정신은 송대의 도학이 수용되기 전부터 있었다. 송대의 도학사상이 전개된 이후 한국의 선비정신은 정밀한 성리학적 이론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더욱 강한 지질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중추적인 사회 이념이 되었던 것이다.
세종시대에 편찬된 <상강행실도>에서는 정몽주와 길재 등을 충신으로 수록함으로써 강상론을 근거로 하는 의리론이 제시되었고 그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사육신 등의 節義派들을 대중들이 지지하고 존숭함으로써 綱常論的 義理論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병자호란 때 主和論을 주장한 지친 최명길과 斥和論을 주장한 청음 김상헌과의 대립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靜菴 趙光祖의 道學思想 정암의 도학사상은 原理의 실현에 주력하는 實踐主義的 色彩가 짙다. 행위를 위한 주체적 실천 즉 의리의 추구정신이 두드려지며 實踐躬行도 철저한 修己와 安人을 꾀하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정치적 비리의 諸問題를 말하는데 정치적 비리를 막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君王이 公私와 義理의 分辨에 밝아야 함을 강조한다. ‘崇道學’ ‘正人心’ ‘法聖賢.’ ‘興至治’를 주장하고 도학의 목표는 생민을 補益하는데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처럼 그의 도학사상은 민을 위한 순전한 公心에서 나온 것이며 이러한 공심을 바탕으로 하여 성의 자세로 실천할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곧 치국의 방법이 도에 있으며 이 도는 심에 의지하며 이 심은 성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한국도학파의 비판정신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첫째는 대내적 不義에 대한 비판으로 잘못된 정치와 사회현실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둘째는 대외적 침략에 항거하는 정신으로서 부당한 침략과 無道한 覇權에 항거하여 민족을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학사상은 한말 도학파가 대외적으로 항쟁하게 하는 근본사상이 된다. 壬辰倭亂 때 순절한 조헌은 국민을 모집하여 항전했고 七百義士의 순절은 不義한 침략에 대항하는 大義精神의 발로가 되었다. 또한 도학파의 정신은 후에 衛正斥邪 精神과 民族의 自主意識을 불러 일으켰다
<<< 려말선초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 조선 건국의 문제에 대하여 周易의 변화론에 근거하여 革命을 주장한 鄭道傳(三峰) 계열과 春秋의 綱常論에 근거하여 節義를 강조하는 鄭夢周(圃隱) 계열과의 대립이 있었다. /// 세조 즉위에 대해 不義한 왕권 찬탈이라 규정 세조에 항거한 死六臣과 生六臣 節義派와 국권을 공고하게 확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성을 강조하고 세조를 도운 정인지와 신숙주 등의 대립이 있었다. ⇒⇒ 세종 때 三綱行實圖에 鄭夢周와 吉再 등을 충신으로 기록 綱常論을 근거로 하는 義理論이 제시되고, 死六臣 등의 節義派를 대중들이 지지하고 尊崇함으로써 綱常論的 義理論이 확립.
* 조선시대 초기의 綱常論的 義理學派의 正脈은 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金宏弼→鄭汝昌→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 (율곡은 한국 道學을 정립시킨 사람은 趙光祖라고 함)
* 道學은 理學과 義理學 등을 포괄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純正한 본질과 함께 정밀한 이론과 時中의 실천을 동시에 갖추어야 진정한 의미로서의 道學이라 할 수 있다. 道學의 단서는 정포은에게서 찾을 수 있으나, 道學의 확립은 趙光祖에서 비롯된다.
