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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로비네(AndréRobinet, 1922-2016), PUF, (1966) 1977.
류종렬, 서광사, (1987) 수정본.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66)
- 1장 중세 철학 / 2장 근세 철학 / 3장 현대 철학 / 결론
1장 중세 철학
101, 샤를마뉴시대의 철학, 알퀭: 문화적 세계
102, 요하네스 스코투스의 철학: 자연의 세계
103, 안셀무스의 지성의 인식: 지적인 인식
104: 이법의 뿌리: 영혼, 빅토리아학파
105, 아벨라르 변증론: 분할과 결합, 개별과 보편.
106, 베르나르의 반(反)변증론: 신앙으로 회귀
107,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 부활,
108, 프란체스코파: 플라톤주의, 지혜의 추구
109, 도미니크파: 아퀴나스주의, (논리학을 통한) 신앙의 체계.
110, 중세의 중간 평가: 원시에서 근대로 이행에서 중간참(中間站)
111, 플라톤 철학의 탐구: 13세기 프란체스코파의 확장 [제1기 르네상스]
112, 플라톤주의 확장: 프란체스코파의 명증성 추구
113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재등장 그리고 발전
114.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이탈: 자유사상가로 [제2기 르네상스]
115. 제3기 르네상스(15-16세기): 그리스 문화에 주목
116. 자의식의 배태: 몽테뉴
2장 근세철학
201. 데카르트: 자아의 성립
202. 말브랑쉬: 프랑스어로철학의 대중화
203. 포르-르와얄: 쟝세니즘
204. 비합리주의자들(데카르트의 대립자들)
205, 볼테르: 뉴턴과 로크를 프랑스로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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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근세 철학
[§05. 볼테르,
뉴턴 과학과 영국 철학(로크)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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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계시가 예고하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계시는 계시적일 수 없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17세기에 원상 복구된 크리스트교의 철학적 세계를 몰락시키는데 기여했다. 지혜-구원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지혜-과학이 구획하고 정리하려는 것으로 남는다. 데카르트는 미립자 및 단단한 물질의 도움으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했는데,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물질과의 관계를 단단한 물질로써 설명할 수 없다. 보편적 수학에 호소하면서 그는 세계를 자기 정신의 상상에 부합하게 했다. 크리스트교도들과 데카르트학자들이 우리들의 모든 오류의 근원이라고 거부했던 것이 진리의 기초가 된다. 즉 감각적 경험이 그 기초가 된다. 볼테르는 데카르트에 반대하여 뉴턴(1643-1727)의 편이 되고, 말브랑쉬와 라이프니츠에 반대하여 가상디(1592-1655)와 로크(1632–1704)의 편이 되고, 모페르뛰(Moreau de Maupertuis, 1698-1759)에 반대하여 퐁뜨넬(Le Bouyer de Fontenelle, 1657-1757)의 편이 된다.그러나 “중력”, 즉 “인력”은 얼마나 상상적인 측면인가! (82)
모든 진리의 기초는 공략할 수 없고 변덕스럽다. 자연적 결과들의 기원에 관한 의문은 우리를 회의의 심연 속에 뛰어들게 하고, 또 우리에게 엉뚱한 추측을 하게 한다. 선회 운동의 원리는 어떤 것이며, 충돌, 생명력 등등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 타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감각, 사유, 의지 등 어느 것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왜 물질은 사유 능력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이 불확실 속에서는 내기를 한다는 것조차 필요하지 않다. 허풍선이만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82)
우리는 우리들로부터 조차도 우리의 관념들을 얻지 못한다. 관념은 경험에 의해 얻어지는 상이다. 그래서 무한은 유한으로부터 구성된다. 모든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숨은 성질로서 남아 있다. 정신은 실체들의 탐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그 정신은 기껏해야 물질 속에서 운동들 사이의 여러 우연들을 확인한다. 형이상학에 대해 아무 것도 답할 수 없다. 만족할 만한 확실성만을 일으켜 보자. 즉 존재한다는 것은 질서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83)
위에서 말한 바로부터 우주의 질서에 의해 신 존재의 첫째 증거가 나온다. 자연은 기술(l’art)이다. 시계(l’horloge)의 존재는 시계공이 있음을 나타낸다. 비록 관계가 은폐된다 할지라도 관계는 명맥하다. 법칙은 비례적이며 분명하다. [볼테르의 생각으로는] “영원한 기하학자”는 자연을 지배한다.말브랑쉬의 신은 지혜로서 은총을 발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추론할 수 없다. (83)
