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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여행 단상 1.
우선, 이번 여행을 기흭하고 과정을 잘 꾸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고,
같이 즐거운 시간을 나눈 분들께도 다시 이 글로 뵙게되어 또한번 반갑습니다.
이번 여행을 다녀온 뒤에야 지난번 여행들을 살펴봤는데, 가기 전에 살펴보고 준비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런 기회가 있는것 자체가 유익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기억속에, ,다녀온후 911 이 났으니 ,2001년 여름이다.
한겨례신문사에서 주관한 여행으로,8월10일쯤 출발 (그때는 인천공항이었는지 김포였는지 기억나지 않음)해서 블라디보스톡 1박후 이르쿠츠크로 비행한후 거기서 1박,바이칼호를 구경하고 기차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로 80시간 ,,모스크바에서 1박후 상뜨페테르부르그로 비행후 1박,다시 모스크바로 와서 귀국하는 일정이었는데,블라디보스톡이 이번 여행과 겹치는 일정이다.
당시 대한항공편이었는데,탑승마감직전에 마지막으로 헐레벌떡 미모의 금발 러시아 처녀 두명이 입장,,남자들 모두 눈길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이 집중 되었는데,우리일행과 가까운곳에 두 자라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은 기내식을 마치고 스텐으로된 포크,나이프,숟가락을모두 가방속에 넣었다.물자가 부족한때라 뭐든지 소중할 것이었으리라. 어설프게 일행 한명이 말을 걸었는데 대화중에 기억나는건 한국은 러시아보다 풍부하고 편리하긴 한데 다시 가고 싶지는 않단다. 여신의 몸매를 지닌 그 두 처녀가 공항에서 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두 아쉬워하는듯 했던 기억도,,,
당시 블라디보스톡 공항은 매우 낡고 시골 터미널 수준이었고,더 심한건 패스포트 체크와 짐 통관 절차였다. 도합 3시간 정도 걸린걸로 기억난다. 아마도 말 구르마에 비행기에서 내린 짐을 날라 벨트에 사람이 일일이 올려 놓아 짐을 찾도록 한걸로,,,지금은 상상도 할수없을 정도,,,,
언덕위에 전망좋은 현대호텔에 묵었는데,호텔과 바깥세상은 매우 다른 느낌이 들었으며,지금처럼 백화점이나 가게가 드물었고 있다해도 물건들이 별로 없어 이번 여행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꼈던 기억이다. 도시의 인상이 잿빛만 있어 우울하고, 언덕위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해변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지금은,때깔 좋아보이는 새 건물들이 제법 들어서고,화려하지는 않지만 건물이나 지붕도 색이 잘 칠해져 있는 모습이 흔하다.
혁명광장은 거지가 많이 보였었고,어두워 지면서는,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거지가 한둘이 아니어서 위협을 느껴 자리를 옮겼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활기가 넘치는 광장이다. 시장도 서고,축제도 열리는 장소로 말이다.
비교적 변화가 없이 느낀 장소는 시베리아철도의 시작이자 종착역, 잠수함과 꺼지지 않는 횃불이 있는 2차대전 전승 광장이다.
이 전승광장은 러시아의 도시마다 있다. 여기 블라디보스톡은 규모가 매우 적은데,모스크바는 수십배나 크다. 수십만의 전몰자 이름을 다 새겨놓았으니 그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일행들과 생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제법 잘 꾸며진 카페는 호텔과 광장 사이 언덕 어디에 있었는데, 흔적도 찾을수 없이 많이 변했다.
당시,나와 같은방을 썻던분은 전주에서 역사교사로 재직중이었고, 동년배로 짧은 기간을 같이 했지만 제법 깊고 많은 역사 소담과 의식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이후 소식은 서로 없었다.)
당시에도,시내에 굴러다니는 버스나 트럭은 대부분 한글이 그냥 남아있어 쉽게 알아볼수 있었는데,지금도 마찬가지,,,달라진건 ,부의 상징으로 승용차가 엄청나게 늘어나 교통체증도 생겼다.
