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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디어 십자송, 십물계를 하게 됐습니다. 십자송은 우리가 장례식장 가잖아요. 백봉선생님한테 옛날에 물은적이 있어요. 장례식장에 가서 천도를 할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이렇게 물은적이 있어요. 십자송만 하라고 해요. 십자송만 계속 해주라고 해요. 영가들 한테. 그러니까 이 십자송은 팔만대장경을 함축시켜놓은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우리는 도반 돌아가시면 가면 십자송만 해요. 계속 십자송만 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간동안 내 십자송만 해요. 거, 제일 이익은 누구죠? 자기요. 염불하는 자기가 제일 이익이에요. 그래서 십자송을 하라 그렇게 얘기를 하신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항상 제사를 지낼때, 우리집에도 차례를 지내잔습니까. 제사를 지내고 그러면 십자송을 해요. 그리고 49제 할때도 이거하고 또 장례식장에 가도 다른사람 기독교도가고 천주교도 가고 불교도 그런데 가면 매 이걸 읽어주고 옵니다. 마음 속으로 영가님께. 자, 우리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온갖 중생은 본래로 부처러니
둘로 보아서 모습에 붙이이면 도깨비굴에 떨어진다
삼세로 낳고 꺼짐이라서 이 묘한 씀이러니
네 가지 갈래는 연을 따라 이뤄지네
다섯 쌓임이 어찌 해맑은 몸이 아니리요
육도만행도 문턱은 아니어늘
칠보의 보시는 그 이익이 많기는 하나
팔풍이 움직이지 아니해야 참으로 공덕이니라
누리의 영특스런 앎을 너는 의심치 말지니
시방의 숱한 세계는 마음가운데 밝더구나
일체중생본래불 一切衆生本來佛
이견착상낙귀굴 二見着相落鬼窟
삼세출몰시묘용 三世出沒是妙用
사종이류수연성 四種異類隨緣成
오온기비청정신 五蘊豈非淸淨身
육도만행무관사 六度萬行無關事
칠보보시기리다 七寶布施其利多
팔풍부동진공덕 八風不動眞功德
구소영지물여의 九霄靈知勿汝疑
시방사계심중명 十方沙界心中明
선생님 계실 때는 우리가 전부다 한자로 했어요. 그래서 한번 보십시요. 그다음에 십물계 한번 읽어 보시죠.
비록 마음과 몸을 빌었어도 본래의 드높은 자리임을 잊지 말라
비록 처자를 두었어도 쏠려봄에 떨어지지 말라
비록 가업을 이으나 삿된 이익을 탐하지 말라
비록 세상법으로 더불어도 큰 도를 버리지 말라
비록 천하에 노니나 법성품을 뭉개지 말라
비록 인연 일어남을 짝하나 악한 뿌리를 용납지 말라
비록 모습 없음을 마루하나 덕심기를 게을리 말라
비록 삼매에 있으나 선의 새김을 세우지 말라
비록 지관을 즐기나 길이 사그라짐에 들지 말라
비록 낳고 죽음을 쓰나 더러운 거님을 하지 말라
수자심신물망본존 雖藉心身勿忘本尊
수유처자물타애견 雖有妻子勿墮愛見
수승가업물탐비리 雖承家業勿貪非利
수여세전물사대도 雖與世典勿捨大道
수유천하물괴법성 雖遊天下勿壞法性
수반연기물용악근 雖伴緣起勿容惡根
수종무상물태종덕 雖宗無相勿怠種德
수재삼매물립선상 雖在三昧勿立禪想
수흔지관물입영멸 雖欣止觀勿入永滅
수용생사물위오행 雖用生死勿爲汚行
네. 나중에 뒤에 법문에 나오겠지만 백봉선생님이 만약에 예불을 다 못할 경우에는 십물계라도 반드시 읽고 나가라. 아침에 나갈 때. 이 십물계는 우리 생활에서 우리의 계,정,혜 할때 그 계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예불송에 염불송동업보살의 서원 다 그렇지만 이 십자송 십물계가 꽃입니다. 그 밑에 화엄경에 이르되 그거 읽으시죠. 화엄경에 이르되 내가 이제 일체 중생을 두루 살피건대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건만 다만 망상 집착으로써 증득하지 못한다 하다. 이거는 지금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이것이 선문염송 제 38칙 지덕이라는 화두, 선문염송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백봉선생님 선문염송에 보면 2권에 제38에 지덕이라는 이 화엄경에 이르되, 선문염송에 나옵니다. 그래서 각론을 읽어보시죠.