그러나 사람들은 현상의 통일 원리가 유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두 개의 원리가 있다면 아무 것도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원리들이 다수이지만 유사하다면, 확실함은 공허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고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성이 존재한다. [볼테르는] 종교는 많으나, 신은 하나이다. (83)
도덕적 증거가 물리적 증거를 확고하게 한다. 인간 세계는 논리의 일관성이 없고, 인간은 더 이상 “순진하지” 못하다.비록 인간 세계가 행복하고 균형 있게 세워졌다 하더라도, 사회는 그것[인간]을 타락시켰다.종교는 광신이요, 도덕은 맹종이다. 자기 신을 위한 인간의 자연스런 숭배는 미신으로 바뀌었다. 비합리적 미신은 강압적 관계들을 생기게 하고, 강제력은 박해를, 그리고 박해는 왜곡을 낳게 한다. 성직자들이 돌팔이가 아닐 때조차도 그들은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논쟁적이게 되었다. 예배는 도덕적 법칙을 대신한다. 신학은 종교적 정신을 나쁘게 사용하는 도구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일 뿐이고, 관대하다는 것이다. 동포애가 부족한 곳에서 철학자는 진리와 정의의 존재를 불러일으킬 의무가 있다. 철학자는 “곤란한 일들” 속에서 투쟁한다.그러나 그가 견고하게 일하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의 신을 선언해야 한다. 인간의 편에서 복수도 하고 이익도 주는 신은 최고의 호소로써 재판해야 한다. 이 증명 방식이 한 암살자만을 죄악의 길목에 고정시켜 놓았을 때, 이 증명 방식은 풍부하게 될 것이고, 전 지구는 이것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84)
이제 형이상학적 논의가 남아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 그 어떤 사물이 태고적부터 존재해 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자신에 의하여 또는 타자에 의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혼자 힘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항상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해 왔다. 만일 한 사물이 그 다음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그 다음 존재는 셋째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여받아 왔다면 자신의 존개가 부여받아 왔던 그 마지막 존재를 필연적으로 신의 존재이어야 한다. (84)
돌바흐(d’Holbach, 1723-1789)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신의 죽음을 선언해야만 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회 사람들을 몰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그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을 때 자유롭다. 그러나 사태는 인간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동기가 그것을 결정한다. 여러 동기는 상호 관련된 보편적 인과성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은 어떤 “비밀스런 최초의 원동력”을 스스로 보존하고 있다. 그 원동력에 의하여 의지는 보편적 인과성을 지지하는 커다란 존재의 개입과 더불어 전개된다. 우리는 우리들 자유의 신성불가침에 의해 구속에서 벗어난다. 연약하고 미묘한 이 자유가 말브랑쉬 철학의 개념과 칸트의 개념 사이를 잇는 역사적 중개물이다. 물리적 원인과 도덕적 원인의 총합은 “라이프니츠가 아주 적합하게 말한 대로” 이 우주의 성질을 이룬다. (84)
(3:24, 59R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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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가상디(Pierre Gassendi, 1592-1655)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수학자․철학자이다.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의학자 철학자이다. 그는 새로운 철학의 방법을 제시하고, 당시 카톨릭의 비판을 피하여 네델란드에서 지냈다. 방법서설(Le Discours de la méthode (1637)
1632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 철학자, 의사. 자유주의의 아버지("Father of Liberalism,") - 백지(tabula rasa)위에 경험의 축적을 기초로 한다. 관용에 관한 Essai sur la tolérance (1667)과 Lettre sur la tolérance (1689) 두 편이 있다. 1688년 명예혁명이후, 1689년 발표한 저서 관용에 관한 편지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종교의 자유가 평화로운 사회의 기본 조건임을 강조 의회가 피를 흘리지 않고 1689에 “권리장전”으로 권력 없는 왕이 등장한다.