이처럼 러시아와 블라디보스톡의 기억은 대체로 좋지않았는데,이번여행에서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상점에는 풍부한 먹거리와 생활용품들 ,거리는 활기차고 축제를 즐기는 시민들, 중국에서온 유 커들,,,,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고려인 마을을 좀더 시간을 두고 방문했으면 한다.
그리고,우수리스크 고려인 마을에서 tough한 삶을 꾸려가는 고려인분들과, 이들과 함께하는 김현동씨 가족에게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할수 있는 일들이 좀더 있을거라고 믿는데,지금 하고계신 일들도 아주 잘하고 있다고 느끼면서,지금과는 다른 방식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고려인 마을을 떠나면서 어딘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던 느껴졌었다.
이상,,연해주편을 마무리하고, 만주,연변 조선족자치주와 백두산편은 다음 메일로 정리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서툰 아마추어 글 솜씨는 양해해 주시고,,,,
신대영
연배여행 단상 2
작년에 회갑을 기념하여 고교동기들이 기흭하여,부부동반 포함 도합 45명이 백두기행에 나섰다.6월26~30으로 이번보다 한달가량 늦은 시기다.
동기중 교원대 지리학과 교수인 친구가 지리와 지질학 연구차 만주와 백두산 부근을 자주 다녔는데 같이 연구에 참여했던 연변대 교수들의 안내와 협조도 있었던걸로 기억된다.
루트는, 이번 기행과 좀 다르게 인천~沈陽~通化~압록강변도로로二道白河~백두산~圗門~용정~연길~창춘~인천으로 이동한 거리가 2천 킬로가 넘는거리를 4박5일간 2대의 버스로 빡시게 다녔다.
작년에는 서파로 백두산을 올랐으나, 천지는 비와 안개로 보지 못하고 내려와서 못내 아쉬웠다.이번에는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 일행에게 좋은 날씨를 베푼덕에 천지구경을 만끽하여 연백여행의 하이라이트를 감동과 흥분으로 장식하게 되었다.백두산 천지에서 일행 모두 이 감격을 사진에 충분히 담아 왔으리라. , 더 이상 이야기 조차 필요없이 사진으로 지금도 만끽하고 있다.
이번 루트와 겹치는 곳이 두만,용정,연길, 그리고 이도백하인데 장소가 같은 두만 뱃놀이장소와 용정 대성학교를 빼고는 같은 지역의 다른 장소여서 같은데를 갔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작년에는 이동거리가 좀 길어 대부분 새벽 일찍 출발하고, 저녁은늘게 먹고 바로 취침하였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여러명이 번갈아 잡고, 역사, 과학, 생활상식, 잡담,,, 등으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냈다.
나도 색과 빛에 대해 직업적이며 상식적 수준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당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본 이야기를 주로 한걸로 기억된다.
작년, 심양공항에 내린후 몇시간 가량 차로 이동하여 밤 늦게 통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 5시에 출발하여 압록강변을 따라 우측으로 강건너 북녘을 원없이? 보면서, 혜산진과 같이 꽤 큰 도시도 압록강 너머로 구경하였다. 북녘의 민둥산과 얼마남지않은 나무를 베어내 뗏목을 띄우는 북의 안타까운 현실에는 가슴이 아팠다.평안북도의 촌마을과 도시들은 하나같이 회색빛으로 이쪽 중국과 비교해서 어려운 삶이 목격되어 우울한 마음을 더했다. 이번 여행에서 두만강 건너의 모습은 그리 적나라 하진 않았는데,압록강 중,상류 쪽은 두만강 쪽 보다 인구도 많아 보였고 북의 현실이 더 생생해 보였던걸로 대비된다.