[강론] 사람은 누구나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망념이 한 번 일어남에 알이가 주인공인 듯이 육경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별천지를 지어내는 판이니 이와 같은 도깨비판에서 어떻게 본래의 여래 지혜덕상을 쉽게 증득하겠는가. 지혜는 본래로 허공의 뼈이러니 온갖 법이 일로 좇아 오노라. 지본허공골 (智本虛空骨) 만법종차래 (萬法從此來)
자, 지금 선문염송 38칙을 이렇게 보니까, 이해가 되시죠? 화엄경에 이르되 내가 이제 일체 중생을,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두루 살피시건대 모두가 여래의 지혜와 덕, 다 여래장 , 다 여래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허공으로서의 내인 그자리를 다 가지고 있어. 절대 평등성인 그자리를 다 가지고 있는데 다만 무엇 때문에? 망상 집착으로써 자기가 여래의 지혜와 덕이 있다는 거를 몰라. 증득하지 못한다는 거여.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망상 집착이라는 건 뭘 뜻하는 가요? 그렇죠. 가짜를 진짜로 알아. 가짜를 진짜로 아니까 망상을 부리고 분별망상을 부리고 집착을 한다 말이지. 그래서 모든 모습이 모든 모습이 공성이라. 본래 절대성 자리에서 상대성이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 그래서 절대성과 상대성이 하나라. 하난데 어떻게 생각을 했냐면 모습으로 보면 차별상이거든, 그러니까 둘로 딱 봐버려. 둘로. 둘로 봐가지고 거기에 쏙 들어 앉아 버리니까 죽었다 깨도 내가 본래 여래장이다. 본래 내가 절대 평등성 자리다. 이것이 생각도 안 나고 돌아 갈 수도 없는 거야. 단지 가짜를 진짜로 알기 때문에. 모습을 진짜로 알기 때문에.
그래서 모습이 변하고 헛것인데 그래서 모습에 머물 수가 없는데, 모습이 자체성이 없는데, 그냥 허공으로서의 내가 진짜 낸데, 내몸은 허공이 내몸인데, 뭘 내몸으로 알아요? 이 뮥신을 내몸으로 알아. 육신이 내몸 아닌건 아니지. 인연과 조건이 있을 때까지는 내가 쓰는 그런 한시적인 몸인데도 불구하고 또 이몸이 이대로 텅 비어있죠? 이몸 이대로 비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돼. 그것이 망상에 집착한다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강론에 보면은 사람은 누구나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망념이 한번 일어남에 알이가 주인공인 듯이 육경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별천지를 지어내는 판이니 이와 같은 도깨비판에서 어떻게 본래의 여래 지혜덕상을 쉽게 증득하겠는가. 이말이죠. 여기서 육경이란 육진이죠? 색성향미촉법. (24;51) 그러니까 앞에 보이는 육진경계와 어떻게하냐 , 내가 이렇게 보면 아, 청안이 있구나 그러면 청안이 진짠줄 알아. 청안을 보면서 그냥 헛것으로 안 보고 진짜로 봤버려. 그러니까 이 아름알이가 주인공이 됐버려. 진짜 주인공은 뭐죠? 알음알이도 본래 이자리에서 나온거지. 그런데 이미 경계에 이미 모습놀이를 해서 알음알이에 딱 들어가버리면 이 말음알이가 아, 내가 본래 부처자리지, 이거 생각을 못 한다는 거여.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은 본래 망심이 진심이다. 이 생각은 죽었다 깨도 안 나.