* 趙光祖의 도학사상은 그 뒤 晦齋, 退溪, 栗谷, 尤菴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 성리학의 정초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의 도학사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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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 성리학의 두갈래
여말 성리학은 두 갈래로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포은 계열의 士林派와 실리와 현상을 중시하는 삼봉 계열의 事功派 또는 勳舊派였다. 그렇지만 포은 계열의 사림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不義로서 목숨을 바쳐 막아야 할 악이지만, 삼봉 계열의 사공파에서 보면 이성계의 혁명은 時中之道로서의 창업으로 정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정몽주를 정점으로 吉再(冶隱)→金叔滋→金宗直→鄭汝昌→趙光祖로 이어져 조선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사공파는 鄭道傳(三峰)을 정점으로 權近(陽村) 등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들은 현실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정책 개발, 저술, 문화 활동에서 두드러진 기여를 하였다. <한국의 유학과 성학사상을 논하라>
공자와 맹자 이후의 유학사상은 중국의 학술사상과 정치, 교육, 사회사상에서 그 주류를 이루어 왔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천여년 이상의 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유학사상은 불교 사상 도교 사상과 함께 동양사사의 핵심을 이루는 사조이다. 그 중에 유학은 현실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된 실천철학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유학 사상은 크게 네번의 변천을 겪으면서 발전해왔는데, 그 첫째는 한 대의 오경사상을 수용하여 제왕의 통치이념으로 발달한 삼국시대의 유학사상이다. 둘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입기간이다. 섯째는 조선중기의 성리학의 융성기이며, 넷째는 조선후기 실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삼국시대의 유학은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국립대학인 태학설립 <논어>나 <효경>을 학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학이 서기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수입되었으리라 시사해 준다. 신라는 선덕여왕 9년 (640) 당태종이 국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해내외의 유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때에 삼국이 모든 자제들을 입학케 하였으며 유학이 행하여 진 것은 오랜듯하나 국학 설립은 신문왕 2년 (682)에 비로소 실시되었다. 백제는 학교 설립 년대를 알 수 없으나 고이왕 62년( 285)에 왕인이 <논어> <천자문> <주역> <산해경> 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황태자를 교육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신라 고구려 보다 앞서 유학사상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고려말엽에서 조선초기의 성리학 도입시기이다. 고려시대 유학은 당나라 문학의 영향을 받아 문장학적 유학의 성격을 지니게 됨으로 건전한 실학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장유학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주도한 사상은 불교였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안유,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다. 이 무렵의 학풍은 한문학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여 유학사상 자체의 발달이 미숙하였다. 그래서 학문의 목적이 경전과 <사기>를 학습하여 그것을 정치에 운용할 수 있는 관리가 되는 것과 시부와 문장을 잘하는 문인이 되는 일에 있었다. 그러나 홍익인간이 건국이념이란 상황하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말 정몽주의 학행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말의 불교의 타락으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드디어 멸망의 길로 가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국가 시책으로 배불숭유정책이 확립되면서, 주자학이 그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조선초 유학을 강화하는 국가 정책을 선도하였던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불교를 배척한 이론에 이단의 사설을 물리쳤다고 이언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조선초기에는 주자학을 새로운 왕조의 통치 질서에 적용하므로써 새로운 사회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에 관학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편 정몽주 이후 길재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로 이어지는 학맥은 조광조에 이르러 대성한다. 이것이 이른바 도학사상인데 도학은 의리를 중시하고, 권세를 천하게 보며 도심을 높이고, 인욕을 누름으로서 강상을 세우려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 이론의 꽃이 만개하는 결실을 보았다. 셋째 성리학의 융성기인 조선 중기의 유학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등을 비롯하여 조식 이항 김인후 장현광 등을 들 수 있다. 이언적은 우리나라에서 무극태극 문제를 최초로 논하였던 학자이다. 서경덕은 독특한 기론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황은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고, 이이는 기의 일도설을 주장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의 절정기를 주도하였던 학자 들이다. 한국 성리학의 독특한 부분은 학문의 주체를 객관적 우주론적 영역보다, 주체적 인성론의 무제에 집중함으로서, 인간 내면의 주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또 인간의 성실성과 실존성을 통하여 진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생각은 사단칠정의 심성론으로 정리되었다. 넷째는 실학이 발흥한 조선후기이다.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된 형태는 성리학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송대의 성리학이나 한국의 성리학이 훈고주석의 성격을 탈피하고 이론적인 발전을 기하였던 업적을 실로 빛나는 것이었다.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자로서 쌍벽을 이루며 그 철학사상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세계 사상사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상사의 핵심을 이루는 성리학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리 공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이라 하면 당파싸움을 주도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만든 주범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학 이란> 성인을 목표로 한 학문이다. 여기에는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과 함께 성인을 배우는 학문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인에 대하여 공자는 널리 백성에게 베풀어 대중을 제도하는 인의 극치로서 말하였고, 맹자는 인륜의 궁극적 경지이며 또한 인간의 덕성이 극대화하여 타인에게 감화를 주는 경지로서 말하였다. 