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물체질·핀셋·현미경…월성 ‘사계’ 복원해 보니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2023.08.14ㅣ주간경향 1540호
경북 경주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동식물 유체 등을 토대로 복원한 5세기의 환경. 해자의 물속~물가에 푸른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 수생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가시연꽃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고,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자생했을 것이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25t 트럭 100대 분량의 흙을 물체질로 걸러낸 끈기와 집중력의 결과물….
얼마 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에 판 물도랑 혹은 연못)와 그 주변의 고환경(古環境)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실감: 월성 해자>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경주 신라월성연구센터(숭문대) 전시동에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데요.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동물 유체는 물론이고요. 작은 씨앗과 미세한 꽃가루 같은 식물자료까지 학제 간 연구로 분석해 당대(5세기)의 환경을 복원해낸 건데요.
1㎜ 씨앗도 물체질과 현미경으로 걸러냈다
그런 영상을 만들어내기까지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고고학자)은 물론 아니었죠. 발굴구간에 쌓인 점토를 1m 이상 파내 일일이 물체질하는 고달픈 작업이었습니다. 물체질한 흙의 양이 25t 덤프트럭 100대분(2200㎥)에 달했다네요.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잘 보이지도 않는 유물 조각을 한 점 한 점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는 것 또한 고고학도의 몫입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발굴구간이 해자인 덕분이죠. 산소가 일정하게 접촉하는 환경이어서 크게 썩지 않아서 그 속의 유기물들이 보존될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점토 퇴적층이라 작은 씨앗 같은 미세 유기체를 구별하기가 어려웠죠. 그래서 그물 간격이 0.5㎜에 불과한 체로 걸러내는 작업을 반복해 찾아낸 거고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점토를 물에 풀어 놓은 다음 가라앉는 것은 골라내고 물에 뜨는 것은 일일이 핀셋으로 집어냈습니다.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는 유기물은 현미경으로 골라냈죠. 크기가 1㎜ 안팎인 오동나무 씨앗도 찾았고요. 1600년 전의 규조물(식물성 플랑크톤) 등도 걸러냈습니다. 저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씨앗 및 열매는 2만여 점이 출토된 가시연꽃 씨를 비롯해 머루, 버찌, 자두, 복숭아, 가래 등이었습니다.
또 느티나무, 느릅나무, 참나무, 소나무 꽃가루도 확인했죠. 찾아낸 씨앗과 열매가 70여 종에 달했습니다. 이런 유물을 토대로 복원된 1600년 전 ‘경주의 사계’를 돌아볼까요.
물체질로 걸러내고 핀셋으로 집어내고 현미경으로 관찰해 찾아낸 각종 식물유기체. 이런 과정 끝에 1600년 전 신라 월성 주변의 경관을 복원·재현해낼 수 있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600년 전 월성의 사계
해자는 나무기둥을 1.5m 간격으로 세우고 그사이를 판재로 연결한 형태로 조성됐습니다.
봄은 분홍색, 흰색으로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벚나무류로 수놓았을 겁니다. 요즘 경주가 봄철만 되면 벚꽃으로 물드는데요. 해자에서 ‘버찌’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주 벚나무는 1600년 전에도 꽃을 피웠던 것 같네요.
여름철은 어떨까요. 해자의 물속~물가에 푸른 잎을 띄우고, 꽃을 피우는 여러 수생식물이 무성하게 자랐을 겁니다. 가시연꽃이 가장 큰 군락을 이뤘을 거고요. 개연꽃, 마름, 붕어마름 등이 자생했을 겁니다.
가을에는 붉은빛과 노란빛으로 물든 느티나무·느릅나무 숲이 눈에 띄었을 것 같습니다.
겨울철은 어떨까요. 소나무와 같은 사철나무가 눈에 덮여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해자에서 출토된 미세한 규조류와 꽃가루 분석을 통해 주변의 풍경도 어렴풋이 그릴 수 있습니다.
월성 주변 물가(발천~남천변)에는 느티나무·느릅나무숲이 존재했고요. 더 떨어진 주변 구릉이나 산지는 소나무와 참나무류의 숲으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새끼돼지, 곰, 터번 쓴 흙인형
해자에서는 궁궐 사람들이 식용 혹은 관상용으로 썼던 동식물의 흔적도 다수 확인됐습니다.
