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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추영현 옮김, [에티카 / 정치론](동서문화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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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론
제1절
철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하고 그들이 바랐던 인간상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대부분은 윤리학을 쓴다는 것이 풍자소설을 쓰게 되었고,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국가학(또는 정치이론)을 생각하는 대신 가공론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론을 생각하거나, 또는 '유토피아'나 시인들이 노래한 황금시대 속에서처럼, 그런 이론이 전혀 필요없는 곳에서 형성되었을 이론에 대해 생각했다. (283쪽)
제2절
정치가들이 국가학에 관해서는 철학자들보다 더욱 적절히 서술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치가들은 경험이라는 선생님을 두고 있었으므로, 어떤 일에서든 실재와 동떨어지진 설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84쪽)
제3절
경험은 우리에게 일찍이 인간이 화합적 생활을 하는데 적합한 모든 종류의 연방국가 형태를 가르쳐주는 한편, 동시에 민중이 지도를 받아야 할, 또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 억제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러하므로 나는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진 적도 시도된 적도 없는 모든 일을 생각에 의해서만 발견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생각에 의한 이 모든 일들은 경험이나 실제와도 일치할 수 있다고 믿는다. (284쪽)
제4절
실제와 가장 조화되는 일들을, 확실하면서도 착실한 이론으로써 증명하거나 또는 그것을 인간적 본성의 상태 그대로에서 이끌어 내려고 의도하였다. 그리고 이 학문적인 이론들을 수학을 취급하는 태도로 탐구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의 여러 실제 행동들을, 웃거나 한탄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285쪽)
제5절
다음에 말하는 경우들은 확실한 일들이며, 또한 우리들이 나의 [에티카]에서 그 참됨을 증명하고 있다.
(1) 인간은 필연적으로 여러 감정들에 종속해 있다(에티카 제3부 정리 및 제4부 정리).
(2) 인간의 성정(性情)은 불행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행복한 사람을 질투하게 되어 있다(에티카 제3부 정리32의 주해).
(3) 동정보다는 복수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에티카 제4부 부록13).
(4)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향에 따라서 생활하고, 그가 시인하는 바를 시인하며, 배척하는 바를 함께 배척하여 주기를 바란다(에티카 제3부 정리31의 주해).
(5) 승리를 하게 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했다는 점보다는 남을 해칠 수 있었음을 자랑하게 된다(에티카 제4부 정리58의 주해).
(6) 종교는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그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 이런 설득은 감정에 대하여 그다지 큰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에티카 제4부 정리15의 증명).
(7) 이성은 감정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다(에티카 제5부 정리4의 주해).
(8) 이성이 인도하는 길은 참으로 험준한 길임을 보았다(에티카 제5부 정리42의 주해).
이렇게 볼 때 민중이라든지 국사에 바쁜 사람들이 그저 이성의 노출된 받아쓰기에만 따라서 생활하도록 지도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시인들이 노래한 황금시대라든지 허구적인 연극무대를 꿈꾸고 있음에 틀림없다. (285-286쪽)
제6절
국가의 안정이라는 점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정신에 따라서 인간이 바른 정치를 하겠는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국가 안정의 요점은 바른 정치가 행하여지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의 자유라든지 정신의 힘이 센 것은 개인에게는 덕이 되지만, 국가의 덕은 이와 반대로 안정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6쪽)
제7절
인간이란 대체로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어느 곳에서는 모두 관습적으로 서로 결합하고 어느 정도 국가상태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의 여러 원인과 그 자연적인 기초를 이성의 증거들에서는 볼 수 없고, 도리어 인간의 공동적 본성이나 상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터이다. (286-287쪽)
제2장 자연권에 관하여
제1절
[신학정치론] 속에서(제16장) 자연권과 국민권에 관하여 논술했다. 또 우리들은 [에티카] 속에서 죄, 공적, 옳고 그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제4부 정리37의 주해2), 그리고 끝으로 인간의 자유란 무엇인가(제4부 정리66의 주해 및 정리67 이하)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들이 이 책과 관계 있는 사항들을 다른 책에서 찾아볼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런 사항들을 여기에 다시 설명하려 한다. (288쪽)
