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인하대학을 다닐적에 서울다녀오면 제물포에서 내려서 인천교대를 거쳐서
독쟁이를 넘어 학교로 갔다 그 골목길안에는 성당이 있었다. 나는 그때에는 신자가 아니었다.
야산에 여러무덤이 있는 성당(용현동성당)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되었는데 그지역이 박순집 베드로가
묻힌 지역이라고 한다. 그곳 성당에서 예비자교리를 받았는데 결국은 세례를 받지 못한채
졸업하고 그곳을 떠났다. 여기 자료는 인천교구 주보에 실린글이다
한국순교자들의 증언자 박순집 베드로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1984년 성 요한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에 103위 순교 성인을 시성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가 많은 성인을 배출하고 성인들을 공경할 수 있는 데에 큰 공헌을 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인천가톨릭대학교와 갑곶 순교성지에서 유해를 모시고 있는 박순집 베드로(1830~1911)이십니다.
박순집 베드로가 증언자의 삶을 살게 된 연유는 그의 아버지의 삶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해박해 때 박순집 베드로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하여 순교하신 주교님, 신부님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고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훗날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으면 잘 가르쳐줘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님과 신부님, 평신도 신자들이 새남터에서 몇 차례 순교하는 것을 군인으로 참여하여 목격하게 됩니다. 이에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하고,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와고개 매장지(지금의 용산우체국 뒤)로 이장하였습니다. 또한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시신도 와고개 매장지에 안장하였으며, 전장운(요한), 정의배(마르코)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습니다. 그 후 병인박해가 심해지자 박순집 베드로의 일가도 결국 검거망에 걸려들어 1866년부터 2년 동안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 베드로는 여러 번 행해졌던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해 위기를 모면합니다.
박해가 끝나고 박순집 베드로는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을 입국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있는 곳 등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언을 엮어 153명 순교자의 행적이 밝혀진 『박순집 증언록』이 총 3권으로 만들어졌고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후 1899년에는 박순집 베드로의 도움으로 와고개매장터에 있던 7명의 유해, 1901년에는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님, 모방 신부님, 샤스탕 신부님의 유해, 1909년에는 노고산에 묻혀 있던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유해가 발굴되어 안치되었습니다. 그 후 가족과 함께 인천 제물포로 내려와 답동 본당 초대 본당신부 빌렘 신부님을 도우며 전교에 온 힘을 다 기울이셨습니다.
박순집 베드로가 안 계셨다면 많은 순교 성인들은 이름 없는 순교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순교하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의 시신도 영영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순집 베드로는 성직자들의 시신을, 성한 사람은 둘러업고 시신이 없는 목을 머리로 묶어서 그 머리털을 입에 물고 밤길을 내달려서 수습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순교자들의 유해를 빼내어 모시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그 행적을 증언해 주신 박순집 베드로. 비록 순교하시지는 않았지만 박순집 베드로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삶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박순집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증언해 주신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가 기억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순교자 성월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