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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아서> 5장. 바른 행위
작성자:담마삐야
제5장 바른 행위
13. 하나의 맛
인간들은 직위와 명성, 재물을 기필코 획득하려 한다. 여기서 특이점이 하나 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올라오지만 진흙이 연꽃을 더럽힐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야(성인)들은 욕계의 감각이라는 진흙 속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출현하지만, 욕계의 감각들이 성인들을 탁해지도록 할 수 없다. 빠라미가 필요한 이들도 감각적인 것들을 찾지만,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빠라미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 찾을 뿐이다.
☸️왑빠는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붓다의 확실한 제자로서 세상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는 생을 통해 빠라미를 쌓아온 사람이다.
☸️ 붓다께서는 상가에 아라한 60분이 채워졌을 때, 세상에 법을 전하기 위해 이들을 인도 중부지방으로 떠나보내셨다. 다른 아라한들 역시 마찬가지로 세상에 진정한 행복을 주는 이들이다. 그분들은 욕계의 감각이라는 진흙에 오염될 사람들이 아니다.
왑빠는 법을 실천하는 불자였다. 살아계시는 붓다께서 그에게 직접 법을 설해주셨다. 이는 바로 담마라따나dhamma-ratana(법보)이다. ‘에히 빅쿠’가 된 꼰단냐는 탁발해서 고귀하신 붓다와 왑빠를 시봉했다. 이들은 상가라따나saṅgha-ratana(승보)이다. 덕분에 왑빠는 삼보를 마음 깊이 믿어서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왑빠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사랑했다. 세상을 통째로 가여워했다. 세상을 통틀어 자랑스러워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세상을 아울러 헌신할 수 있었다.
● 그는 이 세상을 아담마(삿된 법)가 아닌 담마(정법)가 지배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지와까jīvaka라는 의사가 있었다. 지와까는 독초에 속하는 풀도 약초로 볼 줄 알았다. 볼 수 있었고 쓸 줄도 알았다.
☸️💎 약에 대해 통달했다. 쓸모없다고 버리는 풀이 하나도 없었다. 지와까는 보이는 모든 풀을 ‘약초’로 보아서 모든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왑빠는 보이는 ‘모든 감각적 대상들’이라는 진흙으로부터 4성제라는 꽃을 최고조로 피워냈다.
사실 ‘욕계의 감각적 대상’이라는 이름은 유아견의 관점에서 부르는 호칭이다. 이것을 위빳사나의 관점에서 보면 단지 물질과 정신뿐이다. 5가지 집착의 무더기(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일 뿐이다. 이들 감각적 대상은 위빳사나로 관찰할 때만 그 실체가 분명히 보인다. 이리하여 욕계의 감각적 대상이라는 진흙으로부터 고귀한 절대 진리(4성제)를 꽃 피워내는 일을 왑빠는 후에 성취하게 된다.
언급하였듯이, 왑빠는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최초의 실천하는 불자였다. 그는 8정도 모두를 붓다로부터 직접 배웠다. 그는 8정도의 요소 하나하나의 뜻도 정확히 이해했다.
그중 삼마와짜(바른 말)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나쁜 말 4가지를 피하는 길’이지만 그 외에 다음과 같은 몇몇 능력들도 포함한다.
☸️첫째, 뽀리사다porisāda를 믿게 했던 마하수따소마mahāsutasoma 왕의 삿다하빠나삿띠saddahāpana-satti(믿게 하는 능력)이다.21)
☸️둘째, 삘리약카piliyakkha 왕이 쏜 독화살의 독을 해독시켰던 잇차뿌라나삿띠icchā-pūraṇa-satti(소원을 이루게 하는 능력)이다.22)
☸️셋째, 메추라기 경에 나오는 메추라기를 산불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무사위라마나삿띠musā-viramaṇa-satti(거짓말을 피하게 하는 능력)이다.23)
☸️💚💎왑빠가 이러한 삼마와짜(바른 말)의 여러 능력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요리할 때 기름, 소금, 후추, 마늘, 고기, 생선들이 그 재료 고유의 맛을 유지하고 있으면 명품요리가 되지 못한다. 각자 고유의 맛을 버리고 하나의 맛으로 녹아들어가는 원리를 ‘에까라사’(하나의 맛)라고 한다. 각 재료들이 자신의 이름과 특성을 버리고 하나의 맛으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명품요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왑빠가 그의 의식 안에 있는 8정도를 하나의 맛으로 조화를 이룬 명품요리와 같이 조화롭게 알게 될 때, 비로소 첫 번째 도와 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왑빠는 ‘에히 빅쿠’로써 빅쿠가 될 것이다.
아직까지 왑빠는 삼보를 가슴에 품고 삼보를 믿고 의지하며 자애를 실천하려 노력하는 범부로서의 불자, 인품이 뛰어난 불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따라서 왑빠는 붓다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8정도를 갈고 닦아, 8정도가 천성이 되고 기질이 되도록 계속 노력해야 했다.
후에 왑빠는 60분의 아라한들 중 한 분이 된다.24) 또한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로 시작하는 40분의 오른팔 사와까sāvaka(제자) 중 한 분이 되는데, 그는 특별한 아라한 과를 얻기까지 씨앗들을 정성껏 뿌리고 또 심어야 했다.25)
왑빠는 어떠한 순서에 따라 이 씨앗들에 물을 뿌리고 어떠한 거름을 주고 어떻게 솎아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관련된 빠라미들을 잘 채워온 사람이었다. 따라서 왑빠는 가까운 미래에 아라한 과라는 꽃과 열매를 얻을 사람이었다.
이럴 때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심어 둔 씨앗은 시간이 되면 싹이 튼다. 필 때가 되면 피고 맺힐 때가 되어야 맺힌다. 필 때가 되어 피어야 완숙한 훌륭한 열매가 된다. 필 때 피지 못한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혹여 열매가 맺히더라도 자라지 못하고 썩어 버린다. 이것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의미이다.
왑빠는 아리야삿짜냐나ariyasacca-ñāṇa(4성제의 지혜)를 반드시 얻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이 붓다! 바로 그분이 직접 수행방법을 설하시고 있다. 고귀하신 붓다께서는 붓다의 눈으로 다섯 빅쿠 중에 한 분인 왑빠의 성향과 빠라미를 잘 알고 계셨다. 그 때문에 왑빠 한 명을 위하여 따로 법문하신 것이다. 왑빠는 안거달 음력 16일 아침에 수다원 도의 지혜를 얻고 수다원 성인이 되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하신 것처럼, 왑빠도 조금도 어긋남 없이 그대로 정확히 노력하고 분투했다. 몸과 마음을 사띠했다.