이도백하를 거의 다 가서 시골 식당에서의 맛있는 점심,,,그리나 거기 화장실은 좀 끔찍한 경험이었다. 칸막이 없는 공동화장실...특히 여성분들에게는 뭐 이보다 더 곤란한 문제가 있을까? 더 노골적인 표현을 안하더라도 짐작하실줄,,,,
백두산 천지를 비와 안개 때문에 못보고 내려와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용정 대성학교로 갔는데,다들 구경을 마치고 선물 사는데를 지나 옛 교실처럼 꾸며진데로 몇명이 들렀다.
20명쯤 공부했던 작은 교실에는 흑판,책걸상,난로와 옛적 알미늄 도시락,그리고 풍금이 있었다.갑자기 우리집 사람이 풍금에 앉아 선구자를 연주하자 거기있던 10명가량이 모두 목청을 높여 합창을 하였다. 노래를 끝내고 나오니 버스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노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버스가 출발하자 모두 선구자를 2절까지 두번이나 소리높여 열창하였는데,이날은 단연 선구자 열창이 백두산을 재치고 하일라이트 가 되었다.
이도백하는 송화강으로 흘러간다고 들었는데,이도는 백두산에서 나오는 두개의 물줄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안내자 안 주임이 설명한바 있는데,그 설명이 맞다..물론 백하는 여진어에서 온듯,,,나중에 한자화 하여 白河로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도백하 부근에 청산리 대첩지가 멀지않다.일본군 1개사단을 섬멸, 퇴패시킨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당시, 백두산 일대는 우리민족이 건너가서 군데군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현재의 이도백하 동쪽으로 수 km 를 더 가면 백두산 산록으로 해란강 발원지가 나오는데,화룡현 청산리 일대가 전투를 벌인 곳이다.거기서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항일 독립군 (북로군 정서)이 6일간의 혈투로 일본군 동지대수백명을 사살하였다.
봉오리 대첩지는 우리가 뱃놀이 하던 두만(투먼) 부근인데,전적비가 인근 일광산 삼림공원에 있다고 한다.(작년애일광산 공원에 올라 두만강 너머로 북녁의남양시를 바라봤는데 거기에 전적비가 있는줄 모르고 지나친것 같다.나중에 거기 전적비가 있다고 들었다.)
청산리대첩 바로 전,1920년6월에 이곳에서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의 항일 독립군이 150여 일본군을 사살한 전적지다. 이를 신호로 항일투쟁의 서막이 시작되어 크고작은 대첩이 이어지고 백두산 일대는 항일 독립유격대의 근거지로 지금도 수십군데의 항일 전적유적지가 곳곳에 남아있다. 아마도 부근에 50 군데 이상이 작은 비석이나 기념하는 글과 함께 남아있다. 이후 일본 관동군은 양 대첩의 보복으로 이 일대를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사단병력과 막강한 화력으로 마을을 포위,섬멸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포위공격은 주로 밤에 이루어 졌는데,수십명 단위의 마을을 물샐틈 없이 포위해서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어린아이에서 노인,남녀노소 구분없이 몰살시킴.)마을을 불태우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토벌은 상당기간 지속되었고,그 범위가 심지어 흑룡강을 넘어 연해주까지 독립군을 추격해서 마을을 불태우고 한 기록도 있으며,함경도,평안도 일대도 일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로인해, 항일 유격대의 활동도 다소 위축 되기도 하였으나, 1930년대에도 꾸준히 일본군의 토벌에 대항한 크고작은 항일 유격전은 계속 되었고, 후에 이 일대는 다시 소비에트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가 된다고 한다.
지난해 여행에서는 옛 만주국의 수도이자 현 길림 성도인 창춘(長春)을 마지막날 둘러보고 거기서 인천으로 왔는데,일본의 위성국이었던 만주국의 수도를 만주벌판에 계흭도시로 당시에 새로 건설한 도시여서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으며 900만을 넘는 매우 큰 도시의 위용과 당시 일본인들이 지은 관공서 건물들이 아직도 공공 목적의 병원,,,등으로 잘 보존이 되어 있다.