또한 송대의 주렴계도 성인이 중정과 인의로써, 인간 윤리생활의 최고 표준을 세우고 , 사욕이 없는 상태로서의 정을 위주로 하여 인극을 세운다. 라고 하엿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유학에서 말하는 성인이란 인간 자신 속에 내재한 성실한주체성과 보편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체득하여 실천하는 최고의 인격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러한 성인의 구체적인 표상을 고대의 요와 순에서 찾고 있다. 그러므로 성학십도 를 올리게 된 이유를 성학을 권도하고 군덕 을 보양하여 요순의 융성함에 이르도록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당시의 군왕인 선조를 도와 요순의 이상정치를 실현하도록 한 퇴계의 취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퇴계는 제왕의 학문은 그 준칙과 금지의 조목이 비록 일반 학자와 다 같은 수는 없지만, 인륜에 극복하여 궁리하고 실천함으로써 심법의 절실하고 요긴한 것을 구하는 데에는 같지 아니함이 없다. 이와 같이 보면 성학의 적용범위에는 제왕으로서의 성군과 일반인으로서의 성인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봉건주의 시대상황에서는 군왕의 책임이 크고 그 영향이 심원하므로 성학을 위한 일차적 대상이 제왕에게 집중되었으나 넓게 보면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하겠다. 성학에서의 학 의 개념은 이론적 지식의 의미보다는 실천적 태도의 의미가 더 크다 공자가 안연의 호학을 언급할 때의 학의 내용도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면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이론적 지식의 측면보다는 도덕적 실천태도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학의 개념에 대하여 학이란 그 일을 익혀 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선을 좋아하면 다만 마음으로 좋아함에 그쳐서는 안되고 반드시 그 선을 체득하여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학의 내용은 안으로는 개인의 인격을 함양하여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인류 사회에 덕치에 의한 왕도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면 수기치인을 목표로 하는 유학 자체를 의미하며 또한 유학의 도를 실현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도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도의 사회적 구현은 무엇보다도 실천주체의 성숙된 인격이 기초될때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 있으므로 성학은 내적 자아에 대한 각성과 인격 수양에 초점이 모아진다
고려후기 유학이 특성을 논하라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의 고려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유교의 문교에 대한 성쇠를 살펴 볼수 있다. 전기는 태조 이래로 성종을 거쳐 예종, 인종에 이르기 까지 숭유정책으로 문교가 진흥되고 유학이 발전되었으나, 후기의 무신정권 이후부터는 암흑기라 할 정도로 유학이 침체 되었다. 그러한 고려 후기의 불교의 사회의 영향을 고찰해 보면 사회적 공헌으로서 구호 사업과 승병을 둘 수 있고, 문화적 공헌으로는 대장경 조판과 승려의 학문적인 기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은 시대적 변천을 겪으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반면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불보를 통한, 영리사업과 권력과 연관된 사회적 비행, 그리고 왕실의 지나진 불공행사로 인한 재정의 탕진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회는 중엽 이후로 내외적인 여러 요인으로 유학이 쇠퇴하고 유 불 도 3교를 겸한 무사로서 이규보 최자 등이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대성전을 개축하고, 안향의 권의로 섬학전을 설치 하였다. 이로부터 문교는 진흥되기 시작하여 공민왕에는 서울의 동, 서학당을 개수하고, 16년에는 성균관을 개영하는 한편 이색을 대사성에 임명하고, 김용구,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두어 학생을 가르쳤다. 이때 성균관 중심으로 당시 전래된 주자학이 강론되어 짐에 따라, 학풍자체도 종래의 문학 중심에서 경사의 이론 중심으로 변하여 갔다. 이색은 학제를 고쳐 오경 사서재를 설치하고 일경일재식의 학습방법을 채택하니, 유학은 더욱 발전되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불교 배척이 맹렬히 전개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신앙은 불교를 정치는 유교를 숭상하여 유자나 승려는, 모두 양쪽을 겸하였으므로 서로 반목하는 바가 없었으나, 이때부터는 주자학과 불교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앞서와 같이 최충을 해동공자라 일컬었지만 불교 고승들의 비문을 찬한 일도 있으며, 김부식을 완고한 유학자로 여기지만 그가 지은 원효의 화상찬이나, 대각국사비 같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주자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국유학 사상은 삼국시대 이래로 오경을 중심으로 한 한, 당 시대의 학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주자학에 있어서는 오경보다도 사서를 중심으로 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사서와 오경은 유교경전으로서 자같이 중요시하지만 송학 이전에 있어서는 사서라는 용어가 없었다.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송학의 영향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화의 영향이다. 송학은 이론을 주안으로 하는 관계상 종래의 유학의 전고나 시가나 문장의 압박에 벗어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사화로 인한 가솔들의 화마로 벼슬을 고사하고, 낙향하며 산야를 도피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당시 성리학의 학풍은 존양과 궁리이다. 존양은 存心養成을 힘쓰는 것이니, 선량한 마음을 갖고 천부의 본성을 기르는 것으로 수양의 목표를 삼는 것이다. 또 마음을 처함에 있어서 不自欺를 위주로 하였고, 몸가짐과 일을 행함에 한결같이 誠敬을 힘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성찰에 노력하고 실천에 노력하였다. 이는 지나간 학문은 위인지학이었으나 리학자의 학문은 나를 위한 위기지학이었다. 궁리는 도학을 궁구히 연구하는 것이니 지식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를 탐구하며 천인의 관계를 간파하고 인생당위의 근본에 힘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성현을 배우는 리학자들의 학문이요 수양이었다. 성현을 배우기 위하여 존양을 힘쓰고 궁리를 힘쓰는 것이었다. 조선 성리학이 논한 문제들은 우주론과 심리론 그리고 윤리론으로, 이와 기가 다같이 본체적인 개념으로서 우주생성의 요소와 원리를 말한 것이다. 심,성,정이나 도심인심이니 인물성동이의 의론은 우리의 심리현상을 연구하며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우주론이나 심리현상을 힘써 말한 하나의 목적이 천인의 관계와 물아의 관계를 논하여 천인의 원리를 동일하게 말하고, 또 천인합덕을 역설하여 성현을 주출하고자 하는 윤리적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성리학의 최고 목표는 윤리학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조선조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형성하는데 중용 사상이 매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른바 천명과 인성 천도와 인도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송명유학을 수용하는데 총괄적인 이해가 요구되었다. 그에 따른 유학의 또 다른 체계가 도설학이다.
