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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각전마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속리산 법주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미륵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5 교구 본사입니다ㆍ
법주사는 2018년 7월4일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7개 사찰이 등재되었습니다ㆍ
속리산에는 해발 1, 057m의 천왕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원래는 구봉산이라고 불렸으나.
신라 시대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속리산 일원은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제2금강, 또는 소금강이라 불렸습니다. 4계절의 변화에 따른 경치와 기암 기석은 절경을 이루고 있고, 크고 작은 10개의 전통사찰과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법주사는 부처님 법이 머무는 '호서지방 제일 가람' 이라는 일주문 현판에 써 있듯이 속리산 법주사는 '속세에 멀리 있다 '는 뜻으로 불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입니다ㆍ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1966년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나 2009년에 속리산 법주사 주변 지역은 사적으로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명승으로 변경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의 창건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ㆍ》
《의신조사》
의신조사가 인도 천축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합니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법주사의 창건은 의신 조사가 창건을 하고 진표 율사가 7년 동안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전해져 오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보면 진표 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사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고 합니다.
진표 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 융종, 불타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습니다. 그 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습니다.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스님이 미륵불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진표 스님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 등도 마찬가지로 길상초가 난 곳에 절을 세우고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근거하여 현재의 법주사는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 시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법주사는 서기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 붙여진 이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에 중건되었으며 고려에 와서는 태조 1년(918)에 왕사인 증통 국사가 중건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종 때에는 여섯째 왕자인 도생 승통이 중창에 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으나 인조 4년(1626)에 벽암 각성선사가 나와 중창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벽암 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며 그 후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법주사 사적'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기록되어 웅장한 규모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예불용 전각 등 중요 건물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웅대광명전 (2층 28칸). 산호보광명전 (2층 35칸), 팔상오층전 (36칸), 비로전 (17칸), 약사전,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 지장전, 연경전, 영산전, 도솔전, 응진전, 대양문 (7칸), 천왕문, 조계문, 해탈문, 동행랑, 서행랑 임진왜란 이후 벽암 선사의 일대 중창에도 불구하고 복구된 건물의 수는 20여 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습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여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이 절의 주지를 지냈습니다.
《대각국사 의천》
《혜덕왕사 소현》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 승통스님의 형입니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습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 1342년(충혜왕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 그리고 "도생승통비"등입니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종 때(1259∼1274)는 자정 미수(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습니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습니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한 이래 법주사를 비롯해서 장의사, 국령사, 대민천사, 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습니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를 92권이나 찬술하였습니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습니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법주사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의 법등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흔히 조선시대가 숭유억불의 시대라 하지만 유교는 치국의 원리와 개인적 수양의 방편일 따름이고, 사람들의 불교신앙은 사실상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미대사》
조선 초 세조 때(1455∼1468)는 신미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습니다. 세조의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 스님은 이보다 앞선 1449년(세종 31)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를 중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전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법주사를 방문하여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품계를 내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ㆍ
조선 중기 절은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ㅈ《사명대사》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전쟁 뒤에는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습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습니다.
그 뒤 벽암 각성(1575∼1660)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습니다. 벽암 스님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였던 서산대사에 버금가는 분입니다.
병자호란을 맞아 구국의 일념으로 의승장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1851년(철종 2) 3월 영의정 권돈인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1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렸습니다.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지 장석상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수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금오태전》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 태전(1896∼1968) 스님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습니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습니다.
1976년 주지 탄성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습니다. 1990년 주지 월탄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습니다.
1997년 선원과 후원 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잘 갖춘 환경에서 정진하는 대중을 외호하고 있으며,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계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됩니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며 속리산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법주사는 신라시대에 처음 법등을 밝혀 기나긴 세월의 발자취를 절 안팎의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잇고있는 오늘날 이 땅에 미륵 신앙의 요람이라고 일컬어 집니다.
《서호제일 가람, 일주문》
《일주문》
법주사 일주문 전면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호서지방은 대전시, 충청남도, 충청북도, 세종시 일대를 가리키는 한국의 지역구분 용어입니다ㆍ
일주문 뒷쪽 현판은 '속리산대법주사' 라고 쓰여 있습니다ㆍ
《부도전》
《하마비》
《세조길 입구》
《삼거리》
《석주》
《수정교》
《속리산 사실기비, 유형문화재 제167호》
속리산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법주사 근처의 수정교앞에 있는 비 로서 비각 안에 있습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3m, 너비 0.65m입니다.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은 속리산 수정봉 위에 있는 거북바위에 얽힌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불교와 유교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ㆍ
《벽암 대사비, 유형문화재 제71호》《봉교비 》
벽암대사비는 1980년 11월 13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 앞 바위 위에 있는
조선 중기의 승려 각성의 석비입니다ㆍ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높이 210㎝,
너비 110㎝, 두께 35㎝입니다.