내가 지금 성을 내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좋다 나쁘다 한다 이러면 망심과 진심이 구별이 되서 딱 알 수가 있는데 좋다 이러면 좋다에 쏙 들어가 버리고, 나쁘다하면 나쁘다에 쏙 들어가 버리고 홍연옥이네 그러면 그냥 홍연옥 모습에 쏙 들어가 버려. 내가 홍연옥을 본다 이 생각이 안 나. 내가~ 이 생각이 안 나. 그래서 이 새말귀는 이자리를 놓치지 않는 거거든. 이자리를. 이자리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이 잘 안돼있어. 처음에는 잘 안돼겠죠? 그런데 자꾸하면, 혹시 홍연옥 보살님 그런 느낌 있었죠?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하는데 내가한다 하고 하고있었다. 그런 느낌 있었죠? 예. 처음에는 자꾸만 한 생각을 일으켜서 자꾸 화두를 잡아야 돼. 자꾸 가다가보면 화두를 잡지 안해도 어떤 때는 그냥 된다는 거여. 그런데 (그래서?) 모습에 머물면 아, 내가 머물렀다는 것이 얼른 깨쳐져. 그 상황을 탁 보게 돼서 내가 얼마든지 나오게 되지요. 그래서 화두라는 것이 간화선의 화두보면 밥먹고 똥눌때까지 화두를 잡아야 하듯이 우리가 이 공부를 할 때 새말귀를 잡을 때, 모습공식을 해서 아, 이 모습이 변하고 헛것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딱 알아야 돼. 이 모습이 변하고 헛것이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알게되면 이게 헛것이니까 이것을 움직이는 이놈이 드러나. 그러면 이놈을 가지고 자꾸만 잡고 열심히 해야된다 말이죠. 열심히 해야 된다고. 그냥 이거 놔 버리면 안된다고요. 왜? 습관이 안돼있거든. 내가 습관이 붙을 때까지 자꾸 해. 하면은 어떻게 돼냐면 나중에 허공이 내몸이 되지요.
허공으로서의 내라는게 마음에 확 다가와. 아, 내는 텅빈 허공이 내구나. 이 모든 삼라만상이 내 집안 식구구나. 이렇게 딱 느낌이 온다 말이죠. 그러다가도 금방 모습에 쏙 들어가 버리죠. 혼자 있을 때에는 좀 잘 되지요. 또 남하고 있을 때는 잘 안되지요. 특히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싫어하면 진짜 안 돼. 좀 별 관계가 없어야 이것도 잡고 있는데 너무 좋거나 너무 싫어하면 그냥 모습에 확 들어가 버려. 그러니까 공부도 마찬가지죠? 이 공부도. 내 이 악물고 이 공부 해야지. 그렇게 되면 그 공부 모습놀이에 퐁당 들어가버려. 그렇게하면 공부 잘 안되는 거예요. 공부를 어떻게, 놔 줘야 돼요. 이 악물고 내가 깨달아야겠다 이러면 못 깨달아 그사람은. 그때 어떻해야 돼요? 절벽에서 붙들고 있는 손을 놔 버려야 돼요. 내가 깨달아야지 하는걸 꽉 붙들고 있는데 그걸 놔버리면 그길을 갈 수 있는데 그걸 붙잡고 안 놔, 사람들이. 놔야지. 내가 해야지, 열정은 좋으나 집착이 돼서는 안되는 겁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너무 많아서 지금 여러번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고 화두를 놓쳤다고 절대 화내지 말것. 아, 내가 또 놓쳤네. 또 놓쳤네. 이거 하지 말것. 놓쳤으면 놓쳤는가 하고 그다음에 잡으면 되지요. 놓치면 아, 내가 놓쳤네, 또 잡으면 되지요.