도설학이란 일종의 경전 이해를 위한 해석학의 한 방법론이다. 그 도설가운데 천명도의 철학적 범주와 성리 체계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 성리학의 주제는 천명사상에 관한 관심과 인극을 이해하는데 있다. 따라서 천도 보다는 인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태극을 주제로 하는 이기론보다는 천명사상의 심성론이 핵심 과제이다. 이는 하나의 명제에 대한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분석 정리하는 방법으로서, 심법의 지요를 그림으로 계시하고 설명함으로서, 단서를 구하려는데 해석방법론으로 도설학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도설의 주요목적 또한 경전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여 총체적인 해석을 하기 위함이다.
고려후기 유학이 특성을 논하라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의 고려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유교의 문교에 대한 성쇠를 살펴 볼수 있다. 전기는 태조 이래로 성종을 거쳐 예종, 인종에 이르기 까지 숭유정책으로 문교가 진흥되고 유학이 발전되었으나, 후기의 무신정권 이후부터는 암흑기라 할 정도로 유학이 침체 되었다.
그러한 고려 후기의 불교의 사회의 영향을 고찰해 보면 사회적 공헌으로서 구호 사업과 승병을 둘 수 있고, 문화적 공헌으로는 대장경 조판과 승려의 학문적인 기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은 시대적 변천을 겪으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반면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불보를 통한, 영리사업과 권력과 연관된 사회적 비행, 그리고 왕실의 지나진 불공행사로 인한 재정의 탕진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회는 중엽 이후로 내외적인 여러 요인으로 유학이 쇠퇴하고 유 불 도 3교를 겸한 무사로서 이규보 최자 등이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대성전을 개축하고, 안향의 권의로 섬학전을 설치 하였다. 이로부터 문교는 진흥되기 시작하여 공민왕에는 서울의 동, 서학당을 개수하고, 16년에는 성균관을 개영하는 한편 이색을 대사성에 임명하고, 김용구,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두어 학생을 가르쳤다.
이때 성균관 중심으로 당시 전래된 주자학이 강론되어 짐에 따라, 학풍자체도 종래의 문학 중심에서 경사의 이론 중심으로 변하여 갔다. 이색은 학제를 고쳐 오경 사서재를 설치하고 일경일재식의 학습방법을 채택하니, 유학은 더욱 발전되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불교 배척이 맹렬히 전개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신앙은 불교를 정치는 유교를 숭상하여 유자나 승려는, 모두 양쪽을 겸하였으므로 서로 반목하는 바가 없었으나, 이때부터는 주자학과 불교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앞서와 같이 최충을 해동공자라 일컬었지만 불교 고승들의 비문을 찬한 일도 있으며, 김부식을 완고한 유학자로 여기지만 그가 지은 원효의 화상찬이나, 대각국사비 같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주자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국유학 사상은 삼국시대 이래로 오경을 중심으로 한 한, 당 시대의 학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주자학에 있어서는 오경보다도 사서를 중심으로 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사서와 오경은 유교경전으로서 자같이 중요시하지만 송학 이전에 있어서는 사서라는 용어가 없었다.
성리학이 융성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송학의 영향이고, 다른 또 하나는 사화의 영향이다. 송학은 이론을 주안으로 하는 관계상 종래의 유학의 전고나 시가나 문장의 압박에 벗어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사화로 인한 가솔들의 화마로 벼슬을 고사하고, 낙향하며 산야를 도피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당시 성리학의 학풍은 존양과 궁리이다. 존양은 存心養成을 힘쓰는 것이니, 선량한 마음을 갖고 천부의 본성을 기르는 것으로 수양의 목표를 삼는 것이다. 또 마음을 처함에 있어서 不自欺를 위주로 하였고, 몸가짐과 일을 행함에 한결같이 誠敬을 힘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 성찰에 노력하고 실천에 노력하였다. 이는 지나간 학문은 위인지학이었으나 리학자의 학문은 나를 위한 위기지학이었다. 궁리는 도학을 궁구히 연구하는 것이니 지식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근본원리를 탐구하며 천인의 관계를 간파하고 인생당위의 근본에 힘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성현을 배우는 리학자들의 학문이요 수양이었다. 성현을 배우기 위하여 존양을 힘쓰고 궁리를 힘쓰는 것이었다.
