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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예수재 법문
1. 생전예수재의 목표;
살아있을 때 수행을 통해 극락세계에 가는 길을 닦는 것이다.
2. 극락세계는 어떻게 생겼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텅 비었지만 다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현실 생활을 집착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3. 비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현실 생활을 집착 없이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모든 것이 가짜기 때문에 다 비워서 없애고 나서, 다시 그 가짜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는 허상이기 때문에, 나무의 상(모양)을 다 지우고 난 후, 다시 그 나무의 상을 세우고 진짜처럼 사용한다는 뜻이다.
위에서 텅 빔과 현실이라는 두 장면이 따로따로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고, 이 두 장면이 동시에 있기 때문에 겹쳐보인다고 해야 옳다.
즉 “텅 빔” 속에 “현실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첫째;
불상의 황금 색깔=
노란 황금빛은 태양 속에 있는 빛깔이다. 무슨 의미냐 하면, 태양엔 몇백 가지 색깔이 있지만, 태양 빛이 불상의 몸에 비칠 땐, 다른 색깔은 모두 묵음이 되어 반사되지 못하고 불상의 표면에 머물러있지만,
그중 노란 황금빛만 묵음으로 되지 않고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황금빛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뇌 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지 불상에 황금색이 있어서 보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하나의 예로,
어두운 지하, 전깃불도 없는 곳에, 노란 황금색을 놓아두면 우리는 그 황금색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색깔은 전깃불 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전깃불이 없는 곳에선 색깔이 나타날 수 없다.
또 하나의 예로, 별빛도 없는 한밤중에 사물을 보라. 불상과 황금만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하늘까지도 캄캄하여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다.
그러므로 햇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착각할 수 있는 것이,
햇빛에만 황금빛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정답은 햇빛에도 없다. 그러면, 어디에 있을까?
정답은 우리의 뇌가 가상적으로 만든다! 가 정답이다.
둘째;
불상의 몸은 단단한 나무로 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런가를 자세히 살펴보자.
불상을 현미경으로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나무로 된 몸속에는 원자로 가득 차 있다. 또 그 원자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더 작은 전자가 몇 개 돌아다닌다.
이것을 더 정밀히 보려면 그 원자를 더 확대하여 동대문 운동장만 하게 키우면, 그 속에 포도알 만 한 전자 몇 개가 돌아다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동대문 운동장만 한 곳에 포도알 크기의 전자 몇 개가 돌아다니는 형상이란, 즉 원자의 내부는 99.9 %가 텅 빈 허공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체라는 것은 실상은 텅 빈 허공에 불과한데, 중생의 업력 때문에 진실을 모르고, 물체는 단단하게 차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므로 불상은 텅 빈 허공과 같다.
앞에서 중생의 “업력” 때문이라고 했는데, 중생의 “업력” 때문이란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아주 작은 세균이 있다면, 그 세균이 눈으로 사람의 몸을 보면,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이 구멍이 뻥뻥 뚫린 확대된 몸을 볼 것이다.
하나의 예로,
사람의 몸엔 작은 땀샘이 있다. 땀샘을 통해 땀이라는 액체가 비집고 나온다.
그러나 만약 땀보다 더 작은 세균이라면 땀샘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
세균의 입장에선 땀샘도 동굴처럼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큰 구멍으로 보이는 것이다.
땀샘뿐만 아니라 작은 혈관 속에도 틈이 있어서 들어간다.
호흡을 통해 폐의 혈관 속으로 세균들이 들어가서 감기를 일으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균보다 더 작은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은 더 큰 공간이 보일 것이다. 이처럼 작은 생명체의 입장에서 보는 것을, 그들의 업력의 눈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의 “업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며, 개미는 개미의 “업의 눈”으로 보고, 세균은 세균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그래서 모두 보는 세상이 같지 않고 다 다르다. 이것을 업의 눈으로 보면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업(業)= 의미를 가진 생각을 업이라 부른다]
셋째;
허공이 텅 비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허공에, 어느 순간, 봄바람이 불면, 바람이 솜털같이 귓가를 간지럽히며 스치고 지나간다.