만주국의 마지막 황제 영화에서 푸이가 성명(성과 이름)을 묻는 재판관의 물음에 성을 "愛新覺羅"로 답하는데,이愛新覺羅(aisingioro) 에 대한 이야기는 野史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미 여행중에 간략히 몇사람과 이야기 한걸로 기억 되는데,기회가 되면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실 백두산은 우리민족뿐 아니라 만주족의 성지이기도 하다. 청태조 누르하치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곳 이란다.
누르하치는 나중에 정식 성(姓)을 "愛新覺羅"로, ,"애신각라"의 애신은 金으로 신라 왕족의 후손,그리고 금나라의 金을 가리킨다. (청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에 후금이란 국호를 먼저 사용했다. 역사적으로 요-금-원-명-후금(청)으로 이어진다).각라는 "gioro"로 발음되는 여진어의 한자인데,겨레(민족,씨)를 의미한다. 즉 김씨라는 뜻,,,
청 왕조는 한반도와의 관련을 중시하여 관련 기록물도 남아있다. 12세기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멸한 아골타는 신라왕족 김씨의 후손으로 중국 정사에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고려혹은 신라에서 온 김함보의 7대손이 아골타라고 여진기록에 나온다.)
신라가 멸망하자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왕족 일부 무리가 두만강을 넘어 여진족과 합류 하였다고 여진쪽의 기록에 소상히 나와있다.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이고, 몇백년 후에 후금=청 을 세운 누르하치가 이들의 후손이다.
만주족과 그 언어는 이미 오래전에 중국 한족과 동화되어 만주어 자체가 남아있지 않고 그 흔적만 있다. 연길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은옌지허(煙集河)인데 이것은 여진어<두르가투(durgatu)>에서 나온 말로 그 뜻을 한자화 한것이다. 연길(延吉)도 한자화 되면서 본래 연집(煙集)이 변하여 된 걸로 두 한자의 발음이 "옌지"로 동일 하다고 한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란 뜻으로 멀리서 봐도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땅이었다는 여진족의 유래다.
만주 땅에는 여진어,즉 만주어로된 지명이 많은데,이미 한자화 되었지만 어원을 한번만 캐고 들어가면 바로 만주,여진어 라는걸알수 있다.훈춘(壎春)은 눈썰매,吉林은 강가,哈爾賓(하얼빈)은 어망을 말리는 곳 이라는 여진어라고 하며,牧丹江은 꾸불꾸불한 강,송화강은여진어 SunggriUla흰강=白河)에서 유래 하였다고 한다.해란강은 느릅나무 강인데,중국지도에는 느릅나무를 의미하는 楡樹河로 표기된다.두만강도 "Tumen Sean"= "萬개의 水源"이란 여진어에서 비롯된듯,,.흑룡강 또한 "SahalinyanUla"=검은강에서 유래한다. 하도 맑은 강이어서 위에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란다. 러시아에서는 아무르강 이라고 부른는데,이 일대를 탐험하여 영토화한 탐험가/장군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백두산은 여진말로 "GolminSunggarianAlin"인데 의미는"길고 하얀산" 즉 한자로는長白山으로 된다.
지금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섬도 여진어에서 유래한것을 알수있다. 이 이름도"흑룡강 어귀 봉우리"라는 뜻의 여진어에서 유래한 것 이란다.(Sahalin이 여진어 이다.)
여진어의 영향은 한반도 쪽에도 좀 남아 있는데,옛적엔 여진족이 살았던 지역이다.지금은 아마도 우리민족으로 들어와 있으리라 생각된다. " 아오지"는 여진어 "불타는 산"이란 뜻이고 실제로 옛부터 탄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며느리나 사위 집안을 일컫는 사돈이란 말도 사둔(Saddun)이란 만주어에서 유래 했다고 하고,북쪽 음식인 순대 또한 SunggiDuha 란 말에서,여진인들의 주요음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여진어=만주어는 오래전부터 漢族化하여 할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유물 수준이어서 민족의 정체성도 거의 사라져 가고있다.