제2절
자연물들의 관념적 본질은 그들이 존재하기 시작한 앞이나 뒤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 오히려 그들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데에 필요하였던 바로 그런 힘이 그들의 존속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자연물들의 활동력이 되는 힘은 신의 영원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88쪽)
제3절
신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자유라고 생각되는 신의 힘이므로, 자연물은 존재와 활동에 대하여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각 자연물을 존재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힘은 다름아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의 힘이다. (289쪽)
제4절
자연권이란 만물로 인하여 생겨나는 자연의 여러 법칙들, 또는 여러 규칙들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그러한 자연의 생성법칙이란 곧 자연의 힘이라고 해석한다. 그 결과로서 우주적 자연과 하나하나의 자연권은 그 자연권의 힘이 미치는 곳에까지 존재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본성의 여러 법칙들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곧 모두 최고의 자연권(자연법칙)에 의해 행동하는 셈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의 권리를 자연에 대하여 가진다. (289쪽)
제5절
생각하건대 인간은 잘나고 못남을 따질 일 없이 다같이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사람을 행동하도록 지시하는 모든 힘은, 사람의 본성에 나타나는 모습으로 볼 때 자연의 힘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이성에 의해서 인도될 때이든 욕망에 의해서 인도될 때이든, 사물은 모두가 자연의 여러 법칙과 규칙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사물들은 자연권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있지는 않다. (290쪽)
제6절
우리들은 이성을 바르게 쓸 수 있는 능력이 최초의 인간에게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감정들에 종속되어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291쪽)
제7절
인간은 특히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인간은 점점 더 자유스러워진다. 생각함에 따라서는 우리들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자기의 존재와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욱 더 용인하도록 강요당한다. 자유와 방임을 혼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의 이 견해에 찬동할 것이다. 실로 자유란, 덕 또는 완전성으로서, 어떤 일에서든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일들을 인간의 지유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그가 인간 본성의 여러 법칙들에 따라서 존재하고 활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 한해서이다. 우리들은 인간이 더욱 자유스럽다고 생각할수록 그가 이성을 쓰지 않을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또한 선 대신에 악을 선택할 수 있다고는 더욱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이 존재하고 이해하고 활동하는 신도 역시 필연적으로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고 이해하고 활동한다. 신은 자신을 존재하는 것과 같이 자유성으로서 활동하는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291-292쪽)
제8절
이성을 언제나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지는 않다. 단지 이성은 인간 자유성의 최고 정점에서 사용된다. 더구나 사람들은 가능한 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힘쓴다(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을 만큼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가 어질든 어리석든, 노력하여 행하는 모든 것이 최고의 자연권에 따라서 하는 행동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 자연은 인간의 참다운 이익과 유지만을 의도하는 인간적 이성의 여러 법칙들에 의해서는 제약받지 않고, 도리어 모든 자연의 영원한 질서 - 인간은 그 자연의 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에 관계되는 다른 무수한 여러 법칙들에 의해서 제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우습게, 부조리하게, 또는 나쁘게 비치는 일이 자연에 있다고 해도, 그 일들은 모두 우리들이 사물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모든 자연의 질서와 관련을 거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또 모든 것이 우리들이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292-293쪽)
제9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사람의 힘 아래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의 권리 아래에 있으며, 이와 반대로 폭력은 배제하고 자기에게 가해지는 해(害)를 자기 요량껏 복수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의향에 따라서 생활할 수 있다면 자기의 독립된 권리 아래에 있다고 말하게 된다. (293쪽)
