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4:1~11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신 사건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선포후에 일어 난 일이다.
본문 4:1의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광야에 가사' 는 같은 사건을 다룬 막1:12에서는 "성령이 곧 예수를 몰아내신지라"로, 눅4:1,2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로 나와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세례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광야로 가시고 시험을 받으신 것인데, 이는 출애굽시 이스라엘인이 홍해를 지나 40년간의 광야에서 시험을 당한 것을 그대로 본인도 겪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성도들도 구약의 이스라엘인 과 예수님처럼, 세례이후엔 여지없이 이 광야의 시간을 보내며 마귀의 시험을 거치게끔 되어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40일을 금식을 하신 것일까. 물론 구약의 예수님의 예표였던 모세(출34:28)나 엘리야(왕29:8)를 따라 40일을 하신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숫자는 큰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중, 7과 12는 하나님의 완전수이며 4와 10은 인간, 세상의 완전수이다.
4는 동서남북을 뜻하는 땅의 숫자이며 10은 십진법에 의해 완전수이다. 그래서 4를 열번 곱한 40은 인간의 만수이다. 성경엔 40이란 숫자가 여러번 나오는데, 창7:12의 노아의 홍수때 40일간 비가 왔고, 출애굽시 이스라엘인이 40년 광야생활과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의 40일 금식이다.
이처럼 40이란 숫자는 준비의 완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완전한 고난과 인내를 뜻한다.
그러므로 40일 금식을 한다는 인간의 한계치로 할수 있는 최대한의 금식기간이라 할수 있다.
주변엔 그런 예수님을 좆아 40일을 금식기도 하신 목사님들이 꽤 계시는데, 그분들의 간증에 의하면 마지막 40일이 되는 날엔 죽음의 문턱까지 간후, 예수님이 주신 힘으로 다시 살아난 체험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믿지 않는자들이 명상등을 이유로 40일이 넘는 기간을 금식하기도 하는데 그럴경우 죽거나 혹은 미치는 등, 잘못 되는 일이 생긴다.
또한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의 금식과 세가지 시험은 우리 크리스챤이 살아가면서 받을 수있는, 모든 고난과 시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었으나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신성 또한 갖고 계셔서 마귀의 시험 따위를 받으실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 하신것 처럼 우리 크리스챤이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길수 있는지에 대한 표본이 보이신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의 초림 이전이나 이후에도 쉬지않고 우릴 끊임없이 유혹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유혹과 시험은 그리스도가 겪으신 시험 안에 모두 들어 있는 포괄적인 것들이다.
먼저 시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세가지 시험을 당하셨는데, 첫번째가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라인데 이것은 우리의 먹는 문제 즉, 육의 시험이다.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많이 넘어진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원초적인 먹고사는 생계문제로 인해 마귀에게 굴복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
이 먹고사는 문제를 주관하는 것은 물질, 즉 돈이다.
믿는자에게나 믿지 않는자에게나 이 돈의 힘은 막대하다. 그래서 크리스챤을 유혹하고 시험하는 마귀의 제일 큰 수단은 이 물질이다.
그래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고 사형시키겠다 해도 배도 하지 않던 사람도 엄청난 벌금을 부과하면 배도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게 돈은 우리에게 신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갖고 우릴 지배한다.
지금도 이 물질문제로 넘어지는 목회자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린 물질이 왕으로 군림하는 세상에서 돈이냐 하나님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설때가 너무도 많다.
인간은 세상을 사면서 육을 입었기 때문에 물질이 아니면 살수가 없다. 비단 먹는 문제뿐아니라 입을옷과 잠을 자고, 비바람과 추의로 보호할 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것만을 위해 사는 것은 오직 먹는 것만을 위해 사는 동물들과 다름없다.
이와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삶의 이유가 그저 원초적인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말씀을 의지해 살아갈때 비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둘째시험은 예수님을 거룩한성, 예루살렘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이 아니란 뜻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도 성경말씀을 인용한다.
마46"...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시91:11,12"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마귀는 이처럼 때에 따라 하나님말씀을 인용하며 미혹케 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과 이단을 경계해야 하며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요일 4:1)
그리고 이 마귀의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는 말은 인간의 명예욕을 건드린 것으로 혼에 관한 시험이다.
