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6일 주님 공현 후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카 4,14-22ㄱ)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bring glad tiding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captives and recovery of sight to the bli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o proclaim a year acceptable to the Lord.
말씀의 초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실현된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면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요한이 전한,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자라신 나자렛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사람들에게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려주신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묶인 이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회중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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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말씀의 ‘선포’를 ‘선동’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뜻하는 바가 이미 이루어져서 ‘현실’이 된 것을 말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처럼, 듣는 이에게 이미 현실이 된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선포하신 말씀은 가난한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에게 미래에 언젠가 주어질 해방의 소식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이들의 구체적인 현실이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해방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선동이란, 자신의 회심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조장하여 자신이 목적한 바대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안에는 추상적인 해방의 소리만이 난무할 뿐이지, 복음이 현실 속의 생생한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지, ‘복음으로 선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회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의 ‘선동자’들은 많지만, 복음적 가치를 사는 진정한 복음 ‘선포자’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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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기쁨으로 ‘한 해’를 지내라는 선언입니다. 눈먼 이들은 다시 보고, 가난한 이들은 기쁜 소식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으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사람들도 그분을 외면할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두려워합니다. 평생 가난을 벗지 못할까 봐 조바심합니다. 물질의 가난만이 아닙니다. 영적으로도 늘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기쁘게 살 수 없는 ‘함정’을 스스로 파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희년이며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도 확신이 없습니다. 이끄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놓아야 합니다. 모든 두려움의 원인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벗는 첫 번째 행위입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안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생각하며 ‘잡으면’ 안 됩니다. 그분께서 주신 것이기에 ‘끌어안아야’ 합니다. 두려움의 끈은 서서히 약해질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희년의 시작입니다. 매번 성체를 모실 때마다 희년의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바뀌기 마련입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시면, 희년은 내 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미국의 페퍼버그 교수에게는 ‘알렉스’라는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알렉스에게 말을 가르쳤는데, 이 앵무새는 글쎄 150개의 영어 단어의 의미는 물론 색깔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파란 열쇠 두 개와 빨간 열쇠 두 개를 보여 주고 파란 열쇠가 몇 개인지를 물으면 ‘두 개’라고 말하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물으면 ‘색깔’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앵무새를 ‘천재 앵무새 알렉스’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이 앵무새가 죽기 전날 밤에는 30년간 말을 가르친 자신의 주인인 페퍼버그 교수에게 “내일 봐,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어때요? 정말로 똑똑한 앵무새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다 큰 성인이 150개의 단어 의미만을 알고 있고, 색깔을 아주 어렵게 이해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아무도 ‘천재’라고 말하지 않겠지요. 오히려 ‘바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 이 모습을 동료 앵무새가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 정말로 이상하다고 앵무새이면서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오히려 흉을 볼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천재가 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가장 부족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들의 판단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판단이 가장 옳은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집니다. 가장 올바른 판단은 우리 인간들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판단을 내 판단의 기준에 따라 바꾸려고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세상에 더욱 더 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강자의 원칙을 따르려고 하면서 힘 있는 사람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이 올바른 세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판단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약자의 편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오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의 선포를 듣게 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 잡혀간 사람, 눈먼 사람, 억압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고통과 시련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서 하느님 판단은 세상 사람들처럼 강자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과연 누구의 입장에 서 있었을까요?
이제는 하느님처럼 약자와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기쁜 소식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결코 부자라고 할 수 없다(가스 브룩스).