몸과 마음이 존재하는 세상을 세간의 언어로 ‘로까loka’라고 부른다. 결국 ‘세상’이란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그 모두가 함께 존재하는 곳이다.
교학에서 흔히 말하는 12연기란, ‘이러한 로까(세간)에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각각의 모든 것들이 (그냥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생겨나고 사라짐’을 의미한다.
물질과 정신 역시 이러한 인과로 이어져 연속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물질과 정신은 그 특성상 각각 별개이다. 한 덩어리가 아니다.
이러한 인과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이런 결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생기게 하겠다’라는 장악력을 갖는 ‘자아’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다. 단지 어떤 원인들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 따른 어떤 결과가 생겨날 뿐이다. 원인이 충분치 못하여 결함이 있으면 그 결과도 찌그러진다.
원인이라는 담마에 지배력이라는 자아가 없기에 이런 이치에서 우리는 ‘자아란 없다’, 즉 ‘무아’라고 불러야 한다. 원인이라는 담마에서 장악력이라는 자아의 특성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결과라는 담마에 자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라는 담마에도 ‘무아’만이 있다. 이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원인과 결과가 무한히 연속하려면, 의식의 흐름이 이어지는 특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특성을 빨리어로 ‘에깟타ekattha’라고 부른다. ‘에깟타’를 믿지 않으면 웃체다딧티uccheda-diṭṭhi(단견)에 빠진다. 💔💢단견은 바르지 못한 견해로서, 이러한 견해를 불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무덤에 묻히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견해가 바로 ‘단견’이다.
연속되는 원인과 결과가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만, 흐르는 의식의 성품에는 각각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것을 빨리어로 ‘나낫타nānāttha’라고 부른다. ‘나낫타’를 믿지 않으면 삿사따딧티sassata-diṭṭhi(상견)에 빠진다. 삿사따딧티 역시 잘못된 시각으로 불자들은 이 견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 유충처럼 작은 것에도 혼이 깃들어 있어 다음 생으로 옮겨간다거나
💥 ‘변하지 않고 영원한 영혼 또는
💥영생이 존재한다’라는 견해가 바로 대표적인 ‘상견常見’이다.
원인과 결과가 무한히 연속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신의 창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연의 법칙일 뿐이다. 모래가 기름이 될 수 없고 참깨와 들깨만이 기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이것을 빨리어로 ‘에왕 담마따evaṁ dhammatā’(단지 법칙일 뿐이다)라고 부른다. ‘
💢💔에왕 담마따’를 믿지 않으면 창조주를 믿게 된다. 이러한 ‘상견’ 역시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
💢💔창조주를 믿으면 유아견이 저절로 스며들게 된다. 단견과 상견도 유아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원인과 결과를 장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유아견’의 핵심이다.
💢💔유아견에 빠져있는 한, ‘나는 존재한다’, ‘그 사람은 존재한다’, ‘그것은 존재한다’라고 생각함으로써, 존재나 중생과 물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 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은 수행자의 시각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범부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다섯 빅쿠는 붓다의 독려로 오래지 않아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제거해버렸다.
빠띠빠다paṭipadā(수행)의 관점에서, 물질과 정신이라는 상카라담마saṅkhāra-dhamma를 ‘우빠다낙칸다’(5취온)라고 부르기도 하고, 원래 이름 그대로 ‘물질과 정신 상카라’라고도 부른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사실은
●덩어리가 아님에도 덩어리로 알고, ●따로따로임에도 하나인 줄로 잘못 안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음에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고 알고,
●아름답지 않은 ‘아수바’의 특성만 있음에도 아름다운 ‘수바’의 특성이 있다고 잘못 안다.
결국 상카라담마는 진정 고통일 뿐이지만, 각자 나름의 알음알이로 ‘좋아할 만한 것, 집착할 만한 것, 기대할 만한 것’으로 착각한다.
붓다께서는 왑빠에게 이러한 세간, 5취온, 12연기를 관찰하게 하셨다. 그것들을 관찰할 때 범부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바르게 알도록 관찰하게 하셨다. 즉 무상·고·무아의 특성이 드러나도록 관찰하게 하신 것이다.
관찰해야 하는 대상들을 세간이라 부르든, 12연기라 부르든, 5취온이라 부르든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관찰하는 대상들의 본질은 자신의 의식 안에 떠오르는 물질과 정신일 뿐이라는 점이다. 물질과 정신 대상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올 때, 밖으로부터 들어와 비추어지기도 하고 안으로부터 들어와 비추어지기도 한다. 밖과 안, 둘 다로부터 들어와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와서 비추어지든, 어느 시점(과거·현재·미래)으로부터 와서 비추어지든,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은 바로 지금 들어오는 물질과 정신일 뿐이다.
이 물질과 정신 대상을 관찰할 때 위빳사나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위빳사나 지혜라는 것이 다름 아닌, 세간에서 말하는 8정도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8정도가 출세간에서의 8정도가 되어야 진짜 도성제(막가삿짜magga-sacca)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막가삿짜가 되어야 ‘닙바나’(열반)를 눈앞에 볼 수 있다. 진짜 행복, 거짓이 아닌 진정한 행복인 ‘산띠수카santi-sukha’(고요한 행복)를 맘껏 누릴 수 있다.
산띠수카를 찾고 있던 다섯 빅쿠 중에서 첫 번째로 안냐시 꼰단냐가 이것을, 즉 열반을 직접 본 뒤에 붓다 앞에서 ‘에히 빅쿠’로 빅쿠의 생을 얻었다. 이제 다음 차례가 된 왑빠 또한 기나긴 생 내내 그가 찾아 헤매던 산띠수카를 얻을 것이다. 이에 붓다께서는 산띠수카를 찾는 과정에서 활용해야 하는 8정도 중 삼마깜만따sammā-kammanta를 이해하도록 왑빠에게 설하신다.
삼마깜만따(바른 일, 바른 행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란 나쁜 습관(習)들을 피하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자면, 우리 마음상태를 실라위숫디sīla-visuddhi(계 청정)를 시작으로 찟따위숫디citta-visuddhi(마음 청정)까지 올릴 수 있도록 보시·지계·수행이라는 ‘뿐냐끼리야puñña-kiriya’ 선업을 짓는 것을 말한다.
☸️💎보시로 탐욕을 죽인다. 탐욕을 죽이면 행복해진다.
☸️💎지계로 성냄을 죽인다. 성냄을 죽이면 건강해진다.
☸️💎수행으로 지혜를 날카롭게 한다. 날카로운 지혜는 어리석음을 죽인다.
