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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욕치환경(所欲致患經)
서진(西晉) 월지(月支) 축법호(竺法護) 한역
김성구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지내시면서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는데, 비구들도 5백 명이 있었다.
그때에 모든 비구들이 이른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서 사위성(舍衛城)으로 들어갔는데, 다른 것을 배우는 외도(外道)들이 비구들에게 물었다.
“사문 구담(瞿曇)은 무엇 때문에 근심에 머무르며,
무엇으로써 색(色)과 느낌[痛痒]과 생각을 분별하여 생사식(生死識)의 고통이 어떻다 하며,
이러한 모든 법에는 어떤 차별된 특징이 있으며,
어떠한 소원이 있어서 무엇으로 이루며,
사문 구담이 나타내는 법이 무엇이며,
무엇으로 교화하며, 강설하는 말씀이 있는가?”
비구들은 외도들이 하는 말을 들었으나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곧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버리고 물러가면서 각자 생각하기를,
‘이러한 말은 마땅히 세존께 여쭈어야 하리니, 우리들을 위해 분별하여 주시면 곧바로 받들어 행하리라’고 하였다.
그때에 모든 비구들은 분위(分衛)를 이미 마치고 밥 먹는 것도 끝났으므로 다시 의복을 정돈하고 부처님께 나아가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여쭙되, 외도들이 따져 묻던 것들을 모두 차례차례 아뢰었다.
그때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외도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애욕(愛慾)의 일에는 무슨 안락함이 있으며, 어떤 근심을 이루고, 무엇을 좇아 생기며, 무엇으로 인하여 없어지는가’라고 한다면,
너희들이 마땅히 모든 외도들에게 대답해야 하거늘, 잠자코 대답을 하지 못하였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능히 이 뜻을 이해하여 높은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왜 그런가 하면, 능히 미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그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모든 마군과 범천(梵天)과 범지(梵志)와 귀신들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능히 이 질문을 일으켜 풀어서 그의 뜻을 기쁘게 해주기를 찾았으나,
그들의 즐기는 바를 사랑하여 욕심에 물들었으니,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듣고, 코로는 좋은 냄새를 알고, 혀로는 좋은 맛을 알고, 몸으로는 매끄러움을 알아서,
뜻에 맞으면 기뻐하고 즐기는 바에 뜻을 두어 그 때문에 물들은 바가 되며,
마음으로는 법을 탐하지만,
이러한 다섯 가지 욕심은 인연에서 일어났기에 마음이 즐겁게 여기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욕심의 근심이 되는가?
어떤 족성자(族姓子)가 그의 공교한 방편을 따라서 생활의 업(業)을 세우되 생각하는 것이 많아서,
혹은 기술(技術)로 하며, 혹은 벼슬아치가 되며, 혹은 화가[畵師]가 되며,
혹은 산술(算術)을 하며, 혹은 다시 조각하며, 혹은 흙을 바르고 길이를 재며,
혹은 여색(女色)을 말하며,
혹은 추위에 얼며, 혹은 더위를 만나서 목마르고 굶주려 죽으며,
혹은 비바람을 만나며, 혹은 모기와 깔따귀를 만나기도 하느니라.
모든 감관[根]이 변하고 어지러워도 이 모든 일에 나아감에 몸이 자재하기를 바라며,
재보(財寶)를 구하고, 앉으나 서나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다가,
재보에 앉아서 슬피 울고 근심하며, 가슴을 치고 답답해 하니,
나는 이런 무리들을 어리석다 하노라.
열매가 없음에 이를지라도 오히려 이것을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여 그 업을 여의지 않고,
집을 세우거나 모든 재물을 만들어 재보를 얻으니,
만일 얻지 못한다면 무앙수(無央數)의 번뇌와 근심을 일으켜 노래와 춤을 통제하느니라.
현(縣)의 벼슬아치와 물ㆍ불ㆍ도둑ㆍ원수ㆍ빚쟁이에게 빼앗기거나, 불에 타고 물에 빠지며 부딪히고 찔리거나, 겁주며 해치고 침해하여 포악하거나, 집안이 무너져 어지럽거나, 재보를 잃음이 없더라도,
그 족성자는 마음에 이런 근심을 품고 있다가,
마침내 물ㆍ불ㆍ도둑ㆍ원수를 만나 침탈(侵奪)을 당하면,
근심과 슬픔으로 울며 통곡해서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내가 전에 생업(生業)을 다스려 재산을 모았더니, 이제 텅텅 비어서 의지할 곳이 없도다’ 하니,
이것은 정욕(情欲)의 근심이니라.