조선 성리학이 논한 문제들은 우주론과 심리론 그리고 윤리론으로, 이와 기가 다같이 본체적인 개념으로서 우주생성의 요소와 원리를 말한 것이다. 심,성,정이나 도심인심이니 인물성동이의 의론은 우리의 심리현상을 연구하며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우주론이나 심리현상을 힘써 말한 하나의 목적이 천인의 관계와 물아의 관계를 논하여 천인의 원리를 동일하게 말하고, 또 천인합덕을 역설하여 성현을 주출하고자 하는 윤리적 목적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성리학의 최고 목표는 윤리학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유학사상의 흐름
공자와 맹자 이후 유학사상은 중국의 학술사상과 정치, 교육, 사회사상에서 그 주류를 이루어 왔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천 여년 이상의 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유학사상은 불교사상, 도교사상과 함께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사조이다. 그 중에 유학은 현실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용된 실천철학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한국 유학은 크게 네 번의 변천을 겪으면서 발전한다. 첫째는 한 대의 오경사상을 수용하여 제왕의 통치이념으로 발달한 삼국시대의 유학사상이다. 둘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입시기이다. 셋째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 융성기이며, 넷째는 조선 후기 실학이 중심이 되었던 시기이다.
첫째, 삼국시대의 유학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국립대학인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는데 여기에서 논어나 효경등을 학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유학이 서기 372년 보다 훨씬 이전에 수입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신라는 선덕여왕 9년 (640)에 당태종이 국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학을 크게 증축하고 해내외의 유학생을 모집하여 유학생을 보내기는 하였으나 국학설립은 비교적 늦어서 신문왕 2년 (682)에야 실시되었다. 국학의 교과내용은 삼국사기, 국학조에 자세히 나온다.
백제는 학교 설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이왕 62년(285)에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 주역, 산해경을 가지고 일본으로가서 일본의 황태자를 교육하고 문자와 유교 사상을 처음으로 일본에 전한 사실로 볼 때 신라나 고구려보다 앞서서 유학사상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의 성리학 도입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유학은 당나라 문학의 영향을 받아 문장학적 유학의 성격을 지니게 됨으로써 건전한 실학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장의 유학으로 치닫게 되었다. 고려시대 사회를 주도 한 사상은 불교였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안유,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등을 열거할 수 있다. 대체로 이 무렵의 학풍은 한문학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며 유학사상 자체의 발달이 미숙하였다. 그래서 학문의 목적이 경전과 사기를 학습하여 그것을 정치에 운용할 수 있는 관리가 되는 것과 시부와 문장을 잘 하는 문인이 되는 일에 있었다. 고려말 불교의 타락으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국민정신의 혁신이 요구되었다. 다양한 사회모순이 드러났던 고려는 드디어 멸망의 길로 가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국가시책으로 배불숭유 정책이 확립되면서 주자학이 그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조선초 유학을 강화하는 국가정책을 선도하였던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서였다. 이언적의 여망기당서에서는 노장사상을 배척하고 있다. 이황은 여망기당서에서 노불을 배척한 이론에 감탄하고 "오도의 본원을 천명하고 이단의 사설을 물리쳤다."고 이언적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의 건국이 끝난 뒤로는 사상계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조선초기는 주자학을 새로운 왕조의 통치질서에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의 유학은 관학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한편 정몽주 이후 길재,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로 이어지는 학맥은 조광조에 이르러 대성한다. 이것이 이른바 도학사상인데 도학은
셋째는 성리학의 융성기인 조선 중기의 유학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로는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등을 비롯해서 조식, 이항, 김인후, 장현광 등을 들 수있다.이언적은 우리나라에서 무극태극 문제를 최초로 논하였던 학자이다. 서경덕은 독특한 기론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황은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고, 이이는 이와 기의 일도설을 주창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성리학 이론의 절정기를 주도하였던 학자들이다.
넷째는 실학이 발흥한 조선 후기이다.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된 형태는 성리학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송대의 성리학이나 한국의 성리학이 훈고주석의 성격을 탈피하고 이론적인 발전을 기하였던 업적은 실로 빛나는 것이었다.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자로서 쌍벽을 이루며, 그 철학 사상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세계사상사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될 내용을 담고 있다.
실사구시의 실학이다.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정약용의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은 경세제민의 구체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논의 하였으며, 과학적인 학문연구와 경험적 사실을 중히 여겨 인간의 현실사회에 대한 참여활동을 강조한 저술들이다. 실학자들은 현실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언어문자의 학으로 전락한 기존의 학문 풍토를 비판하고, 부패한 사회의 각 부위를 쇄신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수입기도 하였다.
실학은 17세기 말에서 19세기초까지 진행되었던 학풍이다. 조선이 건국될 당시 유학은 실천적 학문으로서의 위상을 주장하며 이 땅에 정착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이라고 하면 당파싸움을 주도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만든 주범 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나간 시대의 사유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공정한 비판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조선조 성리학의 3흐름을 논하라 조선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왕씨정통의 문란과 배원친명의 외교정책에서 찾으려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에 깃든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의 반영이었다.