붓다께서는 이와 같은 3가지 법을《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nikāya》<다사까 니빠따dasaka-nipāta>(10의 모음)와 <마하담마빨라 자따까mahādhammapāla-jātaka>(447번 자따까)에서 설하셨다. 이 자따까를 보면 숫도다나 왕은 아나가미anāgāmi(아나함)가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생을 위해서도 지금 행복, 건강, 지혜가 중요하지 않은가? 삼마깜만따(바른 행위)의 기본적인 의미는 몸으로 짓는 나쁜 습관 3가지(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를 피하는 것이다.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생계활동과 무관한 영역에서 나쁜 습관 3가지를 피하는 것이다.26)
인간으로 태어나 이번 생을 살아가는 동안, ‘몸으로 짓는 업’과 관련해서 나쁜 습관 3가지를 피하면 자동적으로 그 나머지인 좋은 ‘몸의 업’을 지을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몸으로 짓는 나쁜 업을 피해야 한다.
이것은 삼마깜만따(바른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다. 이는 평범한 이들이 깜맛사까따삼마딧티냐나kammassakata-sammādiṭṭhi-ñāṇa(업과 업의 결과를 믿음)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삼마깜만따의 완성은 낮은 의식 수준에서 한 단계씩 올라가서 열반을 눈으로 보는 최고 수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가고 서고 앉고 눕는 4가지 자세 자체가 실은 모두 일이다. 삼무띠삿짜로서 보든 빠라맛타삿짜로서 보든 세상이라는 것은 늘 일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서 ‘삼마깜만따’란 ‘바른 일’을 말하는 것이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삼마깜만따’라는 8정도의 요소를 4성제를 깨닫는 방법 중의 하나로 활용하셨다. 다시 말하지만 ‘삼마깜만따’를 ‘바른 일’이라고 부른다. ‘삼마깜만따’의 본질을 문자 그대로 보자면, 좋은 의도가 분명한 ‘사마다나 위라띠samādāna-virati’(오계를 받아 지켜서 불선업을 피함)이다.
‘위라띠’란 ‘불선업을 피함’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른 일을 함을 뜻한다. 단지 나쁜 일을 피한다는 것만으로는 전혀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환자와 다를 바 없다. 소극적인 의미만 된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뭔가 좋은 일을 해야 한다.
마음부수들 중 ‘쩨따나cetanā’(의도)를 통상 ‘독려함’이라고 번역한다. 좋은 의도는 선명한 삼마깜만따가 촘촘히 이어지도록 ‘독려하는’ 특성이 있다. 나아가 8정도가 잘 이루어지도록 독려하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삼마딧티는 몸과 마음의 무상·고·무아의 특성을 보도록 관찰하는 것이다. 삼마상깝빠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삼마딧티가 볼 수 있도록, 이쪽과 저쪽, 앞과 뒤, 안과 밖, 위와 아래, 지그재그 등 모든 방향으로 돌려가며 보여줘야 한다. 삼마와짜는 알아야 할 이름과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해 절반이 아닌 완전한 앎이 되도록 해준다.
‘삼마깜만따’가 이 3가지 도의 요소들이 각각의 관련된 일에서 서로서로 이어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삼마깜만따의 역할은 매우 광범위하다. 세간의 영역에서부터 출세간의 영역 끝까지 아우른다. 촘촘하게 해야 하는 일에는 논에서 쟁기질하는 것,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서 도와 과 그리고 열반을 얻을 때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삼마깜만따의 일은 매우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빳사나로 관찰해서 세상의 본질을 발라내면, 결국 연기법을 얻는다. 연기법에서 그 핵심만 뽑으면 아윗자, 상카라로 시작되는 12가지 조건을 얻는다. 12가지 조건의 핵심을 찾으면 5취온(우빠다낙칸다)을 얻는다. 우리는 우빠다낙칸다 5가지가 각각의 문으로 들어올 때마다, 무상·고·무아가 분명해지도록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사띠해야 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위빳사나로 관찰한다’고 한다.
위빳사나로 관찰하는 동안, 자신의 의식의 흐름에 떠오르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들을 바로 지금 현재에 하나씩 하나씩, 따로따로 관찰해야 한다. 또한, 그 원인과 함께 대상의 위세사락카나visesa-lakkhaṇa(고유의 특성)가 드러나도록 관찰해야 한다. 그다음에 이러한 모든 물질과 정신이 갖고 있는 사만냐락카나sāmañña-lakkhaṇa(공통된 특성) 하나만 드러나도록 관찰해야 한다. 사만냐락카나란 바로 무상·고·무아라는 특성뿐이다. 요약하자면, 물질과 정신 각각의 여러 가지 위세사 또는 사바와락카나sabhāva-lakkhaṇa로부터 이들의 1가지 공통된 특성인 사만냐락카나에 이르도록 관찰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기억할 만한 사리뿟따 존자와 아누룻다anuruddha 존자의 대화를 보이겠다.
하루는 아누룻다 존자께서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한다.27)
“나는 딥바짝쿠 아빈냐나dibbacakkhu abhiññāṇa(천안통)로 천 개의 세상을 볼 수 있고, 물러섬이 없는 정진력을 가졌고, 사띠가 성성하고, 고요함이 충분하고,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게 둘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아라한 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아누룻다 존자여,
☸️딥바짝쿠 아빈냐나로 천 개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에 《교만》이 일어났습니다. 아누룻다 존자여,
☸️ ‘나에게는 물러남이 없는 정진력도 있다. 사띠가 성성하다. 고요함으로 채워져 있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정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에 《들뜸》이 생겨났습니다. 아누룻다 존자여,
☸️ ‘이렇게 아라한 과를 얻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건만 지금까지 나는 아라한 과를 얻지 못했다’라는 생각으로 그대의 마음에 이미 《후회》가 일어났습니다. 부디, 그대의 마음에 일어난 교만, 들뜸, 후회라는 이 3가지를 버리고 이 3가지에서 벗어나 열반으로 자신의 마음을 이끄십시오.”
위 말씀에서, 사리뿟따 존자께서는 아누룻다 존자에게 드러나고 있는 상카라담마들의 위세사 락카나(고유한 특성)를 개인의 취향으로 관찰하지 말고, 법의 순리인 사만냐락카나(공통적인 특징)가 드러나도록 관찰할 것을 독려한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우리도 아누룻다 존자의 경우처럼 의식 속에 미세하게, 허나 공고하게 스며있는 습을 벗겨내야 한다. 자신의 의식에 드러나는 대상을 – 물질이든 정신이든 – 위빳사나로 관찰할 때, 몸과 마음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고유한 특성(위세사락카나)들로부터 하나의 공통된 특성(사만냐락카나)이 드러나도록 관찰해야 한다. 그때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각각이 아니다. 모두 하나일 뿐이다. 그 하나가 바로 아낫따(무아)이다. 아낫따(무아)를 보았다면 무상과 고통도 본 것이다. 몸과 마음의 공통적 특성인 ‘아낫따’(무아)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왑빠는 어떻게 관찰했을까?