욕심을 연(緣)하여 애정을 이루어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멋대로 해서 이러한 번뇌와 한탄을 이루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욕심으로 인하여 탐내고 사랑하며, 있는 곳마다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멋대로 해서,
아버지는 자식의 악(惡)을 말하고, 자식은 아버지의 악을 말하며,
어머니는 딸의 악을 말하고, 딸은 어머니의 악을 말하며,
형은 아우의 악을 말하고, 아우는 형의 악을 말하며,
언니는 동생의 악을 말하고, 동생은 언니의 악을 말하여,
집안의 친척들이 돌아가며 서로 비방하니,
이것이 탐욕의 근심이 되며, 그로 인하여 수고롭고 괴로움을 이루느니라.
모두가 많이 구하는 까닭에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멋대로 해서 욕심에 빠지는 바가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애욕(愛欲)의 근심은 사랑에 집착함이 뿌리가 되어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멋대로 하여, 그로 인해 이익을 탐내기 때문에,
군사와 무기를 이끌고 활을 당겨 화살을 틀어잡고 군대에 들어가 싸우느니라.
코끼리ㆍ말ㆍ전차의 군사와 걷는 군사[步兵]의 네 가지 군사를 일으켜 뭇 군사들이 함께 싸우니, 이것은 참극(慘劇)의 그물망이어서 욕심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상하게 하느니라.
친척과 친척이 인연을 일으켜서 탐욕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내달려 편안하지 않아서 재산을 구하되 혹 능히 재산을 얻기도 하고, 혹 얻지 못하기도 하며,
혹은 이내 재산을 잃어서, 근심스럽고 괴로워하여 무릎을 치고 가슴을 두드리며 답답해서,
‘나는 본래 재물이 많더니 지금 모두를 잃었도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탐욕의 근심이며, 은애(恩愛)의 번뇌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그것 때문에 빠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욕심으로 인한 근심은 애욕에 집착함이 근본이 되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원망하고, 모녀(母女)가 서로 미워하며,
부부가 서로 해치고, 자매가 서로 탓하며, 형제가 서로 증오하면,
친척과 집안이 저절로 서로서로 비방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탐욕의 근심이 되며, 은애의 번뇌이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그것 때문에 빠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욕심으로 인한 근심은 애욕에 집착함이 근본이 되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해서,
손에 날카로운 칼을 잡거나 혹은 몽둥이를 가지고, 외딴 곳ㆍ모래톱 나무들 사이나 무너진 보루 틈에서 마음이 답답하여 바꾸어 서로 목숨을 빼앗아, 멀리 불 속에 던지거나 끓는 기름에 서로 씻느니라.
이것을 연(緣)하여 악(惡)을 일으켜서 혹은 곤고(困苦)한 고통을 이루고, 혹은 죽음에 이르니,
이것이 바로 탐욕의 근심이며 은애의 번뇌로서,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그것 때문에 빠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욕심으로 인한 근심은 사랑에 집착함이 근본이 되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남의 집 문을 부수고 남의 밥줄을 끓으며,
남의 담장을 뚫고 밤에는 도둑질을 하여,
숨는 곳에 있다가 혹은 다시 도망쳐서 싸우고 불을 지르되,
임금이 알아차리고 혹 아전에게 결박하게 하거나,
혹은 깊은 감옥에 가두거나,
혹은 귀ㆍ코ㆍ손ㆍ발을 끊어서 고문하며 매를 치거나,
혹은 목을 자르거나,
혹은 세워 놓고 발꿈치를 누르거나 사슴 잡는 함정에 떨어뜨리며, 벽돌을 들거나 토끼 굴에 빠뜨리며,
혹은 시루나 가마솥에 찌거나 구우며 끓는 기름을 온몸에 뿌리느니라.
이것이 바로 탐욕의 근심이며, 은애의 번뇌이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그것 때문에 빠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욕심으로 인한 근심은 사랑에 집착함이 근본이 되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몸으로 뭇 죄악을 지으려 하고,
욕하고 꾸짖으며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마음을 모질게 먹어 몸과 입을 보호하지 않으며,
뒷세상을 돌아보지 않다가,
수명이 다하면 혼신이 한 번 떠나 나쁜 갈래의 괴로움의 곳에 떨어져 밤낮으로 고【문】받기를 무앙수(無央數)의 세월 동안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탐욕의 근심이며 애욕의 번뇌이니,
마음을 풀어놓고 뜻을 마음대로 하여 그것 때문에 빠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무엇을 인하여 욕심을 버리고 즐겨 악과 일체의 하고 싶은 바를 끊을 수 있는가?