제10절
상대방을 자기 힘 속에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공포나 희망이 없어지면 상대방은 다시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로 돌아간다. (293쪽)
제11절
정신을 남에게 기만당할 때는, 판단능력도 역시 남의 권리 아래에 있게 된다. 여기서 정신은 이성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자기의 권리 아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은 신체가 강건한 데에 의하기보다는 정신의 강함으로 평가되어야 하므로, 결론으로는 가장 이상적으로 뛰어나면서 동시에 이성에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자기 자신의 권리 아래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성에 따르는 인간을 자유스럽다고 부른다. (294쪽)
제12절
자연권에 따라 자기 자신의 재판관인 자신이 스스로에게 약속한 바가 자신에게 의롭지 못하고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고 판단했을 때 -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기 쉬우므로 그 판단이 옳았을 때도 있을 테고 옳지 않았을 때도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좋다 - 그는 자기의 재량으로 약속을 파기하기로 결의하고 자연권에 따라 이를 파기한다. (294쪽)
제13절
여기 두 사람이 서로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합친다면, 이 두 사람은 그들이 혼자인 경우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함께 더 많은 권리를 자연에 대해서 갖게 된다. 이처럼 점점 많은 사람들이 친밀관계를 이루게 됨에 따라 더 많은 권리를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된다. (294-295쪽)
제14절
인간의 본성은 대개 이러한 여러 감정들에 종속되고 있으므로, 인간들은 본성으로 볼 때 서로 적이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써 막아내야 하는 사람은 나의 가장 큰 적이다. (295쪽)
제15절
인간은 서로의 도움 없이는 생활을 지탱하고 정신을 함양한다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은 고유한 인류영역으로서의 자연권은, 인간이 공동권리를 가지고 살며 일구어 놓을 땅을 서로 같이 지니고, 자기를 지켜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배제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공동의지에 따라 생활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연권을 생각하게 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295쪽)
제16절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전체로서의 힘이 보다 강하면 강한 만큼 그 권리를 적게 갖는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실제로는 공동의 권리가 그에게 허용하는 만큼밖에는 어떠한 권리도 자연에 대하여 가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공동의 의지가 그에게 명령하는 바를 모두 수행하도록 의무지워진다. (296쪽)
제17절
다수자의 힘으로 규정된 이 권리는 보통 통치권이라고 불린다. 이 통치권은 공동의 의지를 발판으로 나라 일을 배려하는 사람, 즉 법률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폐지하며, 도시를 방위하고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등의 배려를 하는 사람의 수중에 절대적으로 장악된다. 그리고 이 배려가 전체 민중으로 성립된 회의체에 속할 때, 그 통치를 민주정치라고 부르게 된다. 또 그 회의체가 약간의 선택된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때, 이를 귀족정치라고 부른다. 끝으로 국사의 배려, 즉 통치권이 한 사람의 수중에 있을 때 이를 군주정치라고 부른다. (296쪽)
제18절
자연의 법칙은 신의 법칙으로서(제2장 제2-3절), 이 법칙을 신은 자기가 존재하는 이치와 같은 자유성으로 정하고, 또 이 법칙은 신의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겨난 법칙으로(제2장 제7절) 영원하며 또 절대로 침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297쪽)
제19절
죄는 국가 안에서만 존재한다. 전체 국가의 공동권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또 누구라도 공동의 결정 또는 의지에 따라서 하는 결정 외에는 권리로서 결정할 수 없는 국가 안에서만 생각하게 된다(제2장 제16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권리로서 할 수 없는 일, 또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복종이란, 법률상 옳은 일과 공동의 결정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을 실행하려고 하는 의지이다. (297쪽)
제20절
보통 우리들은 건전한 이성의 명령에 배반하는 행위도 죄라고 부르며, 또 이성의 규제에 따라서 욕망을 억제하려는 항상적 의지도 복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인간의 자유가 욕심껏 행동하는 데에 있고, 예속이 이성에 지배되는 곳에 있다고 했다면, 나도 그것을 전적으로 시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이성에 따라서 인도되고 욕망을 더 많이 억제할 수 있는 만큼 크므로, 우리들은 억지로가 아니라면 이성적 생활을 복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297-298쪽)