기쁜 소식은 듣는 것에서
- 최견우-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 가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일부분을 낭독하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루카복음의 이 부분에서만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하느님 백성에게 당신 말씀을 전하십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입니다.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해 (희년) 를 선포하십니다. 희년은 죄의 용서와 구원을 상징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재창조되어 본래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것이 희년입니다. 희년은 예수님께서 육화하여 오심으로써 성취되었고, 그분의 말씀은 구원의 표징이자 정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진리를 왜곡하고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 그들이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 죄인들은 살아 있는 소경들이어서 주님께서 그들이 어둠이 아닌 빛 속에서 살도록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야 억압된 이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며 죄와 죽음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면 우선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이 좋다 해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귀는 자연스럽게 열려 있고 입은 열어야만 말을 할 수 있는데, 현대인들은 열린 귀를 막고 닫힌 입을 열려고만 하니 참 이상합니다. 듣는 것에서 기쁜 소식이 오는데,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악한 말만 하려 하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
감각에서 초감각으로
-김찬선신부-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선뜻 동의를 하지 못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안 보면 오히려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고 그래서 한 마디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숫제 안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안 보이는 하느님 사랑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면 정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서 오로지 하느님과만 대면하려고 하는데 자꾸 이웃들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저의 생각이 머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것 다 두고 떠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며, 아니 그때를 대비하여 모든 것 초월하고 하느님 앞에만 오롯이 있고자 하지만 어느새 제 생각은 이웃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여서 사랑하기가 쉽지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꼴 보기 싫어 보는 것을 단념할 때 사랑은 애초에 불성립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그 먼 과정이 첫 단계에서부터 멈추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의 여정은 여러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부산 한우리 음악회 때입니다. 그때 만났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분이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주 수준이 올라갈수록 다른 이의 연주에 관대해지고, 누구의 연주를 통해서도 배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연주론이 아니라 뛰어난 덕론입니다. 덕이란 선과 관련한 능력인데 사랑은 덕 중에서도 이 선을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수준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폐쇄되고 축소된 자기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꼴 보기 싫은 것투성이고 그 까다로운 자기 기준 때문에 선을 악으로 만듭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선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 수준의 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쓰레기투성이고 쓰레기이니 보기 싫어 외면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가 없어지기에 까탈스런 자기 기준으로 선을 사랑하지 않고 그대로의 선을 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선을 쓰레기로 만드는 수준 낮은 사랑에 비교하면 수준 높은 사랑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사람의 선을 보고 사랑하며 하느님에게서는 하느님의 선을 보고 사랑합니다. 보일만큼 작은 인간의 선도 사랑하고 너무 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선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는 작은 선을 사랑하는 단계에서 큰 선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랑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첫 계단을 밟지 않고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놀라운 일 ? 감동
- 이영선 신부-
2009년 1월 21일 새벽 1시부터 5시. 전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길게는 몇십 년 장사하던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을 처지에 몰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라도 해보려 옥상으로 모였습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경찰 특공대가 새벽에 진압작전을 펼쳐 5명을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알지만 모릅니다. 이 사람들을 도심 테러범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법정은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때려죽이는 정부, 놀랍습니다. 감동은 교회가 이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억울함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 오체투지를 합니다.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천막 치고 함께 생활합니다. 전국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이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옵니다. 수확한 농산물을 보내고 반찬을 보냅니다. 매일 저녁 미사 하러 이 용산으로 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감동합니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소리칩니다. 경찰은 방관하고 회사는 깡패 같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가는 전쟁터입니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적으로 내모는 일은 놀라움입니다. 교회가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함께 지내며 평화를 중재하는 교회는 감동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어 받으며 함께 머물며 기도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루어진 은총의 해입니다.
어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분이 드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독자들은 ‘버림받다, 사랑받을 수 없다, 믿음을 잃어버렸다…….’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독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그 독자에게 쏠렸지요. 그 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러나’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일 수밖에요.”
이 독자의 말에 공감이 가십니까? 가장 슬픈 기분이 드는 단어가 과연 ‘그러나’라는 단어일까요? 인간의 말은 이런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단어들을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부족한 인간의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은 반대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단어들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단어로 바꾸어 놓습니다. 제가 이 독자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선 독자의 말과는 달리 모든 것이 무효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효한 말로 바뀌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슬픈 단어로 보였던 것이 가장 큰 기쁨의 단어처럼 보이지 않나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희망과 기쁨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회당에 들어가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은혜로운 해가 주님을 통해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시지요.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이들은 모두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님을 통해서 기쁨과 희망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가장 슬픈 단어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삶을 가장 기쁜 단어로 가득 찬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희년을 선포하신 주님만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지요.