사실 왑빠의 의식 안에, 사띠와 위리야viriya(노력) 등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부수들 중 냐나삼빠윳따ñāṇa-sampayutta(지혜와 함께하는) 담마들이 분명하게 있었다. 왑빠는 붓다의 사사나sāsana(가르침)를 받기 전에도 이미 냐나삼빠윳따 담마를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었다.
바로 지금 그 담마들을 활용해야 한다. 보디빡키야 담마bodhipakkhiya-dhammā(깨달음을 향해 가는 날개. 37조도품)라고 하는 도의 지혜의 범주 안에 들도록 해야 한다. 보디빡키야 담마들의 개수는 37가지인데, 37가지의 본질은 14가지이다.28) 이때 삼마깜만따(바른 행위)가 핵심이 된다. 삼마깜만따는 그 많은 보디빡키야 담마들의 본질이 서로서로 융합되도록 독려함으로써, 한 곳으로 몰아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몰아가 주어야만 그 담마들이 한 몸이 되어 크나큰 힘을 발휘하고 결국에는 일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보디빡키야 담마들은 큰 일을 이루어 낼 뿐만 아니라, 보디빡키야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지막에는 도의 요소들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도의 요소에 적합한 수준에 이르러야 막가삿짜라는 이름도 얻을 것이다. 이때 삼마깜만따만 들어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보디빡키야 담마들이 서로서로 이어져 자신의 역할에 걸맞은 일을 한다. 붓다께서는 37가지 보디빡키야 담마들이 일을 하는 동안, 각 요소들의 힘이 어떤 것은 넘치고 어떤 것은 부족할 수 있지만 사띠의 힘은 항상 부족하며 과함이 없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셨다.
아무튼 나머지 법들을 독려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삼마깜만따의 막중한 역할이 있다. 8정도 중에서 삼마깜만따는 계학에 속한다. 지계·사마디·지혜라는 순서로 익혀나갈 때 지계는 기반석이다. 토대가 되는 기반석이 굳건해야 그 위에 올리는 벽돌도 튼튼할 수 있다. 위에 겹겹이 쌓여지는 벽돌 구조의 안정성은 사실 기반석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달려 있다. 그래서 삼마깜만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삼마깜만따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아난다 존자가 아라한 과를 얻는 과정이 기억할 만하다.
1차 상가결집이 열릴 무렵, 아난다 존자는 아직 수다원이었다. 그런데 아난다 존자는 붓다께서 설하신 8만 4천 법문을 모두 암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수다원임에도 불구하고 70만 빅쿠를 대표하는 상가결집에 참석하는 자격을 얻었다.
마하깟사빠mahākassapa 존자께서 상가결집에 참석할 상가를 구성할 때 아라한 499분을 뽑고 마지막 한 분으로 수다원인 아난다 존자를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1차 상가결집에서 상기띠까라까saṅgīti-kārakā(상가결집을 행한 분들)는 500분이 되었다.
상기띠까라까 500분에서 아난다 존자 외에 다른 분들은 모두 아라한이었다. 마하삭까라자 148년(BC 544년) 안거 중간달 20일에 상가결집을 열었을 때, 아난다 존자는 바로 전날까지 밤새도록 법당 밖에서 행선을 하며 위빳사나에 매진했으나 아라한 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삼마깜만따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여, 위리야(노력)만 넘쳐서 들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난다 존자는 행선을 멈추고 잠시 피곤을 풀기 위해 발을 씻고 선원으로 들어가 침상에 앉았다. 그때도 사띠를 놓지 않고 위빳사나로 관찰하면서, 침대에 몸을 눕히려고 할 때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베개 위에 머리가 닿기 직전! 삼마깜만따의 도움으로 바른 노력과 바른 집중이라는 2가지 도의 요소가 균형을 이루면서 드디어 아라한 과를 얻었다.
이 사사나 안에서 행주좌와 4가지 자세가 아닌 다른 자세로 아라한이 된 분은 아난다 존자 한 분뿐이다. 아난다 존자는 1차 상가결집에서 위삿자까visajjaka(답하는 존재)의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세간의 일이든 출세간의 일이든, 바르고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지 않고서 바르고 훌륭한 결과를 얻는 법은 없다.
세간에서는 삼마깜만따가 몸의 행위와 관련된다. 그렇기에 삼마깜만따가 일어날 때마다 시간상으로도 다르고 대상도 다르다.29) 이런 것을 빨리어로 ‘나낙카나nānakkhaṇa’ 혹은 ‘아니야따요기aniyata-yogi’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출세간에서는 이와 같이 결과가 다르게 나오지 않는다. 동시에 다 갖춘다. 출세간 8정도에서는 보디빡키야 담마 모두가 – 그것이 위라띠(불선업 지음을 ‘피함’. 계 지킴과 관련된 마음부수)이든 아니든 – 동시에 한 덩어리로 녹아서 열반을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마깜만따의 역할은 – 마음에 관련된 것이든 말에 관련된 것이든 행위에 관련된 것이든 – 보디빡키야 담마 37개 모두를 모아 ‘동시에 한 덩어리로’ 열반을 볼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도록 있는 힘껏 밀어 올리는 것이다.
위숫디visuddhi(청정함) 7가지 중 실라위숫디(계 청정) 정도만 갖추어지면 삼마깜만따가 충분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삼마깜만따는 닙바나를 보기 위해 기초가 되는 기반석이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몸으로 짓는 나쁜 업’의 대상을 순간적으로 피하는(따당가빠하나tadaṅga-pahāna) 수준에서 닙바나를 대상으로 보아 불선업의 대상을 완전히 제거하는(사뭇체다빠하나) 수준에 이를 때까지 위빳사나 지혜 단계별로 점점 더 ‘삼마깜만따’를 증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삼마깜만따’가 보디빡키야 담마에 속하지 않는 한, 특히 8정도 중 하나로 속하지 않는 한, 고귀한 4가지 진리(아리야삿짜. 4성제)를 얻을 수 없다. 고귀한 4가지 진리를 얻지 못하면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위빳사나 수행을 처음 할 때는 ‘삼마깜만따’를 포함한 위라띠 도의 요소가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 옳다. 왜냐하면 위빳사나의 대상들은 피해야 하는 나쁜 대상들이 아니라, 단지 물질과 정신이라는 중립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위빳사나 수행에 위라띠가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더라도, 3학을 닦기 위해 마음의 청정을 이루는 기본 조건으로 위라띠가 들어가게 된다. 그것을 빨리어로는 ‘사마다나 위라띠’(5계를 받아 지녀 불선업을 피함)라고 한다.