제21절
그렇기는 하지만, 이성은 우리들에게 도의를 행하라고, 그리고 평온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있으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행하는 일은 국가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 위에 또 다수자가 국가가 요구하는 대로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인도되려면 반드시 이성의 규제에 의해서 된 여러 법률들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안에서 생활하는 일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이성의 규제에 반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죄라고 부른다면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298쪽)
제22절
신을 온갖 마음으로 사랑하는 인간은 신에게 복종하며, 이와는 달리 맹목적 욕망에 따르는 인간은 죄를 범한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 안 될 것은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좋은 그릇을, 또 때로는 좋지 못한 그릇을 만드는 직공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모든 일은 신의 힘 속에 있다(예레미아서 18:6). 따라서 다시 인간은 우리들의 정신 또는 예언자들의 정신 속의 율법으로 아로새겨진 바에 따르기 위해서는 신의 규제에 반하여 핸동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자연 속에 아로새겨지고 모든 자연의 질서에 관계하는 신의 영원한 규제에 반하여서는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신학정리론] 제16장에서도 "인간은 계시된 신의 의지에 배반할 수는 있어도, 모든 것을 예정해 놓은 신의 영원한 결정에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299쪽)
제23절
무엇이 이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저 사람에게 속하는가가 공동의 권리로서 결정되는 국가에 있어서는, 각 사람들에 대하여 각 사람들의 것을 인정하려는 항상적 의지를 갖는 사람을 옳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남에게 속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힘쓰는 사람을 옳지 못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299쪽)
* 옳고 그름의 정의에 관해서는 [에티카] 제4부 정리37의 주해2, 그리고 [신학정치론] 제16장 참조할 것. (주9, 300쪽)
제24절
다시 칭찬 또는 비난의 원인은, 인간의 덕과 무력한 관념을 지닌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이라고 나는 [에티카]에서 설명한 바 있다. (299쪽)
제3장 국가의 권리에 관하여
제1절
모든 통치상태를 국가상태라고 하며, 통치의 전체 범위를 국가라고 부른다. 또 통치권을 파악한 사람의 지도에 의존하는 공동의 정무를 국사라고 한다. 다음으로 국법에 따라 국가의 모든 '편익을 향유'하고 있는 인간을 국민이라고 부르며, 국가의 규정과 법률에 따르도록 '의무'가 주어져 있는 인간을 신민이라고 한다. (301쪽)
제2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국가의 공동 결정에 따라서 요구되는 정도 이외에는 어떤 일이라도 권리로서 행하거나 소유하지 못한다. (301쪽)
제3절
국가가 국민 각자에게 그들 마음대로 생활하도록 하는 규정을 허용한다는 일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재판관이 되도록 자유를 주는 이 자연권은, 국가상태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없어져야 한다. 나는 특히 '국가의 규정에 의하여'라고 단언한다. (302쪽)
제4절
다시 국민들은 국가의 여러 가지 결정이나 법률을 해석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만약 실제로 국민 각자가 국가의 결정이나 법률을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허용된다면 그로써 국민 각자는 자신이 스스로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국민 각자는 자신의 행위를 제멋대로 합법성 있는 듯이 꾸미거나 또는 미화하여, 자기 뜻대로 성찰해 나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3쪽)
제5절
국민은 자기 권리 아래에 있지 않고 국가 권리 아래에 있으며, 국가의 모든 명령을 실행하도록 의무가 주어져 있다. 그는 무엇이 정당하며 무엇이 부당한지, 무엇이 도의적이며 무엇이 부도덕한지를 결정할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다. (303쪽)
제6절
이성은 또 무엇보다도 평화를 찾도록 가르치고 있는데, 평화는 국가의 법률이 침범되지 않고 지켜질 때 보유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을수록, 바꾸어 말하면(제3장 제11절) 자유로운 만큼, 더욱 확고하게 국가의 법률을 지키고, 자기가 신민인 그 국가의 최고 권리의 여러 명령들을 실행할 것이다. (304쪽)
제7절
국가의 권리는 마치 한 사람의 정신에서와 같이 인도되는 다수자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정신의 일치는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건정한 이성이 모든 인간들 각자에게 유익하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것을 국가가 가장 많이 추구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모든 인간들의 정신의 일치란 결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304쪽)
제8절