빗돌을 덮은 머릿돌은 우진각지붕으로 이루어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선조의 손자인 이우가 쓰고 이정이 새겼습니다.
《금강문》
법주사로 들어오는 둘째 관문인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나라연금강, 밀적금강) 혹은 인왕역사 · 이왕역사라 불리는 호법신장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상과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왕문, 유형문화재 제46호》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로 들어오는 세번째 관문인 사천왕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1칸은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높이 5.7m, 둘레 1.8m의 천왕상을 2구씩 4구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사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동방지국천왕은 수미산 동쪽 승신주를 지키며 손에 비파를 들고 있으며, 서방광목천왕은 수미산 서쪽 우화주를 지키며 손에 용과 여의보주를 들고 있습니다.
남방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 담부주를 지키며 손에 칼을 잡고 있으며, 북방다문천왕은 수미산 북쪽 구노주를 지키며 손에 보탑을 들고 있습니다.
《철확(쇠솥), 보물 제1413호》
철확은 보물 제1413호로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철당간》
철당간은 찰주, 찰간이라고도 부르는 기둥으로 불교의식 때 불당을 걸어놓는 용도로 쓰입니다ㆍ
고려 7대 ,목종9년(1006)에 높이 16m로 조성되었으나 조선26대, 고종 3년(1866)에 파괴되었으며 순종 때 높이 22m로 다시 조성된 것입니다ㆍ
《마애여래의상, 보물 제216호》
마애여래의상은 사리각 옆 추래암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ㆍ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습니다ㆍ
전체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능인전 옆의 추래암 암벽에 새겨진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입니다
의상이란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의자대신에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ㆍ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입니다.
《석조, 유형문화재 제70호》
1980년 11월 13일 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에 있는 돌로 만든, 물을 저장하는 용기입니다ㆍ
720년(성덕왕 19)에 조성되어 법주사가 번창하여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살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30㎝, 길이 446㎝, 너비 240㎝, 두께 21㎝의 대형 화강암 석조로 쌀 80가마를 채울 수 있는 부피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닥에서 맨 위에 이르기까지 4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어 단조로운 모습이나 윗면의 가장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습니다.
벽체의 두께도 다르게 하여 긴 쪽은 23㎝, 짧은 쪽은 34㎝로 하여 수리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였으며,
남쪽 벽 바닥에는 지름 11㎝의 구멍이 있어서 실제 용구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서리 일부에 약간의 파손을 제외하고는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존사리탑, 유형문화재 제16호》
높이 3.5m, 1362년(공민왕 11) 공민왕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통도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사리 한 과를 이곳에 옮겨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형식은 팔각원당형으로서 기단부 위에 탑신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으며,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하였습니다.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었는데, 평면방형의 지대석 위에 평면 8각의 기단이 놓여 있습니다.
《능인전, 유형문화재 제232호》
2004년 1월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법주사 세존사리탑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전각입니다. 안에는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함께 연대를 알 수 없는 16나한상과 여래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199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습니다.
법주사 능인전은 국보 제55호인 팔상전, 보물 제915호인 대웅보전, 보물 제916호인 원통보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인 사천왕문 등과 함께 법주사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보존 가치가 높습니다.
'' (자정국존비, 유형문화재 79호 )
1980년 12월 19일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자정국존(1240∼1327)은 국령사·장의사·법주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를 지냈으며, 도승통이 되기도 하였고, 호는 ‘보명’입니다.
비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특이한 형태이며. 비몸 앞면에는 자정국사에 관한 비문을 새겼는데,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습니다.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이 글씨를 썼습니다.
《석연지, 국보 제64호》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입니다.