식물로는 벼·밀·조·콩 등의 곡식류, 박·외류 등의 채소류, 가래·개암 같은 견과류, 복숭아·자두·머루와 같은 과실류 등이 나왔어요. 또 멧돼지·말·개·소·사슴류 같은 동물뼈도 다량 나왔는데요. 바다사자·상어 척추·곰뼈 등도 보였습니다.
출토 뼈 중 30% 정도가 멧돼지류였고, 그중에서도 6개월에서 1년 정도 키운 돼지가 40%(26개체)였습니다.
골절된 후 뼈가 붙어가는 과정이 역력한 어린 돼지도 보였습니다. 치료를 받았다는 얘기죠. 신라인들이 5세기부터 안정적으로 돼지를 사육했다는 증거겠죠. 동물뼈 가운데는 고기를 얻기 위해 해체한 부위가 보였습니다.
월성 출토 동물뼈와 식물유기체 등을 토대로 복원·재현해본 1600년 전 월성 해자 주변의 모습 / 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제공
곰뼈(반달가슴곰 추정)가 15점 이상 나왔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삼국사기>는 “각급 군대의 지휘관 깃대에 ‘곰의 뺨·가슴·팔가죽 등으로 만든 장식’을 단다”(‘잡지·무관조’)고 했습니다. 곰가죽으로 각급 지휘관들의 장식을 제작하는 공장이 월성 근처에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해자 출토 유물 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터번을 쓴 토우(흙인형)입니다. 눈이 유난히 깊은 이 토우는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둘렀고,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는데요. 소그드인(중앙아시아 페르시아계 유목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찍이 동서교역에 종사해 상술에 능한 사람들이었죠.
경주에서는 상당수 페르시아계 유물이 여럿 보입니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인 경주까지 동서양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주는 지표 유물입니다.
사람제사의 살풍경
세인의 이목을 독차지한 월성의 발굴성과는 따로 있었습니다. ‘사람제사(인신공희·人身供犧)’의 흔적이었죠.
본격 발굴을 시작한 2017년 서성문터의 인접 지점에서 나란히 누운 남녀 인골 2구가 노출됐습니다. 심상치 않았습니다. 인골 노출 지점이 성벽을 쌓기 위해 단단히 다진 맨 밑바닥층이었거든요.
남성은 신장 166㎝, 여성은 신장 153.6㎝ 정도로 측정됐습니다. 남성은 정면을 바라보고 누웠고요. 여성은 얼굴을 돌려 남성을 바라본 채 누워 있었습니다. 남성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50대로 추정된 남녀의 영양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유물의 위계도 높지 않았습니다.
4년 뒤(2021) 두 인골에서 50㎝ 떨어진 곳에서 또 인골 1구가 노출됐습니다. 10대 어린이(키 135㎝)로 추정됐습니다. 50대 남녀와 10세 전후의 어린이가 묻힌 양상이 흡사했습니다. 인골들은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습니다.
또 과거의 시굴·발굴 자료를 들춰보던 발굴단원이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984~1985년(3구)과 1990년(최소 20구)에도 이 부근에서 23구가량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는 겁니다.
월성 내부의 3호 건물지에서 확인된 120여 점의 벼루. 별다른 장식이 없는 실용적인 벼루가 대다수다. 벼루 중에는 여러 번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것도 보인다. 평소에 썼다는 얘기다. / 국립경주문화제연구소 제공
불과 5~10m 떨어진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성벽을 쌓을 때 최소한 26명의 사람제사가 자행된 겁니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월성벽은 통곡의 현장?
이번에 <실감: 월성 해자> 전시회 기사를 준비하면서 다소 감상에 빠졌습니다.
1600년 전 월성 해자 주변의 사계를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순간 ‘싸’해진 포인트가 있었어요. 그렇게 감상에 젖을 때인가, 바로 곁에서 성벽을 쌓을 때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됐는데… 오히려 희생자들의 통곡이 울려퍼진 참상의 현장이 아니었을까, 뭐 이런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발굴자에게 물어봤더니 그래도 동시대는 아니라더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략 5세기(1600년 전)를 중심 연대로 삼아 복원·재현한 거고요. 사람제사가 자행된 시대는 4세기 중엽(35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는군요. 50~150년의 시차가 나는 거죠. 시대가 겹치지 않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데요.
물론 지금의 잣대로 1600~1700년 전을 평가할 수는 없겠죠. 죄 없는 생목숨을 줄줄이 죽여 묻는 풍습은 지극히 야만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만합니다.