이 ‘사마다나 위라띠’를 시작으로, ‘삼마깜만따’가 보디빡키야에 들어있지 않다면 들어가도록 정진해야 한다. 또한 8정도 안에 들어있지 않다면 들어가도록 정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삼마깜만따가 보디빡키야 담마들의 각각의 의무들이 빈틈없이 이어지도록, 보디빡키야 담마들을 움켜쥐고 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세간을 초월하는 출세간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 출세간의 권능이란 오직 도의 지혜, 과의 지혜뿐이다.
왑빠가 물질과 정신을 위빳사나로 관찰할 때, 그의 의식 안에 삼마깜만따가 다른 8정도의 요소들과 함께 연관되는 짝으로 포함되지 않다면, 삼마깜만따가 아직 힘없이 고개 숙이고 있거나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다.
다섯 빅쿠가 고귀하신 붓다로부터 위빳사나를 배우기 전 이미 계 청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쁜 습관들은 말끔히 제거된 상태였다. 따라서 삼마깜만따가 속하는 위라띠 담마 3가지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나 삼마깜만따를 통해 몸으로 짓는 나쁜 습관들을 사뭇체다빠하나(뿌리까지 자름)로 제거하는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삼마깜만따가 남은 8정도의 요소 7가지와 함께 동시에 녹아들기 이전까지는 ‘도의 지혜, 과의 지혜’가 생겨날 수 없다.
그렇기에 보디빡키야 담마들을 증장시켜 최종적으로 8정도에 이르도록 정진할 때, 삼마깜만따는 ‘동시에’ ‘남은 도의 요소들과 함께’ 그리고 ‘항상’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한 덩어리로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붓다께서 직접 왑빠에게 ‘삼마깜만따 도의 요소’를 가르치신다. 보디빡키야 담마 무리 안에서 풀 죽어 묻혀 있는 ‘삼마깜만따’를 깨우고 드러내어, 다른 담마들 모두를 빈틈없이 하나로 결합하도록 독려함으로써, ‘막가냐나’(도의 지혜)를 얻게 한다. 닙바나를 눈앞에서 보게 한다. 그들이 집을 떠나면서까지 열렬히 얻고 싶어 했던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붓다께서는 왑빠에게 ‘삼마깜만따 막강가sammākammanta-maggaṅga’(도를 볼 수 있는 ‘바른 행위’)를 그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정확하고 효과 있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므로 닙바나를 보고 싶은 이라면 누구라도 8정도 안에서 ‘삼마깜만따’를 8정도의 다른 구성요소들과 함께 항상, 동시에 연관되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삼마깜만따라는 단어는 합성어로, ‘삼마sammā +깜마kamma + 안따anta = 삼마깜만따’라는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안따’는 의미가 없고 ‘삼마’(바른)만 의미가 있다. 단어의 뜻을 있는 그대로 보자면, ‘바르고 좋은 일’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깜마’는 일이라는 뜻이다. 아비담마의 시각에서 보면, 일이란 – 정신에 관련된 것이든 말에 관련된 것이든 – 의도가 들어가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의도가 들어가야 업이 된다. 업이 되어야 결과를 준다. 그러나 업이 만들어질 때마다 결과를 주는 것도 아니다. ☸️업이 함량을 갖추어야만 결과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서 삼마깜만따는 나쁜 습관들을 피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의도를 완벽하게 밀어넣어, 보디빡키야 담마 37가지 모두 빈틈없는 밀도로 한 덩어리가 되도록 다져가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삼마깜만따는 8정도의 구성원으로서 그 의무를 완수한다.
삼마깜만따가 자신의 의무를 다했는지 다하지 않았는지를 측정할 때, 세간에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관점에서 판단한다.
1) 원인을 중점에 두고
결과를 중점에 두지 않는 시각
2) 원인을 중점에 두지 않고
결과를 중점에 두는 시각
3)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지 않는 시각
4)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는 시각
이런 4가지 관점은 종교적 견해에서 무엇을 중점에 두느냐에 따라 나눈 것이다. 다만 수행 중 삼마깜만따가 8정도 요소 중 하나로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수행자 스스로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1) 원인을 중점에 두고
결과를 중점에 두지 않는 시각
1)의 시각에서 어떤 행위를 할 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결과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전통으로 이어져 온 관습이나 익숙한 습관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자기 종교의 경전을 따라 창조자 혹은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스스로 직접 봤다. 경험했기에 확실하다’,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양쪽 모두 자신의 믿음만이 중요할 뿐, 실제 결과가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지는 관심이 없다. 이런 식으로 어떤 이들은 ‘영원불멸한 신 또는 이런저런 신통자나 창조자가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런 건 상상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둘 모두 결과를 확실히 예측할 수 없고 원인만 분명히 있다.30)
기대한 결과를 얻든 얻지 못하든 현재 믿고 받아들인 원인에 따라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런 시각을 ‘결과를 배제한’ 견해라고 한다. 빨리어로는 ‘낫티까딧티natthika-diṭṭhi’라고 한다. 잘못된 견해이다.
2) 원인을 중점에 두지 않고
결과를 중점에 두는 시각
2)의 시각에서는 원인을 일관되게 말할 수 없다. 원인은 상황에 따라 적절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합법한지 불법한지는 상관없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는 것만 중요하다. 거짓말이나 이간질로 목적한 바를 얻었다 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 최악의 예로, 아버지를 죽여야 왕이 된다면 아버지를 죽여도 된다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를 ‘원인을 배제한 견해’라고 한다. 빨리어로는 ‘아끼리야 와다akiriya-vāda’이다. 이 역시 잘못된 견해다.
3)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지 않는 시각
3)의 시각에서 보면,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좋은 의도로 어떤 일을 했음에도 비난받거나 지탄받기도 한다. 이간질을 잘하고 교활함에도 마치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대우받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우선에 두면서도 부끄러움 없이 자신만만하게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흔들어 대며 듣기 좋은 말만 하여 인기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 흐름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 같고 눈속임 같기도 하다. 될 듯하다가도 안 되고 안 될 듯하다가 되는 일도 있다. 방법과 목적 어디에도 ‘중심’을 둘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인 원인과 결과뿐이다. 원인에도 결과에도 중점을 두지 않는다. 그때 그때 닥치는 우연만이 있다. 이런 견해를 ‘원인과 결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한다. 빨리어로는 ‘아헤뚜까 딧티ahetuka-diṭṭhi’라고 부른다. 잘못된 견해이다.
4)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는 시각
4)의 시각에서는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를 중심에 두고 본다. 진정한 중심이라는 것이 원인과 결과 2가지이므로 원인도 직접 보아야 하고, 결과도 직접 보아야 한다.
☸️💎원인이란 ‘8정도’이고, 결과는 ‘닙바나’(열반)이다.