그런데 어떤 분은 내가 옆에서 옛날에 공부할 때 보면 막 성을 내, 자기 놓친거에 대해서. 처음 공부하시는 분들은 열의에 불타가지고 막 자기 놓친것에 대해서 막 자기를 갖다가 나는 요것밖에 안된다고 막 그라고 그런다. 그럼 공부가 잘 안돼. 놓쳤어, 그라면 그다음에 잡으면 되지. 내가 지금 말하는 거는 이 마음이 너무 이러지도 말고 너무 이러지도 말고 그러라는 거에요. 그냥 마음이 편안이 평정심으로 이렇게 화두를 가져야 된다는 거에요.담담한 마음으로. 그 무렴거사님이 현대 다니셨거든요. 정주영 회장님이 사훈이 뒤에 말은 생각이 안나는데, 나 그분 한소식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담담하게, 옛날에 월급봉투 주면 담담하게 뭐라고 적혀 있었어. 그런데 아, 이분이 진짜 한소식 한분이다 이런 생각을 했어. 그래서 모든 일에 담담하게 한다는 거에요. 담담하게 공부를 해야 돼요. 너무 이 악물지도 말고 너무 헬렐레 하지도 말고 담담하게. 이 담담이 다른 말로 허공과 같이. 백봉선생님은 공부의 마음 갖음새에 은근하게 공부하라고 하시거든요. 이말이 이말인거 같아요. 화두를 잡고 공부를 할때 은근하게 해라. 이렇게 하시거든요. 그러니까 허공은 빠른것도 아니고 느린것도 아니라는 거지. 그러니까 은근하게 공부를 해야 공부를 잘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32;56) 그래서 담담하다는 말이 그말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망념이 가짜를 진짜로 한번 딱 알아버려 내가 육진경계에 딱 보는 순간 한 생각이 딱 일어나, 알이가, 주인공이, 그러면 망념이 한 번 일어남에 알이가 주인공인 듯이 육경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별천지를 지어내는 판이니 이와 같은 도깨비판에서 어떻게 본래의 여래 지혜덕상을 쉽게 증득하겠는가. 그러면 이 문맥을 보면 여래의 지혜덕상을 쉽게 증득할 수 있는 법이 있는거 같은데요? 어떻게 증득하겠습니까? 여래의 지혜덕상을 증득할 수 있는 법을 딱 말씀을 해 놓으셨네 여기서. 육경과 타협하지마라. 그러니까 눈하고 타협하지 말고 귀하고 타협하지말고 내 나오죠? 백봉선생님 내 법문 하시죠. 눈하고 타협하지 마라, 귀하고 타협하지 마라, 코하고 타협하지 마라. 육진 경계와 타협하지 마라. 이것이 여래의 지혜덕상을 증득하는 길이다. 이말입니다 지금.(34;43)
이 자리가 인생문제를 결정적으로 단안내리는 소식입니다. 부처님 말씀 어느 것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지만 여러분이 이걸 잘 이해하시면 이 자리에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전부 해결됩니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인데, 내가 이제 일체 중생을 두루 보니 여래의 지덕을 다 갖추고 있어. 여래의 지혜, 슬기와 덕, 덕 자리, 무엇 때문에 덕 자리를 놓았을 꼬? 덕 자리를 놓지 않고 그만 혜상이라 해도 되는데 덕 자리를 놓았거든요. 여기에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슬기의 모습이언만, 다만 망령된 여김에 집착함으로써 본래의 여래의 지혜덕상을 증득하지 못한다. 단지 이 말 뿐입니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누리가 하나라. 허공이 하나라. 그러니까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가 하나라. (다시 말하자면 진리) 또 지도리가 하나니 생명도 하나일 수밖에 없거든요. 생명이 각자 이렇게 나툰 것은 하나인 여래상, 여래의 지덕, 지혜에서 덕이 있기 때문에 산하대지도 나투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는 겁니다. 슬기 자리도 그만 슬기가 아니라 덕을 갖춘 슬기 자리가 있기 때문에, 파도처럼 숱한 사람의 모습을 나투어도 그 자리는 하나다 그 말씀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인데 경계에 닿질려서 일어나는 망령된 새김 때문에 거기에 딱 집착해버려. 생각하면 참 무섭습니다. 거기에 딱 집착하기 때문에 본래의 소식을 증득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사실로 말하면 우리가 모습공식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모습은 자체성이 없다. 모습은 변한다. 모습은 헛것이다. 모습에 머물 수가 없다. 모습을 잘 굴리자. 이걸 늘 한다말이지. 모습이 변하고 헛것이구나, 모습이 변하고 헛것이구나 이걸 늘해. 모습이 변한다 헛것이다를. 자성월 보살님, 우리가 모습이 변한다 헛것이다를 우리가 왜하죠? 변한다 헛것이다를 하게되면 뭘 알게 돼냐면, 하나의 도리를 알게 돼요. 모습공식을 자꾸하게되면 하나인 도리를 알게 돼요. 하나인 도리를. 아, 이것이 전부다 하나인 도리구나. 이것이 텅빈 도리구나. 이렇게 알게돼요. 하나인 도리를 안다는 거는 무슨 도리를 안다는 거여? 하나로가 될려면 어떻게 돼야 된다고? 텅 비어야 된다고. 텅 비었다는 걸 알게 된다. 텅빈 도리. 그래서 일체만법이 전부 공성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공리에 요달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이 길이지요, 지금. 여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있고 그죠, 희망도 있고 지혜도 있고 행복도 있고. 여기에서 말하는 이런것들은 차별 현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얘기라. 차별현상에서는.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무주상 보시라고 나오죠? 내가 보시를 해도 어떻게 무주상, 머물지 않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는 그런 보시를 할려면 무엇이? 하나인 도리를,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도리를, 그런데 모습으로는 둘이거든, 모습으로는 둘인데 성품으로는 하나에요. 청안죽 일심행죽이라고 하지만 그 바탕은 죽이야, 죽.