4대 임금인 탈해왕은 어려서부터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에 눈독을 들인다. 어린 탈해는 터무니없는 사기행각으로 법정소송을 일으켜 왜인 출신 호공의 땅인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를 빼앗는다.
사기행각으로 일본인 귀화자의 집을 빼앗은 탈해
2014년부터 시작한 월성 발굴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는데요.
월성 내부는 2050년 이후까지 장기 조사가 진행되고 있고요. 성벽은 서성벽(사람제사의 흔적 발굴)에 이어 남성벽 조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해자는 발굴은 물론 복원 정비까지 다 끝나 이번에 전시회를 하게 된 거고요.
이 기회에 ‘월성’과 ‘월성 발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요점만 간단히 일별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무엇보다 월성의 주인을 두고 분쟁을 벌인 일화가 흥미롭습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종합해볼까요.
4대 임금인 탈해왕(재위 57~80)이 어릴 적에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월성)를 보고 흠뻑 빠졌답니다. 그 봉우리의 주인은 왜국 출신인 호공이었죠. 어린 탈해는 앙큼한 계략을 썼습니다.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 두고 “조상 때부터 우리 집이었는데 (호공이) 빼앗았다”고 주장했어요. 날벼락을 맞은 호공이 “무슨 소리냐”고 기막혀했는데요.
탈해가 생떼를 쓰자 결국 법정소송으로 이어졌습니다. 재판관이 탈해에게 “당신 집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요. 탈해는 “우리는 대장장 가문인데, 땅을 파보면 그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죠. 호공은 꼼짝없이 집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탈해가 사기행각을 펼쳐 초승달 모양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는 겁니다.
<삼국사기>는 “101년 탈해왕의 뒤를 이은 파사왕(재위 80~112)이 이곳에 성을 쌓고 옮겨 살았다”(‘본기·파사왕’조)고 했습니다. 박씨(파사왕)가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석씨(탈해)의 땅(월성)을 차지해버린 거죠. 당대 노른자위 땅이었던 월성의 소유권을 두고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는 뜻입니다.
금단의 땅이 된 월성
2014년 시작된 월성(둘레 2340m) 내부 조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착안점이 보였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월성 내부 발굴에서는 건물터 17개 동과 11만 점이 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지금까지 7개 층의 문화층이 확인됐고요. 유독 고려시대의 유구·유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영조 연간(1735) 쌓은 석빙고만이 남아 있죠. 신라 멸망 이후 장구한 세월 동안 인적이 끊겼다는 뜻이죠. 멸망 후 천년왕국의 궁성터는 금단의 땅으로 터부시됐을 겁니다.
이곳은 101년 초축 이후 834년간이나 신라의 궁성이었죠. 지금까지의 월성 내부 발굴에서는 17개 동의 건물터와 11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출토 유물 중에 한 건물터에서 120여 점이나 쏟아져나온 벼루가 시선을 끕니다.
내부에 먹이 묻어 있거나 장기간 사용으로 인해 면이 매끈하게 닳은 사례도 확인됩니다. 이 건물은 궁궐 내에서도 공무를 수행한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천존고와 만파식적
앞으로의 월성 내부 발굴에서 왕이 정사를 펼친 정전 같은 중심 건물이 확인되면 대박이겠죠.
그중에서도 조사단원들의 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천존고’의 발굴입니다.
‘천존고’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등장하는데요.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萬波息笛·불면 모든 풍파가 사라진다는 대나무 피리)을 보관한 창고입니다. 신문왕(재위 681~692)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고 했는데요. <삼국유사>는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다”고 했습니다.
만약 천존고와 함께 ‘만파식적’이 나온다면 세상이 뒤집어지겠죠.
월성 내부의 발굴은 ‘2050년+α’로 예정돼 있어요. 장기발굴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신라’ 국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이라는 구절(<삼국사기> ‘신라본기·지증왕’조)에서 따왔죠. 삼국 중 가장 늦게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졌지만 결국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위업을 쌓았죠. 그런 신라 천년 역사를 이끈 궁성을 발굴한다는데 쉽게 끝나겠습니까. 불과 74년간(710~784) 도성이었던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유적도 50~100년을 목표로 장기발굴을 벌이고 있거든요.
이기환의 Hi-story구독
물론 발굴 자체가 ‘유적 파괴’이긴 합니다. 이미 손을 댄 이상 50년이 아니라 100년, 아니 200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신라 천년 역사의 전모를 규명해 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