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상 >
눈발이 벚꽃처럼 날리던 겨울밤이었다. 군불 땐 구들장은 뜨끈하지만 희미한 알전등 불빛은 어둠 앞에 가난했다. 횃대에는 무릎 나온 조무래기 바지들이 시래기마냥 걸려있고 어머니는 식구들 구멍 난 양말이나 옷들을 기우고 있었다. 솜이불 아래 동생들은 깊은 잠에 새근거리고 온 방안을 등밀이로 휘젓고 다니는 막내의 잠버릇은 늦은 밤까지 멈출 줄을 모른다.
벽 가까이 밥상 하나가 놓여있다. 각진 곳마다 주칠이 벗겨진 소반에 수저와 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지고 모란꽃수 상보로 곱게 덮어두었다. 문풍지가 떨릴 때마다 아랫목에 앙구어놓은 밥주발에 자꾸 눈길이 간다. 일터에서 밤늦게야 귀가한 아버지는 고흐의 자화상처럼 목도리를 위아래로 휘감은 채 하얀 눈을 어깨에 두르고 있다. 밥상너머로 전해오는 넓은 등 그림자는 막 데워낸 된장찌개만큼 정답고 푸근하였다.
구수한 밥 냄새에 잠자던 위가 동하였나보다. 어느새 눈비비고 일어난 막내가 눈치 없이 밥상머리에 달라붙는다. 황급히 떼어놓지만 빤히 목구멍만 쳐다보고 꼴깍거리는 자식에게 결국 숟가락을 넘기며 아버지는 대궁밥을 남긴다. 바깥에서 안주거리를 많이 먹었다며 짐짓 배부른 듯 숭늉으로 입가심을 하신다. 이게 웬 횡재냐 싶게 입맛을 다시는 동생이 얄미웠던 건지, 배곯는 아버지가 속상해서인지 그런 밤에는 잠을 뒤척이곤 했다.
그 때의 밥상은 대단한 권위와 위세가 있었다. 누구하나 끼니를 거르는 경우는 없어서, 강요나 협박이 없어도 온 식구를 한자리에 불러 모으게 한다. 정(情)은 밥상에서 나온다.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지만 형제 많은 집안의 밥상은 언제나 모자라게 마련이다. 밥투정이나 편식은커녕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걸신스럽기 이를 데 없다. 나름대로 요령은 있다. 볼이 미어지게 숟가락질에 부지런하거나 맛난 반찬을 남보다 빨리 내 밥그릇 위에 옮겨다놓는 것.
결국은 탈이 났나보다. 모처럼 고등어조림이 상위에 올랐는가했더니 그만 잔가시 하나가 목에 걸렸다. 동생은 놀라 컥컥거리고 다급한 어머니는 등짝을 탕탕 두들기며 위아래로 훑어 내린다. 효과가 신통찮은지 이젠 김치를 통째로 찢어 억지로 목구멍으로 떠넘기면 덩달아 동생 눈시울도 시뻘겋게 변해간다. 모두가 걱정 반, 웃음 반이다. 그렇게 밥상 앞에 온 식구가 모여앉아 오늘의 이야기와 안녕이 만들어지고 하루의 시작과 끝이 갈무리된다. 대처로 나간 식구 하나의 빈자리가 겨울날 추녀 끝에 매달린 미루나무 그림자처럼 허전하기만 하다.
사업 때문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낸 적이 있었다. 아내의 정성스런 손길이 아쉽지 않은 곳이 없지만 무엇보다 밥상 앞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강다짐이나 매나니 밥상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배부르게 먹어도, 아무리 귀하고 맛난 음식을 바깥에서 사먹어도 공복감은 여전했다. 양념 하나가 빠뜨려진 것 같은, 기억속의 손맛 같은 무언가를 기대했다가 공허하게 돌아오는 상실감 같은 거였다. 숟가락이 하나여서 외롭고 혼자여서 무거웠던 모양이다. 음식의 배고픔보다 온 식구들이 함께 하는 밥상에 대한 허기였다.
“아! 배고파!” 그 한마디에 도마에 칼질 소리 요란하고 찌개 보글거리는 냄새가 풍겨오는 그 정겨운 시간에 대한 그리움, 식당에서처럼 손님중의 한명으로서가 아닌 나만을 위해 정성으로 차려낸 밥상을 받고 싶었다. 문 여는 시간도 문 닫는 시간도 없는 밥상, 늦은 밤에 귀가해도 무조건 부엌부터 달려가는 그 사랑받는 느낌이 절실했었다.