인생의 눈물을 거둬들이고 싶은 자는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한다.(베토벤)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정찬호-
흔히 루카 복음을 가리켜, ‘빈자貧者의 복음서’, ‘죄인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시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움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루카 복음의 이야기는 좀 더 따뜻합니다. 오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공생활의 출발점을 바로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 예수님 시대의 사회적 차별과 분리, 소외는 오늘날 새로운 옷으로 바꿔 입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 사회회칙 ‘진리 안의 사랑’(2009.6)에서 밝히신 바처럼, 신자유주의란 이름 하에 전개되고 있는 “부당하고 원망스러운 (부의) 불균형”입니다(제22항). 오늘의 시대 상황은 ‘빈자의 복음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정의의 차원에서 ‘그의 몫을 그에게 정당하게 주고’, 사랑의 차원에서 ‘나의 몫을 그에게 주도록’ 권고하고 계십니다(제6항). 지금 당장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2코린 5,14)
사랑의 운명
-김찬선신부-
물의 세례. 성령의 세례. 사랑의 세례. 이런 세례를 받으면 큰 축복이겠지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성령을 퍼부어주신다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위에서 듬뿍 내려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축복이겠습니까? 성령의 세례, 곧 사랑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는 곧 고통 가운데로 들어감을 의미하고 가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다시 말해서 공적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기 전, 성령의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어 광야로 내몰리시고, 그리고 가난하고 병들고 짓눌린 사람들에게로 내몰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성령의 힘을 지니시고 갈릴래아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것이 사랑의 성령을 듬뿍 받은 사람의 운명입니다. 사랑의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종속적인 존재
-전삼용신부-
한 청년이 위대한 항해사가 되는 꿈을 안고 세계를 횡단한 유명한 한 항해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 항해사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별히 항해를 잘 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람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님, 저에게 바람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 바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위대한 선장님께서 어떻게 바람에 대해 잘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바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항해사의 기본이 아닙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래도 계속 다그치자 그 항해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바람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어떻게 불게 되고 어느 방향에서 불어올지 전혀 예상도 할 수가 없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언제 닻을 올려야 하고 언제 닻을 내려야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의 이끄심에 어떻게 잘 순종하느냐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오셨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당신의 사명을 읽으신 다음 바로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미리 복음 선포를 하시지 않고 나이가 서른이 되실 때까지 기다리셨을까요? 더 먼저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내리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이 곧 어떠한 소명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렸을까요? 물론 영원으로부터 성령님과 함께 계셨지만, 특별히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또 오늘은 나자렛으로 이끌고 앞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기름이 곧 성령님의 상징입니다. 세례 때나 견진 때, 혹은 병자성사 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곧 성령님의 임하심을 상징하는 성사적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란 곧 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세례와 견진을 받으면서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니 모두 작은 그리스도들입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지 못해도 그 바람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항해사라면 우리 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야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란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마치 자녀가 아닌 머슴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큰 멍에를 짊어지는 것처럼 생각 됩니다. 이전에 하던 것들도 이제는 맘대로 할 수 없게 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성령님이 이끄시면 자신을 버리고 그 소명을 따라야합니다. 마치 머슴살이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성자께서도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인류 구원의 소명을 부여받고 오늘 그것을 선포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엇 하나에게는 종속되어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즉, 죄의 노예가 되느냐 하느님의 노예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누구나가 한 주인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이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안 믿고 자신은 자유롭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른 무엇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독립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상대가 없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도 성자와 성령님이 없이는 온전할 수 없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에든 종속되어야 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머슴이 되고 그 분이 보내시는 성령님의 이끄심대로 소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종으로서 당신 사명을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게 되어 결국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 누구나가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종속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신부님께 쌀 한포대씩만>
-양승국신부- 어제 한 일간 신문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파왔습니다. 한국 사람도 아닌 분, 멀고먼 이태리에서 건너온 신부님-한국명 김하종, 이태리 이름 빈첸시오 보르도-께서 성남에서 운영하시는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최근 불어 닥친 불황의 여파로 운영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드시러 오시는 노숙자들은 점점 늘어나는데, 창고에 쌓여있던 쌀은 급격히 줄어들고, 불황의 여파로 도움의 손길은 거의 끊기게 되었답니다. 작년 12월 안나의 집에 전해진 위문품은 쌀 5가마가 전부였답니다.
