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질 권리를 달라구요
올더스 헉슬리(2015). 『 멋진 신세계 』안정효 옮김. 소담출판사
이강문
야만인 존이 런던 총본부의 부화-습성 훈련국장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폭소가 빵 터졌다. 올더스 헉슬리 때문에 이렇게 웃게 될 줄이야. 어쩌면 그는 이 한 순간을 위해서 과학 문명이 구축한 신세계에서 ‘가족과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표현이 얼마나 혐오스럽고 부끄러운 단어인지를 그토록 공을 들여 설명해 왔는가 보다. 그의 공력이 제대로 먹혀서 한참을 웃었다. 그는 유머의 공식을 아는 작가이다.
<멋진 신세계>는 기계 문명으로 모든 것이 통제되어 아무런 불협화음도 없는 이상 사회를 그린다.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으며, 아프지 않고, 늙지 않는, 그러면서도 마치 시계 태엽이 돌아가듯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상 사회는 모든 것이 맞춤형으로 계획-설계-작동하는 사회이다. 이렇게 완벽한 사회이지만 혹시 모를 불행의 싹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이들은 ‘소마’라는 약으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여 <멋진 신세계>는 말 그대로 멋지다.
그러나 원시 지역에 살던 존이 완벽한 신세계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완벽한 신세계를 극찬하는 통제관 앞에서 그는 외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야만인 존은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행복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불행해질 권리를 얻기 위해 그는 멋진 신세계를 탈출한다.
어떠한 불행한 느낌도 용납하지 않는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행복은 쾌락주의 행복론이다.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쾌락이라고 주장하는 쾌락주의 행복론에서 행복이란 쾌락의 증가와 고통의 회피를 의미한다. 쾌락주의 행복론은 자본주의와 만나 이 시대에 가장 번성하는 행복론으로 ‘소확행, 긍정심리학, 워라벨, 마음챙김, 힐링, 욜로’ 등으로 둔갑하여 유행을 선도한다. 그러나 행복은 쾌감이 아니다. 불쾌를 피하고 쾌를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때문에 쾌락주의 행복론이 장악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읽는 <멋진 신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고 그래서 불편하다.
일찍이 헬렌 켈러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적에 헌신할 때 찾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행복은 자기 만족이나 개인적인 욕망의 충족에서 체험하는 저급한 만족이 아니라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할 때 경험하는 만족이다. 그러니 “야만인 존이여, 멋진 신세계를 탈출했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당신의 삶 속에서 가치 있는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싸우세요!”
완벽한 사회로 통제하기 위해 인간을 배양하는 단계에서부터 세뇌를 시도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며, 역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했다. ‘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느냐?’는 볼멘 소리를 간혹 듣지만, 자유의지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이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인간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큰 모험인지를 생각해본다. 그래서 나는 이미 멋진 신세계를 선물 받았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