1638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1638-1715), 프랑스 철학자, 신학자. 기회원인론자, 오라토리오회(la congrégation de l'Oratoire) 신부.
1643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잉글랜드의 수학자, 물리학자.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외교관, 역사가, 사서. 문헌학자.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1704(1765 출판)는 로크의 Essai sur l'entendement humain, 1689)에 대한 반박문이다.
1657 퐁뜨넬(Bernard Le Bouyer (ou Le Bovier) de Fontenelle, 1657-1757) 퐁뜨넬 수도원 창설자. 프랑스 작가, 과학자. 시인. 1691년 학술원(Académie française)회원이며, 1697-1740까지 ‘과학 아카데미’의 사무총장(Secrétaire perpétuel Académie des sciences).
1694 볼테르(Voltaire, 본명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 계몽주의 사상가. 정의와 관용의 철학자. 1726-1728년 영국으로 망명, 민족들의 정신과 풍습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6).
1698 모페르튀(Pierre 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1759), 프랑스 수학자, 천문학자, 박물학자, 철학자. 유럽에 뉴턴 전파자. 도덕철학 시론(Essai de philosophie morale, 1749)
1723 돌바흐(Paul Thiry, baron d’Holbach, deu. Paul Heinrich Dietrich von Holbach, 1723-1789), 독일출신 프랑어로 작업한 과학자, 백과전서파, 유물론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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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테르의 영국 망명 사건 전후
볼테르(1694-1778)는 앙리아드(La Henriade 1723)[스물아홉]를 썼다, 관용의 시대를 연 앙리 4세를 칭송한 서사시로 이름을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6년 사건 후에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728년까지 머물면서 뉴턴의 과학과, 로크의 관용론에 영향을 입었다.
1726년[볼떼르 서른둘] 로양-샤보(1683-1760)는 연극 극장 앞에서, 볼테르에게 “당신이 볼테르요, 아루에( Arouet, [ alouette 종달새])요.”라고 조롱쪼 농담을 던졌다. 볼테르가 이에 지지 않고 “내 이름은 훌륭하지 않지만, 나는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사람이오” [fr.Wiki: « Voltaire ! Je commence mon nom et vous finissez le vôtre ». 나의 이름은 시대의 알리는 시작이지만, 당신의 이름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비꼬아 받아쳤다
며칠 후, 볼테르가 그의 친구인 쉴리 공작(le duc de Sully, 쉴리가계는 유명하지만 이 인물은 유명하지 않아서 ?-?) 집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누가 불러서 그가 바깥에 나갔을 때, 그날 모욕당했다고 여긴 기사는, 마차에 앉아서 보면서, 하인들을 시켜 볼테르에게 매질(le gourdin: la bastonnade 몽둥이질, 태형 笞刑)을 가하였다. [로앙 기사는 “머리는 때리지 마시오, 거기선 아직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으니”라고 모욕적인 말까지 던졌다고 한다.] 볼떼르는 항의하기 위하여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쉴리 공작조차도 경찰서에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 이 사건에 대해 꽁띠 공(Louis-Armand de Bourbon, prince de Conti, 1695-1727)은 « Ils ont été bien reçus mais mal donnés ». ("의견은 잘 전달받았으나, 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말씀은 잘 들었지만, 뜻이 잘못 전해졌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볼떼르는 부상도 당했지만, 치욕을 당했기에, 샤보 기사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당신의 법률로서는 평민이 귀족에게 결투신청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루앙가(les Rohan)는 루이 15세에게 체포영장[레뜨르 드 까셰(Lettre de cachet, 체포 및 구금 영장)]을 발부 받았다. 볼테르는 4월 17일 바스티유 감옥으로 끌려갔다. 2주 후에 국외로 추방의 조건으로 풀려났으며,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나중에 이런 경험을 포함하여 철학 서간들(Lettres philosophiques, 1733)을 남겼다.