신민은 국가의 힘이나 위협을 두려워할 때, 그리고 국가상태를 사랑할 때, 자기의 권리 아래에 있지 않고 국가의 권리 아래에 있다(제2장 제10절)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보수라든지 위협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은 국가의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305쪽)
제9절
대다수의 사람들을 분격(憤激)하게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국가의 권리가 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 국가의 권리는 다수자의 힘에 의하여 규정되므로, 국가의 힘과 권리는 국가가 스스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탁하도록 하는 연유를 제공할 때, 개인의 힘과 권리는 감소함이 분명하다. (306쪽)
제10절
정신은 이성을 사용하는 한, 최고 권력의 권리 아래가 아닌, 자기의 생각대로 할 권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제2장 제11절). 그러므로 신에 대한 참다운 인식과 사랑은 그 누구의 지배에도 종속하지 않는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그러한 경우(제2장 제8절)와 같다. (307쪽)
제11절
최고 권력인 국가의 권리는 바로 자연권(인간 개인의 본성에 따른 자유로운 판단력)처럼 행사되기 때문이다(제3장 제2절). 이로써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두 사람의 인간 간의 관계와 같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만 서로 다른 점은, 국가는 다른 국가로부터의 압박에 대하여 자기를 지킬 수 있으나,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은 그럴 수 없다는 점뿐이다. (308쪽)
제12절
국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계획하고, 다른 국가로부터의 압박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에 자기의 권리 아래에 있다(제2장 제9절, 제15절). 이에 반하여(제2장 제10절, 제15절) 다른 국가의 힘을 두려워하며, 또 다른 국가에 자기 뜻에 따른 행동을 방해당하고 있을 때, 또는 자기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다른 국가의 원조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에는 다른 자의 권리 아래에 있게 된다. (308쪽)
제13절
두 국가들이 본성적으로 서로 적이라고 생각할 때는 더욱 명료하게 이해될 것이다. 실제로 인간 그 자체가(제2장 제14절), 자연상태에서는 서로 간의 적이다. 따라서 국가에 있어서도, 자연권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들은 모두 서로 적이다. (...) 전쟁의 권리는 각각의 나라마다 속하지만, 평화에 관한 권리는 한 나라에만 있지 않고 두 국가에 함께 속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때 이들 두 국가를 맹약국이라고 부른다. (308-309쪽)
제14절
각 국가는 자유의지대로 어느 때이든 맹약을 해소하는 전적인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공포나 희망의 원인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약속(맹약)을 해소시켰을 때는, 그 이유로 그 나라에 대해서 기만이나 배신적 행동을 하였다고는 비난하지 못한다. (309쪽)
제15절
상호 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한 나라들에게는, 평화의 조건들 또는 그 나라들이 서로 맹세한 규약들에 관하여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계쟁(係錚) 문제를 해결하는 권리가 귀속된다. 평화에 관한 권리는 한 나라만의 소유가 아니라 맹약 국가들의 공동소유이기 때문이다(제3장 제13절). (309-310쪽)
제16절
상호 간에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국가들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각 국가는 다른 국가들에 두려움을 주는 일이 적어진다. 바꾸어 말하면(제3장 제13절) 각 국가들의 권리 아래에 있는 종속국들이 그만큼 적어지고, 맹약국가들 전체의 공동의지에 순응하여 구속받는 경우가 많아진다. (310쪽)
제17절
최고 권력인 국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하도록 약속을 하였더라도, 그 약속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깊이 생각해본 결과 신민의 공동복리에 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그렇게 생각되었을 때에, 그는 확실히 그 약속을 해소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요컨대 성서는 신의를 지키도록 일반적으로 가르칠 뿐, 예외로 특수한 경우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으므로, 성서의 가르침과 지금 내가 제시한 예들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310쪽)
제18절
자기보존의 욕망은 어진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어떤 인간에게나 내재한다. 따라서 인간을 어떻게 해석하든, 즉 감정에 따른다고 해석하든 이성에 따른다고 생각하든 사태는 똑 같다. 이 증명은 지금 말한 바과 같이 보편성에 따르기 때문이다. (311쪽)
제4장 최고 권력 소관사항에 관하여
제1절
우리들이 보아 온 바와 같이 법률을 제정하고, 그 법률에 관하여 싸움이 생길 때에는 그 각각의 안건에 관하여 해석하고, 또 당해 안건이 적법인가 위법인가를 결정하는 권리는 이 최고 권력에만 귀속한다(제3장 제3-5절). 다음으로 전쟁을 하거나 평화조건을 결정하여 제시하고, 또 이 제시된 평화조건을 받아들이는 권리도 또한 같다(제3장 제12-13절). (312쪽)
제2절