정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미인가 시설이다 보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을 기대하기는 힘들고 운영비 전액을 순수한 민간 후원자들로부터 후원받아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연말경기로 하루하루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답니다.
점점 늘어만 가는 노숙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상당히 엇갈리기도 합니다. "무료급식소 사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일이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원점이다. 괜히 노숙자들에게 의존심만 키워주고 안하느니 못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할 일만도 아닙니다.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었으면 집에서 뛰쳐나왔겠습니까? 나름대로 한번 일어서려고 다들 얼마나 발버둥쳐봤겠습니까? 하다하다 도저히 안 되겠으니 거리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굴뚝같을 것입니다.
몇 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보니 이제 수중에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게 된 분들이 노숙자들입니다.
그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일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하더라고 분명히 하셨을 일입니다.
존경하는 노숙자들의 천사 김하종 신부님께서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계신답니다. 내일 당장 쌀 단 한 포대라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한번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신 김하종 신부님께서는 1987년 사제서품을 받은 뒤1990년 한국에 오셨답니다. 외환위기의 한파가 몰아쳤던 1998년에 후원자들의 정성을 모아 "안나의 집"을 설립하셔서 실직자와 노숙자에게 식사,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의에서 "하종"이라는 한국 이름을 스스로 지으셨다는 김하종 신부님은 늘 우리나라(한국)에서 봉사하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말씀하신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수행하실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다음의 김하종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들어보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가끔 신선한 야채를 사서, 갓 구운 빵을 가져다가 노숙자들에게 원 없이 퍼주는 꿈을 꿉니다."
"안나의 집은 비록 가건물이지만 이곳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합니다. 노숙자들은 모두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한시적으로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안나의 집에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일해 주는데 저는 그들에게 정말 성의 있게 이 일에 참여할 것을 부탁합니다.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식단처럼 풍요롭지 않더라도 청결하고 정성스럽게 해야만 한다고 <잔소리>를 합니다. 밥을 먹기 위해서 늘어선 긴 행렬, 그들 중에 내 절친한 친구 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이 아니라 같은 인간으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성당은 바로 여기 안나의 집이에요. 제가 평생 섬길 사람은 여기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이고요."
예수님께서 새기신 말씀
-상지종신부-
사제품을 받으려는 사람은 서품을 받기 전에 평생 간직할 자신의 성구(보통 ’서품 성구’ 라고 합니다)를 하나 정합니다.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살고, 자신 역시 그 말씀을 따라 그 말씀 안에서 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를 정할 때 많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서품 성구와 그것을 정한 사람을 놓고 보면, ’그 신부님에게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온 것일 겁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라는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는 제가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사제로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 서품 성구를 정하기 위해 묵상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심정으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들려져야 했던 말씀 이전에, 아들 예수님께 주어진 아버지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만 할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의 환호와 경외심보다, 이 말씀을 당신의 입으로 선포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가슴 벅참과 떨림이 제게는 오히려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봅니다.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앞으로의 삶이 선명하게 지나쳐 갑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그래도 끝까지 가야할 이 길... 떨리는 마음으로, 벅찬 가슴으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제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은 제게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처음에 읽으셨던 그 말씀, 아니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한결같이 한 길을 가셨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저 역시 제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 주님의 길을 흐뜨러짐 없이 걸어가려 합니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어떠한 말씀을 새기고 사시는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의 가슴 깊이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맡겨진 주님의 사명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주님의 길을 기쁘고 열심히 걷고 계신지요?