*높이 1.95m, 둘레 6.65m입니다ㆍ
《금동미륵대불》
법주사의 상징은 바로 금동미륵대불입니다 ㆍ
높이 33m인 동양 최대의 미륵불 입상입니다ㆍ
최초의 불상은 신라 제36대 혜공왕12년(776)에 승려인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한 후 1,000여 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조선시대 1872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로 비게 되었습니다ㆍ
1939년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이 당시 일제강점기 때 독립에 대한 염원을 살려, 사실주의적 기법을 바탕으로 한 그의 불상습작을 원형으로 하여, 1964년에 시멘트로 대불을 세웠습니다ㆍ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 청동 미륵대불로 조성하는 청동불상 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주재료로 쓰인 청동만도 116t이나 소요되었답니다ㆍ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부 용접 부위에 부식이 진행되면서 얼룩진 외관 때문에 불상으로서의 품위 유지가 어려워지자 2000년부터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ㆍ
총 12억원의 자금이 들어간 공사는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미세한 구멍을 메꾸는 과정부터 옻칠, 금분 칠, 금박 입히기 등 8단계를 거쳐 17개월만인 2002년6월7일 끝났습니다ㆍ
순금이 총 80kg 소요되었고 연면적 900제곱m에 이르는 겉부분에는 3미크론(0.003mm) 두께의 금박을 입혔으며 섭씨80°c~30°c에서 견딜 수 있는 건식 전기도금 공법을 통해 광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도금 하였습니다ㆍ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8m의 기단부 안에는 용화전이 있는데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습니다ㆍ
《용화보전》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기단부안에는 용화보전이 있습니다.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습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습니다.
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습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 160t을 들여서 1989년 사월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점안 되었습니다.
《팔상전, 국보 제55호》
국보인 법주사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5층 목조탑입니다.
* 捌은 八과 같은 의미
(깨트릴팔자와 여덟팔자의 뜻은 같습니다)
팔상전은 법주사를 처음 만들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진 것을 선조 38년 (1605)부터~ 인조 4년(1626)에 걸처 벽암 대사가 주관하여 다시 세웠습니다.
팔상전은 두 단의 석조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기단 네 면의 중앙에는 돌계단이 있습니다. 이 기단과 계단은 통일 신라 때의 것입니다.
각 층의 밑면은 정사각형이며, 1층과 2층은 다섯 칸, 3층과 4층은 세 칸, 5층은 두 칸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들어 안정감을 줍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공포는
1층부터 4층까지는 주심포식이고 5층은 다포식입니다.
지붕은 꼭대기를 중심으로 네 개의 지붕면이 뻗어 있는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 꼭대기 부분은 조선 시대의 것으로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팔상전 내부 한가운데에는 5층 전체를 통과하는 기둥이 있고 이 기동의 네 면에는 팔상도가 두 폭씩 있고 그 앞에는 열반상과 삼존 불상이 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목조탑으로 건축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된다.
*팔상도*
1) 도솔래의상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중으로 들어가는 장면
2) 비람강생상
룸비니 정원에서 태어난 가비라국의 왕자 싯다르타의 장면
3) 사문유관상
늙은이, 병자, 망자를 만나고 이어 왼쪽 위에서 출가한 사문을 만나는 장면
4) 유성출가상
싯다르타 태자가 말을 타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수도상
출가한 뒤 싯다르타가 온갖 고행을 하는 장면
6) 수하항마상
성도를 앞둔 싯다르타에게 위협을 느낀 제육천마왕 파순이 그를 유혹하려 하고, 싯다르타는 그 유혹을 이겨내는 장면.
7) 녹원전법상
깨달음을 얻고 정각을 이루어 붓다가 된 석
가모니가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하는 장면 8) 8)쌍림열반상
쿠시나가르 성 사라쌍수 아래에서 여든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드는 장면
《사천왕석등, 보물 제15호》
석등은 전각 앞에서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조성되다가 전기가 보급되면서 실용성보다는 무명을 밝히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대웅보전 전면에 있는 사천왕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에 4개의 창이 있고, 창과 창 사이 네 곳에 불법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해서 '사천왕석등' 이라 합니다.
《쌍사자 석등,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신라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 연대는 성덕왕 19년 (720)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높이가 3.3m로 널따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사자 조각이 올려져 있으며,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랫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석등의 구조는 8각의 지대석에서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상대석을 따로 조각하여 쌓아 올리지 않고 하나의 둘에 조각하였으며 다른 석등들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 것이 특징입니다.
사자 한마리는 입을 열어 "아"라는 범어의 첫글자를 상징하고 또 한마리는 입을 다물어 "훔" 이라는 범어의 끝 글자를 상징하나 두마리가 합쳐져 완성을 뜻하는 "옴" 이 됩니다
입을 다물고 열어 완성을 뜻하므로 두마리 사자는 진리를 완성한다는 의미입니다ㆍ
《석조 희견보살입상, 보물제1417호 》
2004년 보물 제141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현재 원통보전 옆에 마련된 보호각에 서 있는데 원래는 팔상전 앞에 석연지, 사천왕석등과 함께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명칭은 1625년에 편찬이 시작되어 1874년에 완성된 『법주사사적기』에 ‘희견보살석상 일좌' 라는 기록에 의거한 것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남아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보살상이다.