그런데 보통 사람은 바탕은 잊어버려. 죽은 늘 변하는 건데. 죽은 지 혼자서 일어날 수가 없는 건데. 그러니까 청안죽 일심행죽은 지 혼자서 실제로 존재를 할 수 없는 건데. 우리는 청안죽 일심행죽이 지혼자서 그냥 실체가 있는 줄로 착각을 해버려. 그래서 경계에 착 달라 붙어. 이러면은 그냥 헤어나지를 못하네.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하면 어떻게 되지요? 자꾸 똥바가지 뒤집어 쓰지요. 자꾸 더 결박을 하게 되지요. 내가 이렇게 했네,내가 얼마나 했네, 자꾸 내려놓는 공부를 하는건데, 자꾸 빈도리를 공부하는 건데, 텅빈 도리 하나인 도리로 가야 하는데. 나는 참선방에 삼십년 다녔다. 나는 어디 뭐 큰 절에 다녔다. 아, 공부하러 가는데도 뭐, 뭐를요, 자꾸 어깨에다가 하나씩 둘씩 자꾸 이름을 언져, 언져서 나중에는 본말이 전도가 돼. 내가 하나인 도리를 알고 텅빈 도리, 절대 평등성자리, 본래 나의면목 지혜를 깨달을려고 왔는데, 아, 엉뚱한 짓을 한다 말이지. 그렇게해서 공부하러 갔다가 사람 베렸버리죠. 그러면 얼른 정신을 차려서 나왔버려야 된다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왜 덕 자리를 놓았을 꼬? 그냥 혜상이라고, 지혜상이라고 해도 되는데, 왜 덕을 놓았느냐? 거 중간에 한번 보십시요.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누리가 하나라. 허공이 하나라. 그러니까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가 하나라. (다시 말하자면 진리) 또 지도리가 하나니 생명도 하나일 수밖에 없거든요. 생명이 각자 이렇게 나툰 것은 하나인 여래상, 여래의 지덕, 지혜에서 덕이 있기 때문에,지혜만 있으면 안된다 이 말이지요. 그 지혜가 적적한 본래의 적적한 자리가 있기 때문에 산하대지도 나투고 인연과 조건에 따라서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이렇게 온갖 것이 그것이 바로 지혜의 덕 자리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파도처럼 숱한 사람의 모습을 나투어도 그 자리는 하나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를 할때 어떻게 해요? 새말귀 할때, 이자리가 말한다, 이자리가 듣는다, 이자리가 걸어 간다, 이자리가 잠 잔다. 이자리가 밥 먹는다. 이자리를 다른 말로 하면 나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내가 본다, 내가 말한다. 내가 듣는다, 내가 일한다. 내가, 내가, 내가...내가 바쁘다, 내가 성낸다, 내가 싸움한다, 내가 술 먹는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그 내자리,그 바로 허공인 그 하나인 그자리를 놓치지 마라 그러면은 나중에 여래의 지혜덕상을 증득을 하게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자리는 하나인데 그자리에서 절대평등성인 자리에서 인연과 조건에 따라서 무수한 경계를 나투어, 그런데 그 경계에 닿질려서 일어나는 망령된 새김때문에 딱 집착을 해 버린다 말이지. 그런데 이 망령된 새김도 어디서 나와요? 이자리가 하는 거에요.이자리가 하는 거에요. 이자리가 아니면 할 수가 없지. 그래서 망심이 진심이다 이렇게 되는데, 그래서 아, 내가 지금 이렇게 경계에 휩쓸려서 내가 괴로워 하고 있구나, 내가 지금 바쁘구나 , 내가 싸움을 하고 있구나. 내가 갈등을 하고 있구나. 마음이 아프구나, 이러면 그것을 굴리는 거지요.지혜덕상을 굴리고 있는 거지요 모습을. 그런데 다 잊어버려, 그냥 성이나면 성남데 확 들어가서 아무 생각이 안나. 이것이 무엇이냐면 망념된 새김때문에 거기에 딱 집착해 버려서, 생각하면 참 무섭습니다. 이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것 같습니다. 생각하면 진짜 무서운 말이죠 이말이. 거기에 딱 집착하기 때문에 절대평등성 자리인거는 꿈에도 생각을 못해요. 자 그다음에요.(46;37)