☸️💎그리고 열반의 핵심은 탐욕 없음이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위빳사나 지혜로 관찰할 때, 자신의 의식 안에 ‘탐욕’이 엷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바른 길(8정도)이 되는 그 원인으로서 ‘삼마깜만따(바른 행위)’가 자신의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수행하는 요기가 자신의 의식 안에 ‘탐욕’이 엷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삼마깜만따’가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수행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즉 삼마깜만따가 의무를 다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사마다나 위라띠’(계를 받은 뒤 불선업을 피하는) 정도만 겨우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뭔가에 파묻힌 채 잠들어 있는 것이다.
중도의 견지에서 바로 이러한 시각이 바른 견해(삼마딧티), 즉 바른 시각이 된다. 이를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바르게 분별하는 가르침)라고도 한다.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를 중심에 두는 견해이다.
☸️💎자신의 의식 안에서 탐욕이 조금 멀어지면 열반을 조금 얻는다. 조금 행복하다. 많이 멀어지면 열반을 많이 얻는다. 많이 행복하다. 완벽하게 멀어져 버리면 특별히 말할 필요도 없다. 진짜 ‘산띠수카’(고요한 행복)이다.31)
☸️💎이 견해는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를 중심에 둔다. 원인이 바른지 그른지 스스로 점검해서 알고, 결과가 바른지 그른지도 스스로 점검해서 안다.
☸️💎 원인과 결과는 항상 연관되어 있으므로 늘 함께 간다. 출세간과 관련하여 길이 되는 원인도 정해져 있고, 그 목적지가 되는 결과도 정해져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 원인과 결과가 연관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름 아닌 ‘삼마깜만따’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붓다께서 왑빠에게 8정도 안에서 ‘삼마깜만따’가 다른 요소들과 항상 동시에 짝을 지어가는 도의 요소가 되어야 함을 직접 가르치신 것이다. 삼마깜만따(바른 행위)가 다른 8정도의 구성원들과 동시에 항상 짝을 이루어 일어나자, 왑빠는 마침내 열반을 눈앞에서 보고 수다원이 되었다.
14. 생이 생겨남으로
생이란 전장(戰場)과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에는 범천의 생, 천신의 생, 인간 생, 4악도의 생 등 31개 세상32) 모든 중생들의 생이 포함된다.
전쟁에서 선업과 불선업들이 서로 부딪친다. 담마와 아담마가 쉼 없이 서로서로 충돌한다. 이러한 전쟁터에서 선업이 이기면 행복하다. 불선업이 이기면 고통스럽다. 담마가 이기면 평화롭다. 아담마가 이기면 들끓는다.
선업은 좋은 결과를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 불선업은 좋지 않은 결과를 주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담마는 바른 성품을 지니고 평화로움을 가져온다. 아담마는 바르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고 들끓게 한다. 당연히 중생들은 행복한 생과 평화로운 생을 갈망한다. 고통스러운 생이나 들끓는 생을 혐오한다.
☸️💎범천의 생과 천신의 생이라는 전장에서는, 선업과 담마가 이미 불선업과 아담마를 제압했기에 그들의 생은 행복하고 평화롭다. 그래서 중생들은 범천계와 천상계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자신들의 능력이 닿는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업들을 실천한다.
☸️💢4악도라는 전장에서는 불선업과 아담마가 선업과 담마를 제압한다. 그래서 4악도는 늘 고통스럽고 들끓는다. 중생들은 4악도에 태어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몸서리친다. 하지만 아무리 두려워하고 피하려 해도 ‘4악도가 너희들의 집이다’(짯따로 아빠야 사까게하사디사cattāro apāyā sakagehasadisā)라는 말씀대로,
실은 우리에겐 4악도가 고향인 셈이고 다른 세상들은 손님으로 잠시 머무르다 지나가는 일종의 휴게소일 뿐이다.
인간 생이라는 전쟁터는 더 거칠고 격렬하다. 선업과 담마가 이길 때도 있다. 불선업과 아담마가 우위를 점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선업과 아담마가 선업과 담마를 제압할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죽어서 천상계와 범천계에 태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4악도에 태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장로들께서 주석서에 ‘4악도는 중생들이 소유하는 집’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범천의 생은 범천의 행복, 천신의 생은 천신의 행복, 인간 생은 인간의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집주인으로서 소유하는 행복이 아니라 손님으로 와서 잠시 쉬어가는 행복이다. 영원한 행복이 아니다. 일시적일 뿐이다. 진짜 행복이 아니다. 가짜 행복일 뿐이다. 왜냐면 선업과 담마가 불선업과 아담마를 완전히 제압하여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한시적인 승리의 결과로 얻은 행복과 평화를 어찌 주인이 누리는 행복과 평화,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느낌의 행복을 빨리어로는 ‘웨다이따수카vedayita-sukha’라고 부른다. 아비담마 가르침에서 웨다이따수카는 선업에도 있고 불선업에도 있다. 축생들의 세상에서도 이런 행복이 있다. 독수리들은 썩은 고기를 보면 즐겁고 기쁘다. 개나 돼지들도 마찬가지다.
인간계에서도 이런 특성을 볼 수 있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사람들, 부정한 방법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 부정한 방법으로 유명해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은 재물이나 지위, 명성을 보고 행복해한다. 즐거워하고 흡족해한다. 자랑스러워하며 으스댄다. 그런 사람들과 같은 성향의 사람들, 같은 수준의 사람들은 그를 높이 치켜세운다. 칭송한다. 부러워한다. 흉내 낸다. 그러나 성향이 다르고 수준이 다른 존재들은 부러워하지 않는다. 따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혐오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존재들의 행복은 독수리나 개돼지의 행복과 특별히 다를 게 없다. 4성제의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방법으로 얻은 범천·천신·인간의 행복조차도 그저 ‘변하고 말 고통’(위빠리나마 둑카)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생이라는 것 자체가 실은 모두 명백한 고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이란 업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모든 업은 – 그것이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 ‘어리석음과 집착’이라는 2가지 원인이 뿌리이자 기반이다. 뿌리에 해당하는 이 2가지 원인이 스스로 윤회의 굴레를 굴리는 잠재된 번뇌(아누사야낄레사anusaya-kilesa)인 것이다. 31개 세상에 사는 모든 생들은 이러한 잠재된 번뇌를 뿌리로 하여 태어났고 그 번뇌를 디디고 서 있는 것인데, 그들이 어찌 진정한 행복, 바른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무명과 집착을 죽여서 ‘업’을 잘라버려야 진짜 행복, 참다운 행복이 생겨난다. ‘업’이 잘려야 생이 잘리는 것이다.