* 모든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자신의 온 삶을 담아낼 수 있는 말씀 하나를 정해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으로, 자신이 걸어야 할 주님의 길로 삼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벗님들께 감히 제안을 한 번 해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 이건복 신부-
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소심해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성당 활동도 뒤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자 했지만 책임자로는 활동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한번은 중학교 때 학생미사 독서자로 선정되었는데, 독서대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드디어 미사가 시작되고 제가 독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안 틀리고 무사히 읽고 내려와 안도의 숨을 쉰 후에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너, 숨도 한번 안 쉬고 읽더라. 그리고 너무 빨라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일주일 동안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어 다 외워버렸기에 단숨에 읽어 내려 간 것입니다. 이런 성격 탓인지 저의 가족은 제가 사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뒤늦게 사제의 꿈을 갖게 되었지만, 신학생 시절에도 세미나를 한다든지 대표로 발표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동창들 앞에서 강론 연습을 하는 것도 여전히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제품을 받고 강론대에 서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울렁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저에게 내리신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말씀이 바로 그 자리에서 성취되었듯이 저에게도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성사의 은총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짐을 느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은 열려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구원은 우리 각자가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한평생을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한테서 완성될 것입니다.
-전영동신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이 성경은 오늘 여러분의 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직역됩니다.
오늘 우리들 귀 안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험담과 음해, 욕망과 쾌락,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
2천년전 예수님께서는 기쁨과 해방, 은혜와 평등을 그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고 이루셨건만, 정작 오늘 우리들 귀 안에서는 지옥(地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루가 4,14)을 지니고 선포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성령의 힘을 지닌 사람은 하늘나라를 이루어 삽니다.
그러나 험담과 음해, 욕망과 쾌락, 시기와 질투, 탐욕과 욕심, 악령의 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지옥(地獄)을 이루며 살게 됩니다.
오늘 내 귀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성령의 힘으로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누리시는 나날이 기쁜 날 되시길 바랍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양승국신부-
<꼭 필요한 사람>
언젠가 한 고위관료가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체 아이들이 모두 강당에 모였습니다. 오신 김에 마이크를 잡고 아이들에게 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셋째,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 여러분들께 당부 드립니다. 여러분들,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정말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실 수 있는지요. 저희 사부이신 돈보스코 성인과는 마인드가 어찌 그리도 다른지요.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꼭 필요한 사람, 둘째, 반드시 필요한 사람, 셋째, 정말 필요한 사람.”
아무리 못돼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구제불능의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냥 무턱대고 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
인간이 소중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설 희망이 있습니다.
생명이 아직 붙어있다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이것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중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함부로 대합니다. 단 한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물 쓰듯이 탕진합니다. 금쪽같은 순간들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가장 쓸쓸한 얼굴로, 가장 우울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에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전력투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서 또 다른 예수님이 됩니다.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분께서 하셨던 일을 우리도 따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셨던 모범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님에게 하셨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길거리를 떠도는 청소년들과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소년원과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시각장애우들의 도우미가 되어드려야겠습니다. 환우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만들어드려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제는 인천 교구에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수도회 신부 포함해서 18명의 새 사제, 그리고 20명의 새 부제가 어제 인천 교구에서 탄생했습니다. 3시간이 넘는 전례, 그러나 하느님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이 자리에 모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있었던 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벌써 서품 받은 지도 10년째다.”
새 신부들의 모습이 바로 10년 전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참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그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항상 ‘바쁘다’를 외치고 있었지요.
서품을 받으면서 정말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었건만, 주님 마음보다도 내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기에 더 바쁘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의 첫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순수하게 주님 앞에 나가겠다고 다짐했던 그 첫 마음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첫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색되어가며, 또한 계속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고 말하면서 세상과 타협을 해나갑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왜 잊어버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공생활의 시작에 서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공적인 선포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마음을 고쳐먹고, 그 소식을 받아들을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것이지요.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잠시 잊어버렸던 첫 마음을 다시금 떠올려봅시다.