조선초 성리학은 철학적인 면보다 실제적인 법전·사장(詞章) 등에 주력한 관학파(官學派;훈구파)가 기성사류(旣成士類)를 형성하였다.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격한 정도전(鄭道傳)과 성리학 연구에 의한 이상적 선정덕치(善政德治)의 근거를 탐색한 권근(權近)이 대표자였다. 조선의 문물제도가 기틀을 완전히 잡았던 15세기부터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사림파는 이로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의리 실천에 심혈을 기울여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뚜렷이 하였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정치는 성리학적 의리(대의)의 정치적 합의를 실현하기 위한 대표적인 사례였으며, 정몽주(鄭夢周)에서 시작하여 길재(吉再)·김숙자(金淑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을 거쳐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도학적 측면의 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한국의 유학 사상의 흐름을 논하시오
공자와 맹자 이후의 유학사상은 중국의 학술사상과 정치, 교육, 사회사상에서 그 주류를 이루어 왔다.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천여년 이상의 긴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유학사상은 불교 사상 도교 사상과 함께 동양사사의 핵심을 이루는 사조이다. 그 중에 유학은 현실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적용된 실천철학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유학 사상은 크게 네번의 변천을 겪으면서 발전해왔는데, 그 첫째는 한 대의 오경사상을 수용하여 제왕의 통치이념으로 발달한 삼국시대의 유학사상이다. 둘째는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입기간이다. 섯째는 조선중기의 성리학의 융성기이며, 넷째는 조선후기 실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삼국시대의 유학은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에 국립대학인 태학을 세워 자제를 교육하였는데 여기에서 <논어>나 <효경>을 학습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학이 서기 372년보다 훨씬 이전에 수입되었으리라 시사해 준다. 신라는 선덕여왕 9년 (640) 당태종이 국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학을 크게 증축하고, 해내외의 유학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때에 삼국이 모든 자제들을 입학케 하였으며 유학이 행하여 진 것은 오랜듯하나 국학 설립은 신문왕 2년 (682)에 비로소 실시되었다. 백제는 학교 설립 년대를 알 수 없으나 고이왕 62년( 285)에 왕인이 <논어> <천자문> <주역> <산해경> 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황태자를 교육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신라 고구려 보다 앞서 유학사상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고려말엽에서 조선초기의 성리학 도입시기이다. 고려시대 유학은 당나라 문학의 영향을 받아 문장학적 유학의 성격을 지니게 됨으로 건전한 실학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사장유학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주도한 사상은 불교였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안유,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이다. 이 무렵의 학풍은 한문학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여 유학사상 자체의 발달이 미숙하였다. 그래서 학문의 목적이 경전과 <사기>를 학습하여 그것을 정치에 운용할 수 있는 관리가 되는 것과 시부와 문장을 잘하는 문인이 되는 일에 있었다. 그러나 홍익인간이 건국이념이란 상황하에서 주자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말 정몽주의 학행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말의 불교의 타락으로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국민정신의 혁신이 요구되었다. 다양한 사회 모순이 드러났던 고려는, 드디어 멸망의 길로 가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국가 시책으로 배불숭유정책이 확립되면서, 주자학이 그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조선초 유학을 강화하는 국가 정책을 선도하였던 정도전의 불씨잡변은, 불교를 배척한 이론에 감탄라고 오도의 근원을 천명하고, 이단의 사설을 물리쳤다고 이언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후 조선초기에는 주자학을 새로운 왕조의 통치 질서에 적용하므로써 새로운 사회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이었다. 이 시기에 관학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편 정몽주 이후 길재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로 이어지는 학맥은 조광조에 이르러 대성한다. 이것이 이른바 도학사상인데 도학은 의리를 중시하고, 권세를 천하게 보며 도심을 높이고, 인욕을 누름으로서 강상을 세우려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 도학정신을 계승하여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 이론의 꽃이 만개하는 결실을 보았다.
셋째 성리학의 융성기인 조선 중기의 유학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서경덕, 이언적, 이황, 기대승, 이이, 성혼 등을 비롯하여 조식 이항 김인후 장현광 등을 들 수 있다. 이언적은 우리나라에서 무극태극 문제를 최초로 논하였던 학자이다. 서경덕은 독특한 기론을 정립한 인물이다. 이황은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고, 이이는 기의 일도설을 주장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의 절정기를 주도하였던 학자 들이다.
한국 성리학의 독특한 부분은 학문의 주체를 객관적 우주론적 영역보다, 주체적 인성론의 무제에 집중함으로서, 인간 내면의 주체적 각성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또 인간의 성실성과 실존성을 통하여 진리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생각은 사단칠정의 심성론으로 정리되었다.