《넷띱빠까라나nettippakarana》33)에서는 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시각은 ‘앗사다assāda’이다. ‘앗사다’란 달콤함, 즐거움. 즉 ‘행복’이다. 두 번째 시각은 ‘아디나와ādīnava’ 이다. ‘아디나와’란 ‘결점’이다. 세 번째 시각은 ‘닛사라나nissaraṇa’이다. ‘닛사라나’란 생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이 3가지 시각들 중에서 ‘앗사다’에는 행복이라는 특성이 있다. ‘아디나와’에는 고통의 특성이 있다. ‘닛사라나’에는 평화와 자유의 특성이 있다. 이 3가지 시각은 지혜의 정도가 어린가 성숙한가에 따라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지혜 수준에 따라 생을 각기 다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다.
유아견으로 생을 보면, - 각자의 성향에 따라 즐길 만한 대상이 다르겠지만 - 생은 모두 즐길 만한 것이다. 성냄의 성향이 강한 사람도 성냄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다른 성향의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비유컨대 소설 애호가들 중 어떤 이는 연애소설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SF소설을 좋아하듯이, 자신들의 성향에 따라 세상사는 즐길 만한 것들뿐이다.
생을 삼마딧티(바른 견해)로 보면, 모든 것이 고통으로 보인다. 유아견으로 보는 사람에게 생은 행복한 것이지만, 위빳사나 삼마딧티vipassanā-sammādiṭṭhi로 보는 사람에게 생은 고통일 뿐이다. 더 나아가 로꿋따라 삼마딧티lokuttara-sammādiṭṭhi(출세간의 바른 견해)로 보는 사람은, 생을 넘어서서 생으로부터 벗어난 자리인 열반을 본다.
BC 589년 음력 6월 보름 토요일 해질녘 바라나시bārāṇasī 가까운 곳 미가다야migadāya 숲에서, 고귀한 붓다께서 다섯 빅쿠에게 <초전법륜경>을 설하고 계셨다. 이때 붓다께서 생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자,
☸️바로 그날 꼰단냐는 수다원 과를 얻어 ‘에히 빅쿠’를 통해 빅쿠가 된다.
☸️그달 16일에는 왑빠가,
☸️그달 17일에는 밧디야bhaddiya가,
☸️그달 18일에 마하나마mahānāma가, ☸️와소달 19일에는 앗사지assaji가... 다섯 빅쿠 모두 앞다투어 차례차례 수다원 과를 얻은 뒤 ‘에히 빅쿠’를 통해 빅쿠가 되었다. 이리하여 붓다라따나buddha-ratana(불보)는 붓다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시작되었고, 담마라따나(법보)와 상가라따나(승보)는 미가다야 숲(사슴동산)에서 시작되었다.
다섯 빅쿠는 모두 10만 번의 세상 동안 빠라미를 채워서 마하사와까(대제자)가 되실 분들이었다. 붓다께서는 BC 589년 음력 6월 보름날, 이들 다섯 빅쿠를 모아 놓고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을 설하셨다.
그다음날인 6월 16일부터는 차례로 한 명 한 명에게 법을 설하셨다. 우선 16일에는 왑빠에게만 설하셨다. 다른 네 분은 탁발을 나가고 붓다와 왑빠만 남았다. 이들 네 분이 모두 탁발에서 돌아왔을 때 왑빠는 수다원이 되어 있었다. 네 분이 받아온 탁발로 붓다를 포함하여 여섯 분이 나누어 드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세 빅쿠(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도 한 명씩 가르침을 받아 다섯 빅쿠 모두 수다원이 되었다.
그전까지 다섯 빅쿠는 생과 주변 환경을 나와 나의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붓다께서 그들의 견해를 벗겨내기 위해, ‘생이란 다섯 무더기인 물질과 정신이 생겼다 사라짐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다. 자아란 없다. 나의 것이란 없다. 물질과 정신만 쉼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원리를 설하셨다. 다섯 빅쿠는 이미 빠라미를 채우신 분들이라서 붓다께서 설하시는 대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껍데기를 뜯어낸 뒤에 껍데기 뒤에 가려져 있던 몸과 마음을 보았고, 그때 물질과 정신이 순간순간마다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상의 특성, 고통스러운 특성, 무아의 특성을 보게 된다. 생겨날 것들은 생겨나고, 사라져갈 것들은 사라진다.
생겨나는 물질 없이 생겨나는 움직임이란 없다. 사라지는 물질 없이 사라지는 움직임이란 없다. 그래서 물질과 움직임을 따로 떼어 내어 볼 수 없다. ●움직임은 ‘시간’의 징표이다. ●물질은 ‘공간’의 징표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도 – 선업으로 얻은 생이든 불선업으로 얻은 생이든 – 모든 생은 하나의 전략적 배치라고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순간에 생겨난 물질과 정신은 첫 번째 순간에 사라진다. 결코 두 번째 순간으로 건너가지 않는다. 이렇듯 시간이 물질과 정신을 잡아 삼켜 버린다. 그 와중에 두 번째 순간에, ‘공간’이 그 순간과 관련된 원인들로 물질과 정신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 순간에 생겨난 물질과 정신들은, 첫 번째 순간에 생겨난 물질과 정신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의 이어짐으로 공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물질과 정신이다. 이렇게 공간이 물질과 정신들을 만들어 낸다.
이런 방법으로 각각 관련된 원인들의 지원을 받아 ‘공간’이 물질과 정신을 만들어 내면, ‘시간’이 삼켜버리고 ... 이렇게 물질과 정신이 매 찰나마다 늙고 시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한 생을 마무리 짓고 떨구어진다. 한 생에서 어떤 존재가 완전히 매듭지어져 떨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죽음을 넘기자마자 새로운 생, 입태가 닥쳐온다. ‘공간’이 물질로서 생겨나고 ‘시간’이 움직임으로서 사라진다. 생김과 사라짐으로 ‘공간’과 ‘시간’이 서로 격전을 치른다. ‘공간’이 생겨날 수 있는 바로 그만큼의 순간만 ‘시간’이 허락하고, 그다음 순간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오까사로까okāsa-loka(공간 세상)라고도 하고, 삿따로까satta-loka(중생 세상)라고도 하고, 상카라로까saṅkhāra-loka(끊임없이 생멸하는 세상)라고도 부른다.
‘시간’의 권능이 31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생들의 생을 지배하는 것이다. ‘시간’은 공간이 펼쳐지는 바로 그만큼 따라잡기 마련이다. ‘공간’이 물질이고, ‘시간’이 움직인다. 물질(공간)이 있으면 진동(시간)이 있다. 물질이 첫 번째 찰나에 생기고 그다음 두 번째 찰나에 다른 물질이 생겨날 때, 첫 번째 찰나에 생겨난 물질은 두 번째 찰나의 물질과 정신보다 이미 늙고 시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간으로 인하여 사라져가는 물질과 정신이라는 토대 위에 발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찰나에 생겨난 물질보다 이미 더 깊숙이 늙고 시들어 있다.