참말로 우리가 허공이 하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해소돼버립니다. 그대로 알아져 버립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허공중에 지구가 둥둥 떠돌고 있는데 허공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안 해. 더욱이 지구 자체도 생각 안 해. 그만 땅이다 이 생각뿐이라. 그렇죠 우리 지금 이레 살고 있으면 지구가 허공에 있다는 거는 그만 두고서라도 내가 지구 속에 있는 한국에 있다. 한국 속에 있는 선릉에 있다. 이거 생각 안납니다. 오로지 여기밖에 안 보여. 내 눈으로 보이는 것 밖에 안 보여. 그러니 우에 그게 되겠습니까. 이게 전체 허공이 나다 이거 잘 안돼. 여기있는 모든 모습들이 다 내 식구다. 이거 안돼죠? 바로 나의 나툼이다 이거 안돼죠? 홍연옥 보살님은 나를 보면 나의 나툼이다 이렇게, 왜? 홍연옥 보살님하고 나는 본래 공성이라. 이런 모습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는 무엇이? 텅빈 성품이 실체라. 이렇게 나타난거는 전부 가짜라. 이게 참 어려워요. 이게 어려워요. 자 그다음에요.
제일 집착하는 것은 이 몸뚱이에 집착하가든, 몸뚱이가 실답지 않다는 것은 이제 다 아는 거라. 몸뚱이 자체에 자체성이 없어. 그러니까 한살, 두살때 몸도 없어. 열살 스무살때 몸도 없어. 여러분이 지금 이 몸뚱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나중에 이 몸 없어져. 내년에는 싹 바뀌거든요. 우리가 바꿔지는 줄 모를 따름이지 머리털까지도 싹 바꿔져 버려. 머리도 희게 돼. 나중에 가는 곳이 불구덩이나 흙구덩이인데, 이걸 내라고 딱 집착을 해. 몸을 위해서 여름이 오면 여름옷을 입혀줘야 되고, 겨울이 오면 겨울옷을 입혀주고, 술도 먹고 밥도 먹고 고기도 먹게 되거든. 자꾸 먹여줘야 돼.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살리기 위해서 본래의 소식은 그만 깜빡 잊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죠. 이 몸에도 머물 수 없다는거, 하여튼 잘 기억하셔야 돼요. 이 몸에도 머물 수 없어. 속제로 봐도 머물 수 없어. 늘 변하고 있기 때문에. 머물고 싶어도 못 머물러 지금. 자 그다음에요.
허공이 하나니까 벌써 내 마음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어. 허공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어.그러하면 이 마음하고 허공하고 갈라놓질 못해. 허공이란 말이 있어서 그렇지, 허공 곧 마음이요 마음 곧 허공입니다. 참말로 우리가 마음의 형태를 알려면 허공을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니까 볼것이 없어. 만약 보려고 하면 볼것이 없는 걸 볼 줄 알면 되는데, 아무 것도 없다고 관심 없거든. 빛깔이나 모습에만 자꾸 돌아간다 말이여. 습성이 그리 돼있어요.