모든 탐내어 구함을 끊으며, 뭇 정(情)의 형태를 베어냄이 바로 욕심을 버리는 것이니라.
만약 어떤 사문(沙門)이나 범지(梵志)가 애욕의 티[瑕]가 모든 근심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세하게 살펴서,
자기에게 애욕이 있음을 알고도 뭇 사람들을 권면하고 도와서 애욕을 건너도록 한다면,
설사 권면하고 교화하여 해탈에 이르더라도,
애욕에 뜻을 두면서 저 언덕으로 건너고자 하는 그런 일은 있지 않느니라.
만일 어떤 사문이나 범지가 애욕을 즐거워하여 애욕의 티를 보지 못하였으나,
애욕에 물들어 더러운 이가 만약 능히 정욕(情欲)을 자세히 살펴 알아서,
모든 망정(妄情)을 탐하지 않고 뭇 사람들을 교화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한다면,
자기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해서 곧 이 일을 이루는데 뜻대로 함을 의심함이 없으리라.
만약 이 사람들이 즐기는 바를 눈으로 본다면,
장자의 처와 범지의 처가 나이는 열 네다섯이거나 열여섯ㆍ스물 정도이며,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거칠지도 않고 보드랍지도 않으며,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아, 얼굴이 예쁘고 묘함이 마치 나무에 꽃이 무성한 것 같았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처음에 눈으로 보아 인연으로 일으킨 바가 뜻에 맞아 기쁘고 즐거웠으니, 이것이 애욕의 즐거움이거니와,
어떤 것이 색의 인연에 따르는 근심인가?
이에 여인이 나이가 들고 늙어서 80에 이르고, 90이나 100이나 120살에 이르러,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며,
얼굴은 쭈그러지고 피부는 늘어지며,
몸은 무겁고 기운이 없어서 지팡이를 의지해 구부리고 다니며,
바짝 마르고 기(氣)가 떠서 걸어 다니기 괴롭고 어려우며 몸이 덜덜 떨리니,
비구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매우 단정하고 예쁘지 않으니, 얼굴에 근심의 징험이 이미 나타났느니라.”
비구들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색(色)의 근심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보건대, 여인이 죽은 뒤에 하루나 이틀 내지 닷새나 엿새에 이르면,
몸빛이 푸르게 변하고, 배가 부풀어 오르고 문드러져 냄새가 나며,
악로(惡露)와 부정(不淨)한 것이 아홉 구멍에서 나오고,
몸속에는 벌레가 생겨 벌레가 도리어 그 살을 먹으니,
비구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단정하고 얼굴이 예뻤으나 이제 좋던 모습을 잃었으니, 변화의 증험이 나타난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색(色)이 근심이 되는 증험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다시 여인을 보건대,
냄새나고 문드러져 땅에 있으면 까마귀의 밥이 되고, 매와 독수리가 부리로 쪼며, 호랑이와 여우들이 깨물고, 무앙수(無央數)의 벌레들이 그 몸에서 나와 도리어 그 살을 먹으니,
비구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단정하고 얼굴이 예뻤으나 죽으면 남아 있지 않으니, 그 근심이 나타난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애욕(愛慾)이 근심이 되는 증험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다시 여인을 보건대, 가죽과 살이 몸에서 떨어지고 다만 백골(白骨)만 보인다면, 예전에는 단정하고 얼굴이 예뻤으나 죽으면 다시 나타나지 않으니, 그것이 근심의 징험인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욕이 근심이 되는 증험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다시 여인을 보건대,
몸의 뼈마디가 풀어져 손ㆍ발ㆍ무릎ㆍ정강이ㆍ코ㆍ귀ㆍ겨드랑이ㆍ등ㆍ팔ㆍ팔꿈치ㆍ머리ㆍ목이 각각 다른 곳에 있다면,
비구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단정하고 예뻤으나 죽으면 나타나지 않으니, 근심의 증험이 나타난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애욕이 걱정과 근심이 되는 증험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여인을 보니 무덤 사이에 버려져 있어서 무앙수의 세월 동안 뼈마디가 부서져서 푸르고 희기가 벽옥(碧玉) 같으며, 부스러져서 밀가루 같으니,
비구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예전에는 단정하고 얼굴이 예뻤으나 죽으면 나타나지 않으니, 근심의 증험이 나타난 것인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탐욕(貪慾)이 걱정과 근심이 되는 증험이니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능히 욕심을 여의며, 능히 색욕(色欲)을 끊으며, 정(情)의 색(色)을 제거하며, 탐심을 뽑아버리고 익히지 않아서, 마침내 색에 집착하지 않겠는가?
