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필요하다고 하는 분들은 당연히 기독교인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가운데 일부 말로는 예수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전혀 필요 없는 분들도 있다는 것이다. 입으로는 개 거품을 품으면서 예수를 얘기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예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5장 27절부터 보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 레위인이 등장한다. 히브리어로는 (레위 ywile (lewi), !yYiwil] (lewiyyim),) 영어로는 (리바이트 Levite), 헬라어로는 (레위테스 Leui>vth")라고 한다. 당시 가장 천대 받던 존재로서 창녀와 함께 죄인으로 구분되어졌다. 예수와 함께 연합된 존재를 의미한다.
세상에서 멸시 천대받고 소망과 희망이 전혀 없는 존재들을 의미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세상에서 기회를 얻을 수 없고 살아날 틈이 없는 존재들을 예수께서 부르셨던 것이다. 세상에서 쓸모가 없고 인간쓰레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예수님께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고쳐나갈 수 있으며 개혁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살아날 틈이 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창녀와 다를 바 없는 죄인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더군다나 레위인이 예수님을 자기의 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푼 것에 대해 더더욱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인가? 질문을 해보면 예수를 믿고 복 받아 착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분들에게 과연 예수가 필요한 것인가? 죄송하지만 이런 분들에게 예수가 필요 없는 분들이다. 예수를 잘 믿다가 사업이 망한 분이 자신의 사업을 망치게 한 분들에게 욕을 퍼부어 댄다.
망했다고 하면서 망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원망할 수 있는 의욕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느 존재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벼랑 끝에 섰지만 내 주변 사람을 원망할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고개마저도 들 수 없을 정도 부끄럽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는 긍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밑바닥까지 처참하게 내려간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을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참하게 무너지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요단강처럼 내려가고 내려가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회개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 그 어떤 방법으로도 고칠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내가 버릴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죄송하게도 입으로는 예수를 따라간다고 하지만 절대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잘 믿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고쳐나갈 수 있으며 개혁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이 바리새인이며 서기관인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없고 고칠 수가 없으며 개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 내 자신마저도 바꿔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린 레위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이러한 상태로 되어 있는 장면들이 복음서에 가끔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 다시 찾게 된 것을 너무나 기뻐서 동네 사람을 모아 잔치를 벌인 것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겨 예수님의 제자들을 불러 핀잔을 주고 있는 장면이 있다. 그들의 판단으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 부류의 존재들과 천국잔치를 벌이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식의 발언은 우리들도 하고 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현재 이 땅에 오셔서 거리 여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다면 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있겠는가? 요즘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나 세무공무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또한 동성애를 하는 부류마저도 세상 법에 적용되어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된 상태이므로 함부로 취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판단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건강한 사람에 속하고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건강치 못한 부류로 나뉘어져 있다.“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어느 누가 건강한지 건강하지 않는지가 구분할 필요가 없다. 이 글을 읽는 우리들 속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심성을 갖고 있다.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건강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미안하게도 병든 자이다. 내가 이 세상을 주도할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고 하는 병든 사고방식은 이미 병든 상태를 의미한다. 형제들을 판단하고 핍박하는 것이 건강한 줄로 착각하는 것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한 수 배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불러다가 한 수 가르쳐준답시고 예수님에게 꾸중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한 수를 가르치려고 교회에 등록하는 분들도 있으며 이단들도 득세하는 무리들도 있다. 세상과 교회를 향해서 한수를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한 것이 아니며 의롭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이끌고 갈 수 있다고 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병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병들지 않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고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 존재들인가?
그러나 누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인생을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대반전으로 바꿀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자신의 정체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도함을 받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져야 한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게 되면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 나가고 좋은 일만 생기는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체를 만나게 되면 예수님과 함께 낮은 자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어울려야 하며 돌에 맞을 각오도 해야 되고 배신도 당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하신 모든 과정을 접하게 되며 최후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나면 함부로 기도하지 않게 되며 찬송도 자기가 좋아하는 찬양만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해 갔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경배했던 것처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게 된다면 위에서 언급한 레위인처럼 자신의 집에 예수님과 이웃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배설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분들이 많은데 욥을 닮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추세라고 본다. 그러나 이 글을 접하는 독자들은 욥처럼 나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뺏겨보는 경험을 당해봐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따라가 봐야만이 레위인처럼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