자, 만약에, 그 위에는 다 아시겠죠? 허공이 하나라는 말은 내 마음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고, 허공도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니 마음하고 허공하고 갈라 놓지를 못한다. 이거는 모습이 없으니까. 허공이라는 것은 말뿐이고 마음이라는 것도 말뿐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허공 곧 마음이요 마음 곧 허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이 어떤 것인줄 알려면 허공을 보면 된다 이 말이지요. 이제 지금 여기서 말을 하는 거는 허공이라는 거는 허공은 두가지가 있어요. 그 능엄경에보면 나오죠. 빈것을 허공이라 하고,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허공은 하나는 완공, 공을 두개로 본다 말이지. 하나는 진공으로 보고 하나는 완공으로 본다. 요거는 텅 비어있는거, 그냥 비어 있는거. 요 진공이라는 거는 마음 공, 심공 또는 성공이라고 하는데 이건 여래의 지혜덕상이죠? 인연과 조건에 따라서 모든 것을 나툴 수 있는 공. 그게 진공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 진공을 얘기하죠.
그런데 만약에 보려고 하면 볼것이 없는 걸 볼 줄 알면 되는데, 아무 것도 없다고 관심 없거든.빛깔이나 모습에만 자꾸 돌아간다 말이여. 습성이 그리 돼있어요. 자성월 보살님 볼것이 없는걸 보려면 어떻게 봐야 돼요? 지금 이자리에서 볼것이 없는 허공을 보려면 어떻게 봐야 돼요? 그걸 알아야 되잖아. 보는 방법을 알아야지 내가 공부를 하잖아. 허공을 어떻게 봐야돼? 지금. 볼것이 없는 걸 어찌 볼수 있는지 내말로 표현을 해보라 말이지. 진짜로 지적을 해보라 말이지. 볼것이 없는걸 어떻게 보냐고? 지금 현재 이 상태에서, 지금 모든 모습이 있잖아요. 이 모습에서 볼것이 없는 걸 어떻게 보냐고? 이자리가 바로 공적한 자리죠? 그렇습니다. 그냥 헛것으로 보는 겁니다. 변한다 헛것이다가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모든 모습을 그냥 헛것으로 보고 그냥 빈것으로 봐요. 그러면 빈것이 보여요. 볼 수 없는 것이 보인다 말이야. 너무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볼것이 없는 걸 어떻게 봐? 눈만뜨면 보이고 눈감으면 까만거 보이는데. 어떻게 봐? 모습은 헛것이라고 봐야 볼것이 없는 것을 보는 거예요. 거 진짜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생활 속에서, 생활 속에서 갈등이 일어 나거나 또는 이런 물체를 보거나 내가 일을 하거나 할때 아, 이것이 변하고 헛것이구나. 그래서 바로 헛것으로 보는 훈련을 자꾸 하는거여. 우리가 변한다 헛것이다 하는 이유가 뭐라고요? 하나인 도리를 텅빈 도리를 증득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가는 가장 중요한 관문이에요, 그게. 그래서 그쪽에서 더 앞으로 나가면 그 중에서도 몸뚱이 변한다 헛것이다가 돼야, 이 몸을 자꾸 내몸이라고 하는데 진짜 내몸은 허공이거든, 그러니까 몸뚱이 변한다 헛것이다가 안되면 허공이 내몸이 안돼. 그래서 자꾸 몸뚱이 변한다 헛것이다, 그런 사실대로 보는 거죠 그 다음에요.
실은 산하대지가 전부 다 허공성이고 다 하나인데, 꼭 물거품 이루어지듯이 그 모습을 나투었어. 이것뿐인데. 나투어 봤든 나무나 돌도 허공성이거든. 우리의 몸도 허공성이라. 이 허공하고 지구나 태양을 둘로 볼 필요가 없고 또 볼 수도 없어요.그렇지만 이런 데는 그만 까마득해.
