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나이로서: 젊은이에게
- 2023 01 06. 소한(小寒)
절후는 무심한 것처럼 다시 돌아온다. 삼라만상의 변전에 따라 다시 소한(小寒)이다. 이런 소한을 얼마나 많이 맞이하고 보내었던가. 중국 고대의 공자는 삶의 반복이 아닌 과정을 다음처럼 가장 잘 표현했으리라. “자왈 오십유오이 지우학 삼십이입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열다섯에 학에 뜻을 두고, 서른에 입장을 갖고, 마흔에 흔들리지 않고, 쉰에 하늘의 뜻을 깨치고, 예순에 순리를 따르며, 일흔에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어긋나지 않는다.) 일흔이라, 자연의 순서와 기준을 따라 살아간다는 뜻이리라. 내 심성이 바라는 대로 따라가도 조금도 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천을 중시여기는 이들은 자연의 흐름대로 따라서 산다는 것이리라. 이 자연의 흐름에서 생성, 발전, 소멸의 과정이 있다.
고대로부터 하늘의 운행이 자기 동일성이 있다고 여겼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역사가 반복한다고 하는 것은 지구상에서도 하늘의 운행처럼 되풀이 되는 방식이 있다고 여기면서, 하늘 과 땅 사이에 상호연대를 대입시켜 생각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상의 되풀이와 하늘의 되풀이는 서로 대응되는 것도, 정합적으로 규칙 또는 법칙화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되풀이되는 거처럼 여기는 것은 오랜 인습과 습관에서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생각이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에서나 삶에서나 가역성은 없음에도 되풀이를 생각하는 것은 미래의 예언처럼 자신의 삶도 예측 가능한 삶이라고 착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 착각의 기원을 다루는 것을 서양 고대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의 주제였다.
착각을 벗어나는 것은, 인습과 습관을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느껴진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할 때에는 인습과 습관에서 벗어난다고 여기는데, 대부분의 새로운 일들도 반복의 과정들 중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한 개인으로서 그가 겪지 않았던 과정일 뿐, 누군가가 거의 겪었던 과정이라는 점에서 습관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일생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되풀이 했던 일들은, 일상에서 매일 해가 뜨듯이, 동일한 일상을 겪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일상의 길이를 한해, 한 십년, 한 평생을 주기로 생각해 보게 되면, 자신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가 죽 있어왔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변화 없이 안정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성향(본성)인지라고 물으면, 그 성향이 일생동안에 상식적으로 동일할 것이라 여기는 데서 온다. 세계사에서 한 세기 또는 수 세기 동안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시절에는 동일할 것으로 여기는 편이 편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나라 현대 70여년은 서구 산업화의 270여년을 축약하여 거치면서, 세대 간에 동일성의 추구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대의 변역(變易)은 공시태라는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는데, 세대의 갈등은 각각이 달라 공시태로서 공통의 일반화를 만들기 어려워, 각 세대는 각각의 삶의 경향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 되풀이는 동일성이 아니라 이질성의 중첩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각기 이런 변화과정 바깥에 자기를 두기에 익숙해 있고,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바깥에 둔다는 것은 변화와 변역의 바깥에서 자신이 그것을 보고 또한 훈수를 둘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 불, 물 싸움 구경거리에 빠지듯이 - 그런데 변화와 변역은 도대체 무엇이 길래, 자기의 바깥이라고 여길까? 젊은 시절에는 바깥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간다고 여기고, 조금만 세상을 바꾸면 자기의 인생길도 바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변화의 굴곡이 많은 시대의 곡선에서 변곡점들은 개인의 삶의 과정과 달리 그려져, 어떤 경우에는 상승의 효과를, 어떤 경우에는 상쇄로서 그저 그런 효과를, 어떤 경우에는 예기치 않은 돌발 사태로 나락에 떨어질 위험을, 맞이하기도 한다. 시대의 흐름에서 긴 과정을 되돌아보면, 세상이 바뀌어도 자기가 바뀌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고 여길 때, 세상의 변화에 발 맞추지 못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느낄 수도 있다.
지난 20세기의 우리나라는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 변화의 속도와 폭이 크다. 세계사에서 보아도 우리나라 불교의 영향이 오래듯이 서양에서 크리스트교의 영향이 오래였고, 그런 종교성의 과정에서는 오관을 통한 상식이 지배했다고 철학사는 진단한다. 종교성과 상식을 넘어서 지식의 발달로 지성(오성이든 이성이든)의 추론이 상대성을 인정하면서 추론을 거듭하여 일반성을 알아챘으리라. 그것을 체계화하고 물질계에 법칙을 부여하면서 속좁은 이성은 자기 우월에 도취되어 상식을 넘어서 양식의 시대라고 하였다.
