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래유산 인생투어(2)
◇ 버들다리 (전태일 다리) : 종로구 대학로 116번지 (서울미래유산)
-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다는 데에서 유래된 다리 명칭.
버들다리는 보행자의 이동 편의를 위해 차도와 보도를 분리하고, 그늘을 만든 퍼걸러(pergola)를 설치함으로써 도심 속의 정원을 연출하였다.
이 다리 이름은 전일에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고, 청계천이 복원되던 2005년 9월 30일에 폭 17m, 길이 23.3m로 준공되었다.
버들다리 명칭은 이 다리 근처에서 분신하여 노동권 보장에 헌신한 전태일(全泰壹 / 23세)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2012년 11월 1일부터 ‘전태일 다리’라고 병용하여 부르게 되었다.
이 다리 부근의 평화시장 앞은 평화시장 피복 공장 재단사로 일하다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을 한 ‘전태일(全泰壹) 거리’이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2시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재단사 전태일 열사가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자살을 기도하여 국립의료원을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오후 10시경에 숨졌다.
전태일 열사는 “기업주는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 15, 16세의 어린아이들이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혹사당하고 있으니 당국은 이런 사태를 시정해 달라”고 호소하고, 미리 준비했던 휘발유로 「근로 기준법 해설」이란 책을 태우려다 제지를 받자 자기 몸에 불을 붙여 분신 자살하였다.
정부에 연소 근로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시켜줄 것을 누차 요구하던 전태일 열사가 분신자살을 함으로써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 평화시장 : 중구 을지로6가 17-48 (서울미래유산)
- 중구 을지로6가를 중심으로 흥인지문 및 청계천 지역에 밀집한 의류 도매시장.
동대문시장은 크게 도매시장과 소매시장, 그리고 젊은 세대 타겟 시장과 장년층 이상 타겟 시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젊은 세대 타겟 시장은 두타(두산타워)를 비롯한 쇼핑몰로 대개 1990년대 후반 이후에 지어진 곳이다. 장년층 이상 세대 타겟시장은 평화시장을 앞세워, 이름에 ‘평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장들이다. 그리고 이 ‘평화’시장군이 현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 초기 성장의 원조이자 주역이다.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은 청계천 근처에 거주하면서 의류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를 활용한 옷도 만들어서 팔았다. 당시 청계천 주변은 무허가 건물과 노점이 즐비했으며, 이곳으로 배출된 오수와 쓰레기로 서울시는 골머리를 앓았다.
1958년 청계천을 복개하여 도로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재래시장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시 상인들은 집단으로 대응하여 서울시로부터 부지를 제공받고 건물을 지었다. 많은 상인들이 실향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평화 통일의 염원을 담아 상가의 이름을 평화시장으로 지어 1962년에 개점했다.
평화시장이 성장하자 주변에 생산과 판매가 혼합된 의류상가인 동신시장(1962), 통일상가(1968), 동화시장(1969)이 차례로 개발되었다.
현재의 평화시장은 모든 층이 상점으로 쓰이고, 공장들은 주변의 창신동, 신당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1층은 상점이, 2~3층에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이런 구조는 18~19세기 유럽 산업도시 건물에서도 나타난다.
원재료를 건물의 맨 위층(일종의 재료 창고)에 저장한 후, 밑의 층에서 이를 활용해 제품을 만든 후 1층 상점에서 판매하는 구조였다. 생산과 판매가 공간적으로 단일 건물 안에서 수직적 프로세스를 따라 발생하는 것이 18~19세기 유럽과 20세기 중후반 서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과 지역에서 나타났다.
당시 부유층은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옷감을 사다가 옷을 만들어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 기성복이 등장하자 대중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평화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동대문시장은 대한민국 의류생산의 주축을 담당하면서 빠르게 성장했지만, 노동조건과 노동현장은 열악했다. 하루 평균 16시간 근무하면서 매우 적은 월급을 받았다. 단순 작업을 주로 하는 시다(보조)의 평균 연령은 15세에 불과했다.
또한 층간 높이 3m를 나눠 복층화 해서 공장으로 가동했기 때문에, 공장에 최적화된 환경도 아니었다.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한 공장의 평균 노동자 수는 17.2명이었는데, 이는 현재 섬유패션과 IT를 결합한 동대문 ‘패션클러스터’의 생산축 역할을 하는 창신동 소재 공장(약 2~5명)에 비하면 세 배 이상이나 많은 숫자이다.
1970년대에는 가내수공업을 위주로 한 영세 업체들이 평화시장에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 빈민과 일용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업체를 운영했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종로구 율곡로 (종로6가)~중구 장충단로(을지로6가)
116번지 (서울미래유산)
-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의 오간수문(五間水門)을 빠져 나가는 곳에 설치한 다리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을 빠져 나가는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五間水橋]라고 불렸다. 조선 초에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3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므로 삼간수문이라고 불렀다.
이 수문은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쌓을 때 창건한 듯 하나 확실하지 않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오간수문에 쇠창살을 설치하는 등 경비를 강화했음에도 죄인들이나 외부인들이 몰래 출입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조선초 명종 때 유명했던 도적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나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오간수문을 이용했다
일제의 통감정치가 실시되던 1907년(융희 원년)에 당시 한성부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이 청계천 물줄기를 원활하게 흐르도록 한다는 명분으로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 일제는 오간수문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칭했다.
서울시에서 2000년대에 진행한 청계천 복원공사 때 교통문제로 전일의 오간수문을 복원하지 못하고, 철근 콘크리트로 지금의 오간수교를 놓았다. 그 대신에 오간수교 북측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 중구 을지로7가 2-1 (서울미래유산)
- 복합 문화공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서울시는 2007년 12월에 동대문운동장을 헐고, 복합문화공간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2009년 4월에 착공하여 5년 만인 2014년 3월 21일에 개관하였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여성 건축가로는 최초의 노벨상 격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이라크 태생의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다. 자하 하디드의 DDP설계안에는 동대문 지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 토대 위에 새로운 미래적 가치와 비전을 더한 동대문의 새 풍경이 담겨 있다.
자하 하디드는 이른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동대문의 역동성에 주목하여 곡선과 곡면, 사선과 사면으로 이뤄진 특유의 건축 언어로 자연물과 인공물이 이음새 없이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콘셉트(concept)를 기반으로 DDP는 동대문이 갖는 상징성에 새로운 풍경을 더하게 되었다.
DDP는 2006년 9월에 시공하여 2014년 2월까지(건물 준공 : 2013.11월말) 연면적 86,574㎡로 지하3층, 지상4층, 최고높이 29m로 완공되었다. 우주선을 연상하는 세 개의 공간에는 알림터ㆍ배움터ㆍ살림터가 위치해 있으며, 외부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ㆍ동대문운동장 기념관 등 총 5개의 공간과 15개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DDP는 각종 전시, 패션쇼, 신제품 발표회, 포럼, 컨퍼런스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여 아시아로, 세계로 향하는 ‘디자인·패션산업의 발신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디자인갤러리와 이벤트 홀에서는 다채로운 디자인 작품이 전시되고, 각종 체험 프로그램이 펼쳐지며, 한양도성 축성의 역사와 도시계획사 등을 소개한 ‘한양도성 사진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들이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