넷째는 실학이 발흥한 조선후기이다. 유학이 철학적으로 심화된 형태는 성리학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송대의 성리학이나 한국의 성리학이 훈고주석의 성격을 탈피하고 이론적인 발전을 기하였던 업적을 실로 빛나는 것이었다.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자로서 쌍벽을 이루며 그 철학사상은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세계 사상사에서도 중요하게 거론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상사의 핵심을 이루는 성리학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리 공정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이라 하면 당파싸움을 주도하고 결국 나라를 잃게 만든 주범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유학사상 성대출판사 p-32
조선 성리학의 연원 성리학이라 함은 대체로 송대 이후의 신유학을 말한다. 선진시대의 유학에 비교해서 불교와 도교의 상호 영향속에서 새로운 이론유학으로 발전된 것이다. 도덕연원을 중심한 교훈과 인간성리를 골자로 한 이론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론은 도덕연원을 실천하는 당위로서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요. 경전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감소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송대의 신유학으로로부터 선진유학으로 돌아가야 유학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실을 기하기 위한 학적 체계라는데 진의가 있다. 이치를 말할 때 몇 단계로 잘라서 생각할 수 있다. 물계의 일치를 물리라하고, 심계의 이치를 심리라하고, 심중에 내재한 천명의 요소를 성리라 하며, 물심양계를 초월한 종국의 이치를 천리라고 해서 4단계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성리학은 중국과 한국에서 유학의 이론분야 즉 철학으로서 한결같이 발전되어 왔다. 양국 성리학은 경향이 각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우주본체론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 것이 송대 성리학이라면, 인생성리론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 것이 조선성리학이다.
한국 성리학은 정포은에서 살피고 김굉필 조광조에서 하천이 이루어 졌고 서화담과 이언적을 거쳐서 퇴계와 율곡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학파들이 계보를 쫓아서 그들의 실학사상을 관견하였다. -동양철학의 기초적 연구 p-268
한국 성리학의 전개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고려 말기 원나라를 통해서였다. 이미 고려 중기부터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인란 이후 유불일치의 사상 경향이 대두하면서 유학자들 역시 심성 수양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학문사상계의 이러한 동향은 이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주체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후 원나라를 통해 도입된 성리학은 이러한 노력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새로운 개혁이념으로, 국가 교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들은 유불일치(儒佛一致)의 사상경향 속에서 불교적 심성 수양과 유교적 심성 수양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자의 차별성이 명확하게 된 것은 왕조 교체를 전후한 시기에 불교 비판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비로소 유교적 심성 수양은 윤리도덕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며, 불교적 심성 수양은 현세를 초월한 정신적 해방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차별이 인식되었다. (鄭道傳 : 1337~98)· (權近 : 1352~1409)은 성리학의 이기론·인성론에 바탕을 두고 불교의 초세속적 성격과 그 철학사상을 비판했으며,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의 입문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권근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 성균관 중심의 관학 교육도 유교교육의 기본 교재로 〈소학〉을 채택했고, 경학의 내용도 육경(六經) 이전에 사서(四書)의 학습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유교적인 도덕규범의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고려 말기 이래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리학의 교육과 보급이 행해졌던 것이다.
고려후기 유학이 특성을 논하라
주자학이 전래되기 이전의 고려 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유교의 문교에 대한 성쇠를 살펴 볼수 있다. 전기는 태조 이래로 성종을 거쳐 예종, 인종에 이르기 까지 숭유정책으로 문교가 진흥되고 유학이 발전되었으나, 후기의 무신정권 이후부터는 암흑기라 할 정도로 유학이 침체 되었다.
그러한 고려 후기의 불교의 사회의 영향을 고찰해 보면 사회적 공헌으로서 구호 사업과 승병을 둘 수 있고, 문화적 공헌으로는 대장경 조판과 승려의 학문적인 기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융성은 시대적 변천을 겪으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반면을 보이게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각종 불보를 통한, 영리사업과 권력과 연관된 사회적 비행, 그리고 왕실의 지나진 불공행사로 인한 재정의 탕진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사회는 중엽 이후로 내외적인 여러 요인으로 유학이 쇠퇴하고 유 불 도 3교를 겸한 무사로서 이규보 최자 등이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에는 대성전을 개축하고, 안향의 권의로 섬학전을 설치 하였다. 이로부터 문교는 진흥되기 시작하여 공민왕에는 서울의 동, 서학당을 개수하고, 16년에는 성균관을 개영하는 한편 이색을 대사성에 임명하고, 김용구,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두어 학생을 가르쳤다.