일상에서 익명으로 함몰되어가는 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존재감은 사라져가는 현실 속에서 알게 모르게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을 잃게 될 때가 많았다. 각다분하고 경쟁적인 삶일수록 상처와 좌절을 받기도 쉬운 것이 현실이다. 기운 빠진 어깻죽지에 격려와 위로의 날개가 필요할 때 가장 큰 등받이가 되어준 것은 식구와 함께 하는 따뜻한 밥상이었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다리고 염려하며 차려낸 그 밥상에서 무관심의 결핍은 해소되고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가족에게서 받는 존중과 인정받는 느낌보다 더 힘이 나고 든든한 것은 세상에 없었다.
궁정 같은 식탁과 번쩍이는 촛대나 화려한 그릇들을 꿈꾸지는 않았다. 코앞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고 살 냄새 맡으며 둘러앉은 두리반 하나면 족하다. 식구들 한팔 안에 된장 뚝배기 하나 놓여있으면 천하별미이다. 내 앞으로 고기반찬 밀어 놓아주고 내 밥숟갈에 갈치 살 발라 올려놓아 줄 수 있는 밥상은 가족밖에 없다. 맛있게 먹는 식구들 보기만 해도 배부른 사랑이 있고, 삼시 세끼 불 지피는 일이 귀찮아도 식은 밥 먹일 수 없는 정성이 먼저인 곳이다. 밥상과 가족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밥상은 밥을 먹기 위한 기능적인 식탁이 아니라 같은 시공간 안에서, 같은 형질의 신뢰와 애정을 융합하는 매개체이다.
겨울바람에 행인들의 옷깃이 움츠려든다. 이 차가운 계절에 홀로 먹는 밥상이 또 얼마나 많을까싶다. 사별이거나, 기러기 부부이거나, 독신자이거나, 피치 못할 노숙자이거나, 돈 벌러 가서 어느 외진 숙소에서거나……. 육지로 쪽배하나 연결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홀로 남겨진 고립과 소외감 같은 것은 혹시 아닐까. ‘애정 없는 상차림이 독이 된다.’는 말처럼 혼자만을 위한 밥상에 결코 건강이나 행복감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 식구들과 둘러앉은 밥상이 살아가는 날들의 생명이고 기쁨이었던 그 순간들이 아쉽기만 할 것이다.
오늘도 식탁에 빈자리가 있다. 어떤 때는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또 때로는 내가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생활 방식이 다르고 사회가 바빠지고 인스턴트식품의 편의성이 늘어남에 따라 부모 형제간은 고사하고 자기 식구들도 한자리에서 밥 먹는 것이 쉽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모두가 노마드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버려 가족은 존재하지만 식구는 없어진 것만 같다. 오늘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서로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쉽게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루의 감사기도도 없고 한 끼 밥의 고마움도 없다. 배는 늘 고팠지만 우애와 화목이 넘쳐났던 어린 시절의 정서적 포만감은 이제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갓난아기 때 나의 밥상은 어머니 젖가슴이 아니었을까. 옴죽옴죽 빨아대던 흐벅진 젖무덤, 손안에 잡히지도 않는 그 밥상은 우주보다 크고 봄볕보다 따뜻했다. 홀로된 어머니의 외로운 밥상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반찬 한두 개 소반에 올려놓고 맹물에 그리움을 말아 잡숫고 계실 것이다. 이번 주말에 밥 먹으러 가겠다고 미리 전화해야겠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된장찌개 냄새 그득 할 것이다. ♠
(한국수필)
첫댓글 모처럼 반가운 글을 대합니다.
세월의 어디쯤엔가 잃어버리고 온 것들이 고스란히 글 속에 담으셨군요.
우애와 화목으로 정서적인 포만감에 게슴츠레 눈이 감기던 어린날의 밥상.. 그 밥상이 그리워집니다.
우리 때만 해도 가족이란 생각을 하면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제 각각 식구들 모습이 떠 오르는데
요즘 자식들 세대에 밥상의 의미는 뭘까요.. ㅎ
항상 관심 있게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수필로 최우수상을 받으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되새김질 하듯이 천천히 다시 읽어보려고요.
더 많은 작품활동의 견인차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옛생각이 소록소록나는 수필이네요.
좋은 작품, 함께 할 수 있어 기쁩니다.
2015년도 좋은 작품 많이 남기시길... 허석작가님!
고맙습니다!! 방장님도 한 해 사진 작품으로 환한 꽃 피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