참된 어부, 영적인 어부
-이중섭 신부-
천주교 신자들은 ‘전교’라는 말만 나오면 주눅부터 듭니다. 30년, 40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예비신자 한 사람 인도하여 영세시키지 못한 이가 수두룩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끌어올리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배에 앉아 낚싯줄을 던집니다. 낚싯줄을 던져놓고 ‘물고기야, 이리 오너라’ 하고 앉아 있으니 눈 먼 물고기 한 마리 못 낚습니다. 그나마 낚시 드리우고 조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교를 잘 할까요? 첫째,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어부는 물고기가 미끼에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압니다. 미끼는 우리의 좋은 모범입니다. 둘째,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부는 풍랑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한두 번 방문하고 거절당했다 하여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거절하는 것은 더 많은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셋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고기잡이할 때를 압니다. 이웃이 어려울 때 말로만 위로할 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되,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넷째, 물고기에 맞는 미끼를 써야 합니다. 상대방을 올바로 파악하고 뭐가 좋은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부의 모습이 보이면 물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학식이나 재능을 드러내려 하면 전교는 실패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주영길 신부-
어느 주일 저녁 옆 본당 동창 신부에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 앞에 막 다다랐는데 맞은편 교회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성당 다니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는 저녁 예배 보고 오는 길인데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목사님 말씀은 은혜가 넘치고 우리는 구원받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에 깔린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시작된 심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3,9) 반면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1,27)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지나친 공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싸구려 구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고 계신다. 너무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선포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바람이 채워지는 ‘기적’만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4,42-44 참조). 그들에게 ‘이미’와 ‘아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가끔 ‘신부’인 나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신자들이나 어려워 말도 못 붙이는 이들을 보면 낯이 더 뜨거워진다. 내 모습은 그게 아닌데 신자들은 너무 ‘완벽한 신부’로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는 없다. 성소의 씨앗을 잘 가꾸고 또 사제로서 열심히 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사제는 수품을 통해 ‘이미’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인생도 그러하리라.
일상의 성화
-오상선신부-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루가 4,16)
<일상의 聖化>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참으로 좋아하던 일인데도 얼마 지나면 싫증을 내고 하기 싫어하고, 또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하던 것인데도 얼마 지나면 내팽개치고 새로운 무엇을 쫓아간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만 많아지는 것이 물건들인데 그 중에서도 옷 종류가 자꾸만 많아진다. 이런 저런 기회로 얻어 입게된 것들이다. 그런데 정작 내가 즐겨 입는 옷은 단 몇가지 뿐이다. 그 중에서도 수도복이 참으로 편안하다. 몇년을 계속 입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20여년 동안 수도복을 한번 바꾸기는 했지만 정말 아무리 오래 입어도 싫증 나지 않는 옷이 수도복이다. 아니, 오히려 오래된 옷일수록 더 정감이 간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미사하고 청소하고 밥먹고 좀 쉬다가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만나야 할 사람 만나고 낮기도하고 점심먹고 또 좀 쉬다가 이런저런 일을 하고 묵상과 저녁기도를 하고 저녁을 먹고 좀 쉬고 형제들과 대화하고 말씀 묵상하고 TV News 보고 때론 <미우나고우나>도 보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삶이 때론 마음에 안들 때가 있다. 가끔 <야, 이렇게 사는 게 수도생활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
주일이 되면 의례 성당에 가고 월요일이면 아침미사 가고 화요일에는 저녁미사 수요일에는 레지오 목요일에는 주부미사 금요일에는 ... 봉사 토요일에는 구역모임...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
아침먹고 바쁘게 출근하고 하루종일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저녁에 돌아와 씻고 좀 쉬다가 TV 보고 가끔씩은 외식하고 가끔씩은 친구만나 술한잔 하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가 하고 의구심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
우리의 일상 늘 그렇고 그런 일상 이것을 성화시켜야 한다. 이 일상이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고 구원의 길임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주일)이 되시자 늘 하시던 대로(매 주일) 회당(성당)에 들어가시지 않았는가?
