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은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이며,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ㆍ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이제현의 행로를 보면,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반면 충선왕의 대국 경영과 고조선의 고토 회복을 위한 사전 답사는 아니었을까?. 5) 고려사(高麗史) (1) 1454년(단종 2) 간행. (2) 예사(穢史:더러운 역사). (3)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是非)·득실(得失)이 역력(歷歷)히 다 갖추어 기재(記載)되었으므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出刊)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是非)를 알까 두려워 하여 다만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 (4) ‘정인지의 《고려사》 지리지는 잘못된 데를 이루 다 셀 수 없다’ 말하고, 김부식도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을 모두 미상(未詳)으로 말했다고, 다산시문집 제8권 지리책(地理策)에서 싸잡아 비판했다. (5) 1453년 10월 13일 계유정란(癸酉靖亂), 1455년 단종 폐위사건. -관노, 유배, 하사품. (6) 신찬 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와 세종실록 지리지 1424∼1432년에 완성.
9. 분서사건(焚書事件)과 사서수거령(史書收去令) (1) 660년, 668년 고구려사(高句麗史), 백제사(百濟史)는 唐(소정방, 설인귀)에 의해 분소(焚燒). (2) 1011년(고려 현종 2) 거란의 침입, 사관(史館)이 불타, 보존 사료 모두 소실. 1022년(현종 13)∼1034년(덕종 3) 재편찬 완성. (3) 1390년 명나라 사신 진자성(陳自成)이 개성 저잣거리에서 사서를 불태우다. -“이 불이 사나흘 동안 탔다.” (4) 1411년(태종 11) 1월, 음양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사르도록 명하고, 자수하여 관청에 바쳐 불사르게 하였는데, 어기는 자는 고발하게 하고 요망한 글을 지은 자는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다. (5) 1412년(태종 12) 신지비사(神秘集:神誌秘詞)가 괴탄, 불경하다 하여 불태워 지고 이색의 문집 십오 권(第十五卷)도 거둬들였다. -단군 달문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응제시, 용비어천가, 응제시주. (6) 500년 금서(禁書), 범세동(伏崖 范世東)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7) 원천석(元天錫, 1330∼?), 책 6권, 후손들이 소각. (8) 1432년 세종 14년, 유교와 반하는 불서는 불태우다. (9)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사문난적(斯文亂賊) 1) 3대 왕조 사서수거령(史書收去令) ① 세조 3년(1458) 5월 26일(무자):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 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노·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하였다. ② 예종 1년(1469) 9월 18일(무술)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의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③ 성종 원년(1470) 12월 9일(무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 내리기를,“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 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수거령의 비극(1468년 9월∼1476년) 발고한 자는 2품계를 높여주고, 노비에게도 넉넉한 상품을 주며 이를 어기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2) 두문동(杜門洞) 72賢 (1) 英祖 16년(1740), 부조현(不朝峴). 3) 고려성원록(高麗聖源錄) (1) 1798년(정조 22) 발간, 고려시대 왕족을 중심으로 한 왕실족보. (2) 삼척(三陟), 강화(江華), 거제도(巨濟島)-1394년 태조 3년 4월 (3) 손흥종(孫興宗) 등이 왕씨(王氏)를 거제(巨濟) 바다에 던졌다[己丑/孫興宗等投王氏于巨濟之海]. 같은 날 중앙과 지방에 명령하여 왕씨(王氏)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渡, 令中外大索王氏餘孼 盡誅之]. (4) 4월 26일 왕씨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다[乙未/令前朝賜姓王氏者, 皆從本姓. 凡姓王者, 雖非前朝之裔, 亦從母姓]. (5) 추강냉화(秋江冷話)에 고려의 왕씨가 망하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했더니,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그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6) 4월 15일 윤방경(尹邦慶) 등이 왕씨(王氏)를 강화 나루[江華渡]에 빠뜨려 죽였다[甲申/尹邦慶等投王氏于江華渡]. (7) 1426년(세종 8) 5월 19일 예조에서 도화원(圖畫院)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도화원에 간수된 전조 왕씨(前朝王氏)의 역대 군왕과 비주(妃主)의 영자초도(影子草圖)를 불태우기를 청합니다.”하니, 명하여 정릉(貞陵)의 반영(半影)도 아울러 불태우게 하였다. (8) 고려 7대 실록(七代實錄, 현종 13년 9월):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 실록 편찬. (9) 천문도(天文圖)의 비밀. (10) 白丁 보고서-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10.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金富軾)을 위한 변명 삼국사기(권제32, 雜志第一, 祭祀 樂)에는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고구려에서는 기자(箕子)와 가한(可汗)를 섬기고 있다”라고 표기했다. 