석조희견보살상은 전체 높이 213㎝의 등신대 크기로서
하나의 돌로 제작되었으며, 발형의 향로와 지대석은 따로 만들어졌습니다.
희견보살상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사각 대좌에 올려진 향로를 받쳐 들고 방형 대석 위에 서 있는데 당당한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희견보살은 『묘법연화경』권6 제23 약왕보살본사품에 등장하는데 고행을 즐겨하며 성불의 서원을 가지고 몸과 어깨가 타더라도 향로 공양을 쉬지 않는 보살입니다.
원래 팔상전 좌측에서 용화보전 자리를 바라보며 석연지, 사천왕석등과 함께 차례로 배치되어 불전에 청수, 등, 향을 공양하는 의미를 봅니다. 통일신라시대 법주사의 가람 배치와 신앙의 성격 규명에 중요하며 통일신라시대 다채로운 불교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입니다.
원통보전은 1987년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목조관음보살좌상, 보물 제 1361호》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
1987년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ㆍ
법주사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입니다.
다포식 중층건물로서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내부에 모셔진 삼신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법신인 비로자나불, 좌측에 보신인 노사나불, 우측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릅니다.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1360호》
《진영각》
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서, 일명 선희궁원당이라고도 합니다.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까닭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가 사용하던 원당이었기 때문입니다.
내부 중앙에 개산시조의신과 전법초조 태고화상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 함월 · 명찰· 정준 · 장신· 도홍 · 홍민 · 지영 · 영린· 진하 · 탄응 · 석상 · 금오 · 명일 · 보흔 · 충은 · 법영 등 모두 24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사리각》
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를 적은 세존사리비가 있습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ㆍ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과를 옮겨 오게하여 봉안하였다고 합니다ㆍ
《명부전》
《삼성각》
《종각》
《종무소》
《원주실》
《약사전》
《궁현당, 유형문화재 제234호》
법주사 궁현당은 국보 제55호 팔상전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법주사의 선당으로 중수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인 1632년(인조 10)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852년(철종 3)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쳐 지은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상량문에 적힌 ‘숭정기원사임자년’이라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특히 상량문에는 그 당시 법주사에 기거하던 스님들과 선당을 지은 목수들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상량문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과 보존 상태가 양호한 조선시대의 건물이라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높아 2004년 1월 9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선희궁 원당》
법주사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입니다. 조선 21대 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물은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입니다ㆍ
따라서 법주사에서는 ‘구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한다.
《염화실》
염화실과 응향각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에 부속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석옹, 유형문화재 제204호》
2000년 12월 22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법주사의 주방 근처에 있었는데 현재는 법주사 경내 총지선원(摠持禪院) 왼쪽 40m 정도 떨어진 곳에 묻혀 있는 항아리 형태의 석조물이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속리산 3,000여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선원》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 천년기념물 제103호》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는 15m, 가슴둘레 4.5m, 가지의 길이는 동쪽 10.3m, 서쪽 9.6m, 북쪽 10m이며 총면적은 1158.3㎡에 이릅니다ㆍ
벼슬품계인 정 2품을 받은 나무로 속리산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ㆍ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합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2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이 소나무를 정이품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속리산 정이품송은 원래 우산 모양으로
풍성하고 파릇파릇했지만 1070년대 솔잎혹파리로
인해 타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982년
18m 크기의 초대형 방충망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방충망으로 인해 소나무의 명성이
빛을 잃어간다는 이야기에 1991년
방충망을 벗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4년에는 태풍 브랜던에 의해
북쪽 가지가 30cm 가량 내려 앉았고,
2004년 3월에는 폭설로 남쪽 중간 가지가
가라 앉았다고 합니다.
2007년에는 거센 바람으로 인해 큰 가지 하나를 더 잃게 되었고, 2010년 강풍에 서쪽 가지 1개가 추락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된 손상이 발생되었지만
여전히 소나무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여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을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제20회 팔재계수계대법회 🔶️부산포교사단🔶️불기2568년8월31~9월1일🔶️구체적인 사찰안내가 되어 있습...
https://youtube.com/watch?v=ZCcZ7VlxQDk&si=NUMyUkS2hI4jM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