이런 전쟁과 평화의 일을 실행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은 모든 통치체제에 관한 일, 다시 말해서 국사에 관한 일이므로, 국사는 전적으로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의 지도에만 의존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행위를 재판하고, 사람들의 행위에 관하여 책임을 묻고, 죄 있는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고, 국민들 사이의 소송을 해결하고, 아니면 법률 전문가들을 두어 이런 일들을 대신하게 하는 등의 권리는, 오직 이 최고 권력에만 귀속한다고 결론짓게 된다. (312쪽)
제3절
나라 일을 처리하고, 나라 일을 위하여 관리를 뽑아서 임명하는 권리는 전적으로 최고 권력에만 속하므로, 시민이 최고회의의 인준을 거치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뜻으로 나라 일을 손을 댈 때는, 그 하고자 하는 바가 국가를 위하여 최선이라고 믿는 경우라 할지라도 통치권에 대한 월권행위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313쪽)
제4절
국가가 이성의 지령에 배반하여 무슨 일인가를 할 때에 죄를 범한다고 말하게 된다. 국가는 이성의 지령에 따라서 판단할 때 가장 많은 자기의 권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제3장 제7절). 따라서 국가는 이성에 배반하여 행동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배반하고 죄를 범하는 셈이다. (313쪽)
제5절
국가는 자기를 옹호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그 법률을 해석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다시 이 법률을 폐지하고 또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자기의 절대능력에 의해서 용서하는 권리도 가지고 있다. (315쪽)
제6절
다수자들이 자기들의 권리를 하나의 회의체 또는 한 사람의 인간에게 위임하는 계약이나 법률은, 공공의 이해가 그 계약 또는 법률을 파기하도록 요구할 때는 서슴지 않고 파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에 관한 판단, 즉 공공의 이해가 그들을 파기하도록 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권리는 어떠한 개인에게 속하지 않고 오로지 통치권을 장악한 사람에게만 속한다(제4장 제3절). 따라서 통치권을 장학한 사람만이 국법에 비추어 언제나 그런 법률을 해석하는 사람이 된다. (315쪽)
제5장 국가의 목적에 관하여
제1절
권리에 의하여 명령하고 또 나라 일을 배려하는 일과, 가장 잘 명령하고 나라 일을 돌보는 일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이제까지 각 국가의 권리에 관하여 논술하였으므로, 이제는 각 국가에 있어서의 최선의 상태에 관하여 논할 때라고 본다. (317쪽)
제2절
각 국가에 있어서의 최선의 상태란 어떠한 형태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국가상태의 목적에서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상태의 목적은, 생활의 평화와 안전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화합하여 생활하고, 그들의 법이 침범당하지 않고 유지되는 국가가 최선의 국가이다. (317쪽)
제3절
신민의 악덕, 과도한 방종과 반항 등이 국가의 탓이듯이, 반대로 신민의 덕과 법률에의 복종 등은 전적으로 국가의 덕과 완전한 권리에 기인한다고 해야만 한다. 이는 제2장의 제15에서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사람들이 한니발의 군대 내에서 한 번의 반란도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이유를, 한니발의 남달리 뛰어난 능력 때문이라고 했던 말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 한니발의 뛰어난 능력에 관한 내용은, Livius 13-12에 나옴. (주1, 320쪽)
제4절
신민이 공포에 얽매여 무기를 들지 않는 국가는 전쟁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평화상태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정신의 힘에서부터 생겨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복종 자체(제2장 제19절)가 곧 국가의 공동결정에 따라서 행하여야 하는 바를 실행하려는 항상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318쪽)
* 홉스는 평화의 정의를 '전쟁을 안 하고 있는 시기'라고 정했음. (주2, 320쪽)
제5절
최선의 국가가 어떤 형태인지를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이 화합하여 생활할 수 있는 국가형태이다, 라고 할 경우, 나는 단지 혈액순환이나 그밖에 모든 동물에 공통된 여러 기능들에 의하여서만 규정되는 인간생활을 뜻하지는 않고, 특히 진정한 우수성과 정신적인 삶이 인간생활을 영위하는 국가형태를 말한다. (318-319쪽)
제6절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다고 우리들이 말한 국가는 자유로운 민중들이 세운 국가이지, 전쟁의 권리에 의하여 민중으로부터 얻어진 국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공포보다도 희망에 의하여 더 인도되는 데에 반하여, 정복당한 민중은 희망보다는 공포에 의하여 더 인도되기 때문이다. (319쪽)
제7절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자유인으로서의 민중이 자기의 안녕을 그저 한 사람의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위임하는 일에 얼마나 주의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 마키아벨리는 확실히 자유의 편이었으며, 또 자유를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유익한 조언을 하고 있다. 이로써 나는 이 대단히 현명한 인간을 그렇게 믿으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