구당서(舊唐書 권199上, 열전 제149上, 東夷, 高麗)와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 제145, 東夷, 高麗, 百濟, 新羅)를 인용했다. 구당서는 941년(天福 6) 후진(後晉), 신당서는 1060년(嘉祐 5) 宋나라가 만들었다. 이들 나라 또한 아국(我國)의 입장에서 쓴 철저한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수법이다. 조선은 건국의 당위성을 위해 원본 삼국사기를 수정, 삭제하고 箕子 부분 등 사대(事大)에 유리한 부분만을 강조해 기록했다. 삼국사기를 고찰(考察)한다. “모화사관(慕華史觀)으로 기록된 삼국사기, 김부식(金富軾)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다. 철저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이며, 현실에 안주하는 성향의 수구권신자(守舊權臣者)”라 평가되는 김부식에 대해 일말의 단서(但書)로 세설(世說)을 변명하고자 한다. 물론 그의 생애 곳곳에서 묻어나는 흔적, 사대주의자이자 권력지향주의자이며 수구주의자였다는 평가는 잠시 미루어 보자. 우선 삼국사기 기록이 절대 권력자와 수구 세력의 야합에 의해 수정(修訂), 삭제(削除)되었다는 역사적 진실 앞에 서면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현전하는 대표적 역사서이다. 잊혀져 가는 우리 고대사를 반추할 수 있게 하는 역사서이다. 고려가 만든 정사(正史)요, 관찬사서(官撰史書)였다. 그러나 이 관찬사서는 짓이겨지고, 뭉개져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사실적 기록을 보자. “하륜(河崙)·이첨(李詹)·권근(權近) 등이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4권) 앙엽기(盎葉記)에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설명하면서 기록한 부분이다. 수정은 기존의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거나 그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며, 삭제는 깍아서 없애거나 지워버림을 말한다. 황제국 관찬사서를 뜯어 고쳤고, 깍아내고 지워버렸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이라 한 바, 삼국사기의 ‘속되고 번잡한 문구’는 어느 부분이었을까? ‘속된 것’은 부정적 개념으로 정(淨)하지 못해 더러운 것이다. 가증스러운 일, 또는 거짓말이다. ‘번잡한 것’은 뒤숭숭하고 어수선하며, 사람이나 사물이 번거롭게 섞여 복잡함을 나타낸다. 종교적 개념(槪念)까지 담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정하지 못해 더럽고 거짓말 투성이며, 뒤숭숭하고 복잡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김부식을 매개로 하여 의도적으로 재편찬, 위조했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난해하고,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신생 조선의 국시(國是)인 숭유(崇儒)를 정착시키기 위해 종래의 관습, 제도 등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롭게 한다는 개혁(改革)의 뜻이 담겨 있다. 심사(深思)할 만큼 심사했고, 숙고(熟考)할 만큼 숙고했다는 뜻의 변명일 터이다. 가히 기존의 체제(體制)를 변혁(變革)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혁명적(革命的) 권력 교체의 형식을 빌려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권력의 비호 아래 저질러진 분탕(焚蕩)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새겨 볼 일이다. 조선은 결코 고려를 승계(承繼)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 나라의 관찬사서를 수정, 삭제하여 망신주고 때리고 부수었다. 김부식의 일부 유교사관(儒敎史觀)을 볼모삼아 사대(事大)에 편승한 사서로 변조(變造)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서긍(徐兢)이 부러워했던 수많은 고려사서 중, 삼국사기가 분서(焚書)를 면하고 어렵사리 살아남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물갈이는 성공했는가? 기득계층의 수구 보수 세력이 활개를 치고 새판 짜기를 시도한 지 600여 년, 아직도 고대사(古代史)가 늪에서 헤매고 있음을 보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음이다. 이덕무의 기록은 계속된다. “서사가(徐四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삼국사기》는 통감(通 鑑)》·《삼국지(三國志)》·《남사(南史)》·《북사(北史)》·《수서(隋書)》·《당서 (唐書)》의 내용을 거두어 모아서 전(傳)·기(紀)·표(表)·지(志)를 만든 책이니, 믿음직한 것이 못된다. 사실을 적은 대문에 있어서는 매번 다른 책을 인용하였으니, 더욱 사기를 쓰는 체모가 아니다. 또 침벌(侵伐)·회맹(會盟) 등의 일과 같은 것은 한 사건을 신라기·고구려기·백제기에 중첩으로 적되 문체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으니 취할 것이 못된다.’하였다.”하여 삼국사기는 당연히 수정, 삭제될 수밖에 없었음을 당연시 했다. 위 서사가(徐四佳)는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며, 필원잡기는 그의 저술집이다. 1444년(세종 26)경에 저술한 것으로 추측되며 초간본은 1487년(성종 18)에 간행되었다. 권근 등이 주동이 되어 삼국사기를 손질한 해가 1403년(태종 3)이니, 40년 후 기록이다. 대 문장가라 칭송되던 서거정, 참으로 방대한 사서 열독이 경이롭다. 평론 또한 거침이 없다. 뉘라서 감히 항명(抗命)을 했을까? 상실(喪失)과 단절(斷絶)의 시대, 강자의 논리 앞에 서있던 민초들은 한없이 작아지지 않았을까?. 그는 왜 이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을까. 그의 외조부가 권근이다. 외조부의 명리(名利)를 위해 역사적 사실로 남겨 놓았을 개연성(蓋然性)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과 고려 좌정승 한종유(韓宗愈)와도 연계된다. 김부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다고 한다. 요점을 정리해 보자. 