연변의 조선족이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언어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며 한글의 자긍심을 드높혀 준다. (상기 여진어/만주어에 대한것은 중국에서 거의 10년 국내 신문사의 북경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메모해 두었다가 소개한다.)
중국에서 최근 "동북공정"으로 고구려,발해까지중국사에 편입시켜 만주의 중국화를 정당화 하고 있다고 하는데,사실 금나라,청나라도 고구려,발해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 될수 있다고 믿는다. 이유는 한반도에서 역으로 만주에 진출한 우리민족의 일부가 기존 만주에 살던 민족들과 형성한 세력이, 커져서 만주에 큰 나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좀 다른데로 나갔는데,
윤동주 생가와 명동학교 방문은 작년에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잘 꾸며놓은 가옥과 학교가 소중하게 느껴졌고 귀중한 역사의 한 장소로 기억되길 기원한다.
독립군 전적지를 한군데도 못가 봤는데,버스를 타고 가면서 멀리 큰 기념비와 기념하는 장소같아 보이는 곳을 더러 본것 같다.아마도 그런곳이 아닌가 짐작된다. 다음번에는 유명한 전적지 한군데 정도는 가서,지난날 대한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본군과 싸우던 항일 유격전사들을 위한 묵념을 바쳤으면 한다.
이번 여행은 좋은 멤버들이 다들 배려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는 팀웍으로, 강제로 학연,지연으로 묶여진 일행이나,무작위로 여행사를 통해 묶여진 그룹과는 달라, 토론도 하고,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했던 순간들이 소중이 느껴진다.
소통도 잘 되고,부담없이 매우 즐겁게 함께나눈 시간 이었다.
무릅통증이 재발될까 걱정도 많이 했던 둘쨋날, 동료들의 도움과 배려가 있어 쉽게 극복되지 않았나 생각되고,무사히 일정을 문제없이 소화한걸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백두산의 정기를 되새기면서,,,,
萬木 신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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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백두산 짧은 여행기
연백탐방 이라는 이름으로 21명의 사람들이 모여 비행기에 몸을 담고 불라디보스톡 아르촘공항에 도착한 첫 느낌은 사람들의 여유로움이었다. 함께 온 여생님들의 얼굴에는 이곳의 봄 햇살 만큼 밝았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항구가 보이는 독수리요새. 공원 주변으로 금감만 다리와 공원에 있는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 형제의 동상을 둘러 본 뒤, 이곳의 거센 바람과 함께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저녁은 한식으로 금강산식당이다. 식사 후 한복을 차려 입은 어여쁜 조선 아가씨들의 공연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노을이 지는 불라디보스톡 해변을 찾았다. 주변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유럽의 건축 양식과 비슷했다. 거센 바람에 출렁이는 파도를 맞으면서 아이처럼 웃는 여생님들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다 숙소로 들어와 잠자는 것이 아쉬워 주님(?)을 모시는 예배라는 모임을 가졌다. 담소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 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요?
둘째 날이 밝았다. 맨 먼저 찾은 곳은 지금은 기념비하나로 남아 있는 신한촌. 불라디보스톡에 처음 정착하여 마을과 학교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곳. 하지만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 등으로 빼앗겼던 땅, 그 곳에 남과 북 그리고 고려인을 상징하는 세계의 돌 기둥을 세웠다.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우리들은 묵념을 올리며 숙연 해졌다. 주변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조상님들이 살았던 흔적으로 기념비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 한다. 이어서 러시아 혁명광장을 찾았다. 혁명광장을 지나 2차 세계대전에서 용맹을 자랑하던 C-56 잠수함을 구경한 후 9288km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시발점인 불라디보스톡 역을 찾았다. 마침 혁명광장에서 슬래브 소수민족의 축제가 열린다고 하여 간단하게 러시아식 점심을 먹고 다채로운 복장과 흥겨운 리듬에 맞춰 춤과 노래를 선사하는 슬래브 민속축제를 함께 즐겨보았다. 오후에는 APEC 총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불라디보스톡연방대학을 방문했다. 여행안내를 맡았던 김윤경님의 따님이 다니는 대학으로 바다를 호수처럼 감싸고 현대식 건물들이 잘 들어서 있었다. 이어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여 호텔에 묵었다.