만약 어떤 사문이나 범지가 색을 즐기기를 이와 같이 하여 기뻐하다가,
그 근심의 증험을 보고, 번뇌가 생기는 것을 보아서, 자세히 살펴 있는 그대로 안다면,
곧 모든 색에 평등하여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다른 사람을 권면하고 교화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리니,
만일 어떤 사람이 색으로 색을 의지하여 건너고자 한다면, 그런 일은 있지 않느니라.
만약 사문이나 범지가 색을 기뻐하다가 모든 감정과 욕망을 바꾸어 색이 근심이 되는 증험을 보고,
색을 여의어 그 사랑하는 바를 뽑아버리고자 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아서 평등하게 모든 색을 관찰하며,
모든 사람들을 권면하고 교화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며,
색이 의지하고 있는 바를 알아서 모든 색을 버린다면, 가히 얻을 수 있으리라.”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이 고통[痛庠]이 즐거움으로 바뀐 것이며, 모든 습기를 버린 것인가?”
이때에 비구들은 모든 욕심에 대해 고요하고,
모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었으며,
기억[念]하고 생각[想]하며 홀로 편안히 앉아서 첫 번째 선정[第一禪]을 닦고 있었다.
“만약 비구가 이 첫 번째 선정을 얻는다면, 자기를 탐하지 않고 남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다툼이 없어서 마음에 성냄을 품지 않으리니,
이것이 비구가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성냄이 없는 것이니라.
나에게 한탄할 것이 없음으로 즐거움을 삼으면, 고통이 바로 즐거움이 되느니라.
관(觀)한 바의 즐거움을 익혀서 모든 생각을 없애고 속마음[內心]이 고요함을 즐거워하여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기억함도 없고 행함도 없어서 뜻이 고요하여 편안함에 이르면,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선정[第二禪]이니,
만일 비구가 두 번째 선정을 행한다면, 자기를 탐하지 않고 남에게 집착하지 않느니라.
마음이 늘거나 줄어도 그는 즐겁게 욕심이 없는 행을 관찰하고자 해서 항상 고요한 선정으로써 업(業)의 몸을 편하게 하며, 성현의 말씀과 같이 항상 뜻[意]을 관찰하여 정(定)하면,
세 번째 선정[第三禪]을 행하는 것이니라.
만일 비구가 세 번째 선정을 행하여 이 고통을 즐겁게 여긴다면,
괴로움도 제거하고 편안함도 덜어버려서, 앞서 지나간 옳았거나 옳지 못했던 뜻에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리라.
그 뜻을 관하여 정(定)하면 모두 만족스럽게 청정하리니,
만일 비구가 네 번째 선정[第四禪]을 행하면, 이것이 바로 고통을 즐겁게 여기는 것이니라.
또 비구여, 고통을 연(緣)하여 즐겁고 뜻에 맞는 욕심을 내는 것이 바로 고통을 즐겁게 여기는 것이니,
어떤 것이 고통의 걱정 근심인가?
고통으로 인하여 근심이 생겨서 걱정과 번뇌가 시끄러우면, 이것이 바로 고통의 걱정 근심이니라.
또 고통과 무상(無常)함의 괴로움과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법은, 그 법 모두 고통이 무상함의 괴로움을 일으켜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법을 이룬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고통의 근심이니라.
어떤 것이 고통을 여의는 것인가?
그 고통에서 모든 탐욕을 끊는 것이 바로 욕심을 여의는 것이니라.
만약 어떤 사문이나 범지가 고통은 모든 바뀐 바의 즐거움이 모두 걱정 근심을 이룬 것임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든 애욕(愛欲)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세하게 살펴서 있는 그대로 알아, 고통에 의지하여 뭇 사람들을 권면하고 교화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며, 자기도 성취하여 모든 의지하고 집착함을 제도하는, 이런 일은 있지 않느니라.
만약 어떤 사문이나 범지가 고통이 즐거움이며 즐거움으로부터 근심이 이루어짐을 보고서 애욕을 여의며,
있는 그대로 자세히 알아서 평등하게 고통을 관찰하고 의지하는 것 없이,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고 교화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하여,
자신도 성취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들도 교화한다면,
이 일은 이룰 수 있으니, 이것이 버림의 기쁨과 즐거움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비구들은 경(經)을 듣고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