이때 성균관 중심으로 당시 전래된 주자학이 강론되어 짐에 따라, 학풍자체도 종래의 문학 중심에서 경사의 이론 중심으로 변하여 갔다. 이색은 학제를 고쳐 오경 사서재를 설치하고 일경일재식의 학습방법을 채택하니, 유학은 더욱 발전되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불교 배척이 맹렬히 전개 되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고려의 지식인들이 신앙은 불교를 정치는 유교를 숭상하여 유자나 승려는, 모두 양쪽을 겸하였으므로 서로 반목하는 바가 없었으나, 이때부터는 주자학과 불교가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형세가 되었다. 앞서와 같이 최충을 해동공자라 일컬었지만 불교 고승들의 비문을 찬한 일도 있으며, 김부식을 완고한 유학자로 여기지만 그가 지은 원효의 화상찬이나, 대각국사비 같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주자학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국유학 사상은 삼국시대 이래로 오경을 중심으로 한 한, 당 시대의 학풍이 지배적이었지만 주자학에 있어서는 오경보다도 사서를 중심으로 그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끝으로 사서와 오경은 유교경전으로서 자같이 중요시하지만 송학 이전에 있어서는 사서라는 용어가 없었다. -<한국의 유교> 유승국 지음 p171-174 요약
포은 선생묘의 풍수
포은 정몽주
발로 쓰는 역사.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고려 말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묘는 경기도 용인시 묘현면 능원리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절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정작 충절의 인물이었을까 ?
발로쓰는 역사 . 최초로 써보는 독자들에게 되묻는 소설.
그는 소위 폐가입진(가짜를 몰아내고 진짜를 세움- 우왕,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이란 명분으로 고려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울 때 이성계와 같이 쿠테타를 일으켜 그 공으로 공신이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와 같은 개혁파에 속한 인물인 것이다. 다만 이성계의 급진 개혁세력에 비하여 정몽주는 온건개혁세력에 속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성계와 맹렬한 권력 다툼을 하다가 패하였을 뿐이지 고려를 위한 충신이란 영예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살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 구테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정몽주다. 공양왕을 협박하여 조준등 이성계 세력을 개성에서 모두 제거하였다. 이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방원이 개성을 탈출하여 이성계와 함께 막강한 사병을 이끌고 개성으로 돌아왔다. 이에 포은은 이성계의 부상 정도를 확인하러 이성계의 집에 들렀다가 이방원을 만나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를 남기게 된다..
이방원은 “우리가 뜻을 같이한 동지인데 뜻을 모아 같이 권력을 나누자 " 고 하자, 이미 공양왕을 협박하여 모든 권력을 쥔 상태에있던 포은이 이방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에 이방원은 수하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인다. 정몽주의 정치적 욕구는 여기서 끝나고 만다.
정몽주가 우리 역사상 만고에 없는 충신이 된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방원(태종)은 천하에 둘도 없던 자신의 정적 포은을 비롯하여 고려조 신하를 충신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우대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든 신하들에게 철저히 주입시킨다. 자신의 왕조에 대한 쿠테타를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몽주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만고의 충신이 아니라 정적에게 패한 정치가일 뿐이다. 삼봉 정도전
포은 정몽주에 비하여 반대로 충신에서 역적이 된 사람이 있다. 삼봉 전도전이다. 13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후일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 고려 최고의 학자들이 있었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반원친명 정책으로 일관하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하는 엄청난 공을 세웠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찬진했으며, 지방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었다.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하는 등 한나라의 기틀을 세우는데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종횡 무진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창업에 많은 피를 흘린 이성계가 더 이상 피를 흘리는 정변을 막기 위해 왕위를 창업에 공이 큰 이방원 대신 이방석에게 넘기려하자 삼봉 정도전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에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상대로 폐륜적인 쿠테타를 일으킨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이 때 이방원(李芳遠)은 삼봉 정도전을 죽인다. 그리고는 천하에 둘도 없는 흉측한 인간으로 삼봉을 역사속에 매장시킨다.
그는 포은과 반대로 충신에서 역적으로 격하되었지만 한시대를 풍미한 유학(儒學)의 대가며,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정몽주의 유학보다도 뛰어난 실력자임이 그의 책 삼봉집(三峰集)을 비롯하여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의 저술에서 증명되고 있으나 역사는 아직도 그를 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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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서원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영천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고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것을 초기 신라 때에는 절야화군(切也火郡)이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임고군(臨皐郡)으로 개칭하였다. 925년(경애왕 2)에 고울부(高鬱府)로 고쳐 불렀고, 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맹백현·이지현(梨旨縣) 등의 현들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995년(성종 14)에 자사(刺史)를 파견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경주(慶州)에 편입되었다가, 1172(명종 2)에는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후에 주(州)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영천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신녕군(新寧郡)이 영천군으로 폐합되어 영천면을 신설하였다. 1937년 영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에는 영천읍이 시로 분리 승격했고, 1995년 영천군을 영천시에 통합하였다 |
출처: 토민http://cafe.daum.net/leetomin/8LET/59?docid=1GSDo|8LET|59|20101217034034&q=%C0%D3%B0%ED%BC%AD%BF%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