자기 우월이 주체이라 착각하고, 주체는 자연을 대상으로 법칙에 맞게 다룰 수 있듯이, 인간사의 제도와 체제에도 법률과 규약(코드)으로 재단하였다. 이런 과도한 일반화의 적용은 이기심과 임의자유를 부추겨, 상층과 심층의 이원화된 사회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속좁은 이성의 사고는 자기와 타아(타자)를 구별하고 적대시하면서, 자기의 이익이 식민지 수탈에서 온 것조차 이성의 승리처럼 생각하였다. 이 이성은 내부적으로 종교성의 원리를 토대로 삼고, 외부적으로 지식의 통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 사람들은 백색이데올로기라고도 하는데 - 전지구적으로 심으려 했다. 이런 삼원성의 사고가, 푸꼬가 말하듯이, 광기의 역사였다. 맑스는 이런 지배적 사고가 일찍이 삼층에 속하지 않는 알리에네(소외)를 심화시킨다고 보았고, 심층은 심층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것을 주장했다.
서양사회에서 산업사회는 이기심을 부추겨 부의 획득이 종교성의 확신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 청백리나 청렴결백이라는 용어는 없었다. 종교조차 부를 신의 축복이라고 사기 치지 않았던가? 프루동은 부가 도적질이라고 했는데. 단지 비판자들 중에서 니체가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험하며 헛된 길인가를 내재적 생성의 권능을 강조하였으나, 그 당시에 유심히 귀를 기우리는 자들도 거의 없었고, 게다가 왜곡하여 그 권능을 속좁은 이성에게 복속되는 것으로 여겨, 기술문명 발달이 인간성을 완전하게 하여 (임의)자유롭게 하리라고 착각한 앵글로색슨 철학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결국 기술과 이기심의 부추김이, -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고 하였듯이, - 21세기에 자본제국으로 구축되는 길로 가지 않았던가. 이에 대한 저항으로 어쩌면 제도와 체제 안에서 청백리의 이야기를 해봐야 윤석열조차도 소귀에 경 읽기일 것이다.
절대다수인 심층의 소수자들이, 상층의 몇몇 탐만치에 빠진 자들의 주도자들에게 예속되어 그 부스러기라도 얻고자 자발적 굴종을 감수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소수자의 소리 없는 현존의 함성은 내면에서만 있는 것일까? 의사, 열사, 투사, 전사들의 공감과 공명은 인민들의 심성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을까,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이들 가슴 속에 의사(義士)가 있을 수 있다. 의사는 그렇다고 어느 시대에나 어느 환경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서울 남산의 기슭에 선사시대 선돌과 같은 비석에는, 서른에 결사대를 조직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눈앞의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라는 글귀가 있다. 스물아홉에 프랑스 대혁명에 참여했던 바뵈프(1760-1797)는 혁명이 끝난 후에 거센 반동의 반혁명에 의해 혁명이 소진될 때, 비밀결사체를 형성하였고, 반혁명분자들에 의해 단두대에서 사라졌지만, 그 다음에도 혁명의 열정들에서 계절사라는 비밀결사체들이 있었고, 새로운 지성인들은 무권위주의와 더불어 공산사회 건설에 노력했던 것도 그 시대와 그 환경에서였다.
새로운 공동체의 건설에, 공자는 열다섯에 뜻을 세웠고 평천하를 위해 세상을 주유하였다. 루소는 열여덟에서부터 공동체를 위한 동지애의 열정과 사유를 시작한다고 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교육제도상으로 열여덟에서 기존사고와 다른 사유를 할 가지치기의 기회를 갖는다. 길게는 스물다섯까지 이런 사유의 토대 마련과 더불어, 초기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그 시대와 그 환경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제도와 체제를 바꿀 줄도 안다.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노력할 줄도 안다. 금수강산에는 상수와 고수들이 많다. 산천을 둘러 보건데 젊은이들 속에는 덕후와 별종도 많다.
법구경(法句經) 남전(南傳)의 26품 423게송 중에서, 제8장 술천품-누구도 자기의 그늘 속에서 쉴 수는 없다. 제14장 불타품-움직이는 배 위에서 사물을 바라보라. 제24장 애욕품-욕심이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제25장 비구품-버리고 끊으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
평화통일영세 중립코리아, 이는 젊은이의 노력과 더불어 성취되리라. 그 노력에 조금이라도 보태기 위해, 올해 일흔의 나이부터는 젊은이에게 필요한 이야기로 서양철학의 내면과 실행들을 소개할 것이다. (56LK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