일상 안에서 때가 온다. 주님의 영이 내리는 때가 온다. 그 때를 기다리라. 그 때가 오면 모든 것이 열리리라. 깨달음의 때가 오리라.
깨달음은 이렇게 일상을 통해서 온다. 오늘은 나에게 그 영이 내리는 <오늘>이길 기도한다. 희망한다. 그리고 나 아닌 너에게도 그 영이 임하시길 축원한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지 말아야 할 이유>
-양승국신부-
오늘도 정들었던 한 아이를 떠나보냈습니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이 떠나갈 때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기만 합니다. 물론 오늘 떠나간 아이는 법적 수용기간인 6개월을 잘 지내다가 가는 아이였습니다. 이곳에서 생활을 너무도 잘했던 아이, 매사에 적극적이고 붙임성이 있던 아이, 싱글벙글 잘 웃던 아이였기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이였습니다.
꼭 붙잡고 싶었지만 올 봄에 중학교 복학을 목표로 가는 아이였고, 연로하신 외할머니가 꼭 곁에 두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기 직전,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아이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만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 남지 않고 떠나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 감사함이 합쳐져 묘한 표정이었습니다.
저 역시 잘못하다가는 눈물이 나오려는 난감한 분위기였기에 할 수 없이 늘 준비되어 있는 썰렁한 농담 몇 가지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늘 써먹는 레퍼토리를 꺼냈습니다. 먼저 제 이름과 휴대폰 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힌 명함을 건냈습니다. "**야, 잘 하리라 믿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연락 하거라. 꼭 경찰서 넘어가서 전화하지 말고 미리미리 연락 하거라. 그리고 내 휴대폰 번호는 절대로 안 바꿀테니, 여자 친구 생기면 꼭 연락해라. 주례는 내가 서줄게"
작별인사를 이미 다 끝냈건만 아이는 떠나가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면서 꾸벅꾸벅 인사를 계속했습니다. 현관 앞에서 두 번, 경비실 앞에서 세 번, 대문 가까이서 두 번..."그만 어서 가라"고 해도 또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꾸벅꾸벅 인사를 계속하는 아이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저는 먼저 안으로 들어왔지요.
괜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런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주님, **이가 이제 저희를 떠나갑니다. 저 젊은이의 앞길을 축복해주십시오.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십시오.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가야할 길을 제대로 걸어갈 강건함을 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자신이 부여받은 사명의 본질을 만민 앞에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한 일생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잉태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 때에는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모양을 한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님은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모든 치유나 구마활동, 기적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맛있는 햄버거 세트나 시퍼런 세종대왕 한 장의 용돈, PC방 2시간 같은 것들을 기대하지요. 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결국 한계가 있더라구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주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고통, 실패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 이상, 올바른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자들부터 먼저 성령 안에 살면서 성화(聖化)되는 일,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일, 아이들에게 하느님과 관련된 좋은 추억거리들을 만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임을 확신합니다.