이때, 바람은 솜털같이 부드러운 물체가 된다.
그러나
허공에 태풍이 불면, 이때는 허공이 강한 물체로 변하여 나를 밀어뜨린다. 이때의 허공은 둔탁한 물체가 된다.
또 허공에 토네이도가 불면, 이때는 허공이 더 강한 물체로 변하여 나를 100미터 높이로 말아 올린다.
또 허공에 원자폭탄이 터지면, 이때는 허공이 강철보다 강한 물체로 변하여,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종잇장 구기듯 찢어버린다.
이런 현상을 볼 때, 어찌 허공이 텅 비어 조용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허공도 때에 따라선 강한 물체다.
사람의 업 때문에 그것을 못 볼 뿐이다.
넷째; 나는 로봇이다.
미국에 있는 테슬라 자동차 회사에서 자율주행차를 만들었다.
그 자율주행차가 운전자도 없이, 회사에서 고객의 집 마당까지, 스스로 운전하여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율주행차의 메인 컴퓨터에, 정밀한 정보를 주입하면 살아있는 사람처럼 저절로 움직인다는 뜻이므로,
우리 인간도 어떻게 보면 자율주행차와 같은 구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몸은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수많은 정보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불교 수행법인 사념처경엔 수식관이 있다. 수식관이란 호흡 등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호흡을 왜 관찰하느냐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호흡을 “내”가 쉰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수식관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식관을 통해서 들숨 날숨을 관찰하다 보면, 호흡을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자동컴퓨터에 저장된 정보에 의해서,
호흡이 저절로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수식관 수행의 결과다.
우리의 몸은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저장된 자동 정보에 의해 재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 몸의 팔다리도 마찬가지다.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저장된 정보에 의해서 재 스스로 팔다리를 움직인다.
그러므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내 삶을 책임진다”는 것은 전부 거짓이다.
다섯째;
방 안에는 천장과 바닥이 완벽하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며, 우리의 업력이 만든 허상이다.
그 이유는, “나”라는 몸이 있다고 인정하면, 이 몸에는 중심이 생긴다. 중심이 생기면 위치가 만들어지고, 그 위치에 의해서 위와 아래가 가상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위와 아래가 둘로 나눠진다.
그런데 만약 내 자신에 내 몸의 중심으로 두지 않으면 그와 같은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한번 실험해 보자 어떤 현상이 나는지,
만약 누워있는 내 몸을 기계를 이용하여 반듯하게 들어 올려서 천정과 30센티까지 들어 올려보자, 그리고 다시, 들어 올린 판자에 편안히 누워서, 눈앞 30센티 위에 있는 천정을 바라보라,
그러면 “높고” “낮은” 것은 보이지 않고 단지 눈앞 30센티에 있는 천정이라고 이름만 붙인 물체가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천장이 아니라, 높고 낮은 개념이 없이, 눈앞에 있는 하나의 물체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장과 방바닥이라는 명칭은 둘을 비교할 때만 생기는 착각일 뿐이다. 만약 비교하지 않으면, 천정과 방바닥은 둘로 나눌 수 없다.
만약 이런 지혜를, 수행을 통해서 얻고 싶다면, 이와 같이 하면 된다.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내 몸이 가짜이므로, 가짜인 내 몸을 하나하나 지우면, 홀연히 내 몸이 사라진다. 그러면 동시에 내 몸을 중심으로 하는 위치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몸이 사라졌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그렇다.
위치가 사라지면, 어떤 특이한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위와 아래는 평등해진다. 평등하다는 말은 위와 아래가 둘로 나눠지지 않고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라는 말을 더 자세히 표현하면, 위가 아래와 함께 있고, 아래가 위와 같이 있는, 특이한 일이 생긴다.
이 상태는 수행을 통해서, 한 번이라도 체험해 봐야 알 수 있다.
“만약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절대 알 수 없다.