1683 로앙-샤보(Guy-Auguste de Rohan-Chabot, 1683-1760), 프랑스 귀족(슈발리에), 볼테르와 언쟁(altercation)으로 세상에 알려졌을 뿐 유명하다.
16??- 쉴리 공작(le duc de Sully, 유명하지 않아서?-?), 쉴리가계 쉴리 1세 공작(Maximilien de Béthune, 1er duc de Sully, 1559-1641)에 속할 것이다. 쉴리1세는 프로테스탄트로, 앙리4세의 측근이었고 군대 원정을 동반했다. 여기 볼떼르와 저녁식사를 한 쉴리는 손자 정도일 것이다.
1695 꽁띠 공(Louis-Armand de Bourbon, prince de Conti, 1695-1727), 그는 에스빠뉴 전쟁에 참여했고, 섭정의 고문관이었다. 꽁띠가의 대꽁띠(François-Louis de Bourbon 꽁띠 4세, 1664-1709)의 아들이다.
#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에 연관된 사건들:
1598년 낭뜨 칙령이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위그노)가 공존하였다가,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국교를 카톨릭으로 정하면서 위그노를 탄압하였다. 위그노 지식인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그 후유증은 100여년이 지나도 일어난다. - [해방 후 우리 입말과 외래 사상의 대립은 79년이 지나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보도연맹과 혁신계열의 죽음이후 표면 아래로 흐르다가 간간히 표면 위로 올라오려고 했으나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등의 죽음으로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의 각질에 균열이 있어왔다. 2024년은 새로운 용출선이 등장했다(57WWW). 2026년에는 대통령의 SNS놀이와 맞먹는 민주당의 당원들이 SNS소통이 솟아나고 있다. 정청래와 김민석 사이의 선택은 새로운 소통을 보여줄 것 같다. (59RLH)]
1761 칼라스 소송사건(L’affaire Calas): 툴루즈에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사이의 종교적 갈등으로 1761년에서 1765까지 전개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인 가족에서 아버지와 카톨릭인 하녀 + 카톨릭으로 개종한 아들 사이에 갈등이었다. 아들의 자살을 아버지가 죽인 것으로 고발되었다. 아버지(Jean Calas, 1698 -1762, 화형)는 무혐의를 주장하였으나, 화형 당했다. 볼테르는 이 처형을 보며 이런 명언을 남겼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그는 파리의 법정에서 1765년 복권되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1788]
1761 시르뱅 소송사건(L’affaire Sirven) 1760년에 마자메(Mazamet, 지역 Occitanie)에서 전개되었다. 시르뱅(Pierre-Paul Sirven, 1709-1777) 부부와 3딸은 프로테스탄트이다. 막내[둘째] 딸이 23살에 정신이상이었는데, 그녀가 집을 나가 여성 수도원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데려왔다. 그녀는 의사에 의해 치매로 판정되었다. 1761년에 다시 그녀가 집을 나갔고, 그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딸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고발당했다. 1769년에 풀려났으나 사면되지 않았다가, 볼테르의 개입 덕분에 1771년에 복권되었다.
1765 라바르 소송사건: 라 바르 기사(Le chevalier François-Jean Lefebvre de La Barre, 1745-1766), 1765년 이 귀족가정의 젊은이는 아브빌(Abbeville, 지역 Hauts-de-France)의 법정에서, 그리고 파리 대법원에서도 불경건과 신성모독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766년 7월 1일 집행되었다. 그리고 1766년 7월 30일에 신성모독이 사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라 바르 기사는 1793 혁명의 제헌의회에서 복권되었다.
1766 랄리 소송사건: 랄리 백작(Thomas Arthur, baron de Tollendal, comte de Lally, dit « Lally-Tollendal », 1702-1766)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고급공무원. 프랑스 인도령의 장군, 파리의 제네바 광장에서 사형. “왕의 이익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7년 전쟁(1756-1763: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패배의 희생양이었다. 배반 혐의는 풀렸으나 다른 혐의가 유지되어 랄리는 복권되지 않을 것이다[아직도].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6:07, 59RLH)