주님 공현 후 목요일
- 김창환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른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회당에 다니셨습니다. 회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일반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들을 읽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이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방문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받아들고, 이사야서 61장 1,2절과 35장 5절과 58장 6절을 섞어서 읽고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어도 가련한 처지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고 복원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왕들이나 사제들처럼 올리브유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기름 부음을 받으시면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루카가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통치자들의 야욕으로 궁핍해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처지는 한마디로 소외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을 소외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구출해 내고 자유롭게 하는 활동을 펼치시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 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 제정된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일들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특히 소외되고 가난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랑의 삶을 살아가자. -경규봉 신부-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되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다른 형제들을 사랑한다.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성서에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즉, 신앙인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다(마태 11,30).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4,19)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교회를 적대하는 세상과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고(요한16,33; 19,30),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요한 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이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되, 당신의 모습을 닮게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정이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랑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육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며, 육정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사랑은 자신의 육정과 이익을 구하는 것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하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다.”(갈라 5,17.19-21) 이 안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돌려놓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이다.”(갈라 5,22-23)
그러므로 주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당신 외아들까지 바치는 그 깊은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성령께서 머무르시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가슴에 담아 사랑과 기쁨, 평화와 친절, 진실과 온유의 삶을 살아가자..................◆
루가의 시간과 공간 개념
-박상대신부-
공관복음은 저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 시점을 시사하고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세례자 요한의 투옥(마르 1,14; 마태 4,12)과 동시에 시작되어 그 첫 무대가 갈릴래아 지방 호숫가 근처인 것으로 보도한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까지 먼길을 가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1,9) 다음 광야에서 40일간 공생활 준비시간을 가지셨다. 여기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1,13), 요한이 투옥되자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마태오는 마르코와 같은 과정을 더욱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태오는 예수의 세례장면(3,13-17), 악마의 유혹장면(4,1-11) 등을 세세히 열거하고, 갈릴래아 지역에 속하는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의 가파르나움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이곳에서 공적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루가복음을 살펴보기 전에 요한복음을 먼저 보자.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가 공관복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요한복음은 프롤로그(서문)에서 우선 성자이신 말씀의 선재성과 말씀을 통한 세상창조와 말씀의 육화사건을 계시하고 있으며, 이 계시의 증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킨다.(1,1-18)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다음 요한과 예수의 대비구조를 도입하여 요한 스스로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예수가 전부임을 고백하게 한다.(1,19-28) 요한은 스스로 세상에 와 계신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면서 자신의 제자 등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예수께 이양(移讓)시킨다.(1,29-37) 요한의 이양작업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접촉에서, 대화와 고백으로 발전하고, 나타나엘의 고백과 예수의 계시말씀으로 완료된다.(1,38-51) 이러한 점진적인 이양작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복음선포의 정면(正面)에 서신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얻어내는 공생활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이다.(2,1-12)
루가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루가복음이 예수의 전사(前史)에서 다루고 있는 12살 시절의 어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성가정의 나자렛 생활에 관한 짧은 보도는 예수의 성장과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2,41-52) 루가복음도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활약상, 특히 인상적인 회개설교를 제보한다.(3,1-18) 그런데 요한의 메시아 도래선포와 예수의 세례사건 사이에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투옥사건(3,19-20)이 보도되는 점은 좀 특이하다. 루가가 예수의 세례장면(3,21-22)에 요한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막연히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서술하는 점도 이상야릇하다. 그런 다음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그 서두에 "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3,23)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광야에서의 유혹(4,1-13)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세 가지 유혹의 순서가 마태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가신다.(14절) 갈릴래아에 오신 예수께서는 먼저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이다.
루가복음에서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장소와 시점에 두고 말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루가는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루가가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3,23)고 하지만, 이것을 공생활 시작의 시점으로 볼 수는 없다. 세례자 요한의 활약과 예수의 세례장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것도, 예수의 세례에서 요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도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편집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들로 루가의 심오한 시간과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 없다. 루가는 마르코나 마태오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시간적 서술에 묶어두지 않았다. 루가는 복음선포의 시간적 서술보다 복음이 선포되는 원동력을 더 강조한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와 성령의 능력이다. 루가는 "기도" 라는 단어를 복음에서 28번, 사도행전에서 30번, "성령"이라는 단어를 복음에서 17번, 사도행전에서 57번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서간들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빈도(頻度)의 사용이다.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도하셨음을 강조한 것도,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신 것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18-19절)의 근거와 내용을 밝히는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18절)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인용(61,1-2)으로 시작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다.
다음으로 루가의 심오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루가가 파악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말씀에 담겨있다. 바로 "오늘", 그리고 "이 자리"이다. 루가가 말하는 시간은 "오늘"이고, 장소는 "이 자리"이다. 즉, 기도와 성령의 능력이 오늘과 이 자리에 집중되는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국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는 것이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바로 지금과 여기에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교회의 봉사를 통하여 오늘, 그리고 여기에 또한 실현되어 실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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