4. 정리하면,
위에서 여태까지 네 가지 사례를 들어서 우리의 눈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짜를 만드는 눈을 가지고는 진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네 가지 사례를 들은 것이다.
그러면,
결론은 단 하나다.
가짜를 만드는 것은 “나”이므로 나를 없애는 것이 핵심이 된다.
나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 모든 것은 “나”라는 중심을 만들어서 생기는 일이므로, 나를 지우는 수행이 모든 수행의 핵심이 된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수행법을 설명한다.
A.
나의 명예심이 가짜 나를 만드는 원인이므로 명예심을 놓아버린다.
나의 자존심이 가짜 나를 만드는 원인이므로 자존심을 놓아버린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가짜 나를 만드는 원인이므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놓아버린다.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가짜 나를 만드는 원인이므로 살려는 마음을 놓아버린다.
죽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짜 나를 만드는 원인이므로 죽지 않으려는 마음을 놓아버린다.
B.
내 몸에 집착을 놓기 위해서 사념처수행법에 의해서 몸을 해체하는 것이 필 수 적이다.
하나의 예로, 푸줏간에서 짐승을 잡아 잘라내어 늘어놓듯이 해체한다.
팔다리를 잘라내고
심장, 간, 폐, 등등 내장을 끄집어내어 늘어놓고
눈, 코, 귀, 입술을 뜯어내고
피부를 벗겨내고
뼈를 망치로 부수어 가루를 만든다.
C.
내 몸을 화장장에서 태우듯이 상상을 동원해서 태워 없애는 수행.
화장장에 가서, 사람의 몸을 태우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하고 나서,
돌아앉아서 상상을 동원하여,
내 몸이 불에 타서 하나하나 사라지는 과정을 또렷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다 사라지고 나면 텅 빈 허공만 남는 것을 본다.
D, 내 몸뿐만 아니라 바깥 사물인 바위와 나무 등도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질 뿐, 실체가 없다는 것을 관찰한다.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씨앗에서 출발하여 지수화풍을 받아들여 점차 커 가는 과정을 관찰한다.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해서 나무도 인연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다.
이것을 알았으면, 나를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내 몸을 가감히 지우면, 동시에 눈앞의 세상도 나와 함께 사라진다.
그 이유는, 눈앞의 세상은 나를 매개로 해서 만들어지는 가짜이므로 나를 놓아버리면, 바깥세상도 당연히 나와 함께 사라진다.
이 둘은 서로를 연으로 하여 붙어있는 것이므로,
내가 사라지면 당연히 바깥세상도 사라진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첫 번째 사례에서 설명한 것처럼 불상의 황금빛 색깔도 내가 중생의 업력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황금빛 색깔과 같은 가짜가 만들어지고,
두 번째 사례와 같이, 불상의 몸이 딱딱한 것도 내가 있어서 나의 업력으로 보니까 딱딱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로 인해서 일어나는 이 모든 것은 “나를 지우면” 당연히 나와 바깥세상이 한꺼번에 텅 비어져 사라진다.
텅 비어서 사라지면, 사라진 그 속에서 특별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반드시 지혜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이 확인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어떤 특별난 현상이 나타날까?
그 속엔 앞뒤가 없고, 좌우, 상하가 없고, 죽음과 삶 등 “두 가지 현상”이 모두 사라지는 일이 생긴다.
이런 사라지는 현상을 통해서, 지혜가 발동하여, 모든 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의 최종 결과다.
이 결과를 얻고 난 후 다시 중생의 업력을 되살려, 세상을 다시 보면, 눈앞에는 “업력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있다.
그러면, 이것을 지혜를 통해서 보면, 이것들은 모두 업력이 만든 허상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되므로, 이 이후로는 그것에 속지 않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 해탈이며 극락세계다.
(육도=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
5. 극락세계는 육도를 벗어나 제3의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육도(지옥, 축생 등등) 속에 함께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이미 육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그분들에겐 육도의 어떤 곳에 살더라도 항상 육도를 벗어난 극락세계 입장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이 땅에 모든 중생과 함께 살면서도 이 땅에 묶이지 않기 때문에, 육도 중생과 함께 살아도 함께 사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업력을 지운 다음, 다시 사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해탈이며 자유라고 하고
또 이것을 극락세계라 한다.