첫째,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둘째,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 셋째, 고구려는 장수왕대로 부터 기록, 호태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으며, 넷째, 지역을 모호하게 하고, 바꿔 기록했다. 다섯째, 철저한 사대적, 유교적 사상의 기록이다. 사기(史記)가 위작(僞作)되지 않았다면, 위의 질책과 비난은 당연할 터이다. 단군조선이 엉망이 되고, 대륙과 한반도 지명이 혼선을 빚도록 만들었다. 신라 중심 사관이 되었다. 유교적 사관으로 무장되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전면 개편되어 날조된 이 역사서를 어디까지 수긍해야 할까? 김부식이 편찬했으되, 이름만 빌려 왔을 뿐 그의 작품이 아니게 되었다. 후대를 위한 기록이 수정, 삭제되어 황폐화되었다. 역사에 대한 수구세력의 비상식적이고 무자비한 폭거(暴擧)요, 폭력이다. 진정한 역사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도 없이 사라졌다. 수구세력이 휘두른 칼날에 베인 역사의 상처는 600백 여 년 동안 사대(事大)에 묻혀 지나는 줄 몰랐다. 이제 심장에서 핏물이 배 나오고 나서야 겨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있음이다. 1174년 고려는 한 질의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은 그가 지은 옥해(玉海)에 합본했다하나 현존하지 않는다는 답변이다. 이 때의 책명이 해동삼국사기(海東三國史記)이다. 2차 판각은 성암본(誠庵本)으로 열전의 일부가 남아 있고, 일본 궁내청(宮 內廳)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으며,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으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시기적으로 보아 송나라에 보낸 판본 외에 믿을 수 있는 삼국사기는 없지 아니한가. 1차 본(本)으로 보이는 삼국사기의 책명은 해동(海東)이 있되 분명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삼국사(三國史)’라는 책명은 수정, 삭제되어 변조된 지 1백 년의 시차가 나는 4차 본 이후의 책명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일제가 삼국사를 ‘삼국사기’라 폄하했다는 논리는 지엽적(枝葉的)이지 않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들 사서가 진서(眞書)인양 이를 인용, ‘삼국사(三國史)’라 우기는 우(愚)는 삼가야 할 일이라 본다. “十二月壬戌金富軾進所撰三國史”라는 기록은 고려사 인종 23년 조에 나온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삼국사(三國史)’라 했다. 고려의 기록이라 항변하나 두 사서는 유교사관으로 왜곡되어 은폐된 조선의 작품이라 믿기 어렵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이 지은 고금금경록(古今金鏡錄),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을 모본(母本)으로 이를 인용, 고려사 편찬 후 없앴다. 다섯 차례의 수정과정을 거쳐 78년 만에 나온 사서이다. 그 편찬과정에서도 시시비비가 끊임없이 나왔다. 고려사에 단군 기록이 단 한 건 밖에 없다는 사실은 왜 간과하고 있는가? 식민사관만을 비판하고 그것에 분노하고 울분만 할뿐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식민사관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세(外勢)만을 탓하기 전, 고대사를 폐기시킨 선대(先代)에 대한 성찰(省察)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내 선대의 행위이니,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노벨문학 수상자 가오싱젠이 “한국이 역동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서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충고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현전하지 않는 삼국사기로 찬, 반의 시시비비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새 왕조의 입맛, 그 맛에 맞춰 사대주의 사서로 날조한 배반과 야합(野合)의 역사 기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심정을 가누기가 힘든다.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아 1차 사료를 찾아 중앙아시아, 유럽 일대까지 추적 중이다. 가시거리에 근접해 가고 있다. 햇살을 기대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김부식 가계는 손자 김군수(金君綏) 대(代)에서 끊겼다. 이 또한 누구의 소행일까? 이 억울함을 전할 구전(口傳)마저 차단한 것은 아닐까? 김부식, 그만 그를 놓아주면 어떨까?
三. 마무리 글
기자(箕子) 기록 조선왕조에서 500년 동안 이어져 추종 세력집단에 의해서 황제(黃帝)는 조선의 계보(系譜)를 형성하는데 절대 가치가 되었다. 황제의 16세 후손 자리에 앉은 ‘箕子’는 한반도로 원행(遠行), 원조(元祖)가 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의 끊임없는 추앙과 찬양을 받았고, 대 사상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정치와 통치이념’으로 작용했다. 조선왕조 3대에 걸친 사서수거령(史書收去令), 고대사서 분서사건(焚書事件)은 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백정(白丁)으로 추락한 조의선인(皁衣仙人)들, 그 후예들은 오백 년 한(恨)을 쌓았다. 우리 민족의 올바른 방향을 위하여, 자아성찰을 통해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의 청산’이 미루어지는 한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식민사학은 요원하다. 사견이나 사도를 깨고 정도를 나타내야[破邪顯正]만, 정의(正義)와 기개(氣槪)가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이로써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가 이루어 질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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