다음날 발해의 성터가 있던 드넓은 평원에서 고구려 발해인들의 기상을 눈을 감고 바람과 함께 느껴 봅니다. 이상설선생유허비와 고려인 이주 140주년기념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고택을 둘러본 후 우수리스크 외각에 있는 우정마을에서 맛있는 샤슬리를 대 접 받았다. 식사 후 고려인들이 유기농으로 재배한 콩으로 메주를 만드는 공장을 둘러보았고, 그 와중에 이곳의 아이들과 공을 차며 놀아주는 여생님들의 순수함을 볼 수 있었다. 이어 방문한 고향마을에서 한글을 배우는 솔빈학교 아이들에게 전달할 리코더 등 선물 증정식을 가졌다. 이곳은 방과 후 한글을 배우기도하고 공부도 하는 곳이란다. 이곳에서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의 고마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넷째 날 아침 일찍 우수리스크 버스터미널에서 러시아-중국 국경을 넘는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일행이 유일한 손님이다. 서너 시간을 달려 육로로 러-중 국경에 도착했고, 1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 출국과 중국 입국 심사를 받았다. 어서 훈춘 숙소를 가기 이전에 한눈에 조, 중, 러 3국의 영토를 볼 수 있는 방천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북쪽을 보니 알 수 없는 무언가 가슴이 짠해 왔다.
5일째 우리 일행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도문을 찾았다. 북한이 맨 눈으로도 잘 보이는 두만강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가슴이 멍해오면서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산가족도 없는데 말이지 아마도 한 민족 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여행지기님들은 유람선을 타면서 조금 더 북한 땅에 다가가 보려고 하면서 여유를 즐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두만강변의 막걸리를 마시면서 풍류를 누려본다. 이어서 명동마을 시인 윤동주선생님의 생가와 윤시인과 문익환 목사가 다닌 용정의 대성중학교를 들러보았다. 보존이 잘되어있다. 대성중하교에서 해설해주시는 분의 북한식 말씨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이제는 백두산 가는 길. 백두산 관광의 거점도시로 크게 팽창하고 있는 이도백하에서 하룻밤을 머물기로 하였는데, 이도백하는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뜻이란다. 이곳은 한참 개발 중이었는데, 몇 년 후면 도시 전체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6일째 백두산에 가는 날,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차로 이동하면서 보는 풍경들은 말로는 설명 안 된다. 천지를 오르는 길은 강원도 태백을 넘어가는 꼬불꼬불한 길과 비슷했다. 백두산 천지는 아직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좋았다. 천지 아래에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곳에서 여생님들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면서 도보로 장백 폭포가 있는 곳까지 걸었다. 탐방로가 깔끔하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맑고 깨끗한 날씨에 쉽게 볼 수 없다는 천지를 보는 감동의 여운을 안고 연변시내로 들어와 저녁 식사 후 발의 피로를 풀고 연변의 밤거리를 둘러보았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눈이 빨리 떠졌다. 새벽시장이 열린다는 강 쪽으로 걸어 가보았다. 부지런 한 사람들 속에서 내가 살아 있음이 감사했다. 부지런히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아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서로를 배려하며 웃음을 준 여생님들과 함께한 나의 첫 해외여행. 생활 속에서 힘들 때마다 힘이 될 것이다. 연해주, 연변 자치주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과 함께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살아가는 작은 담소도 들어보고 싶고,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문화적 교류를 해보고 싶다. 두서없는 글이 어렵게 끝을 맺는다.
- 곽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