6. 깨달은 후의 수행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보자.
윗글에서,
“텅 빈 대 허공”을 얻고 나서 다시 중생의 업력을 되살려 세상을 다시 보면, 눈앞에는 “업력으로 만들어진 현실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있다. 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첫째; 내 몸의 상(모양)을 지워 사라지게 했을 때는, 내 “목숨”에 대한 애착이 사라졌기 때문에 손톱만큼도 몸에 대한 애착이 없어진 것이고,
둘째; 상이 다시 나올 때는, 어느새 수행력의 힘이 사라져, 내 “목숨”에 대한 애착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다시 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에 집착이 사라지는) “무아의 시간을 유지하기”가 얼마만큼 힘든가를 간단하게 말한 것이다.
그러니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깨달은 후의 수행을 통해서, 나의 “습”(습관으로 익혀진 것)을 닦아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습”이 다 닦일 때까진, 절대 수행을 멈춰선 안 되는 것이다.
만약 수행을 멈춘 순간, 다시 중생으로 되돌아가서 목숨에 대한 애착이 다시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이치(머리)”로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업력에 다시 끌려다니게 되는 것이다.
즉, (수행을 했다고는 하지만), 중생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7. 결론
모든 현상을 다 해체하여 철저히 지우고 나면, 앞뒤가 없는 텅 빈 대 허공이 나타난다.
그다음 텅 빈 허공과 겹쳐서 “지운(사라진) 현상들”이 다시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텅 빈 허공”과 “현실 세계”가 동시에 함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텅 빈 허공을 바깥 세계로 하고, 그 가운데 현실 세계가 그림자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이 말은 “텅 빈 허공”과 “현실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겹쳐 있다는 것.
(핵심 = 이때는 눈을 감지 말고 눈을 뜨고 수행해야 한다)
둘이 겹쳐 있게 되면, 서로 비교되기 때문에 “현실”이 거짓이라는 것이 더 선명하게 부각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현실 세계”를 집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왜냐! 눈앞에서 두 장면이 겹쳐 보이게 되면, “완전히 다른 두 장면”이 비교되기 때문에,
절대로 “허상인 현실 세계”를 집착할 수 없다.
그러니, 미움과 원망과 사랑들을 예전처럼 집착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수행 측면에서 진행되어가는 과정을 순서대로 적어보면,
처음 텅 빈 대 허공을 체험했을 땐, 대 허공과 현실 세계가 따로따로 놀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 허공이 나타났을 때, 현실 세계가 없어지고, 반대로 현상 세계가 있을 땐, 대 허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수행이 점차 익어갈수록 대 허공과 현실 세계가 항상 “겹쳐” 나타게 할 수 있다.
(이 정도가 되면 수행이 매우 깊은 상태다)
이렇게 되면, 현실 세계가 내 마음이 만든 환이며 허상이라는 것을 쉽게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현상 세계를 집착할 수 있겠는가!
눈앞에 뻔하게 “현실 세계”가 “텅 빈 허공”과 비교되면서 나타나는데 말이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텅 빈 허공이 바깥으로 마치 거대한 공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있고, 그 속에 “현실 세계”가 그림자처럼 “투명한 유리에 그려진 그림처럼” 나타나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림자가 환이라는 것을, 비교를 통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 집착을 끊기 매우 쉬워진다.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텅 빔 속에서, (환영처럼) 현실이 겹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애착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이다.
목숨의 애착이 없어지면, 현실의 삶이란 그냥 그림자일 뿐이다. (현실은 힘이 없어짐)
이 현상을 [진공묘유(眞空妙有)= 텅 비었지만 다 있다]라고 한다.
(핵심 = 눈을 감지 말고, 눈을 뜨고 수행했을 때를 말한다)
반대로,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텅 빈 허공이 완벽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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