이렇게 순간순간 끊임없이 시들고 또 시들어간 후, 마지막 순간에 한 생을 매듭짓듯 생이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무상한 특성, 고통스런 특성, 무아라는 특성이다. 이러는 와중에 근심과 통곡이 비집고 들어와 우리를 짓이기며 고통스럽게 한다.
[주해]
21) 앙굴리말라aṅgulimāla의 전생인 뽀리사다는 인육을 먹는 왕이었다. 후에 붓다가 되시는 보디삿따가 이때 마하수따소마 왕이었는데 어느 날, 뽀리사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마하수따소마는 뽀리사다에게 죽기 전에 법문을 들은 후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가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약속한 날짜에 돌아왔다. 뽀리사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그를 보고 깊이 감명받아 법문을 청하고,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이에 마하수따소마는 자신이 아닌 함께 잡혀 있는 10명의 왕들을 살려줄 것을 소원했다. (537번 자따까 참고.)
22) 보디삿따가 수완나사마suvaṇṇasāma(아름다운 사마)라는 이름으로, 시각을 잃은 부모님을 봉양하며 살 때의 일이다. 사냥을 나온 삘리약카 왕이 수완나사마를 사슴으로 착각하고 독화살을 쏘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위해 “우리 아들은 바른 법을 실천하는 이, 부모를 공경하는 이였다. 이러한 진실의 힘으로 독이 사라지기를!”이라고 진실의 맹세를 했다. 이를 지켜보던 바후순다리bahusundarī 천녀(과거 7생 동안 수완나사마의 어머니)도 “일생 동안 내가 수완나사마보다 사랑한 이는 없다. 이러한 진실의 힘으로 독이 사라지기를!” 하고 진실의 맹세를 했다. 그러자 독이 완전히 사라졌다. (540번 자따까 참고.)
23) 보디삿따가 메추라기로 태어났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산불이 나자 그의 부모까지도 아기 메추라기를 남겨두고 떠났다. 그러자 메추라기는 과거에 뵈었던 붓다의 공덕을 회상하며, “나는 아직 어려 날개가 있으나 날 수 없고, 발이 있으나 걸을 수 없다. 부모마저 나를 버리고 떠났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러한 진실의 힘으로 산불아, 물러가라!”라고 진실의 맹세를 했다. (35번 자따까 참고.)
24) 붓다께서 <초전법륜경>을 설한 최초의 다섯 빅쿠, 여섯 번째로 아라한이 된 야사yasa 존자, 야사 존자의 친구 54명이 최초의 육십 빅쿠이자 아라한이다.
25) 《앙굿따라 니까야》 으뜸품(A1:14)에는 41명의 빅쿠(으뜸 칭호로는 47개), 13명의 빅쿠니, 11명의 남성 재가자(으뜸 칭호로는 10개), 10명의 여성 재가자가 나온다. 모두 합치면 80개의 으뜸 칭호를 받은 사부대중이 있다. 그러나 《테라가타 주석서》에서는 80명의 빅쿠 대제자를 따로 열거하고 있다.
●이중 사리뿟따 존자를 필두로 하는 오른편 대제자가 40분, ●목갈라나 존자를 필두로 하는 왼편 대제자가 40분이다. ●왑빠 존자는 사리뿟따를 필두로 하는 오른편 사와까(제자) 중 사리뿟따, 꼰단냐 존자 다음인 세 번째로 열거된다.
26) 생계활동을 하면서 살생 등을 하면 ‘바른 행위’가 아닌 ‘바른 생계’를 어기게 된다.
27) <아누룻다 경2>(A3:128).
28) 37조도품 중 성질상 공통된 요소들을 모아 추리면 14개가 된다. 사띠, 위리야, 빤냐, 사마디(= 에깍가따), 찬다, 찟따, 삿다, 삐띠, 빳삿디, 우뻭카(= 따뜨라맛잣따따tatramajjhattatā), 상깝빠(= 위딱까), 위라띠 3가지(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29)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행위를 피하는 것’과 ‘도둑질을 피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 대상도 하나는 술이고 하나는 타인의 물건으로 다르다.
30) 관습을 따르거나 자신의 경험만을 따르거나,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등으로 모두 다르지만,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이 이 모두는 자신의 경험 범주에 갇힌 주장이며, 실제 결과를 보증하지 못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자신의 믿음과 관습적 행위라는 원인은 있지만, 그 원인이 실제 결과를 보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과가 따르지 않는 원인은 결국 바르지 못한 원인이다.
31) 열반은 ‘느낌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고요하고, ‘모든 고통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A9:34 nibbānasukha-sutta, 《법구경》 202번 게송 참고.)
32) 3계(욕계·색계·무색계)를 다시 세밀하게 구분하면 31개 세상이 된다.
즉, ■4가지 욕계 악처(惡處): 1) 지옥 2) 축생 3) 아귀 4) 아수라,
■7가지 욕계 선처(善處): 5) 인간 6) 사대왕천 7) 삼십삼천 8) 야마천 9) 도솔천 10) 화락천 11) 타화자재천,
■16가지 색계 선처(善處): 12) 범중천 13) 범보천 14) 대범천 (여기까지 1선정) 15) 소광천 16) 무량광천 17) 광음천 (여기까지 2선정) 18) 소정천 19) 무량정천 20) 변정천 (여기까지 3선정) 21) 광과천 22) 무상천 23) 무번천 24) 무열천 25) 선견천 26) 선현천 27) 색구경천 (여기까지 4선정), ■4가지 무색계 선처(善處): 28) 공무변천 29) 식무변천 30) 무소유천 31) 비상비비상천을 합하여 ■■총 31가지 세상(존재 영역)이다.
33) '간략하게 설한 것에 대해 상세하게 그 뜻을 설명하는 데 제일'(A1:14)로 알려진 마하깟짜나 존자가 저술한 논서로 알려져 있으며, 미얀마에서는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에 포함시키고 있다.
- <행복을 찾아서> 中, 우 쉐아웅 지음,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옮김.
첫댓글 열반은 ‘느낌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고요하고, ‘모든 고통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4)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는 시각
4)의 시각에서는 원인과 결과 2가지 모두를 중심에 두고 본다. 진정한 중심이라는 것이 원인과 결과 2가지이므로 원인도 직접 보아야 하고, 결과도 직접 보아야 한다.
☸️💎원인이란 ‘8정도’이고, 결과는 ‘닙바나’(열반)이다.
☸️💎그리고 열반의 핵심은 탐욕 없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