인간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명예를 가지려하고 높아지려하고 또 이로 인해 교만한 마음이 든다.
특히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교만을 주의해야 한다.
난 특별한 사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긍심을 느끼게 해주지만 도가 지나치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믿음으로 자랄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을 시험하다 죽은 경우를 들은 적이있다. 어느 여자가 하나님을 믿은후, 남편을 전도하다 안되니까 난 믿는자라 무슨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며 내가 이걸 먹어도 안죽으면 믿을 거냐며 농약을 실제로 먹고 죽은 사례가 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이 여자성도를 독약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한것이며 자신의 믿음에 대한 오만이 극에 달한 행동이다.
세번째는 경배문제로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의 영화를 보여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것을 네게 주겠다고 유혹한다.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만물을 지으신 분으로 마귀가 이런 유혹을 예수님에게 한다는 것은 무척 주제넘은 짓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 하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으로 물리치신다.
마4:10"...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실제로 자기를 경배하는자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기도 한다. 불법이라하더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그날까지 이 세상의 임금은 사단이다.(요12:31,14:30,16:11)
어느 유명연예인들이 사단에게 영혼을 파는 댓가로 세상의 명예와 영화를 얻는 것은 소설속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이젠 더이상 음모론자의 망상으로 치부되지 않는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크리스챤은 이런 사람들 처럼 대놓고 사단을 경배하겠다 서약하진 않는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를 섬기느냐에 대한 문제로 시험받을 때가 많고 때론 타협하는 일도 생긴다.
생존을 위해서, 또는 그보다 약하게는 가족, 또는 친한 지인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등등.
이러한 타협은 하나님말씀이 아닌 자기생각으로 합리화, 정당화를 하기 때문이다.
명목상으로 이웃사랑, 타종교인의 화합과 평화등, 세상사람들과 잘지내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단에게 절하는 것이며, 이러한 종교통합, 화합, 다원주의는 엄연히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가지 시험을 이기시면서 모두 성경말씀을 인용하셨는데 우연인지 고의인지 모두 신명기 말씀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신6:16)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신6:13)
신명기는 '거듭 말했다'란 뜻으로 출애굽기, 레위기,민수기에 나온 말씀을 반복한 것이 많아서이다. 그만큼 너무 중요하기에 하나님께서 거듭말씀 하신 것이니, 그래서 예수님도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신게 아닐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인이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요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이신 분이 굳이 '기록되었으되..'라며 성경말씀을 인용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이유가 뭘까.
그것은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당할때, 오직 말씀에 근거해 이겨야 하며 자신의 생각, 철학으로 물리치려 하면 시험에 질수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신것 같다.
마귀의 시험에 진 대표적 케이스인 아담과 하와도 "아니, 하나님은 먹지 말라하셨어"라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귀를 응대했다면 단연코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은 법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지켜야 할법은 단 하나였지만 아담은 그 단하나의 법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먹을 것이 풍족한 가운데에서도 먹는 문제, 첫번째 시험에서 어이없이 시험에 패배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한 상태로 먹는 문제에서 정신적인 것, 영적인것, 인간에게 있을수 있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시험을 끝까지 다 승리로 이끄신 것은 아담과 극렬한 대조를 이룬다.
눅4:13에서 '마귀가 얼마동안 떠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얼마동안 떠나있던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실 때 다시 등장한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라고 말 한것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막15:30~32눅23:35) 민중의 입을 빌어 했던 말을 반복해 다시 시험한다.
예수님은 충분히 마귀의 말처럼 천군천사를 동원해 자신을 조롱하는 무지한 민중들을 벌벌 떨게 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고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인간 한계치를 넘은 모든 고통을 다 겪으시며 마귀를 이기셨다. 그러므로 아담이 잃었던 축복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 우리에게 되돌려 주셨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과의 싸움에서 졌어도 그후로도 같은 방법 수단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크리스챤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시험을 한다.
먼저 물질적인 문제로 육을 공격하고 안되면 정신적문제로 혼을, 또 안되면 신앙을 절개를 무너뜨려 영을 오염시키려 한다.
마귀는 공중권세잡은 자(엡6:12)로서 인간이 살고 있는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 둘째 하늘에 껴서 끊임없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훼방하며 괴롭히며 시험한다고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면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길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한것이다.
엡6:17"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