예예, 여기 참 중요한 얘기입니다. 산하대지가 다 공성이고 꼭 물거품같이 그 모습을 나투었어. 이것뿐이라. 이것뿐이라고. 이런 모습이 꼭 물거품과 같이 나툰거. 이거뿐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에 들어 앉아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투어 봤든 나무나 돌도 공성이거든, 우리 몸도 공성이야. 이 허공하고 지구나 태양을 둘로 볼 필요가 없고 또 볼 수도 없어요. 우리 싸이클에는 다 차별상으로 둘로 보여. 그런데 죽은 죽인데 무슨 죽이죠? 태양죽 허공죽 지구죽 이레. 전부 다 똑같은 성품이라. 그래서 지금, 홍연옥 보살님 자성월 보살님, 혜덕이 청안 보살님, 우리 여기 계시는 모든 분, 또 여기 있는 모든 물체 , 이런 것들이 전부 뭐라고요?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다. 뭘로 봐서? 성품으로 봐서. 그렇지만 이런데는 까마득해, 왜? 모습이 자꾸 진짠줄 알아. 모습 스스로 지 혼자서 일어났다 꺼졌다 할 수 없는 물체라 이 모습은. 실체가 없는 물체라.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은 물체라. 이 모습은. 그 다음에요.
그런데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에 성현들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을 누가 만들었든지 진짜로 봤어. 예수교에서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지만 좌우간 어떻든지 이걸 진짜로 봐. 모든 것에는 이름자가 있어, 지구다 땅덩이다 나무다 하느님이다 부처님이다 중생이다. 중생의 지견에 따라 지어 붙여놓고, 그 이름자에 전부 매달려요. 그 이름자가 진짜인줄 알고. 사실은 진짜가 아니련만.
그렇죠. 그러니까 자기가 이름을 지어 놓고 경계에 닿질려서 이름을 지어놓고 또 그게 진짜라고 쏙 들어 앉아 버린다 이말이죠. 그래서 타 종교에서는 조물주가 피조물을 만들었다 이렇게 한다 말이예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피조물이 진짜다 이러는 바람에 뒤집어 지는 거예요. 조물주가 만들었다. 어, 절대성자리가 인연과 조건에 따라서 일어났다 꺼지는 것까지는 좋았다 말이지, 그런데 상대성이 가짜다 이러면 맞지요. 피조물이 가짜다 이러면 맞는데, 아, 피조물이 진짜다 이러네. 그래서 막 하느님을 팔아서 온갖 , 또 우리 불교에서는, 이거 유튜브에 올라가는 말이지만 부처님을 팔아서 온깆 또 다하지요. 그런거 다 하지요. 자 그다음에요.
덕상이란 십자송을 뜻하는 겁니다. 십자송은 바탕, 체입니다. 바탕을 들낸겁니다. 십물계는 무엇이냐? 십물계는 용(用)입니다. 씀씀이입니다. 사실로 여러분들이 십자송을 바탕으로 하여서 십물계,씀이를 그대로 굴리면 그것이 혜덕상입니다. 십물계를 그렇게 굴리지 아니하면 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실로 여러분들이 예불송만 납득이 가고 관심만 있다면, 솔직한 말로 팔만대장경이 이 속에 다 있습니다. 여길 떠나서 팔만대장경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 다른 말로하면 모습을 굴리지 않는 허공 소용이 없는거 아시죠? 허공이 잘 드러날려면 어째야 되느냐? 모습을 잘 굴려야 돼. 모습은 허공의 살림살이거든. 그런데 만약에. 진짜 실제로 이 공부를 한다고 하는분이 직장을 다녔어.그런데 공부를 하신다고 내 공~하고 있은거라. 일을 해야 되잖아요? 바삐 일을 처리해 내야 되는데 가만히, 결국 그분은 짤렸어요. 그분이 제대로 공부를 했냐? 아니죠? 모습을 안 굴렸잖아요. 무기공에 들어간 거지, 그거는. 그러니까 모습을 굴리지 않는 허공이 뭔 소용이 있데? 그래서 모습을 잘 굴림으로 해서 허공의 그자리가 바로 드러난다 이말이죠.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법문 올려주신 지행거사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